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길 (金東吉ㆍ1928~2022ㆍ94세ㆍ독신)"은 평생 100권이 넘는 책을 출판했다. 모두 수필ㆍ신문칼럼을 모은 산문집들로, 문장력이 뛰어나고 사람들에게 쉽게 술술 읽히는 수필로 한때는 상당히 잘 팔리는 베스트셀러 저자였다. 특히 "미국 보스턴 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할 당시, 연구 주제가 "링컨"이었기에 그의 일생을 간략히 요약한 그의 대표작인 "링컨의 일생"을 펴내기도 했다. 신랄한 "풍자ㆍ해학"으로 인하여 학생들로부터 인기 있는 교수였다.
1. 김동길 (金東吉ㆍ1928~2022ㆍ향년 94세ㆍ호- 산남(山南)ㆍ독신)
연세대 사학과 교수ㆍ연세대 부총장ㆍ국회의원(14대 국민당)ㆍ신민당 대표최고위원ㆍ조선일보 논설고문ㆍ자유민주연합 상임고문ㆍ시민사회단체 운동ㆍ방송인 겸 시사평론가ㆍ수필가ㆍ시인ㆍ김병두(원남면장)의 장남ㆍ누나 김옥길(1921~1990ㆍ독신ㆍ이화여대 총장(1961~1979)ㆍ문교부 장관(1979~1980))
• 출 생 : 평남 맹산군 원남면 향평리 • 사 망 : 서울 서대문구 연대동문길
• 학 력 : 연희대 영어영문학과 학사 (1951) → 미국 유학 (1954) → 미국 인디애나 주 에반스빌 대학교 사학과 → 미국 보스턴 대학교 대학원 철학박사 (링컨 관련 연구)
• 상 징 : 평생 "나비넥타이"만 맨 것으로 유명하다. 미국 유학 시절 학칙이 엄해서 학생식당에서도 항상 타이를 매라고 해서, 간단하게 할 수 있는 나비넥타이를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1960~70년대, 군부 독재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하던 "민주화 운동가"였다면, 1980년대 이후, 독재정권ㆍ집권 여당뿐 아니라, 민주화를 주장하는 보수 야당ㆍ(진보적)재야까지 "구태정치"라면서 싸잡아서 비판하는 정치혐오 성향을 보여주었다. 이런 관점에서 소위 "제3세력"을 자처하는 "재벌회장(정주영)ㆍ기성정치인(박찬종)"과 함께 정치에 나섰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는 못한 채 이미지만 구겼다. 1997년, 정권교체 이후에는 "반공ㆍ반북"을 외치는 인사가 되었다. 2014년, 설립된 우파 성향 정치 원로들이 모인 "한민족 명예원로회의"의 공동의장을 맡았다.2017.11~ 2018.12월까지 "조선일보"에서 "김동길의 인물 에세이"를 연재하였다.
2. 논란
① "강경대(1972~1991ㆍ명지대 경제학과)" 구타치사 사건 관련
1991.04월, 강의 도중에 "강경대 구타치사 사건"에 대해, "그를 열사라고 부르지 말아라. 어린 나이에 뭘 알아서 데모를 나갔겠느냐"는 식으로 폄하했고, 이것을 학생들이 교내 대자보로 비판하자 결국 1991.05.08일 사표를 제출하고 학교를 떠났다. 그는 "학생들이 교실에서의 강의 내용을 갖고 스승을 비방하는 대자보를 붙이는 현실에 배반감을 느껴 결국 사표를 낸다"고 발언했다. 당시 "서양문화사 강의를 듣는 한 연세대 학우"라는 제목으로 게시된 대자보는 다음과 같다. < 김 교수가 지난날 29일 1교시 서양문화사 시간에 "입학한 지 2개월 된 신입생이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얼마나 느끼고 행동했길래 그를 열사라고 부르는가?ㆍ그는 배후조종한 선배들에 이끌려 시위 도중 도망가다가 맞아 죽은 것일 뿐ㆍ강씨를 배후조종해 죽게 만든 선배들은 내빼고 난 뒤 그를 다시 열사로 만들어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고 말해 김 교수 특유의 비약논리로 강씨의 죽음을 수많은 학생들 앞에서 하찮은 죽음으로 만들어버렸다.(한겨레신문 1991.05.02.>
② "노무현" 전 대통령, 친족관련 뇌물수수혐의로 검찰조사가 시작되자,
"노무현 씨는 정말 딜렘마에 빠졌습니다.(중략) 국민에게 사과하는 의미에서 자살을 하거나 아니면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가서 복역하는 수밖에는 없겠습니다" 라며, 자살을 종용하는듯한 글을 자신의 홈페이지에 적어 논란을 빚었다.
③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이후
"자살로 생을 마감한 16대 대한민국 대통령의 국민장은 가히 세기의 장례식이라고 할 만큼 역사에 남을 거창한 장례식이었다"라고 올렸다.
