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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宮闕) : 4대문 (大門)ㆍ4소문 (小門)

by 당대 제일 2022.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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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에는 성곽에 "4대문 (大門)ㆍ4소문 (小門)"이 있고, 그 안에 5대 궁 (경복궁ㆍ경희궁ㆍ경운궁ㆍ창덕궁ㆍ창경궁)을 축조하였다. 동ㆍ서ㆍ남ㆍ북으로 "4대문 (大門)"을 내고, 그 사이에 "4소문 (小門)"을 내었다. 그리고 도성 안의 물이 빠져나가는 "수구문 (水口門)"도 만들었다.

 

1. 4대문 (大門)4소문(小門)

경복궁의 4대문 : 건춘문(동문)영추문(서문)광화문(남문)신무문(북문)

4대문 (大門): 유교사상인 기본 이념인, ""에 근거를 두고 이름지었다.

() : 흥인지문 (興仁之門) 어질고 착함 (인을 일으키는 문) : 동대문 (종로구 종로669) 보물 제1

() : 돈의문 (敦義門) 의로움 (의를 돈독히 하는 문) : 서대문 (종로구 신문로2가 강원산업 건너편 보도 강북삼성부근) 현재 멸실

() : 숭례문 (崇禮門) 공손하고 예의바름 (예를 숭상하는 문) : 남대문 (중구 남대문로4 29) 국보 제1

() : 숙정문 (肅靖門숙청문(肅淸門) 지혜로움 : 북대문 (종로구 삼청동) 1976년 문루복원 (門樓復元)

() : 보신각 믿을 수 있는 신의

북쪽문은 지형이 험하고, 사실상 사람의 왕래가 없어선지, "숙지문(肅智門)"이라 하지 않고, "()"자를 넣어 "숙청문()"이라고 하였으며, 이후 "숙정문(肅靖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숙정문"은 본래 방위에 맞추어 문을 내기는 했지만, 평상시에는 열지 않고 항상 닫아두었다 풍수설에 의해, 북문을 열어 놓으면, 음기(淫氣)가 침범하여 서울 부녀자들의 풍기가 문란해진다 하여, 문을 만들어 놓기만 했을 뿐, 그곳을 통해 드나들지는 않았다 "숙정문"은 축조한지 18년만인 1413년에 폐쇄하였다 대신 "숙정문" 서북쪽으로 약간 비껴, "상명대" 앞쪽에 "홍지문 (弘智門)"을 내고, 그쪽을 통해 다니 하여, "북대문"의 역활을 하게 한 것이다.

4소문 (小門)

동북쪽 : 혜화문 (惠化門弘化門東小門) 종로구 혜화동 34 (혜화동로타리에서 삼선교로 가는 종로성북구 경계)

남동쪽 : 광희문 (光熙門) 중구 광희동 2105-24 (지하철 2호선 동대문 운동장역 3번출구 20m)

서남쪽 : 소의문 (昭義門昭德門西小門) 중구 서소문동 589 (중앙일보사 정원길 마루턱 언덕 멸실됨)

서북쪽 : 창의문 (彰義門紫霞門) 종로구 부암동 (지하철3호선 경복궁역 3번출구 50m 전방 버스 이용경복고 다음에 하차)

1395(태조4),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성곽을 쌓도록 하였다"태조 이성계""정도전" 등 신하들에게 새 도읍지를 알아보라고 명령한다

원래 "태조"가 처음 천도를 결심한 곳은 "계룡산 지역"이었으나, 1393년 초부터 10개월 간 도성공사를 진행하다가, 그 해 말에 "하륜"의 반대로 공사가 중단되었는데, "하륜""계룡산"의 위치가 국토의 남쪽에 치우쳐져 수도로 적절치 않다며 반대했다그 다음 "신촌"을 중심으로 한 "무악"이 논의되다가, "정도전""북악산"을 중심으로 한 남경지역을 적극적으로 추천해 도읍을 결정하고, 한양에 성곽축조를 결정한다

성곽을 어떻게 쌓아야 할 것인가가 "정도전"의 큰 고민거리였는데, 그러던 어느 많은 눈이 내린 날, 다른 곳은 눈이 다 녹았는데, 특별히 눈이 녹지 않는 곳이 있어서 유심히 바라보니 바로 그것이 "북악산인왕산"을 이은 능선이었다고 한다바로 이곳을 따라 성곽을 쌓고, "대문(4)소문(4)"을 만들었다.

남대문

2. 4대문 (大門)4소문 (小門)

① 남대문 : 숭례문 (崇禮門)ㆍ국보 제1호

"오행사상"에서 남쪽은 "예(禮)"에 해당하기에, "예를 숭상한다"는 의미에서 지었다. 현재 "국보 1호"로 지정되어 있고, 1395년(태조4)에 시작하여 1398년에 완성된 후, 1447년(세종29)에 개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현판 글씨"는 "양녕대군(태종의 아들)"이 쓴 것으로, "추사 김정희"도 이 현판글씨를 보고 감탄했다고 한다. 현판은 세로로 글씨를 썼는데, 풍수지리에서는 남쪽은 양기가 충만한 곳인데, "남쪽 관악산"의 형상이 "불(火) 모양"을 하고 있고, 화기(火氣)가 세서 도성에 화재의 위험이 있으므로,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기 위해 세로로 썼다고 한다. 또한, "예를 숭상하는 문"이란 뜻에서 공손한 자세를 나타내는 것이라고도 한다.

