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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건ㆍ전쟁ㆍ혁명ㆍ학살

혁명- 1959 : 쿠바 혁명ㆍ체 게바라 (쿠바의 두뇌ㆍ아바나 백작)

by 당대 제일 2023.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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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Che Guevara스페인어1928~1967향년 39세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라는 애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쿠바의 두뇌아바나 백작"라 불렸다. (현재 쿠바의 3페소 지폐에서 그의 초상을 볼 수 있다) "짐 피츠(Jim Fitzpatrick)"의 "체 게바라" 초상화가 유명하다. 그는  쿠바혁명 게릴라 지도자ㆍ공산주의 혁명가(아르헨티나 출신)ㆍ남아메리카의 게릴라 지도자ㆍ혁명 이론가ㆍ1960년대 좌익급진주의자들의 영웅ㆍ정치가ㆍ의사ㆍ저술가이다.  (체 게바라의 유언 : 알아두어라. 너는 지금 사람을 죽이고 있다)

 

1. 체 게바라 (Che Guevaraㆍ1928~1967ㆍ향년 39세)

"쿠바 혁명"을 완수한 뒤, "볼리비아"로 건너가 억압받는 "라틴 아메리카 원주민"을 해방시키는 전쟁을 시작했지만, 1967년 용병들의 "매복 기습"을 당해 붙잡힌 뒤, 처형당했다. 그의 유해는 30년이 지난 뒤에야 전문가들 팀에 의해 발굴, 확인된 뒤, "쿠바"로 귀환됐다. "제3세계"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에 강력하게 저항하면서, "카스트로 정권"의 "반미ㆍ친공 노선"을 열렬히 옹호하였다.

국 적 : 아르헨티나ㆍ쿠바            애 칭 : 체 게바라 (Che Guevara)            본 명 :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 (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            별 칭 : 아바나 백작쿠바의 두뇌푸세(Furibundo de la Serna)

출 생 : 산타페 로사리오(Rosario) 아르헨티나            사 인 : 총살 (시체는 30년 후, 볼리비아에서 발굴되어, 쿠바에 안장)            사 망 : 피살지: 라 이게라(La Higuera) 볼리비아 / 암매장지 : 바예그란데(Vallegrande)볼리비아            체 게바라의 길 : 이게라~ 바예그란데를 잇는 62km 구간            학 력 :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직 업 : 의사혁명가 종교 : 무신론 정당 : 쿠바 공산당

 처 : 1째- 일다 가데아(이혼ㆍ여성운동가ㆍ페루)- 1녀(이루디다)  /  2째- 알레이다 마르치 데 라 토레이다- 4명의 자녀  /  자 녀 : 5명 (딸- 이루디다ㆍ알레이다)            경 력 : 1959.11~ 1961.02 - 쿠바 국립중앙은행 총재 1961.02- 쿠바 산업부장관1962- 쿠바통일혁명조직 전국지도부비서국1966- 볼리비아의 반군 지도자

 저 서 : Che의 일기(짐 피츠의 체 게바라 초상화)ㆍ라틴 여행 일기ㆍ체 게바라 평전ㆍ먼 저편모터사이클 다이어리체 게바라 자서전체 게바라의 홀쭉한 배낭

 "피델 카스트로 (Fidel Castroㆍ1959~201152년간 쿠바 통치)"와 함께 쿠바혁명을 수행하였다.

일반인을 뛰어넘는 대담한 발상과 행동력을 가졌고, 인내심ㆍ성실ㆍ상황 분석ㆍ냉정한 판단력ㆍ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재능을 가졌다.  게바라의 중증 천식은 그를 평생 괴롭혔다. 미숙아로 태어난 게바라는 폐렴에 걸려 2살 때 심한 천식을 앓는다.  부모는 아들의 건강을 우선시해서 천식 치료에 좋은 환경을 찾아 몇 번이나 이사를 했다. 어렸을 때는 경련을 동반하는 천식 발작에 위기에 빠진 적도 많았으며, 그 때마다 산소 흡입기를 사용하여 회복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본래 아르헨티나 태생인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학위까지 받았으나, 혁명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는 멕시코에서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 1959년 "쿠바"에 공산정권을 수립하는 것을 도왔고, "카스트로 정부"에서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러나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소련의 철수를 반대하자, 소련은 그의 "마오주의" 경향을 비판하였다.

