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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 : 시라소니 이성순 ① 1916~1983 (66세)

by 당대 제일 2022.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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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소니"라고 불린 "이성순 (1916~1983ㆍ67세)"은 "김두한"과 더불어 당대의 주먹이었다. 특기는 "공중걸이 박치기(장거리에서 뛰어드는 박치기)ㆍ무릎치기(니킥)ㆍ팔꿈치 공격"이었고 "단검"에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한다.

 

1.  시라소니 이성순 (李聖淳1916~1983향년 66175cm65kg)

일제 강점기~ 1공화국 시기 활동한 조직폭력배협객밀수(도비노리/ 16)개신교 집사해방 정국의 신익희 경호실장서북청년단 감찰부 부장한국전쟁 시 북파공작원 (KLO부대 요원)

"김두한"과 더불어 당대의 주먹이었다. 특기는 "공중걸이 박치기(장거리에서 뛰어드는 박치기)무릎치기(니킥)팔꿈치 공격"이었고 "단검"에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한다. 아무런 수련을 거치지 않은 "싸움의 달인"으로 그려지지만, 실제로는 어린 시절부터 운동을 거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1934년에는 "백두산"에 올라가 훈련도 했었다고 한다.

•  별 칭 : 시라소니 (못난 호랑이 새끼호랑이가 될뻔했으나, 되지 못했다) / 동물 "스라소니"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평안도에서 못나거나 혼자 뒤떨어지는 사람을 뜻하는 용어

•  출 생 : 조선 평북 신의주 오일동   •  사 망 : 서울 성동구 군자동   •   종 교 : 개신교 (장로회)영락교회 집사   •   : 이진옥 (재혼13세 연하)  :  "북경"에서 "치에코"라는 여성과 살림을 차렸지만, 잠시뿐이었다   •  자 녀 : 2 5 (막내- 이의현 목사) 이성순의 영향으로 목사가 됨  •  가 족 : - 이기정 (1878~1943ㆍ목사)- 이성덕 (와세다 대학 졸업자)

시라소니

생애에 대한 여러 무용담이 있으나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는 자료들이 사실상 거의 없다. 대부분 주변 사람들의 증언이나 조폭으로서 날렸던 악명에 기반한 뜬소문 따위에 의지하고 있다.

그가 이름을 날리게 된 계기는 "박두성(평양 제일의 싸움꾼)"을 이긴 것이며, 이후 중국 전역을 떠돌며 활약했으며, "상하이"에서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이상대(봉천의 호랑이)와 싸움장천용(상하이 독수리)와 우정일본 야쿠자 40:1의 싸움"이 알려져 있다.

1916, "평북 신의주"에서 전주 이씨 가문의 부농이자 목사인 "이기정"3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5살 위 형 "이성덕""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전 일본빙상선수권대회1936년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올림픽"에 참가할 정도의 엘리트 체육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릴 적부터 "일본제국경찰"의 감시를 받을 정도로 "골목대장" 노릇을 했다. 아버지가 보증을 잘못 서 가계가 기울자, 1932(16)부터 "신의주~ 만주" 사이를 오가는 기차에서 "밀수(도비노리)"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 시절, 실수로 열차 밑으로 들어가 죽을 뻔했으나 기적적으로 열차에 올라탔고, 이때 "시라소니"라는 별명을 얻어, 평생 본명보다 이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이때의 "시라소니"는 동물 "스라소니"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평안도에서 못나거나 혼자 뒤떨어지는 사람을 뜻하는 용어였다.

1953, "동대문파 이정재"에게 "동대문 점포양도"를 요구하다가, "동대문 상인연합회"에 린치당하여 중상해를 입었고, 돌대가리 부하 "이석재(이정재 재종제(6촌뻘 되는 아우)"에게 1번 더 폭행당했.

이후 "516군사정변" , 군사정권이 "구악 일소"라는 명분 아래에 조직폭력배들을 일제히 검거할 때 그도 체포되었지만, "영락교회" 신자들의 탄원으로 풀려나왔다구속 중이던 "이정재"를 추가 기소하기 위해, 당시 검찰에서 방증을 수집하는 중, "시라소니 린치 사건"의 조사를 위해 "이정재"와 대질심문도 했는데, "린치 사실"을 부인하며, 이정재를 감쌌다고 한다.

