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선/인물 • 악녀 (10인) • 부덕 (6인)

화가 : 김홍도 (정조ㆍ1745?~1806?)ㆍ풍속화(민중의 삶)의 대가

by 당대 제일 2022. 11. 21.
반응형

 

"김홍도 (金弘道ㆍ1745?~ 1806?ㆍ61세)"는 중인 집안 출신으로, 조선 후기(정조) 문예부흥기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조선화단 3대 거장"은 "단원 김홍도(金弘道)ㆍ안견(安堅)ㆍ오원 장승업(張承業)"를 말하고, "조선 4대 풍속화가"는 "단원 김홍도(檀園)ㆍ혜원 신윤복(蕙園)ㆍ오원 장승업(吾園)ㆍ긍재 김득신(兢齋)"을 말한다.

 

1. 김홍도 (金弘道1745?~1806?향년 61)

1784(39)부터, "단원(檀園)"이라는 "관서"를 사용하였다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는 그의 호인 "단원"을 따온 이름이다.

: 단원(檀園)단구(丹邱)서호(西湖)고면거사(高眠居士)취화사(醉畵士)첩취옹(輒醉翁) : "단원(檀園)""명나라"의 문인화가 "단원 이유방(李琉芳, 1575~1629)의 호"를 그대로 따온 것이고, "단로(檀老)단옹(檀翁)"이라는 호는 모두 "단원"을 응용한 노년 무렵의 호다.

가 족 :  - 김석무(金錫武) / 증조부- 김진창(金震昌) "만호 벼슬을 지냈다"는 기록이 전하는 것을 보면, 본래 "무반"이었던 듯하나, "김홍도"가 태어날 무렵에는 "중인 집안"이었다.

문 집 : 단원유묵(아들 김양기(화원)이 출판)- 그림만 그린 것이 아니고, ""도 썼음.

작 품 : 신선도병풍풍속화첩투견도소림명월도ㆍ무예도보통지- 실린 삽화각 무예 과정마다 그림을 덧붙여 이해를 도우려 했다 (정조의 명으로 간행된 책의 그림이므로, 정조의 명으로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 신선도- 신선도군선도선동취적생황을 부는 신선  /  인물화- 서원아집도평생도 / 풍속화(민중의 삶)- 무동(舞童, 춤추는 아이)서당씨름타작우물가나룻배

김홍도1

"산수화, 풍속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화가였지만, "고사 인물화신선도화조화불화" 등 모든 분야에서 독창적인 회화를 구축한 화가이기도 하다"그림"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했으며, 배경은 "은은한 먹"으로 강조하였다.(수묵채색화조금 짙은 ""으로 그린 뒤, 거기에다 나무바위 등을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가볍게 점을 찍었다.

"김응환"에게 사사했으나, 강렬한 개성으로 독특한 경지를 개척하여, 한국적인 풍토 감각을 잘 표현했다"풍속화"에서는 "해학과 풍자"를 조화하여, 서민적인 풍취도 그렸고, "채색의 농담(濃淡)"으로 형체의 원근고저를 표현하기도 했다당시 "화단"에 고착된 "중국 북화(北畵)"양식을 탈피하여, 대담하게 "남화 양식"을 시도해서 신선한 조형미를 완성했다주로 "어명고관 명양반 청탁"을 받아 그림을 그렸지만, 한편으로는 "양반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한 "상민중인천민" 등 일반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그린 "풍속화가"로 유명하다.

김홍도2

"영조" 말년, "세손(정조)의 초상화"를 제작한 것을 계기로, 자신의 재능을 알아본 "정조"로부터 많은 배려와 관심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1773(영조 49), 29세의 나이로 영조 "어진왕세손 이산"의 초상화 제작에 "동참화사"로 참여하여 그렸다고 생각되는 것인데, 이것은 "화원"으로서의 재능이 여간 인정받지 않고서는 하기 어렵고, 만큼 명예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1781(정조5), "어진화사(御眞畵師)"로서 "정조의 초상화"를 그렸다.

1795(51), "남의 중매나 일삼으면서, 백성을 학대했다.""충청 위유사 홍대협"의 보고로 만 3 만에 파직, 연풍 현감"에서 해임되어, "한양"으로 올라온 그는 다시 "화원"으로 활동하였다1800, "정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한데다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그와 교류하던 후원자인 "김한태"도 별세하여, 후원자를 모두 잃고, 생활이 어려워졌다많은 그림을 그렸고, "당대 최고의 화가"로 이름이 높았지만, 그의 삶은 어려웠고, 건강이 좋지 않았다.

