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자ㆍ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은 단군 이래, "최대의 사기사건"으로, "제5공화국 (전두환 정권)" 시절, "3대 금융 부정 사건(명성그룹사건ㆍ영동개발진흥사건)"중 하나이다
1. 장영자ㆍ이철희 금융사기 사건
어음사기사건:건설사 등 자금 사정이 좋지 않은 기업을 찾아,현금을 빌려주고,채권의2~9배에달하는 어음을 챙겨,사채시장에서 다시 할인 유통하는 방법으로 부를 불렸다. 이들은"특수 자금"이라며,기업에 함구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포항제철"에 이은 업계 2위 "일신제강(현, KG동부제철)"ㆍ도급 순위 8위였던 "공영토건" 등이 모두 부도가 났다.
• 일 시 : 1982.05 • 금 액 : 7,111억 원 (현, 2조 5천억ㆍ국립대 등록금 50만 원)
"장영자"는 주로 자금압박에 시달리던 건설업체들을 찾아가, 남편 "이철희"의 과거 경력을 들먹이며 "특수자금이니 절대 비밀로 하라"며 현금을 빌려주고, 대가로 업체들로부터 수배에 달하는 "약속어음"을 받아냈다. "공영토건"에서는 빌려준 현금의 9배에 달하는 1279억 원을 약속어음으로 받아냈다.
이들 부부는 이렇게 받은 "어음을 할인"해서 생긴 돈을 다른 회사에 빌려주며 똑같은 짓을 하였다. 이걸 계속 반복해서 받은 어음의 총액은 7,111억 원이고, 이 중 6,404억 원을 할인해서 사용하였다. 처음 종자돈을 제외한다면, 마치 폰지 사기나 다단계처럼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셈이었다. (참고로 신군부가 3~4공화국의 대표적 부정축재자로 지목한 10명의 부정축재액 총액이 853억 원이었는데, 장영자 부부가 받아낸 어음 총액은 7,111억 원이다.
2020년 현재에도 7,111억 원이면 대기업조차 쥐락펴락하는데, 저 때는 이루 헤아리지도 못하는 거액이었다. 서민용으로 지은 "개포동 주공APT 18평짜리도 분양가가 600~700만 원이었다. 지금의 환율로 따지면 약 7조 원 내외고, 거기에 당시 GDP의 1.4%, 당시 한국정부 예산의 10%를 차지했다.)

2. 인 물
① 장영자 (1944ㆍ2번 이혼ㆍ1982년 재혼ㆍ숙명여대 메이퀸ㆍ전두환-김대중의 인척ㆍ김주승 장모)
• 장성희 : 언니ㆍ 이규광과 결혼(이규동(전두환 장인ㆍ이순자 친정아버지)의 동생)
• 차용애 : 32세ㆍ외사촌 언니ㆍ김대중 1번째 부인ㆍ아들 2명 - 홍일/홍업ㆍ목포 인쇄소를 운영한 재력가 딸
• 1982 : "장영자"와 함께 6,404억 원에 달하는 "어음사기사건"으로 구속 기소ㆍ징역 10년
• 지금까지 수감 기간 29년 : 1994 : 징역 4년(김주승 운영하던 회사의 부도 사건)ㆍ2000 : 징역 15년(220억 원대의 구권 화폐 사건)ㆍ2018 : 구속기소(지인들에게 총 6억 2천만 원을 가로챈 혐의) : 사채시장 거물로, 사건이 터지기 전부터 엄청난 부동산과 사채시장에서 큰손으로 유명한 재력가였으며, 젊은 시절부터 미모와 남다른 지략으로 다른 사람을 조종하는데 매우 능한 인물로도 명성이 있었다. 상대방이 어지간히 영리한 사람일지라도, 장영자 본인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자신감마저 보인 적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재산을 불린 과정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② 이철희 (1923): 육사2기(박정희 동기)ㆍ정보의 귀재ㆍ재혼- 장영자(전두환-김대중 대통령의 인척)
육군 소장ㆍ국회의원ㆍ중앙정보부 차장ㆍ육군방첩대 SISㆍ육군첩보부대(HID) 부대장ㆍ중앙정보부 창설요원ㆍ정보 관련 업적 대단ㆍ김대중 납치사건의 핵심 라인
• 1952 : 육군 첩보부대(HID) 부대장 • 1954 : 육군 정보 학교장
• 1961 : 육군 방첩부대장 (쿠데타 방지 등) "박정희" 거사계획은 "육군ㆍ공군 정보망ㆍ방첩부대"에 정보가 잡혔으나, 무시함 → "뭔가가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식 (이심전심의 마음) → "이철희"는 상당한 정보를 파악하였으나, "장도영"에게 "이상 징후 없다"고 보고. "쿠데타군"과 내통한 "장도영" 밑에 숨어 있어서 인지, "5ㆍ16이후" 반혁명에서 제외
• 1966 : "김형욱"에 의해 "중정 국장"으로 발탁 • 1970 : 중정 차장보 • 1979 : 유정회 의원
③ 이규광 (장영자 형부ㆍ전두환 부인 이순자의 삼촌(숙부))
이규광이 증권 정보나 거물을 소개해주고 금전 관리법을 알려주는 식으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미확인이다. "이순자"가 군인 아내 시절, "장영자"를 따라 부동산 투기에 나서 "연희동 집"을 샀다고 한다. (일명 연희동 빨간 바지) "장영자"의 친언니는 "전두환 정권"에서 승승장구하던 "이규광(전두환의 처삼촌)"과 결혼했는데, 공교롭게도 고종사촌 언니는 "전두환 정권"에 맞서던 "김대중"과 결혼했다.
