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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 한국 • 외국 (2020~ 이후)

대선주자 : 김문수 (1951~ ) 운동권의 전설

by 당대 제일 2025.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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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가 출신 정치인국회의원 (3ㆍ신한국당ㆍ한나라당)경기도지사 (3233)고용노동부장관

학생운동을 하다가 "서울대"2번이나 제적을 당했으며, 공장에서는 노동운동을 하다가 2번이나 해고되었다. 이로 인해 감옥도 2번이나 갔다 왔기 때문에 대학을 졸업하는데 자그마치 246개월이나 걸렸다. 원래 매우 유명한 "운동권 지도자" 출신으로, 무려 20년 이상을 노동운동에 투신하며 활동한, 그야말로 1980년대 노동운동을 대표하는 "전설"이었다.

 

1. 동지로 지내던 시절의  "김문수"는 전설이었다. 운동권의 황태자이자, 하늘같은 선배였다 (심상정)

본디 매우 유명한 운동권 지도자 출신이었다. 사실 유명한 정도가 아니라 무려 20년 이상을 노동운동에 투신하며 활동한, 그야말로 1980년대 노동운동을 대표하는 전설이다.  그 시절, 노동운동가들 대다수가 "김문수"를 따르거나, 혹은 "김문수"가 이끌던 조직과 깊게 연계되어 활동하던 사람들이었으며, 당시 그는 "노동운동계의 김근태"라고 볼 만큼 절대적인 인물이었고, 수많은 노동운동 후배들의 흠모와 존경을 받던 인물이다. 2010년, "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경기도지사 후보" "김문수ㆍ유시민"은 다시 만난다.

2.  논란

①  권위적인 행태

2011, "경기지사" 시절, 경기 지역의 한 요양병원을 방문해서 행정점검차 119에 전화를 걸었다가 "갑질 논란"이 불거졌다. 당시 전화를 받은 "소방서 상황실 직원"에게 대뜸 "도지사 김문수입니다"라고 말했다. 직원이 "무슨 일 때문이냐"라고 묻자, 그는 되레 "이름이 누구냐"라고 재차 묻는 등 불쾌함을 드러냈다. "도지사"에 대한 응대가 부적절했다는 취지였다. 이 일로 해당 직원이 "문책성 인사조치"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②  내가 국회의원 3번 했어, 경찰 동행제안에 막무가내 항의

2020.08, "코로나19 검진"을 위해 임의동행을 제안한 경찰에, "내가 국회의원을 3번이나 했다"며 실랑이를 벌인 사실이 확인됐다.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날 "영등포구 국회의사당 역"에서 경찰과 마주친 상황을 영상으로 소개하며, 경찰이 강제연행을 하려고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어디라고 와 서, 나보고 왜 가자고 해. 사람을 뭘로 보고 말이야"라며 항의했고, 경찰은 "강제로 가자는 게 아니고, 해주시면 감사하다는 것"이라며, 동행은 권고임을 설명했다. 이에 그는 "나를 왜 가자고 하냐고. 이유가 뭐냐"며 항의를 했다. "건강 검진을 위해 함께 가자고 제안한 것"이라는 경찰 설명에도 "같이 있었으면 다 잡아가나, 혐의가 있든지 해야지, 내가 김문수인데 왜 가자고 그러냐", 거듭 반발했다오해라는 경찰 해명에 "오해가 아니고, 이러면 안 된다고 당신들, 내가 국 회의원 3번 했다"며 소리를 치기도 했다. 그는 확진 판정을 받은 "차명진 전 의원"과 밀접 접촉한 사실이 사진 등을 통해 확인돼 진단검사가 필요한 상황으로 추정된다.

"윤석열 대통령"  탈당하란 건, 옳지 않아 (절연 요구 일축), 출당제명도 생각 안 해

2025.05.13, "김문수"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탈당하라고 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대구"에서 열린 출정식 뒤, 기자들과 만나"대통령이 탈당하는 건 본인 뜻"이라고 말했다. 이어 "윤 전 대통령이 잘못한 점이 있다고 판단해 탈당하라고 한다면, 우리 당도 책임이 있다. 자기가 뽑은 대통령을 탈당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이 면책될 수 없고, 그렇게 하는 건 도리도 아니다"라고 했다. "자진 탈당을 안 하면, 출당이나 제명 조치도 검토하냐"는 기자들의 질문엔, "현재로선 그런 건 생각한 적 없다"고 잘라, 말했다.

