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 (宗廟)"는 1395.10월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그 해 12월에 시작하여, 이듬해 9월에 마쳤다.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었다가, 1608년 "광해군" 즉위년에 다시 지어졌다. "태조"는 가장 먼저 "종묘ㆍ사직"을 건설하였는데, 유교 이념에 따라 궁궐인 "경복궁"을 중심으로 왼쪽(동쪽)에 "종묘"를, 오른쪽(서쪽)에 "사직"을 다음 해에 세웠다.
◆ 3묘 (三廟)
① 종묘 (宗廟) : 돌아가신 선대왕들의 제사를 지내는 곳 (왕이 효를 다하는 곳)
② 성균관 (成均館)ㆍ문묘 (文廟)ㆍ문선왕묘 (文宣王廟)ㆍ공자묘 (孔子廟)ㆍ대성전 : 공자(孔子)의 신위를 받드는 "묘우(廟宇)"
③ 동묘 (東廟)ㆍ동관왕묘 (東關王廟) : "관우 (중국 촉나라의 장수)"를 모신 "관왕묘"
1. 종묘 (宗廟) : 돌아가신 선대왕들의 제사를 지내는 곳 (왕이 효를 다하는 곳)
조선시대 역대 왕ㆍ왕비ㆍ추존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봉안한 사당
• 위 치 : 서울 종로구 훈정동
• 정전(正殿ㆍ19실(49위)ㆍ국보)ㆍ영녕전(永寧殿)16실(34위)ㆍ보물)ㆍ공신당(공신83위ㆍ정전뜰 앞) / 종묘제례(제사 지내는 의식)ㆍ종묘제례악(세종대왕 작곡ㆍ종묘제례 때 연주하는 음악ㆍ무용ㆍ춤)
종묘는 "정전(正殿)ㆍ태묘(太廟ㆍ태조의 묘(廟)가 있기 때문)"라고도 불린다. 역대 왕ㆍ왕후는 사후에 그 "신주"를 일단 "종묘"에 봉안하였다. (사당(祠堂ㆍ종묘ㆍ가묘): 조상의 신주를 모셔 놓은 집ㆍ신주(神主): 죽은 사람의 이름을 적은 나무패로, 죽은 사람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였음)
"정전(正殿)ㆍ영녕전(永寧殿)"으로 나눠, "정전"에는 정식으로 왕위에 오른 선왕ㆍ왕비의 신주를 순위에 따라 모시고, "영녕전"에는 추존(追尊)된 선왕의 부모나 복위된 왕들을 모셨다. 그리고 정실의 출생이 아닌 왕이 그 사친(私親)을 봉안하는 사당으로서 따로 "궁묘(宮廟)"를 두었다. 1392년, "조선 태조"는 즉위 12일 만인 08.16일 자신의 4대조에게 차례로 "목조ㆍ익조ㆍ도조ㆍ환조"로 왕의 칭호를 올리고, 그 비에게도 각각 "효비ㆍ정비ㆍ경비ㆍ의비"의 존호를 올렸다.
① 건축물
• 정문 주변 : 창엽문(蒼葉門ㆍ정문ㆍ3칸ㆍ측면 2칸에 맞배지붕을 한 3문 형식) 정문을 들어서면, 널찍하고 거친 돌로 깐 "삼도(三道)"가 북으로 길게 나 있다. 가운데가 양 옆보다 약간 높은 凸자형으로, 가운데의 높은 길은 신향로(神香路ㆍ제향 때 향로를 받들고 다니는 길)이고, 동측의 낮은 길은 어로(御路ㆍ임금이 다니는 길), 서측은 세자로(世子路)이다. 이 길은 "어숙실ㆍ정전ㆍ영녕전"으로 이어지는데, "어숙실"에 닿기 전에 오른쪽으로 난 갈림길에는 "망묘루ㆍ향대청"이 있다.