"이규광"의 부인(장영자의 언니)도 "김대중" 첫 부인의 "고종사촌 동생"이라서, "이규광ㆍ김대중"은 사촌동서가 되고, "이규광"이 손아랫동서라 "김대중"에게 형님이라고 불러야 한다. 이렇게 되면 "이순자"는 작은아버지 "이규광"의 형님뻘인 "김대중"에게 뭐라고 불러야 하나?
④ 김대중 (사촌형부ㆍ첫 부인 "차용애"가 "장영자" 고모의 딸, 즉 "고종사촌 언니")
"차용애"가 사망한 후, 1962년 "김대중"이 "이희호"와 재혼했기에 기존의 처가와의 인척관계는 소멸되었고, 따라서 "김대중"과는 법적으로 완전 남남이다.
3. 여담
① 100년 만에 1번씩 장씨 여자가 큰 일을 벌인다.
조선 시대에 이름을 날린 "장녹수(16C초)ㆍ장희빈(18C초)"이 거론된다. 둘은 200년을 사이에 둔 인물이고, "장영자"는 "장희빈" 사후 거의 3C 뒤의 사람이다.
② "이동찬(코오롱그룹 회장)"은 "장영자"에게 계열사 중 하나인 "코오롱건설"을 팔려고 하였다.
그런데 팔기 직전, "장영자"가 검찰에 연행되는 바람에 이 사건에 연루되는 화를 면하였다.
③ "장영자"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 남매를 두었는데, 남매는 부모가 이혼한 후 아버지 밑에서 컸다.
전 남편이 크게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 경제적으로는 남 부러울 것 없이 자랐지만, 엄마의 복잡한 팔자를 물려받았는지 남매 모두가 삶이 평탄치 못했다. 남매 중 맏이인 딸은 배우 "김주승"과 결혼해서 딸까지 낳고 한동안 잘 살았는데, "장영자"가 출소하고 다시 사기 사건을 일으켰을 때, "김주승"의 연예계 제작사가 부도나면서 "김주승"이 미국으로 도피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일과 관련하여 부부는 결국 이혼했고, 그 후 "김주승"은 2007년에 지병이던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둘째인 아들은 2000년 "구권 사기" 때, "장영자"와 함께 잡혀갔다가 풀려났는데, 교도소까지 다녀와 자중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뺑소니 사고를 크게 치고 외국으로 튀었다. 그러나 몇 년 후, 희귀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이 된 상태로 귀국했는데, 알고 보니 외국으로 도피하기 전에 사귀다가 헤어진 "여배우 차주옥(1982년 MBC 15기 공채 탤런트로"이 둘 사이의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상태라 자기 핏줄에 애착이 느껴졌던지, 아들은 죽기 전 "차주옥"과 혼인신고를 해서 정식 부부가 되었고 얼마 후 사망했다. 그런데 아들이 생전에 아버지의 유산 분배를 놓고 누나에게 소송을 건 상태였는데, 소송 중에 사망하면서 법적으로 부인이 된 "차주옥"이 그 소송을 대신하여 계속했다.