 "전광훈 목사 (1954~ ㆍ사랑제일교회)랑 친해요? 김문수 측 : 멀어질 이유 있나?

"김문수 후보 (국민의 힘)""전광훈"과의 관계에 대해, 캠프 인사가 "멀어질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25.05.12, "박종진 (, 전략기획본부장)""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두 분이 친하시지 않았나? 제가 볼 때, 과거에 태극기 활동도 하셨다", 이같이 밝혔다.

5년 전, "김문수전광훈 목사""자유통일당"을 창당하는 등 정치적으로 가까운 사이인데, "박종진""김 후보와 전 목사가 자유통일당 창당 시절 친했는데, 지금도 친한가?"라는 질문을 받고, "전광훈 목사가 어찌 됐든, 탄핵 반대 운동을 이끌었던 분은 맞지 않느냐? 인정할 건 해야 한다. (전 목사가) 극우라고 하는데, 극우라는 개념을 정확히 다시 잡아야 한다", 옹호했다.

  시대 착오적인 젠더 인식

2010, "경기지사" 시절, 대학 특강에서 걸그룹 "소녀시대"를 언급하며, "내가 봐도 잘생겼다. 쭉쭉빵빵이다"라고 표현했다. 2011, "한국표준협회의" 조찬 모임에서 "춘향전이 뭡니까? 변 사또가 춘향이 X 먹으려고 하는 거 아닙니까"라고 발언했다,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극언이 잦았다.

2017, 한 보수단체 집회에서 "문재인은 김정은의 기쁨조"라고 목소리 높였고, 2019"자유한국당" 주최 토론회에선 "박근혜이명박이 구속이라면 문재인은 당장 총살감"이라고 주장했다. 2022.10, "경사노위원장"으로 국회 국정감사를 받으면서도, "문 전 대통령은 김일성주의자"라고 발언했다가, "국회 모욕죄 혐의"로 고발당했다.

  편향된 역사관 논란"뉴라이트 계열"의 역사 인식

2024.08, "고용부 장관 후보자", "국회 인사청문회"에 출석해 "일제시대 때, 선조들의 국적은 일본이었다"는 취지로 발언했다가 야당의 비난을 받았다. "장관" 취임 직후,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의 동일성이 유지된다는 외교부 문서에 동의하느냐"는 질문에, "동의하지 못하겠다"고 답했다. 2018, 한 교회 강연에서도 "(일제강점기인) 1919년에는 나라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1948.08.15일을 "건국절"로 기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뉴라이트 계열"의 역사 인식과 같다("건국절"을 주장하는 강경 우파 인사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와도 우호적 관계로 알려졌다)

  "백범 김구 선생"의 국적은 중국

대정부질문에서 "최민희 국회의원 (1960~ ㆍ더불어민주당)"'일제시대 김구 선생의 국적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김구 선생은 중국 국적을 가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부분은 국사학자들이 다 연구해 놓은 게 있다"고 답변하며, 논란을 일으켰다. 또한 2024.08, 국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도 "일제강점기 시기, 우리 국민들의 국적은 일본이었다. 대한민국이 없었기 때문이다" 는 발언으로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최근 "국가보훈부"는 잇따른 부적절한 역사관 논란에 대해, 2025.02.20일 공식 보도자료를 통해, "김구 선생의 국적은 명백한 한국이며, 일제강점기 우리 국민의 국적은 한국임"을 밝히며,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을 공식화 한 바 있다.

  노동운동가 출신이지만, 편향된 노동관

2023.03, "경제사회노동위원장 재임" 시절, 본인 페이스북에 "광주글로벌모터스를 방문했다. 감동받았다. 노조가 없다. 620명의 평균나이 28, 현장에서 핸드폰은 보관하고 사용할 수 없다. 평균임금은 4,000만 원이 안 된다"라고 썼다. "무노조 저임금 경영"을 옹호한 발언이었다.

