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 기무사령부 (기무사ㆍ보안사ㆍ國軍機務司令部)"는 "국방부" 직할의 수사정보 기관으로, 군사에 관한 정보수집ㆍ군사 보안ㆍ방첩/범죄 수사를 목적으로 한다. "기무 (機務)"는 "근본이 되는 중요한 일ㆍ중요하고 기밀한 정무" 등을 뜻한다.
1. 국군 기무사령부 (기무사ㆍ보안사ㆍ國軍機務司令部ㆍDefense Security CommandㆍDSC)
• 임 무 : 군내 군사기밀의 보안/ 관리ㆍ군 내 주요 범죄 수사ㆍ군사 정보/ 정보 보안 및 방첩업무ㆍ군 관련 첩보의 수집/ 작성/ 처리ㆍ정보 작전 방호 태세 및 정보전(情報戰) 지원ㆍ통신 감청 업무ㆍ군사법원법 제44조제2호에 규정된 범죄의 수사에 관한 사항ㆍ정보통신기반 보호법 제8조에 따라 지정된 주요 정보통신 기반시설 중 국방 분야 주요정보통신기반시설의 보호지원
• 활 동 : 1948.05.27~ 현재 • 소 속 : 국방부 • 표 어 : 충성ㆍ명예ㆍ정의 • 역 할 : 방첩ㆍ정보 보안ㆍ범죄 수사 • 종 류 : 사령부 (중장) • 지 휘 : 정승화 준장ㆍ윤필용 소장ㆍ김재규 중장ㆍ전두환 대장ㆍ노태우 대장ㆍ 김종태 중장 • 위 치 : 1974~ 2008.10 (서울 종로구 소격동 165번지) ㆍ2008.11~ (경기도 과천시) • 구 성 : 본부와 지원부대로 구성되며, 지원부대는 국군의 여단 이상의 부대에 배속되어 배속부대를 지원
< 연 혁 >
미 군정청 국방사령부 정보과 (1945.11ㆍ남조선국방경비대 총사령부 정보과 모체)→ 미 군정청 국방사령부 정보처→ 육군정보국 정보처 특별조사과 (1948.05→ 방첩대 (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 CHEO)ㆍ초대 방첩대장 : 김안일 대위 (박정희 소령과 육사 2기 동기))→ 육군본부 정보국 정보대 (1948.11)→ 육군본부 정보국 공작과 (1950.07ㆍ① 제1과 : 첩보 분석을 담당하는 정보국 정보대 ② 제2과 : 첩보 작전을 담당하는 정보국 공작과 ③ 제3과 : 방첩을 담당하는 정보국 방첩대)
→ 1950.10월, "제3과 (육군본부 정보국 방첩대)"는 정보국에서 분리되어 "육군직할 특무부대 (1950ㆍCIC)"가 되고, 1951년, "제2과 (정보국 공작과)"는 "첩보분견대본부 (HIDㆍ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가 된다.
→ 육군직할 특무부대 (1950ㆍ特務部隊ㆍCICㆍCounter Intelligence Corp)→ 육군 방첩부대 (1960ㆍ防諜部隊)→ 육군 보안사령부 (1968ㆍ保安司令部)→ 국군 보안사령부 (1977ㆍ통합되어 3군 첩보를 총괄)→ 양심선언사건 (윤석양 이병)→ 국군기무사령부 (1991)
※ 육군직할 특무부대 (CICㆍ1949) + 해군 방첩대 (1953) + 공군 특별수사대 (1954) → 1977년 국군 보안사령부로 통합
① "기무사"의 시작은 1948.05월 "육군정보국" 내에 창설된 "정보처 특별 조사과"이다.
"기무사" 역사의 시작은 광복 이후, "좌ㆍ우익"이 첨예하게 대립했던 194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회 혼란 속에서 "대공(對共)업무 전담기구" 필요성이 대두됐고, 정부는 "조선 경비대 정보처" 내에 "기무사 모체"라 할 수 있는 "특별조사과"를 설치한다.
