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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건- 상식 • 논쟁 (개화파 • 북학파)

조선 ⑧ 경복궁ㆍ궁궐의 역사

by 당대 제일 2022.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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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도읍지로 선택한 "한양"은  넓은 분지 형태로 "한반도 중심부"에 있다. 한양의 입지조건은 "외사산 (外四山)ㆍ내사산 (內四山)"으로 둘러싸여, 전쟁ㆍ왜적의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한양도성"을 중심으로 약 18Km의 "청계천"이 외수인 "한강"과 합수해, 서해로 빠져나가는 물길로 "수운(水運)에 의한 교통이 편리한 곳"이다. 즉 "한양"은 지형적으로 정치ㆍ경제ㆍ교통ㆍ국방의 요충지로서, 제반여건을 고루 갖춘 천혜의 길지였다.

 

1. 한양 천도 (1392.10.25)

1392.07.17, "태조 이성계""개경의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했다"고려 공양왕"으로부터 선위의 형식으로 즉위했으나, "역성혁명"이었다처음에는 민심의 동요를 염려해 국호는 그대로 "고려"로 두었지만, 1393.02.15"조선(朝鮮)"이라 고치고, "고려"500년 도읍지 "개경"에서 천도를 결심한다.

"태조"1394.08(재위 3)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하여금 "한양"을 새 도읍으로 정하게 하고, 09.01"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했다새 수도의 도시 계획을 구상하고, 천도를 명령한 "태조""종묘사직궁궐터"를 정한 뒤, 그해 10.25일 역사적 "한양천도"를 단행했다.

2. 한양의 입지조건

외사산 (外四山) : 서울을 외곽에서 감싸고 있는 산 : - 북한산 (北漢山)- 아차산 (峨嵯山)- 덕양산 (德陽山)- 관악산 (冠岳山)

내사산 (內四山) : 서울 안쪽에 있는 산 : - 백악산 (白岳山)- 타락산 (駝駱山)- 인왕산 (仁王山)- 목멱산 (木覓山)

"북한산" 줄기가 남으로 내려온 "백악산(白岳)"은 청와대 뒤편에 보이는 "서울의 주산(主山)"이다.

산줄기는 "백악"에서 동으로 벋어나가 응봉(鷹峰)을 이루고, 동편에 이르러 "타락산(駝駱山)"이 되었다. "백악"의 서편으로 "인왕산(仁王山)"이 솟고, 남쪽에 "목멱산(木覓山)"이 있다.

3. 궁궐 : ()과 궐 ()을 합친 말

  () : 왕실 가족궁궐 사람들이 사용하는 건물

  () : 건물을 에워싼 "궁장"출입문 좌우에 설치하였던 "망루(望樓)"를 가리킨다.

 법궁(法宮)정궁 : 왕이 주로 머물면서, 정사를 돌보던 핵심 궁궐

 이궁(離宮)별궁(別宮)행궁(行宮): 왕이 거동할 때 머무르던 별궁(別宮)태자궁세자궁

조선의 국왕들은 늘 "법궁""이궁"을 번갈아 오가면서 지냈다고대 중국 궁궐제도의 규범인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를 기본으로 삼고 있다이는 "유교적 군주관"을 정치의 이상으로 여겼던 "중국 주나라시대"의 궁궐건축에 관한 제도를 받아들인 것이다. "경복궁"의 왼편()에 국가 사당인 "종묘(宗廟)", 오른편()"사직단(社稷壇)" 두어, "종묘""왕의 조상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고, "사직단"에서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나라의 번영과 안위를 빌었다.

서울에는 조선 시대에 법궁(法宮)이궁(離宮)으로 쓰였던 5개의 궁궐이 남아 있다서울의 주산 "백악"에 기대어 지은 "경복궁"은 반듯한 터에 전각들도 남북축에 맞추어 질서 있게 배치돼 있다. "백악"이 동쪽으로 흐르다 솟은 "응봉"의 한 줄기는 "창덕궁 인정전", 또 한 줄기는 "경궁 명정전" 받쳐주고, 그 남쪽 산줄기는 "종묘 정전"을 받치고 있다. "경희궁""백악"의 서쪽 "인왕산"에 기대어 지은 궁궐이고, "덕수궁(원래 이름이 경운궁)"으로 고종 대에 지은 "대한제국의 황궐(皇闕)"이다.