④ 2010년, "전두환"의 팔순 생일잔치에도 참여했다.
이때 같이 참여한 사람은 "노신영(국무총리)ㆍ정호용(국방장관)ㆍ박재완(청와대 국정기획수석비서관)ㆍ주호영(대구 수성구 갑 국회의원)ㆍ강재섭(한나라당 대표)ㆍ심대평(충남지사)ㆍ윤상현(인천 동구/미추홀구을 국회의원)ㆍ조용기(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ㆍ이미자(가수)ㆍ이문열(소설가)
⑤ "전두환ㆍ노태우"가 징역을 선고받은 것에 대해
"이 광경을 지켜보면서, 이제부터 한국 정치는 원칙도 의리도 없다고 판단하고 크게 실망했다."
⑥ "김활란ㆍ이광수"를 옹호하는 기사를 실어낸 적이 있다.
"이광수ㆍ김성수ㆍ김활란ㆍ모윤숙 등의 공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들의 과오만을 들추어내는 것은 우리 민족성의 하나의 결함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죄인으로 낙인 찍는 일은 삼가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라는 글을 올렸다.
⑦ 안철수 후보 관련
2012.11월, 사퇴한 "안철수 후보"를 가리켜, "만에 하나 18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다고 하여도 임기 중에 암살을 당했거나 아니면 견디다 못해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란 글을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리면서, 또다시 어그로를 끌었다. 2021.02.12일, "9년 전 암살당했을 것"이라고 폄하했던 "안철수"와 함께 유튜브 방송을 진행했다.
3. 생애
아버지 "원남면장 김병두"가 광산업에 손을 댔다가 가산을 모두 말아먹는 바람에, 어린 시절 어머니ㆍ형제들과 함께 "맹산"을 떠나, "평양"으로 옮겨 살았기에 고향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다고 한다. 이때 이후, 아버지와의 연락이 끊어져, 어머니 혼자서 자신을 포함한 4남매를 먹여 살리고 공부를 시키느라 엄청난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 영향 때문인지 아버지를 미워하며, 끝내 자신도 결혼하지 않았다. 1945년, 해방 직전, "교원 자격시험"에 통과, "평남 평원군 괴산국민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그러나 1946.06월, "김일성 정권"이 들어선 후, 신변에 위협을 느껴, 부모와 함께 야음을 틈타 월남했다.
서울에 도착한 그는 "연희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다니던 중, 평소에 존경하던 "백낙준ㆍ함석헌" 등을 쫒아 "역사학과"로 전과했고, 대학 졸업 후, 미국에서 1년 동안 유학을 하고 돌아와, "연세대 전임강사"가 되어 영어를 가르쳤다. 그러나 "미국에서 다시 공부하라"는 "백낙준"의 권유에 따라 다시 미국 유학을 떠났다. 이후 "인디애나 주"에 있는 "에반스빌 대학교 사학과"에서 수학한 뒤, "보스턴 대학교"에서 "링컨"에 관한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연세대 철학과 조교수ㆍ부교수"를 거쳐, 교수로 승진한다. 1962년에는 연세대 교무처 처장을 지냈다. "연세대 교수"로 재임하며, 사회 풍자를 하는 식으로 부패를 비판하였다가 조사를 받고,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유신 시대"에는 "씨알의 소리"라는 잡지에 "내가 만약 대통령이 된다면"이라는 수필을 발표, 대통령이 된다면 부모도 섬기지도 않던 놈들이 청와대에 가서 아부하며, 각하 각하하는 것들을 차라리 모두 잡아다가 서해의 무인도에 보내 "아첨도"라 하겠다고 비판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중앙정보부"에 연행, 고문을 받기도 했다. 출감 후, "소학교 접장하던 사람도 18년째 대통령을 하는데 대학 교수가 대통령을 한다는 것도 아니고 단지 하고 싶다는 마음을 먹은 것이 어찌 죄냐"며, 항변하였다.
1974.04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었다. 혐의는 제자인 "김영준ㆍ김학민" 학생에게 "긴급조치 1호로써 박정희 씨는 스스로 묘혈을 판 것이다"고 말하여 긴급조치를 비방하고, "학생시위를 치밀하고 대담하게 전개하여 박정권을 타도하라"고 격려하여, 내란을 선동하였다는 것이었다. "변호사 한승헌"을 선임했으나, 최종 심문에서 "윤보선(전 대통령)ㆍ지학순(가톨릭 주교)ㆍ박형규(목사)ㆍ김찬국(박사ㆍ상지대 총장)" 등과 함께 배후지원 혐의로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고, "윤보선"을 제외하고는 전부 구속되었으며,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나, 1975.02.15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그는 1심 선고 당일에 항소를 포기하며, "법이 법 같아야지"라는 언급을 하였다. 1975.03.01일,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김동길ㆍ김찬국" 교수의 석방을 환영하는 모임이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열렸다.
