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이승만ㆍ김구ㆍ박정희ㆍ정당

1 공화국 ③ 민주당- 신파ㆍ구파 갈등 (진보정당)

by 당대 제일 2022. 10. 5.
반응형

 

"진보주의"는 "마르크스주의ㆍ민주사회주의ㆍ사회민주주의ㆍ좌익 내셔널리즘" 등 다양한 진보적 사조에 기초한 진보적 정치운동을 말한다. 해방 직후, "사회민주주의ㆍ공산주의" 등 수많은 사상을 지향하는 집단으로 퍼져 있었으나, 정부수립을 주도한 세력의 탄압과 한국전쟁의 영향으로 사실상 소멸하였다. 이후의 "진보주의"는 1970년대 "통일운동"을 주축으로 등장하였고, 1980년대에는 "마르크스주의" 영향을 받은 학생운동(민족 해방ㆍ민중 민주)의 형태로 등장하였다.

 

1. 민주당 (民主黨Democratic Party)

① "민주당"의 기원은 "한국 민주당(韓國民主黨ㆍKorea Democratic Party)"에서부터 시작된다.

"한민당"은 1945.09.16일에 결성되어, 정부수립 후에도 존속하다가, 1949.02.10일 발전적으로 해체, "민주국민당(민국당)"으로 개편되었고, 그 이후부터 "민국당"은 원내 야당으로 활동하다가 역시 발전적으로 해체, 1955.09.28일 "민주당"으로 개편되었다. 1955년, "자유당의 사사오입개헌 사건"을 계기로, "반이승만 세력 (민주국민당 보수파ㆍ자유당 탈당파ㆍ흥사단 등)"이 모여, 1955.09.18일에 창당되었다.

1956년, 대선후보 선출 전, "곽상훈 의원"의 중개로, 대통령 후보에 "신익희", 부통령 후보에 "장면"을 내세워, "제3대 정ㆍ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신익희"는 선거 직전에 사망했고, "장면"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0년, "4ㆍ19혁명"에 의해, "이승만 정권"의 퇴진 직후에 실시한 1960.07.29일 총선에서 크게 승리하여, "윤보선 대통령ㆍ장면 국무총리"를 선출하여, "제2공화국"의 여당이 되었다.

그러나 구파ㆍ신파간의 분당ㆍ당내 분열 등으로 혼란을 겪다가, 1960.11월에 "민주당"을 탈당한 "구파세력"이 "신민당"을 창당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1961년에 발생한 "5ㆍ16군사정변" 직후, 군부에 의해서 해산되었다.

② 이들 "신파ㆍ구파"의 대립이 노골화된 것은 1960.08월, "제2공화국 제1차 내각"을 구성할 때였다.

  즉, 상징적인 의미의 "대통령"에 선출된 "구파 영수 윤보선"이 "김도연 (부영수격)"을 국무총리로 지명하자, "신파" 의원들은 묵계 하에 단합투표로 "총리지명 인준안"을 부결시켰다. 이에 "윤보선"은 마지못해 "장면(신파의 지도자)"를 총리로 지명했고, 국무총리가 된 "장면"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으로, 내각각료들을 "구파" 출신 1명ㆍ무소속 2명을 제외하고, "신파" 일색으로 임명함으로써 내부대립을 격화시켰다.

"장면 총리"의 이러한 처사에 격분한 "구파"가 "민주당"을 분당시킬 태세를 취하자, "장면"은 타협안을 제시하여 무마하려 했으나, 끝내 "김도연"을 비롯한 "구파"가 "민주당"을 이탈, 12.14일 "신민당(新民黨)"을 창당함으로써, "신ㆍ구파"의 알력은 분당사태로 결말나고 말았다.

③ "민주당 신ㆍ구파"의 뿌리는 깊고도 오래되어, "이승만 정권" 때부터 있어왔다. 

1945년 해방 이후, "여운형"이 이끄는 "좌파 계열"이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정국의 주도권을 잡아가고, "박헌영의 공산당"이 크게 세력을 떨치자, 이에 대항한 국내의 우파인사들은 "한국 민주당"을 결성한다. 당시 "한국민주당"은 대부분 "국내 민족주의 세력"이었는데, 원래 일제시대에 "국내 우파민족주의 세력"이라는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친일 지주ㆍ친일 엘리트"가 중심이 되는(당시 사회에서는 지도층이지만, 친일 관련해서는 명분이 없는 세력)형태가 되었다.