당시 한국에 있던 "미군 제917 CIC 파견대"는 각 연대 정보과에 근무하던 장교 및 간부 33명을 선발하여 방첩 관계 교육을 시킨 다음, 기존의 "특별조사과"를 "방첩대"로 개칭하여 이곳에 배속시켰다.
② "육군 정보국 방첩대"는 6ㆍ25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1950.10.21일 "육군 특무부대"로 독립했으며, 초대 부대장은 "김형일 대령 (金炯一ㆍ1950.10.20~ 12.15)"이었다.
"특별조사과"는 1950년 육군 직할의 "특무부대(CIC)"로 독립하는데, "대공 업무를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입어, "육ㆍ해ㆍ공군"이 각각 별도기구를 설치해, 독립적이고 입체적인 방첩 태세를 갖춘다. 1960년, "육군 방첩부대"로 개칭되었으며, 1968년 다시 "육군 보안사령부"로 개칭되었다.
1953년에 "해군 방첩대"가, 1954년에 "공군 특별수사대"가 각각 창설되었으며, 1977년에 이르러서는 "국군 보안사령부"로 통합되어, 3군의 첩보를 총괄하게 되었다.
"여수순천 10ㆍ19사건" 직후, "방첩대"는 조직을 전국으로 확장해가면서 국군 내부에 침투한 "남조선노동당" 조직의 색출작업을 벌여, 총 4차례의 숙군작업을 통해 1,300여 명의 군내 좌익세력을 제거했다. 이 과정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던 사람이 "김창룡" 당시 1연대 정보주임(후에 특무과장ㆍ특무 부대장 역임)과 친일 헌병경찰 출신자들이었다.
※ 여수순천 10ㆍ19사건 : 1948.10.19.일, 전남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소속의 일부 군인들이 "제주도 4ㆍ3사건 진압출동"을 거부하고, 단독정부를 저지하기 위해 군인들이 일으킨 사건
③사령관 (정승화ㆍ대장)"을 끌어내린 "보안사령관 (전두환ㆍ소장)
"전두환"(소장ㆍ보안사령관ㆍ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이 직속상관인 "정승화"(대장ㆍ육군참모총장ㆍ계엄사령관)"을 끌어내리는 "하극상" 발생
"방첩부대ㆍ보안부대"로 개칭한 "육ㆍ해ㆍ공군" 각 기구는 1977년 기능이 합쳐지면서, "국군보안사령부"로 다시 태어났고, "군 내부"의 모든 주요 정보를 손에 쥘 수 있게 된 "보안사 권력"은 막강해진다.
급기야 1979년 "육군 소장"이던 "전두환(보안사령관 겸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이 직속상관이자 대장인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끌어내리고 정권을 장악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12ㆍ12사태"다. "보안사" 권력은 정점에 이른다. "신군부"의 정권 장악 의도에 따라, "보안사"는 1979.12.12, 1980.0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 등에 관여 하였다. 1989년에는 "친위 쿠데타"에 대비하여, "청명계획"을 수립하였다.
④ 1990년대 들어서, 하늘을 날던 기세가 꺾이다.
"윤석양 이병" 양심선언 사건 이후, 1991년 "국군기무사령부"로 개칭되었다. "보안사가 민간인을 사찰했다"는 "윤석양 이병"의 폭로를 계기로, "노태우 정부"는 군 정보기관의 "민간인 사찰 금지"를 약속해야 했고, 1991년 "보안사" 이름이 "국군기무사령부"로 바뀌었다.
현재 "기무사"가 홈페이지에 소개하고 있는 업무는 크게, "군사 보안 및 군 방첩 업무ㆍ군 및 군 관련 첩보의 수집/처리ㆍ정보 작전 방호 태세/정보전 지원ㆍ군사법원법(제44조 2호)에 규정된 특정 범죄 수사ㆍ국방 정보통신 기반 체계 보호 지원"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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