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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건

사건- 87.01 : 수지 킴 사건ㆍ여간첩 남편 납북기도사건

by 당대 제일 2022.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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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지 킴 사건"은 1987.01.03일, 한국 기업체의 "홍콩 주재원"이었던 "윤태식(尹泰植)"이 부인 "김옥분(金玉分ㆍ수지 킴)"을 "홍콩"에서, 사업자금 문제로 말다툼을 하다가 흥분해, "김옥분"을 우발적으로 살해한 사건이다. 당시 "5공화국 정권"은 이 살인사건을 "여간첩 남편 납북기도사건"으로 조작했는데, "군부 독재정권"이 정권 유지를 위해서 "장세동(국가안전기획부장)"이 벌인 대표적인 "간첩 조작 사건"이다.

 

 

1. 수지 킴 사건 (여간첩 남편 납북기도사건)

"윤태식""싱가포르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자신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작원"에게 납치되었다가 탈출했으며, 아내인 "김옥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간첩이었다."고 주장했다이후 "윤태식"은 성공한 "벤처 사업가"로 변신해, "패스 21(지문인식 회사)"를 설립하고 정관계 인사에게 로비를 벌이다가, 2001.12월 일명 "윤태식 게이트"가 언론을 통해 드러나면서 모든 사실이 밝혀져 처벌을 받았다. 2001.11월에 구속되어, "살인사기뇌물공여" 혐의에 대해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김옥분 (金玉分1952~198735): 16녀 중 2째 딸충북 충주초등학교 졸무직

홍콩인 남편 (이혼) 홍콩인 남편 (이혼) 윤태식 (1986년 결혼ㆍ1987년 홍콩에서 김옥분을 살해)ㆍ"수지 김"은 가명이었으며, "홍콩일본" 국적을 취득한 것은 아니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서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했다 "8"에서 일하면서 "일본 관광객들"을 상대하다가, "홍콩"사람과 결혼하여 "홍콩"에서 살았다 "홍콩" 남편과 이혼한 후, "일본의 한국계 술집"에서 일하다가, 또 다른 "홍콩" 사람과 잠시 결혼을 하기도 했으나, 결국 이혼했다 이후 "홍콩"에서 한국 기업체 주재원이었던 "윤태식"을 만났고, 1986년에 결혼했다.

 윤태식 (尹泰植1958~): 중퇴비디오 제작/유통업체 직원벤처사업가2001.11~ 2017.04 출소

1986년 초, "비디오 제작 및 유통업체""임시직"으로 취직하고, "홍콩"에서 비디오 판권을 얻어 국내에 유통시킬 것을 제안하여 "홍콩"으로 발령받았다 중학교 1학년 중퇴학력에 방위병으로 병역을 마쳤음에도, "육사를 졸업하고 대위로 예편한 뒤 홍콩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다"는 거짓말을 해왔다.

수지 킴

1986년 가을, "김옥분"과 혼인 신고를 하였으나, 1987.01.03"홍콩"의 아파트에서 부부 싸움 끝에 아내 "김옥분"을 목 졸라 살해하고, 주검을 침대 밑에 숨기고, 이틀 뒤 "싱가포르 주재 조선 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관"을 찾아가 망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관에"서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미 대사관"을 찾아갔고, 결국에는 "한국 대사관"으로 보내졌다. "한국 대사관"에서 그는 "북한의 공작원에게 납치되었다가 탈출했으며, 아내는 북한의 간첩이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한국 언론들은 이 사건을 "북한 여간첩이 미인계로 순진한 남편을 꼬드겨 홍콩에서 월북시키려다가 남편이 가까스로 탈출한 일종의 활극"처럼 보도했다생계를 위해 일본에 드나들다, "홍콩"에서 살해된 술집 여종업원은 "일본 조총련계 간첩단"과 연루된 "미모의 여간첩"으로 둔갑하였고, 살인범은 "사지(死地)에서 돌아온 반공투사"가 되었다1986년 가을부터 KBS에서는 "남십자성"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되었는데, "수지 김 사건" 이후에는 아예 "수지 김"이라는 여간첩이 드라마 배역에 등장하기도 했다<윤태식의 귀국 인터뷰 : 지금까지는 반공, 반공해도 그 의미를 몰랐으나 우리가 왜 반공을 해야 하는지를 절실하게 깨닫게 됐다. >

2. 사건 개요

"윤태식"을 면담한 "이장춘(싱가포르 대사)가안전기획부 현지주재관"은 그의 주장이 "신빙성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이장춘 대사"는 횡설수설하는 "윤태식이 기자회견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반대했다.(이장춘 대사는 싱가포르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하라는 본국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시말서를 쓰기도 했다.)

"장세동(국가안전기획부장)"은 현지의견을 받아들여 기자회견 보류를 지시했으나, 이후 마음을 바꿔 4시간 만에 "다시 강행하라"고 지시했다결국 "싱가포르"와 외교마찰을 우려해, 1987.01.08일 제3국인 "태국 방콕"에서 1차로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으로 송환된 1987.01.09"김포공항"에서 2차로 기자회견을 가졌다.