• 망묘루(望廟樓): 왕이 휴식을 취하는 곳
• 향대청 : 종묘에 쓰는 향축폐(香祝幣)와 제사 예불을 보관하고 제향에 나갈 제관들이 대기하던 곳
• 공민왕(恭愍王) 신당 : 고려 공민왕의 신위를 모신 신당으로, 안에는 공민왕ㆍ노국대장공주의 영정ㆍ준마도가 있다. "태조"가 공민왕의 업적을 기리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었다.
• 어숙실(재궁ㆍ어재실(御齋室)): 왕이 목욕재계하고, 의복을 정재하여 세자와 함께 제사 올릴 준비를 하던 곳이다.
• 정전(正殿): 네모나게 담으로 둘러싸여있고, "묘정(廟庭)"을 중심으로 남쪽 담 중앙에는 "신문"이, 동서쪽으로 제례 때 제관이 출입하는 "동문"과 악공과 종사원이 출입하는 "서문"이 각각 있다. "신문"을 들어서면 동서 109m, 남북 69m가 되는 넓은 "묘정 월대"가 펼쳐진다.
• 묘정 월대 : 단의 일종으로, 지면에서 단을 높여 다른 공간과 성격을 달리하며 천상으로 이어지는 공간임을 암시한다. "묘정 월대"의 한가운데로 남북을 잇는 신로(神路)가 길게 나 있다. 남쪽 아래 동서쪽에는 "공신당ㆍ칠사당"이 각각 서 있고, 서북쪽 뒤에는 제향 후 축과 폐를 불사르는 "예감(망료위)"이 있으며, 동문 북쪽으로 "수복방이", 둘레담 밖 서북쪽으로는 "전사청ㆍ제정"이 있다. "정전" 서남쪽으로 "악공청"이 있고, "정전" 서북쪽으로는 "영녕전" 일곽이 있다.
• 하월대 : 제관들이 제사를 드릴 때 대기하는 공간으로, "헌가"가 자리 잡고 일무를 추며, "상월대"는 등가가 자리 잡는 공간이다. "상월대" 위에 설치된 기단에는 길이가 101m인 정전 건물이 있다.
• 악공청 : 종묘제례 때 음악을 연주하는 아악사(雅樂師)들이 대기하고 연습하던 건물
• 제기고 :제향(祭享, 제사) 때 사용하는 각종 그릇, 기구 등을 보관하는 장소
• 영녕전(永寧殿): "종묘 정전"에서 옮겨온 신위를 모신 "종묘의 별묘"다. "영녕전" 제례는 정전보다 1단계 낮게 행해졌으며, 건축 규모 면에서는 "정전"보다 건축 영역이 좁다. "정전"과 달리 "공신당ㆍ칠사당"이 없는데, 이곳에 모신 "목조ㆍ도조ㆍ환조ㆍ익조"는 추존된 왕이므로 신하가 없어서, 함께 "영녕전"에 모시게 되는 왕도 도리상 신하를 데리고 들어갈 수 없다는 이유가 작용한 것이다. 물론 엄연히 "영녕전"에 모셔진 왕의 배향공신도 "종묘 배향공신"이다. 한때 폐위되었다가 "숙종" 때, 복위된 "단종" 신위는 "종묘 영녕전"에 모셔져 있는 반면, 폐위된 "연산군ㆍ광해군"의 신위는 모두에서 제외되었다.