1965년 쿠바를 떠난 체 게바라는 "콩고"에 자신이 발전시킨 고유한 공산주의 이론을 정착시키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마오주의(모택동주의): 마오쩌둥을 따르는 공산주의의 분파) 쿠바에서 많은 일들을 했음에도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일을 찾아 떠났다. 1965.04월, "쿠바에서는 모든 일이 끝났다."라는 편지를 남기고, 행방이 묘연해졌다. 이 때 쿠바를 벗어나, "볼리비아"로 투쟁무대를 옮겨, "바리엔토스" 정권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였으나, 1967.10.09일 미국이 가세한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잡혀 총살당했다. 총살 후 그의 시체는 정부에 의해 언론에 공개되었으나, "체 게바라"를 하찮은 인간으로 보이게 하려는 의도와 달리, 그의 모습이 예수와 비교되면서 다시 많은 이들의 추앙을 받게 되었다.

그의 시체는 30년 후, 볼리비아에서 발굴되어, 그가 혁명가로 활동했던 쿠바에 안장되었다. 그는 사후에 전 세계적으로 "체 게바라 열풍"을 일으킬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아마도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그의 가장 눈에 띄는 유산은 티셔츠에 그려진 인기 있는 초상일 것이다. 

아르헨티나 의사의 자리를 버리고, 전 아메리카의 쿠데타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혁명에 뛰어들었으며, 쿠바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도 이를 박차고, 또 다른 혁명을 위해 헌신하는 숭고한 모습이 사람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체 게바라가 "쿠바ㆍ콩고ㆍ볼리비아"에서 벌인 일련의 혁명과정에서, 반혁명 세력과 수많은 농민들의 피해를 가져왔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당시 쿠바에 살았던 사람들이 체 게바라를 "아바나 백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주장도 있다.

 평 가 :  사후, 전 세계적으로 "체 게바라 열풍"을 일으킬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아르헨티나 의사"의 자리를 버리고, 전 아메리카의 "쿠데타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혁명에 뛰어들었으며, "쿠바"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도 이를 박차고, 또 다른 혁명을 위해 헌신하는 숭고한 모습이 사람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일반인을 뛰어넘는 대담한 발상ㆍ행동력으로 알려져 있으나, "쿠바 상륙" 직후에 동지의 절반 이상이 사망ㆍ체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17명이나 살아남았다. 이로써 바티스타 자식의 생명은 끝난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기세가 죽은 "카스트로"를 보고, "슬픔에 빠진 나머지 미친 것이 아닌가"하고, 진심으로 걱정했다. 그러나 그 후, 정보의 중요성에 주목한 "카스트로"의 전략과, "게바라"의 "포로는 죽이지 않는다."는 방침이 힘을 발휘하여, "혁명"에 성공했다.

하지만 "체 게바라"가 "쿠바콩고볼리비아"에서 벌인 일련의 "혁명과정"에서 "반혁명 세력"과 수많은 농민들의 피해를 가져왔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는 "쿠바 혁명" 승리 후, 쿠바 "공산당ㆍ쿠바 혁명정부"의 중요 직책에 있으면서, "쿠바혁명"에서 얻은 것들을 지키며, 혁명을 더욱 전진시키기 위하여 정력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여기서 "사형제"를 부활시켜, "친미ㆍ반혁명" 세력 약 14,000명을 죽였다.

"쿠바 혁명" 승리 후, 얼마간 "아바나"의 "라 까바니아 요새 수비대 사령관"으로 있다가, 산업성장을 조종하는 책임자로 있었으며, 동시에 토지 개혁 준비에 참가하였다. 1959.11~1961.02월에 "쿠바 국립은행총재", 1961.02월부터 "쿠바 산업상"도 함께하였으며, 1962년에 "쿠바 통일혁명조직" 전국지도부 및 비서국에서 일하여, "쿠바의 두뇌"라 일컬어졌다.