""이 부족했을 정도로 가난했던 적도 있지만, 생활에 크게 구애받는 성격은 아니었다"호산외사- 조희룡 저"는 이런 "김홍도"의 모습을 전해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집이 가난하여 더러는 끼니를 잇지 못하였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매화 한 그루를 파는데, 아주 기이한 것이었다 돈이 없어 그것을 살 수 없었는데, 때마침 돈 3,000을 보내주는 자가 있었다 그림을 요구하는 돈이었다. 이에 그중에서 2,000을 떼 내어 매화를 사고, 800으로 술 두어 말을 사다가, 동인들을 모아 매화음(梅花飮)을 마련하고, 나머지 200으로 쌀과 땔나무를 사니, 하루의 계책도 못 되었다."

2. "정조"와 관계

"호산외사- 조희룡 저", "정조 때에는 화원의 공봉(供奉)으로 관내에서 그림을 그려 올릴 때마다 매번 칭찬을 받고, 곧 왕지(王旨)에 맞았다."거나, "임금께서 금강산 사군(四郡)의 산수를 김홍도에게 그리라고 명하고, 관용으로 조석(朝夕)을 받들게 하니, 이는 이수(異數)의 대접이었다."라는 기록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으며, 일찍이 "화단"에 자신의 이름을 날렸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정조"는 자신의 문집인 "홍재전서"에서 "김홍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김홍도는 그림에 솜씨 있는 자로서 그 이름을 안지가 오래다. 30년쯤 전에 나의 초상을 그렸는데, 이로부터 무릇 그림에 관한 일은 모두 홍도를 시켜 주관케 하였다." < 정조의 어제문집, "홍재전서","삼가 주자 선생의 시에 화운함", 시의 말미에 첨부된 협주(夾註) >

3. 교우 관계

매우 폭넓은 사람들과 다양한 교류를 했고, 이를 통해 "그림"을 그리는 것 외에도 "문학철학음악" 다방면의 소양을 닦아, 화가로서의 성장에 큰 도움을 받았다교류한 인물들의 가장 큰 특징은 "남인중서인 출신 문사"들과의 교류가 많았다는 점이다.

"남인"들 중, 스승이 되어준 "강세황", "문단"의 지도자 "이용휴정범조정란" 등과 많은 교류를 했는데, 이들은 "전기 김홍도"의 성장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중서인"으로는 "홍신유"와 같은 "여항 문인"들과 "연암 박지원" 같은 "북학파 문인"들이 있다"남인여항 문인북학파"의 사실적 문학이론은 당대의 시대적 풍조를 형성한 동시에, "김홍도""풍속화진경산수"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4. 멘토 : 강세황 (姜世晃문신서화가평론가1713~179178)

"강세황""()()()"에 능했으며, 당시 "최고의 감식안"으로서 "김홍도"의 화업에 많은 도움과 영향을 주었다"강세황""정조"의 신임을 두텁게 받아, "김홍도""정조의 어진(御瞋)"을 제작하는 명예를 누리도록 해주었는데, 이것은 "화원"으로서, 최고의 영광을 누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또한 "강세황"은 말년에 이르러, 김홍도를 가리켜 "우리나라 금세(今世)의 신필(神筆)"이라고 극찬하고 "화제(畵題)"를 써주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의 관계가 매우 밀접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강세황""김홍도"의 재능을 이렇게 칭찬한다"단원은 어릴 적부터 그림을 공부하여, 못하는 것이 없었다 인물산수신선불화꽃과 과일새와 벌레물고기와 게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묘품(妙品)에 해당되어 옛사람과 비교할지라도 그와 대항할 사람이 거의 없었다 특히 신선과 화조를 잘하여 그것만 가지고도 한 세대를 울리며 후대에까지 전하기에 충분했다 또 우리나라 인물과 풍속을 잘 그려내어 공부하는 선비시장에 가는 장사꾼나그네규방농부 누에치는 여자이중으로 된 가옥겹으로 난 문거친 산들의 나무 등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를 꼭 닮게 그려서, 모양이 틀리는 것이 없으니, 옛적에는 이런 솜씨는 없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은 대체로 천과 종이에 그려진 것을 보고 배우고 익혀서, 공력을 쌓아야 비로소 비슷하게 할 수 있는데, 단원은 독창적으로 스스로 알아내어, 교묘하게 자연의 조화를 빼앗을 수 있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천부적인 소질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지 않고서는 될 수 없는 일이다."