② 정전 (正殿) 배치도 : 19실 (49위)ㆍ공신당 (공신 83위ㆍ정전뜰 앞)
• 제 1 실 :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ㆍ조준ㆍ남은ㆍ의안대군ㆍ남재ㆍ이제ㆍ이지란ㆍ조인옥
• 제 2 실 : 태종 대왕 (太宗大王)ㆍ하륜ㆍ조영무ㆍ정탁ㆍ이천우ㆍ이래
• 제 3 실 : 세종 대왕 (世宗大王)ㆍ양녕대군ㆍ효령대군ㆍ황희ㆍ최윤덕ㆍ허조ㆍ신개ㆍ이수
• 제 4 실 : 세조 대왕 (世祖大王)ㆍ한명회ㆍ권람ㆍ한확
• 제 5 실 : 성종 대왕 (成宗大王)ㆍ숙주ㆍ정창손ㆍ홍응
• 제 6 실 : 중종 대왕 (中宗大王)ㆍ박원종ㆍ성희안ㆍ류순정ㆍ정광필
• 제 7 실 : 선조 대왕 (宣祖大王)ㆍ이황ㆍ이이ㆍ이준경
• 제 8 실 : 인조 대왕 (仁祖大王)ㆍ이원익ㆍ신흠ㆍ김류ㆍ이귀ㆍ신경진ㆍ이서ㆍ능원대군
• 제 9 실 : 효종 대왕 (孝宗大王)ㆍ송시열ㆍ김상헌ㆍ김집ㆍ민정중ㆍ민유중ㆍ인평대군
• 제 10실 : 현종 대왕 (顯宗大王)ㆍ정태화ㆍ김좌명ㆍ김수항ㆍ김만기
• 제 11실 : 숙종 대왕 (肅宗大王)ㆍ김만중ㆍ남구만ㆍ박세채ㆍ윤지완ㆍ최석정ㆍ김석주
• 제 12실 : 영조 대왕 (英祖大王)ㆍ김창집ㆍ최규서ㆍ민진원ㆍ조문명ㆍ김재로
• 제 13실 : 정조 선황제 (正祖宣皇帝)ㆍ김조순ㆍ김종수ㆍ유언호
• 제 14실 : 순조 숙황제 (純祖肅皇帝)ㆍ이시수ㆍ김재찬ㆍ김이교ㆍ조득영ㆍ조만영ㆍ남연군
• 제 15실 : 문조 익황제 (文祖翼皇帝)ㆍ남공철ㆍ조병구ㆍ김로
• 제 16실 : 헌종 성황제 (憲宗成皇帝)ㆍ이상황ㆍ조인영
• 제 17실 : 철종 장황제 (哲宗章皇帝)ㆍ이헌구ㆍ김수근ㆍ익평군
• 제 18실 : 고종 태황제 (高宗太皇帝)ㆍ박규수ㆍ민영환ㆍ신응조ㆍ이돈우
• 제 19실 : 순종 효황제 (純宗孝皇帝)ㆍ송근수ㆍ서정순
③ 영녕전 (永寧殿) 배치도 : 16실 (34위)
• 제 1 실 : 목조 대왕 (穆祖大王) • 제 9 실 : 예종 대왕 (睿宗大王)
• 제 2 실 : 익조 대왕 (翼祖大王) • 제 10실 : 인종 대왕 (仁宗大王)
• 제 3 실 : 도조 대왕 (度祖大王) • 제 11실 : 명종 대왕 (明宗大王)
• 제 4 실 : 환조 대왕 (桓祖大王) • 제 12실 : 원종 대왕 (元宗大王)
• 제 5 실 : 정종 대왕 (定宗大王) • 제 13실 : 경종 대왕 (景宗大王)
• 제 6 실 : 문종 대왕 (文宗大王) • 제 14실 : 진종 소황제 (眞宗昭皇帝)
• 제 7 실 : 단종 대왕 (端宗大王) • 제 15실 : 장조 의황제 (莊祖懿皇帝)
• 제 8 실 : 덕종 대왕 (德宗大王) • 제 16실 : 의민 황태자 영왕 (懿愍皇太子 永王)
④ 종묘ㆍ문묘 동시 종사 6현 : 이언적ㆍ이황ㆍ이이ㆍ송시열ㆍ김집ㆍ박세채
2. 성균관 (成均館)ㆍ문묘 (文廟)ㆍ문선왕묘 (文宣王廟)ㆍ공자묘 (孔子廟)ㆍ대성전
공자(孔子)의 신위를 받드는 "묘우(廟宇)"를 말한다. 여기서 "묘(廟)"는 무덤 묘(墓)가 아니라 위패를 모시고, 제사 드리는 사당(祠堂)을 뜻한다.