③ 혁명 이론 (Guevara theory)

쿠바혁명의 지도자 "체 게바라 (Che Guevara)""피델 카스트로 (Fidel Castro)"와 함께 수행한 "쿠바혁명" 경험을 총괄한 이론으로, 제3세계 제국의 해방세력에 영향을 끼친 이론. 제3세계 인민의 반미제국주의인민해방투쟁은 "민족해방전선"에 의해 조직된 농촌과 산악지대에서의 인민의 게릴라 투쟁을 기본적인 형태로 삼는다. 무장투쟁의 포기나 도시에서의 합법적 활동에만 의존하는 방법은 "투항주의개량주의"로 본다.

 체 게바라의 길 (Ruta del Che)

피살지 "라이게라 (La Higuera)"와 암매장지 "바예그란데 (Vallegrande)" 사이를 잇는 62km의 길인구 11,000명의 "바예그란데"에 해마다 "체 게바라의 길"을 밟고자, 찾아오는 사람이 무려 2,500명에 이른다고 한다. 비록 39세라는 길지 않은 인생이었지만, 오로지 세계변혁이란 시대적 소명에 헌신해온 "사건 창조적" 위인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지구촌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이 "체 게바라의 길"이 트이게 되었다. "라이게라" 마을 동구의 "체 게바라 광장"에는 당국의 제지를 무릅쓰고, 1992년, 1997년, 2007년에 각기 다른 형태의 추모 동상이 세워졌다. 2007년 "전투복 차림의 동상" 제막식에는 세계 각지에서 온 "체 게바라스트" 3,000여 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2. 사 인 (총살형)

"쿠바"에서 많은 일들을 했음에도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일을 찾아 떠났다. 1965.04월, "쿠바에서는 모든 일이 끝났다"라는 편지를 남기고, 행방이 묘연해졌다. 이때 "쿠바"를 벗어나, "볼리비아"로 투쟁무대를 옮겨, "바리엔토스 정권"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였으나, 1967.10.09일 "미국"이 가세한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잡혀, 총살당했다. 총살 후, 시체는 정부에 의해 언론에 공개되었으나, "체 게바라"를 하찮은 인간으로 보이게 하려는 의도와 달리, 그의 모습이 "예수"와 비교되면서, 다시 많은 이들의 추앙을 받게 되었다.

그의 시체는 30년 후, "볼리비아"에서 발굴되어, 그가 혁명가로 활동했던 "쿠바"에 안장되었다. 그는 처형당할 때, 12,000 달러의 현금과 "롤렉스 손목시계"를 지참하고 있었다. 현금은 혁명을 위한 군자금이었으며, "롤렉스 손목시계"는 그 시계가 정확도 높은 시계였기 때문에 소유하고 있었다.

 체 게바라를 처형한 병사

게바라를 처형한 병사는 나중에 "눈 치료"를 위해 제3세계에서 가장 고도의 의료를 무상으로 받을 수 있는 쿠바를 찾았으나, 쿠바정부는 특별히 문제 삼지 않고, 그는 무사히 치료해 주었다. 우상과도 같았던 공산주의 영웅 체 게바라는 추적을 당한 끝에 "볼리비아"에서 피살된다. 

1966년 남아메리카로 돌아와서, 소수의 게릴라 전사들과 함께 "볼리비아"의 "난카화사"지역에 훈련 캠프를 설립하고, 후에 "발레그란데" 지역으로 옮겨갔으나,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지역 주민들은 그를 의심하고 불친절하게 대했으며, 모병에 실패한 나머지, "게바라 군"은 50명을 넘지 못했다. 1967.10.08일, 체 게바라는 22명의 "다인종 게릴라 부대"를 이끌고, "볼리비아" 남부의 오지 도시 "푸카라(Pucara)"를 향해 진군하던 중 추로(Churo) 계곡에서 매복 중이던 정부군과 조우하였다.  격전 끝에 4명이 전사하고, 허벅지에 총상을 입은 채, 게바라를 비롯한 3명이 생포되었다. 그들은 즉시 인근의 "라이게라" 마을에 있는 작은 소학교 교실로 압송, 구금되었다.

