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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물

문인 : 이육사(二六四ㆍ1904)ㆍ민족시인ㆍ광야(曠野)ㆍ청포도

by 당대 제일 2024.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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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은 "이원록(李源祿)"이었으나, 후에 "이육사(二六四)"로 개명했다. 1927"장진홍""조선은행 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고, 당시 수인번호(264)에서 따서 호를 "이육사(二六四)"로  지었다.

1. 이육사 (二六四ㆍ본명 : 이원록(李源祿)1904~1944향년 40)

민족 저항 시인(윤동주한용운과 일제강점기 저항 시인)퇴계 이황의 14대손 ㆍ "이원조(동생좌파 문인북한정권 고위직)" 뿐만 아니라. 그도 사회주의자였다. 생전에 작품집이 발간된 적은 없었고, "이원조"가 광복 후 1946년에 형의 작품집을 발간한다. 그의 시()는 독립운동 지사로서의 강한 의지를 담은 시들이 많지만,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느끼던 인간적인 고뇌를 담은 시들도 존재한다.

 출 생 :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706        • 사 망 : 중국 베이징시 일본 제국 총영사관 교도소 (옥사)        • 아 명 : 이원삼 (李源三)         •  학 력 : 보문의숙(졸업)ㆍ일본 킨죠예비학교(중퇴)ㆍ중국대학(상과 2년 중퇴)         •  소 속 : 의열단         •  종 교 : 유교 (성리학)

•  필 명 : 대구이육사(大邱二六四)육사(肉瀉戮史陸史)이활(李活)         •  저 서(): 광야ㆍ청포도ㆍ꽃ㆍ강 건너간 노래ㆍ자야곡ㆍ황혼절정교목 

 •  처 : 안일양 (1906~ ?ㆍ2 2녀)           가 족 : 이원조(동생ㆍ좌파 문인ㆍ북한정권 고위직)ㆍ독립유공자 "이광호ㆍ이영호" 9촌 삼종숙(三從叔)이고, 그의 시신을 거둔 여성독립유공자 "이병희(의열단에서 활동ㆍ경성트로이카)"는 10촌 친척이며, 여성독립유공자 "이효정(경성트로이카의 핵심인물)"과도 친척이다.

일제 강점기 동안, 수많은 문인들 중 가장 적극적으로 애국독립운동을 한 인물이다그의 경력이 독립운동에 매진한 것으로(옥살이 17) 채워진 덕분으로, "저항 시인"으로서 평가받으며 실제로 1943년부터는 한글 사용에 대해 탄압을 가해오자, "한시"만 쓰는 식으로 붓을 꺾지 않으면서도 저항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윤동주"가 부끄러움반성기독교적 희생을 주로 다루고 있다면, 그의 시는 남성적목가적극한에 서서도 굴하지 않는 의지를 표출하였다고 할 수 있다. 시가 주제가 명확하게 드러난다고 해서 쉽다는 사람도 있지만, 상징적인 시어가 많아 의미 자체를 해석하기 어려워, 그의 시 앞에서는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말까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능에서 "윤동주"와 함께 많이 출제된 작가인데, 그것은 친일 행적이 없기 때문이다.

1943"베이징"으로 건너갔다가 어머니와 큰형의 상을 위해 5월에 귀국했다가, 6"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이듬해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옥사하였다 (대나무로 살점을 떼내는 고문을 받았다고 한다). "이원창(2째 동생)"과 함께 "의열단"에서 활동했던 이병희(독립유공자10촌 친척)"이 그의 유해를 수습하여 "서울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했고, 1960"안동시"에 이장됐다"이원조(동생)"는 좌파 문인으로 활약하다, 해방 후에 북한 정권에서 고위직을 한다. "박헌영"과 더불어 숙청되는데, 여러 이설이 있지만 1955년경 "정치범 수용소"에서 옥사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때문에 그 또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기는 하지만, 해방 이후 북한정부 수립과는 관련이 없는데도 동생 때문에 언급되기도 한다.