• 위 치 : 서울 종로구 성균관로
• "성균관(成均館)ㆍ문묘"는 1398년(태조7)에 창건되었으나 1400년(정종2)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 후 1407년(태종8)에 다시 지은 것이 "임진왜란" 때, 거의 대부분 소실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후, 성균관의 유생들이 전국적으로 자금을 모아, 1601~1602년(선조 34~35)에 "대성전"을 중건하였다.
옛말에 "정승 3명이 죽은 대제학 1명에 미치지 못하고, 대제학 3명이 문묘배향 현인 1명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三政丞이 不如一大提學이요, 三大提學이 不如一文廟配享(賢人)이라) "문묘" 서차는 먼저 "대성지성 문선왕 공자"를 정위로 하여 남쪽을 바라보게 한다. 그 앞에 "4성(안자ㆍ증자ㆍ자사ㆍ맹자)"을 동서로 나누어 배향하였다. "공문 10철ㆍ송조 6현ㆍ우리나라 동방 18현"을 종사하였다.
"성균관"은 한국의 옛 "대학(大學ㆍ고려시대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의 학식)"으로 명칭은 "고려 충선왕" 때, "성균관"으로 개명한 데서 비롯하였다. "공민왕" 때는 "국자감(國子監)"이라 부르다가 곧 "성균관"으로 복귀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이전까지 고려 말ㆍ조선시대에 관리양성을 위한 최고 국립 교육기관으로 기능하였다.
① 공문 10철 : 공자의 뛰어난 제자들
• 덕행 (德行) : 안회 (顔淵)ㆍ민자건 (閔子騫)ㆍ염백우 (冉伯牛)ㆍ중궁 (仲弓) • 언어 (言語) : 재아 (宰我)ㆍ자공 (子貢)
• 정사 (政事) : 염유 (冉有)ㆍ자로 (子路) • 문학 (文學) : 자유( 子游)ㆍ자하 (子夏)
② 송조 6현 : 주돈이ㆍ정호ㆍ정이ㆍ소옹ㆍ장재ㆍ주희
③ 동방 18현 (동국 18현) : 신라ㆍ고려ㆍ조선을 거치면서 최고 정신적 지주에 올라, 문묘에 종사(從祀)된 18명의 한국의 유학자들
• 동배향 제1위 : 홍유후(弘儒侯) 설 총 • 서배향 제1위 : 문창후(文昌侯) 최치원
• 동배향 제2위 : 문성공(文成公) 안 유 • 서배향 제2위 : 문충공(文忠公) 정몽주
• 동배향 제3위 : 문경공(文敬公) 김굉필 • 서배향 제3위 : 문헌공(文憲公) 정여창
• 동배향 제4위 : 문정공(文正公) 조광조 • 서배향 제4위 : 문원공(文元公) 이언적
• 동배향 제5위 : 문순공(文純公) 이 황 • 서배향 제5위 : 문정공(文正公) 김인후
• 동배향 제6위 : 문성공(文成公) 이 이 • 서배향 제6위 : 문간공(文簡公) 성 혼
• 동배향 제7위 : 문원공(文元公) 김장생 • 서배향 제7위 : 문열공(文烈公) 조 헌
• 동배향 제8위 : 문경공(文敬公) 김 집 • 서배향 제8위 : 문정공(文正公) 송시열
• 동배향 제9위 : 문정공(文正公) 송준길 • 서배향 제9위 : 문순공(文純公) 박세채
3. 동묘 (東廟)ㆍ동관왕묘 (東關王廟)
"관우(중국 촉나라의 장수)"를 모신 "관왕묘"이다. "관왕묘"는 서울의 동서남북에 모두 지어졌는데, 그 중 "동관왕묘"가 제일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 "남대문" 밖에는 "동묘" 보다 먼저 생긴 "남관왕묘(1598년 건립)"가 있었으며, "고종" 때에는 "북관왕묘(종로구 명륜동)ㆍ서관왕묘(숭의묘ㆍ서대문구 천연동)"을 지었다. "남관왕묘"는 다른 곳으로 옮겨졌고, "북관왕묘ㆍ서관왕묘"는 "조선총독부"가 철거했다.