  사회 문제에 관한 인식

2023.09, "경사노위" 주최로 개최한 청년 행사에서, "저출생 문제"를 언급하며, "애를 낳아서 키워줘야지, 개를 안고 다니는 것이 어떻게 행복일 수 있나"라고 말했다. 청년 세대의 근본적인 고충을 이해하지 못한 원인 진단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2018, "서울시장 선거" 후보 시절엔 "대한민국의 상징이 세월호처럼 돼서는 안 된다. 세월호처럼 죽음의 굿판을 벌이고 있는 자들은 물러가라"라고 발언했다가 유가족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

3.  그가 말하는 "유시민 (1959~ ㆍ작가ㆍ정치평론가ㆍ보건복지부장관)"과 기구한 인연

(유시민 후보)는 제가 어려울 때, 가장 어려울 때, 저의 옥바라지도 해주시고, 도와주신 분입니다, 제가 특히 미안하게 생각하는 것은 유시민 후보의 동생 "유시주 (1961~ 서울대 국어교육학과번역가희망제작소 이사)"라고 있습니다.

그때는 처녀지만, 지금 결혼했습니다만, "유시주"씨가 저 때문에 참 옥고도 치르고고생을 많이 했습니다또, "유시민 후보" 누님, "유시춘 (1951~ ㆍ고려대 국어국문학과소설가EBS 이사장)" 누님께서는 사실상 참, 저희가 구속됐을 때,  "구속자 가족협의회" 총무를 맡으셔서, 굉장히 참 고생 많이 하셨어요.

제가 생각한다면, 평생동안 제가 가장 어려울 때,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유시민 후보"에 대해서 정말, 늘 이렇게 "마음의 부채" 같은 걸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혼자만이 아니라, "유시주" 동생이든지, 다들 온 가족에 대해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4. 김근태 (1947~201164세ㆍ민주화운동가ㆍ국회의원(3)ㆍ보건복지부 장관)과 인연

실제, "김문수"를 노동운동에 처음으로 관심갖게 한 이가 "김근태"이다. 그에게 처음으로 "공활(대학생들의 공장체험)에 가자"고 한 선배가 "김근태 (서울대 5년 선배)"였던 것이다. 그가 1학년 때 선배 "심재권"의 권유로 학생운동 동아리에 가입한 후, 2학년 때 "김근태"의 권유로 "공활"을 하면서부터,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이후 "전태일 열사의 일대기"를 탐독하면서 노동운동에 관심을 보였고, 게다가 "김근태"가 고문을 당한 걸로 유명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그도 고문당한 적이 있다.

1980년 당시 그는 "구로공단 한일공업 도루코 노조위원장"으로 한창 활동하다가 잡혀서 남영동에 끌려가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그의 당시 재판기록 중, 변호사가 한 말에 따르면, 체포한 뒤 봉고차에 실어서 남영동 건물 앞에서 차문을 열고, 묶여 있던 그를 걷어차 떨어지게 하자, 밖에서 기다리던 남성 2명이 각목을 들고 다가와, "죽여, 이 새끼는 빨갱이보다 더 나쁜 새끼야"라고 욕설을 한 뒤, 각목으로 무차별 폭행을 했다고 한다. 맞다가 기절하고 깨어나니 고문실 안이었다고 한다. 고문은 이와는 비교도 안되게 끔찍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죽고도 남을 뻔했다. 물론 그 이후에도 잡힐 때마다 고문을 당했는데, 후술될 "인천 5.3 운동" 때도 또 끌려가서 고문을 당했다.

5. 노동운동계의 전설이었던,   김문수

1학년 때, "심재권 (서울대 5년 선배민주당 국회의원)"의 권유로 "서울대 학생운동 서클" 중 하나였던 "후진국 사회연구회"에 들어가 학생운동을 시작했고, 2학년 때 "김근태"에 의해 "공활"을 경험하고 노동운동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70년대 초중반까지는 "학생민주화운동노동운동"을 병행했는데 스스로 회고하기를 당시 진로 방향을 제대로 못 잡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노동운동"에만 전념하기로 하고, 공장에 위장취업 후, 노동조합을 만들면서, 80년대에 전설적인 노동운동가가 되었다.