4. 사건의 발단ㆍ진행
1980.07월, 당시 "정도영 준장(국군보안사령부 보안처장)"은 "어느 중년 여인이 군부대 불교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해 거액을 뿌리고 다닌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이 여인이 해당 부대의 부대장들과 아무런 인연도 없으면서 거액을 기부했다는 점이 수상했다. 조사 결과, 여인의 이름은 "장영자"로 당시 나이 40세. 법명은 "보각행(普覺行)"이고, 엄청난 재력가 행세를 하지만, 사실은 빚 독촉을 받는 상태였다. 곧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었고, 각 부대에는 "장영자를 조심하라"는 지휘 조언이 내려갔다.
1981년,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산하 민정수석비서관실"에 "장영자 부부"에 관한 첩보가 입수되었고, "이학봉(민정수석비서관)"은 "유학성(국가안전기획부장)"에게 통보해줬다. "유학성"은 처음엔 별 것 아니라고 여겼으나, 곧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1982.04월, "공영토건"이 "장영자에게 어음사기를 당했다"며 진정서를 "검찰청"에 제출했는데, 검찰 내사 결과, "어음 사기와 관련된 기업이 더 있음"이 밝혀졌다. 처음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2과"에서 사건을 맡았으나, 곧 "중수부ㆍ서울지검"이 맡았다.
1982.05.07일,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부장 이종남 검사))"가 부부를 구속하며 사건의 전말이 밝혀졌다. 워낙 엄청난 규모의 사기 사건이고, "장영자"가 "전두환" 처가와 얽혀 있다 보니, 이 사건의 배후에 "청와대"가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가령 "태양금속"은 현금 단 한 푼도 받지 않고, 어음을 끊어주는 등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사실 여부를 떠나서 그런 의혹이 제기될 만했다.
"장영자ㆍ이철희"에게는 법정 최고형인 "징역 15년형ㆍ미화 40만 달러ㆍ엔화 800만 엔 몰수형ㆍ추징금 1억 6254만 6740원"이 선고되었다. 또한 "이규광(장영자 형부ㆍ영부인 이순자의 작은 아버지)"에게도 징역 1년 6개월ㆍ추징금 1억 원이 선고되었다. 그 외에 구속된 사람이 30여 명에 이르렀으며, "장영자"의 집에 침입해 "물방울 다이아" 등 1억 2천만원 어치를 훔친 유명한 "절도범 조세형"을 잡은 사례로 "장영자"에게 50만 원을 받았던 경찰관 8명은 쫓겨났다. 참고로 당시 경력 10년짜리 평교사 월급이 25만 원 수준이었다.
검찰은 사건 조사 후, "장영자 부부가 15개월 만에 49억 원 내외를 썼다"고 발표했다. 이 부부는 하루에 1,089만 원 내외를 지출한 셈이다. 1980년대는 서울 시내 20평 아파트가 1천만 원이 안 되었던 시대였다.
5. 사건의 여파
사건으로 당시 "5공의 실세들"은 물러났다. 유창순(국무총리)ㆍ신병현(경제기획원장관 겸 경제부총리)ㆍ노신영(외무부장관)ㆍ이광표 (문화공보부장관)ㆍ이종원(법무부장관)ㆍ정치근(검찰총장)ㆍ유학성(국가안전기획부장→ 후임자 노신영)ㆍ서정화(내무부장관)ㆍ김용휴(총무처장관)ㆍ나웅배(재무부장관)ㆍ최광수(체신부장관)ㆍ천명기(보건사회부장관)ㆍ권정달(민주정의당 사무총장)ㆍ윤자중(교통부장관)ㆍ고건(농수산부장관)ㆍ서석준(상공부장관)ㆍ이선기(동력자원부장관)ㆍ허화평(정무수석비서관)ㆍ허삼수(사정수석비서관)"
"허화평ㆍ허삼수"는 바로 경질되지는 않았고, 그해 말에 경질되었다. "허화평ㆍ허삼수"는 이 사건을 계기로 "김상구(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사무차장) 등 "전두환 대통령"의 친인척들을 공직에서 배제하려고까지 하였고, 심지어 "전두환 정권"의 개국 공신들인 "유학성ㆍ노태우ㆍ정호용" 등을 "궁정동 안전가옥"에 초대하여 "전두환"에게 친인척의 2선 후퇴를 건의할 것을 결의하기까지 하였다. 이 점 때문에 그들은 "전두환"의 눈 밖에 났다.
