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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고대 • 불가사의 (7대) • 로마 • 신화

7대 불가사의 (고대) ④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神殿)

by 당대 제일 2023.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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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神殿)"은 소아시아의 그리스인 식민지 "에페소스"에 있던 "여신 아르테미스"를 모신 신전으로, 신전은 처녀ㆍ정절ㆍ다산ㆍ풍요를 가져다주는 여신인 "아르테미스"를 모시기 위해, "에베소" 사람들이 범국민적으로 건설하고, 복원하고, 유지해왔던 것이다.  또한 그녀는 "달의 신"으로 "출산"을 관장하고, "풍요"를 가져다주는 여신으로, "에베소"만이 아니라 "소아시아ㆍ그리스ㆍ로마"에서도 숭배되었던 신이다.

 

1.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神殿)

에페소스(Ephesusㆍ성서에서는 에페소/에베에게 해 연안에 위치(터키)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 의해 BC 9C에 건립된 식민도시다.

"신화"에 의하면, "아르테미스"는 선녀처럼 "아름다움ㆍ성스러움"을 함께 지닌 여신이다. 그녀는 골짜기에 활을 메고 수렵을 다니다가, 지치면 샘에 와서 반짝이는 물에다 청순한 처녀의 몸을 씻곤 했는데, 어느 날 그녀가 목욕을 마치고, 몸단장을 하고 있을 때, 지나가던 "악타이온"이 이것을 보자 그녀를 "사슴"으로 만들어, 동료 사냥꾼들이 이끌고 왔던 개들에게 갈기갈기 찢겨 목숨이 끊어지게 했다고 전해진다.

2. BC 8C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건립자는 "크로이소스"다. 

규모 : 바닥면 55 x 115mㆍ기둥 수 127개ㆍ건축 양식 : 이오니아 양식

신전은 높이 20m 정도의 "백색 대리석"을 깎아, 127개의 기둥을 "이오니아식"으로 세우고, 지붕을 이어 만들어졌다  "에베소"인들은 "파르테논 신전"이 높이 10m, 대리석 기둥 58개 사용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높이 18m짜리 기둥을 127개 사용하였고, 길이ㆍ폭도 "파르테논 신전"의 2배 정도로 만들었다.  건축 자재는 가장 순도가 높은 "백색 대리석"만을 사용했으며, "대리석 계단"을 사방으로 내서, 중앙의 홀로 올라가게 만들었다.

"소아시아 에베소 시의 아르테미스 신전"은 BC 6C 중엽,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 (BC 595~547?BC 560년부터 "리디아"의 마지막 왕BC 547"페르시아 제국"에게 전쟁을 일으켰다가 패하여 떠돌이가 됨)" 때부터 세우기 시작하여 120년이 걸려 완성되었다. 이것이 세워지고 난 후, "헤로도투스(그리스 역사가)"가 이곳을 방문하고 "이집트의 피라미드ㆍ모에리스의 라비린토스" 등 세계적인 걸작에 전혀 손색이 없는, 위대한 걸작으로 높이 평가한 바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BC 356년 10월, "헤로스트라투스"라는 자가 후세에까지도 유명해질 수 있는 일을 찾다가 고의적으로 이 신전에 불을 질렀다. "신전"이 불타버리자, "디나크라테스"는 재건에 바로 착수했는데, 이때 "에베소"에 살고 있는 여인들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보석 등의 귀금속을 팔았고, 각지의 "왕"들은 기둥을 기증하기도 하였다. 특히 "아시아"로 원정을 떠나던 "알렉산더 대왕"은 완성 중이던 이 "신전"에 마음이 빼앗겨, 자기의 이름으로 신전을 세워준다면, 모든 비용을 대겠다고 공언했으나, "이방인의 신전을 에베소에 세울 수는 없다"고 거절했다. "에베소"인들은 "아르테미스 신전복구 사업"을 국가적인 대사업으로 삼고, 그 당시 가장 훌륭한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2배나 더 크고, 빼어난 신전으로 만들려고 했다.

이 "신전"이 BC 250년경에 완성되자, 곧바로 전 세계에 규모와 화려함이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에베소 시"는 "아르테미스 신전"과 더불어, 시가지의 건축물들이 대부분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도시 전체를 둘러싸고 있었던 "성벽"으로도 유명하여, 관광 명소가 되었다. "에베소 항구"에는 관광객들을 태운 배들과 교역을 위한 상인들로 넘쳤다. 그런데 화려한 "신전"이 세워지고, 영화를 누리게 된 "에베소 시"에 "기독교"의 물결이 밀려들어 왔다.