얼굴 한번 못 본 신인급 노동운동 청년들도 입소문으로 퍼진 "노동투쟁 신화 김문수"의 파란만장한 전설들을 들으며, 존경했다고 하니, 그 위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대학 제적 후, 스스로 공장에 위장취업하여,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을 지내면서 밑바닥부터 노동운동을 한 인물이다.

본격적으로 대학생들의 위장취업이 시작되는 시기가 1980년대다. 1980년대의 대학생들, 특히 "노동운동계"에 뛰어든 20대 젊은이들에게 그는 절대적인 전설이었다. 당시 김문수의 연설 내용을 그대로 적은 "필본"이 돌아다니곤 했다고 하는데, 그 연설을 못 본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필본"을 돌려 보면서 눈물 흘리는 경우들도 흔히 있었다고 할 정도이다.

1985, "서노련(서울지역노동운동연합)" 설립에 기여했는데, 1986, 지도위원으로서" 인천 53 운동" 당시 "53 직선제 개헌투쟁" 주도 혐의 등으로 구속되었다.  당시 "1028 건국대 항쟁"으로 "애학투련 (전국 반외세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 학생 2,000명 이상이 잡혀 들어와 함께 수감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그 중 많은 주체 사상파들이 자신에게 찾아와 "위수김동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을 이야기하며 함께 할 것을 설득했지만, 당시 자신은 "마르크스-레닌주의마오주의"에 빠져있었을지언정, 주체사상에는 동참하지 않았다고 한다.

6. 김문수 뒤를 이은 심상정 (1959~ ㆍ민주화운동가ㆍ국회의원 (4))

1986~1988년까지 복역 중이던 중, 그의 뒤를 이은 인물이 "심상정"이었다"심상정"의 결혼을 주선해 준 사람도 "김문수"였고, "김문수"가 고문을 받으면서도 "심상정"의 위치를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1987"6월 항쟁" 이후, "양김의 분열""노태우 정부"가 들어서자, 본격적인 진보정당이 필요하다면서 현실정치에 투신, "이재오장기표이우재" 등과 손을 잡고, "재야민주화운동 세력노동운동 세력" 일부를 모아, 1990년에 "민중당"을 창당하고, 본인은 공장 밀집지역인 "서울 구로() 지구당 위원장"을 맡는다. 하지만 "민중당"199214대 총선 때 단 1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하고, 득표율 미달로 해산되었다. 같은 해 14대 대선에서 재야를 비롯한 "비 김대중-김영삼 계열의 민주화운동 추진 진영"에서 민중 후보로 추대했던 "무소속 백기완"1%라는 저조한 득표율을 보이며, 낙선했다.

7. 민주화운동 포기 : 백기완의 낙선ㆍ함석헌의 죽음

"백기완 (1932~2021ㆍ89세ㆍ통일운동가ㆍ저항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 작사)의 낙선함석헌 (1901~1989ㆍ88세ㆍ민중운동가)의 죽음"이 그의 민주화운동 포기전향 선언과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이고, 이 시점부터 진보 진영의 인사들과도 척을 지며, 본격적으로 그에게 가장 흔히 쓰이는 별명 중 하나인 "변절자"로 불리기 시작한다. 이 때 "백기완"과의 악연이 그가 "민자당"에 들어가는 계기로 지목되기도 한다.

임을 위한 행진곡 (1981518 민주화운동의 상징곡작사 : 백기완 (원작 : 묏비나리ㆍ1932~2021, 향년 89세)ㆍ작곡 : 김종률)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8. 1994"김영삼"에게 영입되어, "민주자유당"에 입당하면서, "우익"으로 전향

"민중당"의 실패 이후, 택시기사(1년간)로 일하다가, 1994"김영삼"에게 영입되어, "민주자유당"에 입당하면서 "우익"으로 전향한다. 이 때 "김영삼""민주자유당"이 과거 "군사정권 잔당"이라는 색채를 지우기 위해, "재야민주화운동 인사들"을 대거 영입했는데, 그 중에 중요 인사가 "김문수이재오"였다. 그리고 이 둘을 따라서 엄청난 숫자의 "노동운동가재야인사들""민주자유당"에 합류한다이후 "국회의원경기도지사"를 지내면서, "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으로 이어지는 보수 정당의 대표적인 "대권 잠룡"으로까지 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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