"한민당"은 자체적 명분이 없었으므로, "좌파"에 대항하는 논리로, "상해 임시정부"를 법통으로 내세우며, "김구ㆍ이승만"을 추대했다.그러나 "김구"가 귀국하고 나서 "미군정"과 대립을 보이자, "한국민주당"은 "임정"을 버리고, "이승만"과 제휴했다.  그리하여 "한민당"은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여, 정부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승만"을 허수아비로 세우고 스스로 정권을 잡고자, "제헌헌법"을 "내각책임제"로 발의하였으나, "이승만"의 반대로 "대통령제"로 바뀌었다. 이에 지지기반의 문제를 느낀 "이승만"은 차츰 "한민당"을 버리고 "자유당"을 결성하여, 친위정당을 만들었고, "한민당"은 분열하여, "민주국민당" 등 여러 정당으로 나뉘게 되었다.

1955년, "이승만"이 "사사오입 개헌"을 단행하여, 영구집권의 길을 트자, 이에 크게 반발한 야당세력은 난립했던 정당을 통합하여 (민주국민당과 대한민주당(신익희) 중심의 통합) 단일 거대야당을 만드니 그것이 "민주당"이었다. "민주당"은 이때부터 주로 "한민당" 계열의 "구파"와 이후 잡다한 세력에서 합류한 "신파"가 나뉘어 사사건건 계파대립을 보이게 되었다.

④ 민주당 변천

• 1960 (신민당): 민주당 "구파"가 분당하여, 1960.12.14일 창당ㆍ윤보선은 개입하지 않았음ㆍ신민당 내분과 당내 입지조건이 불리하여, "무정파"로 활동

• 1963 (민정당): "박정희"에 대항하기위해 창당, 1963.06.28일 등록ㆍ대표 : 김병로 → 윤보선(63.09.15)ㆍ1963.11월 : 자유민주당을 흡수ㆍ1965.05월 : 민주당과 함께 민중당을 신설ㆍ합당하여 소멸

• 1966 (신한당): 1966.03.30일, 한일기본조약에 대한 입장 차이로 윤보선등 강경파가 독립하여 창당 → 1971년 김대중이 대통령 후보가 되자, 윤보선이 불만, 탈당하여 국민당 창당

• 1971 (국민당): 1971.01.06일, 김대중이 신민당의 대통령후보로 결정되자 이에 반발→ 민주당 구파 계열 윤보선ㆍ박기출 등을 중심으로 창당→ 1972년 유신헌법으로 해산되고, 신민당에 흡수

2.  신파구파의 갈등

신파 구파

1960"419혁명" 이후, "민주당"이 대거 당선되어 국회를 거의 독점하게 되어 독재가 가능한 상황에 이르렀다. "내각책임제"에서 거의 대등한 세력인 "구파"의 대립은 정국을 혼미에 빠지게 하였고 정부정책의 효율적 추진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원래 국회에서는 "구파"가 약간 우세한 상황이었으나 지나친 욕심을 부리다 실패하여, "총리 직""장면(신파)"에게 넘겨주었고, "장면 총리" 취임 이후에 이를 억울하게 여겨 사사건건 정부의 행위를 물고 늘어지며, 괴롭히는 작태를 보였다.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당"이 의회의 절대다수 의석을 차지, 집권당이 되면서 곧바로 표면화되었다. "신파구파"는 출신배경정치적 성향에서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구파""민국당(민주당의 전신)"을 이루던 이른바 정통야당 인사들로 이루어진 데 비해, "신파"는 무소속자유당 출신의 신참 인사들의 정파였다"민국당""한민당"과 상해 임시정부 계열의 인사들이 연합결성한 정당이었던 만큼 "구파"에는 지주출신이 많은 데 비해, "신파"에는 관료출신이 많았다.

"신파"의 핵심세력은 "장면"을 중심으로 한 "흥사단계 인사들"로서, 이들은 주로 "평양"출신이었으며 과거 "미국"에 오래 거주하여, 친미적 성향이 강했다.

2.  한국 정당 변천사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