미국은 볼리비아가 라 히게라 근교의 계곡에서 체 게바라와 그 일당을 추적하도록 원조는 했지만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았다. 이튿날 "쿠바출신의 CIA 요원"에 의해 게바라의 신분이 확인되자, 30분도 채 안 되어 사살 명령이 내려지고, 곧바로 총살이 집행되었다. 볼리비아 병사들은 누가 그를 처형할 것인지를 놓고, 제비를 뽑았다. 옆방에서 같이 생포된 두 전우의 최후를 알리는 2방의 총성을 들으면서, 체 게바라는 소학생이 앉았던 나지막한 나무 걸상 위에서 묶인 채, "볼리비아군 하사관"의 총을 맞고 이슬로 사라진다.  전해진 바에 따르면, 체 게바라의 마지막 말은 "알아두어라. 너는 지금 사람을 죽이고 있다"였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헬리콥터에서 발레그란데 강으로 던져졌으며, 언론에 그의 죽음이 공표되었다. 게바라의 시신은 헬리콥터로, 전우들의 시신은 소달구지에 실려, 당시 게릴라 소탕 사령부가 있던 "바예그란데"로 운구 되었다. 당국은 시신을 "병원 세탁대" 위에 눕혀놓고, 10일간이나 치아, 지문 식별 같은 검증을 위해 손을 자르고, 주민과 기자들에게 공개한 뒤에 어딘가에 암매장 해버렸다. 당시 시신을 씻어주었던 간호사 "수사나"는, "체 게바라가 마치 성인처럼 영채 도는 눈을 뜨고 있는 상태였다"고 회상하곤 한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그를 성인으로 추앙하기까지 한다.

체 게바라의 암매장지는 한동안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당시 암매장 공사에 참여했던 한 병사의 양심고백에 의해 매장지의 단서가 잡혔다. 쿠바와 아르헨티나의 두 학자가 2년간 노력한 끝에, 마침내 사망 30년 만인 1997.06.28일 체 게바라를 비롯한 7명의 시신 암매장지를 찾아냈다. 암매장지 건물 내의 세탁소 좌측 벽 상단에는, 이 시신 발굴에 직접 참가한 쿠바 학자가 쓴 "그들은 땅속 깊이 묻었지만, 우리는 찾아내고야 말았다. 28-6-97"란 굵은 갈색 글씨가 아직도 남아 있다.

3. 일 화

엄청난 "골초"

굉장히 아이러니한 것은 그가 "천식 환자"였기 때문에, 평생 "산소 호흡기"를 휴대하고 다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골초"였다.

 1956년 : 레저보트 "데셈바르코 (그란마)"로 쿠바상륙 직후

1956.12월, 쿠바 상륙 직후에 동지의 절반 이상이 사망, 체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17명이나" 살아남았다. 이로써 바티스타 자식의 생명은 끝난 것과 마찬가지다"며,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기가 죽은 카스트로를 보고, "슬픔에 빠진 나머지 미친 것이 아닌가"하고 진심으로 걱정했다. 그러나 그 후, 정보의 중요성에 주목한 "카스트로의 전략"과, 게바라의 "포로는 죽이지 않는다."는 방침이 힘을 발휘하여, 혁명에 성공했다.

1956년 12월, "그란마 호"가 쿠바에 상륙한 직후, "알그리아 데 비오"에서 정부군으로부터 돌연 집중포화를 받은 탓에, 게릴라부대의 동지들이 사탕수수밭으로 도망가려 할 때, 동지 하나가 게바라의 발밑에 가득 차 있는 탄약상자를 두고 달아나버렸다. 또 하나 그의 눈앞에는 의약품이 가득 찬 배낭이 있었으나, 탄약상자와 의약품 양쪽을 짊어지는 것은 너무 무겁다고 생각하였다. 그 역시 사탕수수밭으로 도망가려 할 때, "의사로서 천직과 혁명전사로서의 의무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 딜레마에 직면한 순간"이었지만, 결국 탄약상자 만을 손에 들고 달려갔다.

 1959년 : 쿠바 국립은행 총재 취임 시

1959.11월 "쿠바 국립은행" 총재로 취임한 후, 그때까지 풀 네임으로 하는 것이 관례였던 지폐에의 사인에 "체"라고만 기입했다. 화폐에 부정적인 생각에서 한 행동이라고 보인다. 현재 쿠바의 페소 지폐에서 그의 초상을 볼 수 있다. 또, 금융에 관해 문외한이었던 게바라의 총재취임을 의아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농담을 속닥거렸다.