1975.09월, "양일동ㆍ백기완"과 함께 "장준하 장례식"을 주관하고, 추도사를 낭독하였다. 그러나 대학에서는 해직되었고, 1979년 "10ㆍ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한 후 일시 복직했다가 신군부의 탄압으로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연루되면서 다시 해직되었다. 이후 "민주화운동"과는 거리를 두고, 정치에 냉소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수필이나 신문칼럼만 간간이 쓰면서 칩거하였다.
1988년 이후부터 방송에 출연하여 강연가 혹은 사회자로 진행하였으며, 사석에서 비평을 하던 중 우발적 발언한 "이게 뭡니까?"라는 발언을 훗날 "최병서"가 풍자하여 한때 세간에서 화제가 되었다. 1954년, 미국 유학을 떠났고, 마친 후 귀국, 강단에 올라 1960년부터 "연세대 전임강사"가 되었다. 1961년부터 "연세대 교수"를 지내며, "고려대 강사"도 1961년부터 이듬해 1962년까지 잠시 겸직한 그는 신랄한 풍자와 해학으로 인하여 학생들로부터 인기 있는 교수였다. 1975년, "장준하 장례식"을 주관하고, 추도사를 낭독하였다. "마광수 교수"와도 친분이 있는데, "마광수"가 왕따를 당해 아플 때 보약을 지어 병문안을 갔다.
지금은 "보수인사"로 유명하지만, 오래전부터 "함석헌"을 몹시 존경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함석헌"이 발행하던 잡지 "씨알의 소리"에 수차례 기고문을 올리기도 하였고, 2017년 경에 여러사람들과 함께 공저로 펴낸 "이 나라에 이런 사람들이"에서는 함석헌에 대하여 "나의 스승"이라고까지 말하며 존경을 표했다.
1984.06월, "정권의 유화조치"로 다른 해직교수들과 함께 대학에 복직하였다. "김영삼계ㆍ김대중계"가 손잡고 창당한 "신한민주당"이 "2ㆍ12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키면서 단숨에 제1야당으로 올라선 직후인 1985.04월, 난데없이 "3김씨는 정치 관두고, 고향가서 낚시나 하라. 이제 민주주의를 위해 40대가 기수노릇을 해야 한다"는 신문칼럼(일명 낚시론ㆍ40대 기수론)을 발표하였다 (한국일보ㆍ1985.04.04ㆍ나의 때는 이미 지났다)
"양 김씨ㆍ민주화세력"이 "관제야당"을 제치고 국민의 지지를 얻어가고 있는 시점에서 군사정권이 아니라, 야당 지도자들을 비판하면서 정계 은퇴를 요구하는 칼럼은 재야ㆍ지식인들의 큰 반발을 사면서 역풍을 맞았다. 이후 "3김정치 청산ㆍ새 정치"를 주장하면서, "태평양시대위원회"를 창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한당 창당"을 준비하다가, 1992년 "정주영(현대그룹 창업주)"이 창당한 "통일국민당"에 최고위원직을 보장받고 합류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당 후보"로 서울 강남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2년, "정주영"이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패배하면서 탈당과 함께 정계은퇴를 선언하자, "통일국민당 대표"가 되었으나, 소속 국회의원이 50% 이상이 탈당하는 등 당이 무너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1994.05월, 남은 사람들을 데리고 "박찬종"이 이끌던 "신정치개혁당"과 합당하여 "신민당"을 창당하였으나, 당권을 놓고 양쪽(김동길ㆍ박찬종) 다 정치깡패를 동원하여 전당대회에서 각목을 휘두르는 난투극을 벌였다. "박찬종계"가 다시 이탈하고 "김동길"은 "신민당"을 장악했으나, 이미지는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1995.01월, "신민당"을 이끌고 "김종필"이 창당한 "자유민주연합"에 합류하였으나, 19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전국구 공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탈당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하였다.
"김대중"이 대통령이 된 이후로는 "반공, 반북" 성향의 인사가 되었다. "국민행동본부" 등이 주최하는 집회에서 자주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우익언론ㆍ각종 인터넷매체에 수시로 칼럼을 게재하였다. 살펴보면, 대략 20년 주기로 정치적 스탠스가 변하고 있었다.
'한국 (근• 현대사) >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인 : 이육사(二六四ㆍ1904)ㆍ민족시인ㆍ광야(曠野)ㆍ청포도 (0) | 2024.04.05 |
---|---|
교수 : 마광수 (1951)ㆍ연세대ㆍ즐거운 사라ㆍ가자 장미여관으로 (2) | 2022.11.09 |
교수 : 김옥길 (1921)ㆍ이화여대 총장(1961~1979)ㆍ김동길 누나 (0) | 2022.11.09 |
인권 운동가 : 2020.06.10일, 6ㆍ10 민주항쟁 (33주년)에서 (0) | 2022.11.08 |
3공 저항 : 박노해 (1957)ㆍ얼굴 없는 시인 (노동의 새벽)ㆍ사노맹결성 (2) | 2022.11.0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