당시의 "화원 세계"는 무척 폐쇄적이었다그런데 "김홍도"의 가계로 보면, 집안에는 "화원"이나 "사자관(寫字官)" 출신이 없다따라서 그가 어떻게 "강세황"과 교제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진다그러나 "화사양가보록(畵寫兩家譜錄)"을 참고하면, 부친 "김석무(金錫武)"의 장인, "김홍도"의 외조부는 "장필주(張弼周)"이다.

그가 속한 "인동 장씨" 집안은 대대로 "화원"을 낸 "화원사회"명문거족이므로, 그는 "외가"에 드나들다가, 자신의 "화재(畵才)"가 돋보여, "강세황"을 비롯한 "화원세계" 소개된 것으로 보인다"강세황"의 지도를 받으며, 성장한 그는 20대 때부터, 이미 "화명(畵名)이 높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5. 생 애

그의 "유년 시절"은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김홍도 관련 문헌인 "근역서화징- 오세창 저"속에 들어있는 "호산외사"에도 가장 중요한 김홍도의 생부모형제 관계본처자녀 관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강세황"이 지은 "단원기(檀園記)"에만 "김홍도"가 젖니를 갈 나이 때부터, "강세황"의 집에 자주 드나들면서, 화법(畵法)을 배웠다고 한다.

이렇게 "김홍도"의 유년시절이 베일에 가려진 것은 "호산외사"를 저술한 "조희룡(趙熙龍)""김홍도" 평소에 숭배한 나머지, 상세한 사실은 의식적으로 기록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며, 이러한 일들은 "김홍도"의 출신 성분이 "중인"이라는 점과 관련 있어 보이는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그는 "영조의 어진"을 그린 공으로, 1773"장원서(掌苑署) 별제(別提)"로 임명되며, 30세 되던 해인 1774년에는 왕실 소유의 "원포(園圃)"와 채소재배를 관장하는 "사포서(司圃署)"에서 "6"의 관직인 "별제(別提)"로 임명받게 된다1776, 왕세손이 "영조"를 이어 "정조"로 보위에 오르자, 정조에게 "규장각도"를 바쳤다1781(정조5), "어진화사(御眞畵師)""정조 초상화"를 그렸고, 이 공으로 "와서(瓦署) 별제" 임명된다.

6. 1784(40) 부터, "단원 (檀園)"이라는 "관서"를 사용

후기 작품의 시작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1784(40세 되던 해)에 그린 "단원도"이다이때부터 "단원"이라는 "관서"를 사용하기 시작했다"중인""김홍도""명나라의 문인화가 이유방의 호"를 자신의 ""로 삼은 것은, 후기의 그의 새로운 심적 상태를 반영한 것이다.

1784, "경상도 안동의 안기역(安奇驛) 찰방(察訪)"이 되어, 25개월 간 근무하였다1790, "정조""영조"와의 정치적인 대립으로 죽은 "사도세자"를 위해 지은 사찰인 "용주사 대웅전" "운연법"으로 입체감을 살린 "삼세여래후불 탱화"를 그렸다.

1791, "충청도 연풍""현감"으로 임명되었다"연풍"에서 "현감"으로 일한 경험은 그가 민중들의 삶을 "중국"의 영향을 받는 대신, 자신만의 개성으로 그려내는 중요한 기회가 되었다1796, "용주사 부모은중경"의 삽화, 1797년에는 정부에서 찍은 "오륜행실도"의 삽화를 그렸다.

1795(51), "남의 중매나 일삼으면서, 백성을 학대했다.""충청 위유사 홍대협"의 보고로 만 3 만에 파직됐다"연풍 현감"에서 해임되어, "한양"으로 올라온 그는 다시 "화원"으로 활동하였다그 후, 50대의 나이로 관직생활 이후, 자신의 독특한 화풍을 정립해가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벌이게 된다이 시기에 그는 "도화서"의 공적인 일 이외에, 사적인 "주문"에 의한 작품도 활발하게 하였고, 부드럽고 서정적인 필치로 그린 그의 작품은 인간적으로나, 화가로서나, 원숙한 모습을 보여준다.

"김홍도"가 정확히 몇 년에 사망했는지는 전하지 않는다1805.12월에 쓴 편지가 전하고, 이후 행적과 작품이 일절 전하지 않아, 1805년이나 1806년 사망하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그의 아들 "김양기"도 아버지를 이어, "화원"이 되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