"윤태식"은 곧바로 "국가안전기획부 남산분실"로 연행되어 엄중히 추궁을 받았으며, 결국 "자신이 부인을 살해하였고, 처벌을 피하기 위해, 자진 월북하려 했다"고 자백했다그러나 "국가안전기획부""윤태식"이 함부로 발설하지 말도록 했으며, 1991년부터는 한국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출국금지를 시키기도 했다

1987.01.26, "악취가 난다"는 이웃집의 신고로, "홍콩 경찰""김옥분"의 아파트를 수색했고 결국 침대 밑에서 "김옥분"의 주검을 발견했다"홍콩" 언론은 "수지 김은 북조선 간첩이 아니다"라고 정정보도를 했으나, 한국에는 이 소식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이후 "홍콩" 경찰은 "남편 "윤태식이 "김옥분을 살해했을 것"이라 추정하고, "홍콩"으로 불러서 조사하려 했으나, 한국 "외무부"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한편, "싱가포르 주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관""윤태식은 자진해서 대사관에 왔을 뿐 납치기도는 없었다."고 주장하자, "싱가포르 주재 한국 대사관""납북 미수는 사실"이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3. "간첩"으로 몰린 "김옥분" 일가족

"간첩"으로 몰린 "김옥분"의 일가족은 풍비박살 나는 아픔을 겪었다일가족 중에서 3명이 "화병정신병"으로 세상을 떠났다여동생 4명중 3명은 "간첩을 자매로 두었다"는 사회적 지탄 때문에 이혼을 당했고, 조카는 따돌림 때문에 학교를 자퇴하기도 했다이와 반대로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은 "윤태식"은 계속해서 각종 사기 범죄를 저질러 왔다.

영화배급 사업을 하다가 파산한 이후, 1994년에는 "방송사 PD 신분증"을 위조해서 신용카드를 발급받아 수억 원을 쓴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1996.07월에 출소했다이후에도 "위폐감식기중국사업 진출" 등의 명목으로 수천만 원의 사기 행각을 벌이기도 했다이런 경력이 있는 "윤태식"이 어떻게 "패스 21"이라는 "지문인식 시스템" 벤처 회사를 설립했는가에 대해 강력한 의혹이 남아있다

특히, 살인사건을 조사했던 "국가안전기획부""패스 21 지문인식시스템"의 기술시연회를 1998.10"국가안전기획부"에서 열기도 하는 등 "국가안전기획부""윤태식"을 특별히 관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되었다"윤태식 게이트"가 드러난 이후에는 "한나라당 전현직 의원새천년민주당 의원들""패스21"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음이 언론에 공개되기도 했다2000.03, "김찬경"이 인수한 "미래저축은행"에 회장으로 추대되어 구속 직전까지 활동했다.

4. 재조사

이 사건을 최초로 조사한 사람은 "이정훈(신동아 기자)"였다1995, 한 언론사 선배에게 이 사건의 전모를 귀띔 받고 취재를 시작하였으나, 당시 근무하던 "주간조선(1995)시사저널(1998)" 편집부의 반대로 기사화하지 못했다결국 사건의 전모가 2000.01"주간 동아"에 처음으로 보도되었고, 2000.02.12"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심층적으로 다뤄졌다.

그렇지만 취재 사실을 눈치 챈 "윤태식"은 법원에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고, 그 결과 "일부 내용을 삭제한 채, 방영하라"는 판결이 나와, 실제 방송분에서는 "윤태식"의 이름이 "○○"으로 가려졌고, 1987년 당시 신문을 내보낸 장면에서도 이름사진 등이 가려진 채로 방영되었다이 방송을 우연히 알고 시청하게 된 "김옥분"의 유족들은 "간첩 조작"과는 별개로, "살인 혐의"처벌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던 "윤태식"이 버젓이 벤처 사업가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분노하여, 2000.03.09"윤태식"을 고소했다.

이후 "국가정보원"의 방해 공작 등으로 인해 수사가 지지부진했으나, 2001.05"윤태식"으로부터 1987년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에서 있었던 일을 담당 검사가 진술 받아, "국가안전기획부의 은폐가 있었다"는 정황이 포착되었다마침내 공소시효를 50일 남겨둔 2001.11.13"윤태식""살인 혐의"로 구속되었다그리고 11.24"SBS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2000.02월 당시 방송되지 못한 부분을 포함하여 "수지 김 사건"의 전모를 상세하게 다뤘다.

5. 결 과

2002.05.14일 법원은 "아내를 살해한 뒤 주검을 숨기고, 납북될 뻔했다가 탈출한 것처럼 거짓 기자회견을 여는 등 죄질이 나쁘다",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와 더불어 유족들에게 15년 동안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히고도 전혀 반성하는 기미가 없어 중형을 선고받아 마땅하다"고 밝히고, "윤태식"에게 "살인사기뇌물공여" 혐의에 대해, "징역 156"을 선고했다그러나 "수지 김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은폐조작을 주도했던 "장세동" "국가안전기획부 관계자들"에 대해서는, 2002.06월 검찰은 "직권남용죄(공소시효 3)직무유기죄(공소시효 1)"의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공소권 없음" 처분을 내렸다.

이에 대해 유족 10명은 같은 해 "정부윤태식"을 상대로 108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고, 원은 2003.08.14"42억 원"의 배상 판결을 내렸다이 비용은 당시 유사소송과 비교했을 때, "최고의 배상 금액"이었다정부가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공무원에게 "구상권"을 청구한 것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관련된 "박처원(전 치안감)"이후 2번째였다.

2003.08.21, "국가정보원"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사건조작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법무부""수지 김 사건"의 항소를 포기함으로써 사건을 종결시켰고, 정부는 "장세동" 등 당시 "국가안전기획부 책임자"에게 "구상권"을 청구해, 배상액을 물리기로 결정했다"장세동""구상권"에 의한 "배상액 지불"을 피하기 위해, "빌라(8억 원대)"를 처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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