2. 사상

동생 "이원조" 뿐만 아니라. 그도 사회주의자였다. 1931년 그는 "김원봉"에 대해 "중국국민당"의 지원을 받음으로써, "중국의 부르주아 계급과 야합하고, 사상이 애매하고 비계급적"이라고 비판했다또한 "코민테른의 11당주의"를 위반하여, "조선인이 중국에서 조선의 혁명사업을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혁명적 정조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1933년 국내에서 발표한 "자연과학과 유물변증법"이라는 글도 그의 이념적 성향을 잘 보여준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졸업식 때 지은 연극 "지하실"에서는 조선에 공산제도가 실현되고, 토지는 국유화되고, 노동자농민이 지배하는 사회가 실현돼, 마지막으로 "조선혁명 성공 만세"를 외치는 내용이어서, 그의 독립운동의 방향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3. 일화

생전에 상당한 주당이었는데, 절친인 "신석초(시인)"에 의하면, "조용히 말술을 마시는 시인이었고, 그럼에도 술에 취해 민폐를 끼치는 일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이옥비 여사(이육사의 딸)"의 증언에 따르면, 1934년 그와 "정치군사간부학교" 1기생 동기인 처남 "안병철(安炳喆)"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잡혀들어간 후 고문을 이기지 못한 자백으로 여러 사람이 체포되어 죽거나 다쳤다. 이 일 때문에 그는 크게 분노해 "안병철"의 뺨을 때린 후 장인과 처삼촌에게 두루마리 6장이나 되는 편지를 보내, 더러운 피의 일족(부인 안일양을 지칭)인 사람을 더는 받아들일 수 없으니 데려가라 전했다 한다. 심지어 그 일 이후 무려 7년 동안이나 본가에 들러도 부모님께 인사만 드리고 잠은 여관에서 잤다고 한다.

4. (): 청포도 (靑葡萄1937)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려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5. (): (曠野1937)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 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6. 생애

어린 시절 대한제국 시기 장릉(章陵) 참봉을 지낸 조부 "이중직"에게서 소학을 배우는 등, 한학을 공부하다가 조부가 별세하던 1916"보문의숙(도산공립보통학교로 개칭)"에서 수학하여, 훗날 창작 활동에서 한학을 배운 흔적이 보인다1920, 가족들이 "대구부 남산정(, 대구 중구 남산동)"으로 이주하였고, 19살 때 영천군의 사립 "백학학원(白鶴學院)"의 교원으로 9개월간 근무하였고, 1924.04"일본 도쿄"에 유학하여 "킨죠(錦城) 예비학교"1년간 다니다가 중퇴하였으며, 1925.08"중국 베이징"으로 유학하여 "중국대학(中國大學) 상과"에 입학하였으나 2학년 때 중퇴하였다.

1927"장진홍(張鎭弘)""조선은행 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고, 출옥 후 1929.05월부터 "중외일보 대구지국 기자"1년간 근무하였는데, 1930.01"이활(李活)"이라는 이름으로 첫 시() """조선일보"에 발표한다이때 "신용호(후에 교보생명 창업자)"에게도 영향을 미쳐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고, 나아가 교육보험사업에 설립하는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1931.08"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전직하였으나, 1932.03월 퇴사하였다. 4"만주국 펑톈"으로 가서 "윤세주(의열단 핵심단원)"를 만나 "의열단" 입단을 권유받고,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난징 소재)"1기로 입교하였다. 이곳에서 "폭탄/탄약/뇌관 등의 제조법/투척법피신법변장법무기운반법" 등을 배웠으며, 권총 사격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전한다.

1933.04월 학교 졸업 후 7월경 귀국하여, "육사(六四)"라는 필명으로 시 "황혼(黃昏)""신조선(新朝鮮)"에 발표하여 시단에 데뷔했다. 신문사잡지사를 전전하면서, 시작 외에 논문시나리오까지 손을 댔고, "고향(故鄕루쉰의 소설)"을 번역하였다. 그러나 1934.03, "의열단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출신자"라는 이유로 "경성부 본정경찰서"에 검거된 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1937, "윤곤강김광균"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 그 무렵 유명한 "청포도"를 비롯하여, "교목(喬木)ㆍ절(絶頂)광야(曠野)" 등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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