"우상 숭배"를 금했던 "초기 기독교인"들의 눈에는 "에베소의 아르테미스 신전"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행태는 자신들의 교의에 근본적으로 위배되는 것이었다. "요한 계시록 2장"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경고의 편지로 첫사랑을 버린 것을 반성하고, 처음 하던 일을 다시 하지 않으면, 촛대를 그 자리에서 치워버리겠다고 적고 있다. "사도 바울도" 이곳에서 우상 숭배를 하지 말 것을 권유하면서, "에베소" 사람들과 있었던 충돌에 대하여 적고 있다. 형상화된 "신의 이미지"를 숭상했던 문화와 "내면의 신성"을 표현하려고 했던 문화가 서로 마찰을 일으켰으나 "아르테미스 신전"은 건재했고, "기독교"는 "소아시아ㆍ유럽"으로 전파되어 갔다. "기독교도"와의 충돌에서도 "에베소" 인들은 "아르테미스 신전"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신전"은 AD 260~268년, "유럽"에서 "아시아"로 이동해 온 "고트인"들에 의해 약탈되었고, 이때 방화로 철저히 파괴되었다. 

"에베소 신전"은 화려한 영광에 대한 기억과 거대한 대리석들의 잔해를 남겼다. 사람들은 "신전"의 잔해들을 주우려고 이곳으로 왔다. "신전"에 서 있는 돌이란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자, "폐허" 위에는 먼지ㆍ흙이 쌓이게 되었고, 마침내 땅 밑으로 깊숙이 들어가게 되자, 마을 사람들도 신전이 어디에 있었는지 아는 사람들이 없게 되어 버렸다. 마을의 어떤 곳이 과거에 아름다움과 영광을 가져다주었던 "신전"이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는 상태는 1863년 "와트(영국 고고학자)"가 발굴에 착수하기까지 1600년 동안 지속되었다. "와트"는 과거의 역사서ㆍ지리서ㆍ철학서를 가지고 이를 고증하였고, "신전"에서 발굴한 유물을 가지고 상당히 정확하게 신전 본래의 모습을 복원했다고 한다.

3. 알렉산더 대왕 (Alexandros): 재위- BC 336~323(14년)ㆍBC 356~323 : 33세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그리스ㆍ페르시아ㆍ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대왕"필립포스 2세와 올림피아스"의 아들로서, "알렉산더 대왕알렉산드로스 3"라고도 한다탄생에 관해서는, "플루타르코스(영웅전 작가ㆍ그리스 작가)가, "올림피아스가 벼락이 배에 떨어지는 꿈을 꾸고 임신하였다"거나, "필립포스가 아내의 곁에 있는 뱀을 보았다" 등의 전설적인 이야기를 전한다.

자기가 정복한 땅에 "알렉산드리아"라고 이름 지은 도시를 70개나 건설하였다고 한다. 이 도시들은 "그리스 문화 동점(東漸)"의 거점이 되었고, "헬레니즘 문화"의 형성에 큰 구실을 하였다. 문화사적 업적은 "유럽ㆍ아시아ㆍ아프리카"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여, "그리스 문화ㆍ오리엔트 문화"를 융합시킨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를 이룩한 데 있다. "알렉산더 대왕" 사후, "그리스(마케도니아)ㆍ시리아(셀레우코스 제국)ㆍ이집트(프톨레마이오스 제국)"의 3개 나라로 갈라졌다.

당시의 대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펠라(마케도니아 수도)"의 궁정에 초빙되어, 3년동안 그에게 "윤리학ㆍ철학ㆍ문학ㆍ정치학ㆍ자연과학ㆍ의학"등을 가르쳤다. 그는 "호메로스 시"를 애독하여, 원정 때도 그 책을 지니고 다녔으며, 학자를 대동하여 각지의 "탐험ㆍ측량 등을 시킨 일ㆍ변함없이 그리스 문화를 숭앙한 일" 등은 스승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또한, "부왕"으로부터는 "전술ㆍ행정" 등의 실제적인 일을 배웠고, BC 338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 직접 참가하였고, "부왕"이 암살되자, 군대의 추대를 받아, 20세의 젊은 나이로 "왕"이 되어, "그리스" 도시의 대표자 회의를 열고, 아버지와 같이 "헬라스 연맹의 맹주"로 뽑혔다.