"신정부의 각료를 결정할 때, 카스트로가 "누구 에코노미스타(경제통)은 없나?"라고 물었다. 연일 격무로 피로하여 깜빡 졸고 있던 그는 이것을 "코무니스타(공산주의자)"로 잘못 알아듣고 얼른 손을 들어, 그의 국립은행 총재취임이 결정되었다." 실제로는 이러한 사실은 없었으나, 정식으로 취임발표가 나자, 소규모이지만 예금을 인출하는 소동이 발생하는 등, 금융 불안이 확대되었다.

4. 연 보

1952 : 남미 방랑 여행 (나이 많은 친구인 "알베르토 그라나도"가 동행) "알베르토 그라나도스""모터 사이클"을 이용한 "아메리카 전역" 여행공부를 마치기 전에 "오토바이 여행"을 하였는데, 억압받고 가난하며, 한센병으로 고통 받는 "인디오"들과 민중들의 아픔을 이해하는 기회였으며, 당시의 이야기는 "모터 사이클 다이어리"로 저술되었고, 2004년도에 영화로 제작개봉되기도 하였다  1952 : "볼리비아 인민운동"에 참가, 외국자본의 유치와 산업 민영화에 반대

1953 :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학" 의학 박사학위ㆍ과테말라에서 의사생활의학대학 졸업, 25일 만에 남미 방랑여행(2, 친구 "카를로스 페레로" 동행)  1954 : "일다 가데아"와 결혼- 여성운동가, 조국 "페루"에서 쫓겨나 과테말라에 망명 중, 과테말라에서 새로 집권한 "아르마스"정권에 의해, "게바라의 암살령"이 내려져 멕시코로 망명

1955 : "멕시코"로 건너가서, 그곳에 망명하고 있던 반체제 쿠바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ㆍ쿠바 혁명지도자)"와 합류, "체 게바라"로 개명 1956.11 : "피델 카스트로"를 반군 지도자로 하여, 82명이 8인승 레저보트 "데셈바르코(그란마)" 탑승  1956.12 : 7일 후에 쿠바 도착, 도착 후 정부군의 습격으로 괴멸, 17명만 생존(군의관 역할) 1957. : 소령으로 진급, 카스트로에 이어 반군 2인자로 부상 1958.12 : 쿠바 제2의 도시 "산타클라라"에 진입

1959.01 : 01.01일 쿠바의 독재자 "바띠스따(Fulgencio Batista)" 출국ㆍ"쿠바" 해방"카스트로"의 게릴라 전쟁을 도와, "바띠스따" 축출 성공"쿠바 혁명" 달성, "쿠바 시민권" 부여받고, 쿠바 새 정부의 각료로 임명 (31)사형제를 부활시켜, 친미 또는 반혁명세력 약 14,000명을 사살

1959.07 : 쿠바의 통상사절단을 인솔, 일본 방문  1959.11~1961.02 : 쿠바 중앙은행 총재라카바니아 요새 사령관공업장관 역임  1960 : 사회주의국가 순방 (소련중국불가리아북한체코 방문)  1961 : "쿠바" 산업부장관 역임 (1961~1964)  1961.08 : "쿠바" 대표로" 우루과이의 푼타 델 에스테" 방문  1962 : 쿠바 통일혁명조직 전국지도부 및 비서국에서 활동  1965.01 : 콩고기니가나알제리탄자니아이집트 방문  1965.04 : "쿠바에서는 모든 일이 끝났다."라는 편지를 남기고, 쿠바 떠나, "콩고"에서 자신이 발전시킨 유한 공산주의 이론을 정착코자 했으나 실패

1966.03 : "콩고"로 떠남→ "쿠바"에서 사라진 후, 1966년 "볼리비아 반군 지도자"로 나타남  1966 : 남아메리카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활동  1967.10 : 미국이 가세한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잡혀, "볼리비아 발레그란데" 근처에서 "총살"

5. 명 언

무릎을 꿇느니, 서서 죽는 것을 택하겠다   /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한 싸움에서는 한 번도 져 본적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지지 않을 것이다   /   수단이 비열하다면, 결코 목적은 정당화 될 수 없다.