• 위 치 : 서울 종로구 숭인동
"임진왜란" 이후에 세워진 "동묘"의 경우에는 "임진왜란" 때 "조선ㆍ명나라"가 왜군을 물리치게 된 까닭이 성스러운 "관우 장군"께 덕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여겨, 곳곳에 "관왕묘"를 세웠고, 이 보고를 받은 "명나라"는 전쟁이 끝난 뒤, 조선에 "관왕묘"를 지으라는 요청을 하였고, 이에 동대문 밖에 1599년 공사를 시작하여 1601년(선조 34년) "동관왕묘"를 완공하였다.
"명나라 황제 신종(神宗)"은 친필 액자를 써서 "사신 만세덕(萬世德)"이 조선을 방문하였다. "관공은 원래 영령이 비범하여 임진왜란 시에 귀국의 음조(陰助)가 지대하였으니 묘를 세워 공을 갚는 것이 마땅하다"는 조서와 함께, "동묘" 건축기금으로 4천금을 보내 설립케 했던 것이다.
현재 건물 안에는 "관우의 목조상"과 그의 친족인 "관평ㆍ주창" 등 4명의 상을 모시고 있다. 규모는 앞면 5칸, 옆면 6칸이고 지붕은 T자형의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으며, 지붕 무게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새의 날개처럼 뻗어 나오게 장식한 "익공계" 양식이다. 평면의 특징은 앞뒤로 긴 직사각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과 옆면과 뒷면의 벽을 벽돌로 쌓았다는 점이다.
건립 동기는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출병하였던 명나라 장수들의 요구와 우리나라의 명에 대한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특히, 당시 명나라의 황제였던 "신종(神宗)"이 "관우"를 "나라와 백성을 수호하는 무신(武神)"으로 선포할 만큼 열렬한 "관우 신앙"의 숭배자였기 때문에, 제후국인 조선에서도 그대로 유지하려 했다는 분석이다.
다음은 관우 운장을 우리나라에서 모시게 된 이유를 알 수 있는 일화이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후원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영접사(迎接使)가 의주까지 마중을 나갔더니 "명장 이여송이"가 "귀국의 군신(軍神)은 누구를 모시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조선은 문(文)만 숭상하고 무(武)를 경시했기 때문에 군신을 모신 일이 없으니 대답하기가 난처했다.
그래서 망설이고 있었는데, 이여송이 재촉하는 바람에 명나라를 다녀온 수신사중에 한 사람이 중국인들이 많이 모시고 있던 "관운장을 모시고 있다"고 엉겁결에 대답해 버렸다. 만일 "이여송"이 사당에 참배하게 되면 낭패이므로 급히 조정에 연락하니, 조정에서 "시급히 관운장의 사당을 설치하라"는 어명이 떨어졌고, 임진왜란 때 관왕묘를 갑자기 세우고 관왕의 위패를 모시게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세워진 "동묘"의 경우, "임진왜란ㆍ정유재란" 때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 장병들이 말하기를 "평양싸움ㆍ홍산싸움"에 "관우"의 영혼이 나타나서 왜병들과 싸우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말했다. 이리하여, 명나라 장군인 "진유격"은 "한양"의 북악산 꼭대기에 관왕묘를 세우고, 석상을 만들어 앉히고, 석상 옆에 관운장이 자기들과 조선을 도운 사실을 기록한 비를 처음으로 세웠다. "남묘"의 경우, "진인(명나라 유격장군)"이 "울산싸움"에서 부상을 입고, 서울에 있는 "남묘"자리에 머물러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명나라 군사들이 싸움터에서 자주 "관우"의 령을 통하여 가호를 받았다고 믿는 데에서 열렬한 "관우" 숭배자인 그는 그곳에 묘를 세워 "관우"의 신상을 안치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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