때마침 "마케도니아"의 북방에 "만족(蠻族)"이 침입하고, 서방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친정하였는데, 이 싸움에서 "그가 전사하였다"는 소문이 퍼지자, 온 "그리스"가 동요하고, "테베"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즉시 "테베"를 토벌하고, "테베 시(市)"의 전 시민을 노예로 팔아버렸다. BC 334년, "마케도니아 군ㆍ헬라스 연맹 군"을 거느리고, "페르시아 원정"을 위해 "소아시아"로 건너갔다. 먼저 "그라니코스 강변"에서 "페르시아 군"과 싸워 승리하고,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있던 "그리스"의 여러 도시를 해방하였으며, "사르디스" 그 밖의 땅을 점령한 뒤, "북 시리아"를 공략하였다.

BC 333년, "킬리키아의 이수스 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의 군대를 대파하였으며, 이어 "페르시아" 함대의 근거지인 "티루스(티로스)ㆍ가자" 등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시리아ㆍ페니키아"를 정복한 다음, "이집트"를 공략하였다. "이집트"에서는 "나일 강 하구"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 시"를 건설하고 1,000km가 넘는 사막을 거쳐 "아몬 신전"에 참배하였다. 여기서 "신(神)의 아들"이라는 "신탁(神託)"을 받았는데, 이후로 그는 "만인동포관(萬人同胞觀)"을 지니게 되었다.

BC 330년, 다시 군대를 돌려, "메소포타미아"로 가서, "가우가멜라"에서 3번이나 "페르시아 군"과 싸워 대승하였다. 이때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는 도주하였으나, 신하인 "베소스"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알렉산더"는 계속하여, "바빌론ㆍ수사ㆍ페르세폴리스ㆍ엑바타나" 등의 여러 도시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여기서 "마케도니아 군ㆍ그리스 군" 중에서 지원자만을 거느리고, 다시 동쪽으로 원정하여, "이란 고원"을 정복한 뒤, "인도 인더스 강"에 이르렀다. 그러나 군사 중에 열병이 퍼지고, 장마가 계속되었으므로, 군대를 돌려 BC 324년 "페르세폴리스"에 되돌아왔다. BC 323년, "바빌론"에 돌아와서 "아라비아 원정"을 준비하던 중, 33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죽었다.

4. 마케도니아 (Macedonia)

"발칸반도"의 중부, "그리스ㆍ불가리아ㆍ마케도니아"의 3국에 걸친 지역, 원주민은 "일리리아 트라키아 인"이다. BC 5C, "마케도니아 왕국"이 일어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헬레니즘 제국"으로 발전하였으나, 그가 죽자, 곧 붕괴하였다. BC 2C부터는 "로마제국의 속주(屬州)"가 되고, 4C부터는 "비잔틴 제국의 속주"가 되었다. 6~7C에는 "발칸"을 향한 "슬라브 민족"의 대이동이 있었으며, 그들이 새로 세운 "불가리아 왕국ㆍ세르비아 왕국"이 번영하면서, "봉건적 토지소유 제도"가 발달하였다.

그러나 14C 말, "터키 제국"이 융성해진 후로는 그 영토가 되었으며, 그 후 약 500년간의 강제적인 동화정책(이슬람 화)으로 경제ㆍ문화가 황폐해졌다. 그러나 근대(특히 19C)에 들어와, 여러 "발칸민족의 해방운동"이 활발해지고, 열강(러시아ㆍ오스트리아ㆍ영국)의 "동방정책"이 이와 얽힘으로써, 국제적으로 복잡 미묘한 "마케도니아 문제"가 발생하였으며, "발칸전쟁(1912~1913)"으로 그 절정에 달하였다.

이리하여 "마케도니아"는 마침내 "터키"로부터 해방되었으나, 이번에는 열강이 조종하는 "발칸동맹"의 3국(그리스ㆍ불가리아ㆍ세르비아)"로 분할되었다.  그 후 "3국간"에도 국경분쟁이 끊이지 않았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불가리아"가 전 국토를 일시 병합하였으나, 1947년 "파리조약"으로 전전상태로 복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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