그 후 허망함을 느낀 그는 완전히 신앙에 귀의하여 "영락교회 집사"가 되었으며, 딸들과 친척의 도움으로 다 쓰러져가는 2칸짜리 판잣집에 살다가 사망하였는데, 남긴 것이라곤 "빛바랜 사진첩손때 묻은 성경책"이 전부였다고 한다. 죽기 직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이기고 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만이 진실하다."

2.  회고

① "장천용(상하이 독수리)"과 절친한 관계로 지내며, 아들 "장호근"과도 친분이 있었다.

소설가가 된 "장호근"은 "이성순"이 주인공인 "소설 시라소니"를 집필해서 그의 무용담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올 수 있게 했다.

② 신상사 (신상현 (申常鉉))

앞머리가 좀 벗어졌고, 전체적으로 체격이 컸다. 딱 보기에 근육질은 아니었으나, 몸통 자체가 매우 두꺼웠고, 딱 벌어진 어깨와 골격이 대단했으며, 일반 성인 남성에 비해, 손이 2배로 컸고, 손가락 1개가 없었다..

③ 이진옥 (재혼한 아내)

• 남편은 싸움뿐만 아니라, 단도의 명사수였다. 30~40m 거리에서도 정확히 과녁을 맞출정도였으며, 몸이 정말 민첩했다. 

• 해방 전, "조선 최고의 미인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동화백화점"에서 근무했던 그녀는 "백화점에서도 최고의 미인"으로 손꼽혔고, 첫눈에 반한 "시라소니"의 아내 사랑은 정말 유별났다. 대표적 일화로 아내가 어느 순간 병에 걸렸는데, 1번만 아내를 살려주시면 종교인이 되겠다고 신에게 빌며, 이때 기적적으로 아내는 일어나게 되고, 후에 "이정재"를 용서하며 종교계에 본격적으로 귀의하게 된다. 그리고, 아내 역시 "가난했지만 행복했다."고 회고했다.

• 아내와 결혼하고자 괴팍한 방법도 썼다고 한다. "1948년, 친척의 소개로 남편을 처음 만났는데, 솔직히 너무 못생겨서 안 만나려고 했어  그러니까 하루는 우리 집안 친척들을 다 모이게 하더니 쌍권총을 딱 꺼내놓고, "결혼을 안 시켜주면 모두 죽이겠다고 위협을 하더라고. 그러니까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친척들이 서둘러 결혼을 시켰지"

• 이렇게 얻은 아내를 학대하기는커녕 그에게는 아내가 "법"이었으며, 아내가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로 인해 전과가 없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 항상 자랑으로 여겼다고 한다. "아이들에겐 무뚝뚝했지만 내겐 한없이 다정했어. 심지어 맛있는 걸 사 가지고 오면, 아이들 몰래 나만 먹게 했지. 남편은 나 때문에 아이들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니까"

• 처음엔 깡패란 것도 모르고 결혼을 했다가 나중에 알았어. 그래서 굶어 죽어도 좋으니 제발 나쁜 짓은 하지 말라고 간청했지. 그런데 나쁜 짓을 해야 돈이 생기는 거잖아. 그걸 못하니까 남편도 답답했던지 자기를 원망하지 말라고 하더라고. 하지만 그 덕분에 남편 이력서엔 평생 빨간 줄이 하나도 없어.

④ 이선숙 (3째 딸)

• "이화룡ㆍ정팔이" 아저씨 등 아버지를 따르던 주먹계의 후배들이 회현동 집을 자주 찾았었다며, 그때마다 이들은 많은 용돈을 쥐어주곤 했다고 회상했다.

•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아버지의 모습은 왜소한 모습에 지저분한 옷을 입고 등장하는데, 실제는 그런 모습이 아니다며, "항상 중절모와 정장을 하고 다니셨다"고 말했다.  "키는 한 1m75cm에 몸은 근육질이셨습니다. 극 중에선 항상 술에 취한 모습이지만 술은 즐겨 하시지 않았습니다. 왜 작고 왜소한 모습으로 비쳐지는지 이해할 수 없더라구요. 아마 아버지의 빠른 몸놀림 때문에 그런 것 같다."며, "동료분들은 아버지의 싸움 기술 중 공중 걸이(몸을 날려서 하는 박치기)는 세계 최고였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고 전했다.