① 5명의 자식들에게 남긴 편지의 일부- 쿠바를 떠나 볼리비아로 향할 즈음,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며,  "술은 좋아하지 않는다. 담배를 핀다. 여자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면, 남자를 포기한다.  그렇다고 해서, 혹은 어떤 이유라 할지라도 혁명가로서 임무를 다할 수 없다면, 나는 혁명가를 관두겠다.  세상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고통당하고 있는 부정(不正)을 마음 깊숙한 곳에서 진심으로 슬퍼할 수 있는 인간이 되거라. 그것이야말로 혁명가로서 가장 아름다운 자질이므로"            죽기직전에 남긴 유언, 아내의 재혼까지 이야기하는 그의 용기 : 피델에게는 아메리카에서 영광스러운 혁명 성공의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전해주게.  내 아내에게는 재혼해서 행복하게 살라고 전해주게나.  

③ UN총회 출석을 위해 뉴욕 체재 중, 인터뷰에서의 "혁명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에 답하며, "바보 같다고 생각될지 모르나, 진짜 혁명가는 위대한 사랑에 의해 인도된다. 인간에의 사랑, 정의에의 사랑, 진실에의 사랑, 사랑이 없는 진짜 혁명가를 상상하기는 불가능하다."           ④ 07.26일 운동의 슬로건  "조국인가 죽음인가" : 만약 우리들에게 공상가 같다고 한다면, 구제할 방법 없는 이상주의자라고 한다면, 불가능한 일을 생각한다고 한다면, 몇 천 번이라도 대답해 주지. "바로 그렇다"

 이곳은 전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격전지다. 나는 우리가 콩고에서 제국주의자들에게 일격을 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레방아를 향해 질주하는 돈키호테처럼, 나는 녹슬지 않는 창을 가슴에 지닌 채, 자유를 얻는 그날까지 앞으로만, 앞으로만 달려갈 것이다. (콩고로 떠나기 전)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인민들의 단 하나의 해결책은 무장투쟁이라고 굳게 믿고, 이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모험주의자라고 손가락질하지만, 저는 단지 제가 옳다고 믿는 것을 온몸으로 표시하기에 주저하지 않는 한 인간이라는 점에서 모험주의자라는 공격을 기쁘게 받아들이겠다. (편지 중에서)

나는 결코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유 의지에 따른 신념의 소산이었다. 나는 68년 혁명을 함께 한 내 또래를 "메시아를 기대한 마지막 세대"로 본다.           당신과 우리 민중에게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것은 불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에게 바라는 것을 말로써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합니다.(피델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⑨ 시간은 어느 누구의 사정도 봐주지 않는다.  나이를 한살 더 먹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전사로서 내 미래에 대해 깊이 성찰한다.           ⑩ 우리 시대가 당면한 문제는, 기층 민중을 헐벗게 만드는 자본주의와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할지 몰라도 자유를 억압하는 공산주의 중에서 택일해야한다는 점이다. (1959년 초)           ⑪ 자본주의는 인간을 제물로 삼는다. 한편 공산국가는 자율에 관한 한 전체적인 개념 때문에 인간의 권리를 희생시킨다.  우리가 그 어느 것도 일률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의 혁명은 쿠바만의 주체적인 혁명이어야 한다.            우리는 포위되었다. 덕분에 문제는 간단하다. 우리는 이제 모든 방향으로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너의 권리와 자유는 딱 네가 투쟁한 만큼 주어진다.  이 세계 어디선가 누군가가 불의를 당하면, 분노할 줄 알아야 한다.   /  우리는 이론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직 행동이다 (인터뷰 중에서)   /  잠자는 자는 꿈을 꾸지만, 잠자지 않는 자는 꿈을 이룬다.   /  나는 천천히 걷는다. 하지만 적어도 뒤로 가지는 않는다.   /  불가능은 가능을 위해 존재한다.   /  너의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냐? 나의 인생은 고난극복의 연속이다.   /  우리는 처음 숫자를 셀 때 1부터 센다. 하지만 모든 일의 처음은 0부터 시작한다.   /  영원히 살 것처럼 배워라. 그리고 내일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라   /  태양을 향해 쏜 화살은 태양근처까지라도 간다.   /  인생은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다. 네가 계속 폐달을 밟는 한 너는 넘어질 염려가 없다   /  네가 죽어도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네가 살아있으면 세상은 반드시 변한다.   /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  마지막 1%의 길, 그것이 곧 나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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