궁궐

4. 법궁이궁의 양궐(兩闕)체제

조선의 국왕들은 늘 두 궁궐을 번갈아 오가면서 지냈다.

경복궁 (景福宮): "조의 큰 복을 빈다"는 뜻시경(詩經)의 군자만년개이경복(君子萬年介爾景福)

"태조"가 고려의 기존 세력권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정치 이념을 실현하고자 한양천도를 단행하고 나서 지은 조선왕조의 1번째 "법궁"이다 왕위를 찬탈한 "세조""경복궁"을 기피해 "창덕궁"에 기거하면서, 왕이 살지 않는 궁이 되었다 1394.12(태조3)~1395.09월 중요한 전각이 대부분 완공되었다.1592"임진왜란"으로 전소되었고, 1868(고종5)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되었다.

창덕궁 (昌德宮): 1405(태종5), "태종" "창덕궁"을 이궁으로 지었다.

창경궁 (昌慶宮): 1484(성종15), "성종" 왕실 가족을 위한 생활공간의 확장으로 "창덕궁" 잇대어 "창경궁"을 짓고, "경복궁"을 법궁으로 "창덕궁창경궁"을 이궁으로 썼다.

경희궁 (慶熙宮): 1617(광해군9), "광해군""창덕궁창경궁"을 중건하고, "경희궁" 지었다.

덕수궁 (德壽宮경운궁 (慶運宮)): "세조"가 남편을 잃고 궁궐을 떠나는 맏며느리 "수빈 한씨(수대비)"를 가엽게 여겨 개인 사저로 마련해주었다.

이후 한씨의 2"자산군(성종)"이 보위에 올라 궁궐로 들어가자 장남인 "월산대군"이 물려받았고,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임시로 왕의 거처로 쓰면서 ""이 되었다. 1608"선조"가 죽은 뒤, "광해군"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는데, 그해 완성된 "창덕궁"으로 떠나면서,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붙여주었다,

1897(고종34), "고종""러시아 공사관"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비로소 궁궐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되었다. 1906년엔 "대안문(大安門)"이 수리된 뒤,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하게 됐다. 1907(순종1), "순종" 즉위 후, 궁호가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개명되었다.

경복궁

5. 1592(선조25) 경복궁 소실 1868(고종5) 경복궁 중건 (276년간 폐허)

1592(선조25), "임진왜란"으로 "한양"의 모든 궁궐이 불탔고, 피난을 갔던 "선조"1년 후 한양으로 돌아와, 임시로 "정릉동"에 있던 "월산대군의 사저""행궁"으로 사용하다가 그곳에서 승하했다1608.02, "정릉동행궁 서청"에서 즉위한 "광해군""창덕궁창경궁"을 중건하고 "경희궁"을 지었다.

"광해군""창덕궁"으로 이어 하면서, "정릉동 행궁""경운궁"이라 이름 지었다1623, "인조반정" 이후, "창덕궁"이 법궁이 되고, "경희궁"이 이궁이 되는 새로운 양궐 체제가 정립됐다그러나 역대 국왕들은 "임진왜란"으로 불탄 조선왕조의 1번째 궁궐인 "경복궁"을 국가 재정적인 형편으로 복원하지 못하는 데, 따른 부담을 떨칠 수 없었다.

1863, "고종"이 즉위한 후, "대왕대비(신정왕후)""흥선대원군"에게 "경복궁 중건"을 명했다"임진왜란" , 270여 년간 "폐허"로 두어야 했던 "경복궁"의 면모를 되살린 것이다드디어 1868(고종5), 국왕이 대왕대비를 모시고 "경복궁"으로 이어하면서 "창덕궁"은 다시 이궁이 되었다.

이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1895.10"경복궁 내 건청궁"에서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이듬해 02.11일 왕세자를 데리고,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였다.

"고종""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는 1년 동안, "경운궁"을 수리해 1897년 환궁하고, 그해 08.14일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에 올랐다. 그러나 1907"일제"의 압력으로 "고종"이 퇴위당하고, "황제"에 오른 "순종""창덕궁"으로 이어 한 뒤, "고종"이 머무는 "경운궁""덕수궁(壽宮)"으로 궁호가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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