여담으로, "박철언(국회의원)"의 회고에 의하면, "허화평ㆍ허삼수"는 경질되기 몇 달 전부터는 "청와대 본관 출입"도 경호원들에 의해 통제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박철언" 자신은 자랑 격으로, "대통령비서실 법률비서관 겸 정무비서관" 신분으로 해당 사건을 수사한 검사들을 텔레비전에 출연시켜 의혹을 잠재우는 데 기여했다고 하였다.
이후 "장영자"는 "음모론"을 제기했다. "이규동(이순자의 아버지)"이 "명성그룹"의 뒤를 봐주고 있다는 의혹으로 세간이 시끄러워지자, "전두환 정권"에서 무마하려고 "장영자ㆍ이철희" 부부를 대신 희생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훗날 "장영자"가 출소한 후에도 사기 사건을 일으켜, 다시 구속ㆍ수감되는 행각을 되풀이했음을 생각하면, "이순자"의 친정 식구들이 비리를 저지른 것은 저지른 거고, "장영자"는 그녀대로 사고를 친 게 분명하다.
"김재익(경제수석비서관)"은 "제2의 장영자ㆍ이철희 사건"을 막기 위해, 시중의 음성자금을 양성화해야 한다는 점과 조세 부담의 불균형을 시정해야 한다는 점을 들어, "전두환"에게 "금융실명제" 시행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기득권층에서는 "정치자금 모금의 어려움ㆍ기업 활동의 어려움"을 들어 반대하였다. 결국 불발된 "금융실명제"는 "김영삼 정부"의 1993.08.12일 오후 8시 정각이 되어서야 시행되었다.
6. 사건 이후
① 장영자 사건 (2차)
1991년, "가석방"된 후에도 "용인술ㆍ처신에 대한 자신감"으로 억울함을 호소하는 언론 보도를 내는가 하면, 다시 시중은행의 주요 간부들을 자신있게 찾아 다닌다. 1994년, 다시 140억 원대 "어음사기 사건"을 저질러서 4년간 복역한다. (2차 장영자 사건) 여기에 연루된 "동화은행ㆍ서울신탁은행"에도 불똥이 튀어, 현임 은행장들이 사임했고, 이들 기관들도 징계를 받았다.
② 장영자 사건 (3차)
1998년,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풀려나, 다시 "구권 화폐 사기"를 일으키며, 2000년에 다시 구속되었다가 2015.01월에야 석방되었다. 기간 동안 남편 "이철희"가 옥중의 아내를 정성껏 돕는 모습이 다시 한번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③ 장영자 사건 (4차)
2018.12.21일, 출소 3년 만에 다시 6억 대 사기를 쳐서 구속되었다.
< 구권 화폐 사기 >
"구권화폐"는 흔히 과거 정권 시절 "비자금으로 조성됐다"는 수십 조원 규모의 1만원권 지폐를 말한다. 성격에 따라 "구권(舊券ㆍ위조방지를 위한 은색 실선이 첨가되기 전인 1994년 이전에 나온 지폐"와 "구권(求券): 국가 경제가 위태롭거나 긴급 시를 대비해 만든 지폐"로 나뉜다. "명동 사채시장"에는 그동안 일확천금을 노리는 허황된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구권"을 미끼로 한 크고 작은 사기행각이 끊이지 않고 있다.
2000.03월, "윤모 여인"등이 "김영삼 전 대통령 아들 현철씨의 비자금을 1만원권 구권화폐로 관리하고 있는데, 수표와 바꿔주면 웃돈을 주겠다"며, "은행지점장" 등을 상대로 벌인 "구권화폐 사기" 행각에 휘말렸다. "윤모 여인"등은 "장영자"에게 "전직 대통령의 구권 화폐를 관리하고 있는데 수표로 바꿔주면 사업상 편의를 봐 주겠다"며, 21억원 상당의 수표를 받아 가로챘다. 그러나 "검찰" 수사결과 단순 피해자로 알려졌던 "장영자" 또한 "아들 김모씨ㆍ윤씨"와 짜고, "시중은행ㆍ제2금융권"을 상대로 "현금 21억~24억을 주면, 구권화폐 30억원을 주겠다"는 수법으로 10여 차례에 걸쳐, 300억 원 이상을 가로챘던 것으로 드러났다. "장영자"는 체포되면서 눈물을 흘리며 "나는 피해자이며 억울하다"고 항변했고, 법원에 출두해 "지하자금인 구권을 유통시켜 경제를 살려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한때의 큰 손이 이런 유치한 사기극을 벌일 정도로 돈이 궁하지 않다."고 강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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