 "휴전 후 아버지가 장면 박사 등의 경호원을 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사실이 아니다. 아버지는 어느 한 곳에 속하지 않는 자유인이셨다." 아버지가 동대문 사단에 집단 린치를 당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것은 전혀 사실 무근이다. 5ㆍ16혁명 이후, 주먹세계와 손을 끊고 편안한 삶을 사시다 여생을 마치셨다고 했다.

3.  생애

해방 후 월남하여, 서울로 와서 "이북 출신 조폭들"의 큰형님 격으로 이북 출신들로 구성된 "서북청년단"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서북청년단"은 당시 이북 출신들인 "이화룡정팔""압록강 동지회대동강 동지회"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서로 조직은 분화되었지만, 공동의 목표를 두면 단합하는 성격이었다

이 가운데에 그는 "옵저버 역할"을 하면서 중재를 담당했다정식 직함은 "압록강동지회 감찰부장"이었다"625전쟁" 시기에는 "서북청년단" 인원으로 구성된 "KLO 부대원"으로 전쟁에 참가했고, "31공수 유격단" 창단식에 "부부대장 자격"으로 한국군 최초 "공수 강하훈련"을 교육했었다는 주장이 있다.

한국전쟁 이후, 서울 조폭계는 "이화룡"이 이끌던 "명동파""이정재"가 이끌던 "동대문파"로 양분되었는데, 그는 "14 후퇴" 당시 부산에서 많은 깡패들에게 린치를 당하던 "이정재"를 구해준 인연으로 "명동파"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유일하게 "이정재" 사무실에 드나들 수 있었다고 한다그러나 "이성순"이 돈을 뜯어가며, "동대문 시장"의 점포 양도문제로 "이정재"와 충돌하게 된다처음은 굶주리고 갈 곳 없는 "KLO 대원들"을 위해서 돈을 2번 빌리고, 점포양도를 구했고, 마지막은 "50만 환(5억 원)에 달한 거금을 내달라"고 하며, "서북청년회 출신 상이군인들에게 동대문 상가의 점포를 좀 내달라"는 요구였지만, 사실 그 이전에도 그는 "이정재"에게서 수시로 돈을 뜯어 갔었다이 때문에 "동대문파"의 간부인 "김사범조열승임화수" 등 간부들이 "이성순"에게 분노하고, "정재"도 자존심이 워낙 상했다.

그래서 이권분산과 조직 위계질서가 흔들리는 것을 염려한 "이정재""시라소니"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부하들에게 명령하여, 좁은 사무실로 유인하여 "몽둥이둔기손도끼" 같은 흉기로 "이성순"을 잔혹하게 린치했는데, 이 사건이 "시라소니 동대문 린치사건"이다.

1983, 그가 사망했을 당시, "동아일보"에서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당시 "이정재" 측 부하 10명 정도가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집단 린치"를 했다고 한다"린치" 당시의 정황도 인물 사이의 주장이 상당히 엇갈렸는데, 당시 "이성순""종로 5가의 반도 병원"으로 옮겨졌고, 얼마 뒤에 "백 병원"으로 이송됐다.

이 사건 이후, "시라소니"의 인생은 내리막을 걷게 됐다. 당시 부상이 너무 참혹해서, 의사가 "시체인 줄 알았다."고 했을 정 도이고, 후유증 또한 마찬가지로 심각했다그걸로 끝난 게 아니라, "백 병원"에 입원한 그를 "이정재"돌대가리 부하 "이석재(이정재 재종제(6촌뻘 되는 아우)""후환을 없애겠다."는 의도로 단독으로 병원으로 찾아가, 쇠막대로 "2차 린치" 벌여, 그나마 하나 남은 멀쩡한 다리를 부러뜨리려고 했다.

그러나 당하기에 앞서 방심한 틈을 이용하여, "이성순"이 깁스로 "이석재"의 얼굴을 치고 그 소란을 들은 간호사가 들어온 바람에 "이석재"는 그대로 도망쳤다고 한다나중에 "임화수"가 오자, "시라소니"는 마구 화내며, 권총을 들이대고 돌려보냈다고 한다이후 복수를 시도하려 했으나, 경찰들의 방해로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이후 거의 폐인이 되어, "장티푸스"에 걸린 적도 있고, 쓰러져서 쓰레기장에서 발견된 적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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