"남대문"은 도성에서 "용산강" 등 남쪽으로 나가거나, "마포"에서 "공덕동 고개"를 넘어 들어오는 문으로 가장 왕래가 빈번한 문이었다. "남대문" 밖은 "칠패(七牌ㆍ현재 남대문~서울역 사이)"라 해서 한강에서 들어온 물건들로 커다란 시장이 형성되었고, "청파(靑坡ㆍ현재 청파동)"에도 시장이 있었다.

역사적 애환이 담겨있는데, "병자호란" 때는 "인조"가 남대문으로 나갔다가 청나라 군대가 도달함에 남대문에서 한참동안 머물기도 했고, 1907년 일제가 "군대해산령"을 내렸을 때는 남대문 옆 성벽에서 왜병과 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일제시기에는, "일본 황태자가 숭례문을 통과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강제로 허물어 버리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일제는 남쪽성벽을 부수고 새로운 길을 내고자, 연결된 부분을 철거하여, 현재 "남대문"은 좌우의 팔을 잃은 채,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② 동대문 : 흥인지문 (興仁之門)ㆍ보물 제1호

오행사상에서 동쪽은 "인(仁)"에 해당하기에, "인을 흥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지었다. 처음 동대문을 만들 때는 "흥인문"이라 했으나, 세조 무렵에 "지(之ㆍ갈 지)"자를 넣어 "흥인지문"이라 바꾸었고, 1869년(고종6)에 개축한 것이다.

"흥인지문"은 바깥쪽에 작은 성으로 둘러 쌓여있다. 이런 성을 "옹성(甕城)"이라 하는데, 방어를 위한 것이다. 외적이 문 앞에 왔을 때, 문을 지키는 군사가 성안에서 "옹성"으로 들어가서 외적의 후방에서 공격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동대문"이 있는 서울의 동남쪽은 지세가 낮다. 그래서 풍수지리적으로는 지세가 허(虛)하기 때문에 이름에 "지(之)자"를 넣었고, "옹성"도 둘렀다고 설명한다.

"동대문"은 서울에서 동쪽으로 나가는 문으로, 역시 왕래가 빈번하였다. "강원도ㆍ영남지역"에서 들어오는 물건은 동대문으로 많이 들어왔다. 강원도 산골에서 약초가 동대문을 통해 들어왔기에 동대문 밖 "제기동"에 있는 "경동시장"에 한약방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③ 서대문 : 돈의문 (敦義門) → 현재는 없는, 멸실된 문이다.

오행사상에서 서쪽은 "의(義)"에 해당하기에, "의를 돈독히 한다"는 의미에서 지었다. 태조 때, 도성을 만들면서 서쪽에는 "홍살문"을 만들었다. 왜냐하면 "서대문"은 중국 사신이 들어오는 문이었기 때문이다. 서대문으로 가는 길도 현재 광화문 4거리에서 직선으로 도로를 만들었다고 한다. 1442년(세종4), 서대문의 자리를 조금 남쪽으로 옮겨 "돈의문"을 세웠고, 따라서 길도 구부러지게 되었다.

"돈의문"은 일제 때인 1915년에 완전히 없애버려, 지금은 자리를 알기도 쉽지 않다. "돈의문"은 "세종" 때, 새로 만든 문이었기 때문에 "신문(新門)"이라고도 불렀다. 우리말로는 "새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광화문" 사거리에서 "서대문" 사거리까지의 길 이름은 "신문로(新門路)"라고 한다. 또 "돈의문" 안쪽의 동네는 "새문안"이라 불렀다. 지금 "새문안"이란 지명은 없지만, "새문안교회"라는 교회가 있어 옛 이름을 떠올려 볼 수 있다.

④ 북대문 : 숙정문 (肅靖門)

"북악산" 산속에 있어서, "숙정문"을 보기 쉽지 않다. "경복궁" 동쪽으로 올라가면 "삼청동"에서 "성북동"으로 넘어가는 "삼청터널"이 있는데, 그 위쪽에 있다. "북악스카이웨이" 중간에 있는 휴게소 "팔각정"에서 길건너편 쪽을 보면 산속에 도성이 쭉 보이고 아래쪽에 멀리 "숙정문"이 보인다.

 

3. 소문 (小門)

① 남소문 : 광희문 (光熙門)ㆍ수구문 (水口門)

조선 초기, 장충단공원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길(국립극장ㆍ국악예술학교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 "광희문" 이외에 1457년(세조3), "장충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따로 "남소문"을 축조하였으나, 1469년(예종1)에 "남소문"을 폐지하고, 지금 자리에 "광희문"을 세웠다고 한다.

"광희문"은 "동대문운동장" 옆 남쪽에 있다. "광희문"도 일제 때 헐리고, 아래 부분의 석재만 남아있었는데, 1966년 "광희문" 북쪽의 성을 헐고, 도로를 넓혔으며, 1975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또한 "광희문" 부근에는 "청계천 물"이 도성 밖으로 나가는 "수구문"도 있었다.

② 동소문 : 혜화문 (惠化門)ㆍ홍화문 (弘化門)

1484년(성종15), "창경궁(昌慶宮)"을 건축하고, 정문을 "홍화문"이라 하였으므로, 1511년(중종6)에 "혜화문"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혜화문"은 동북지방인 "함경도ㆍ강원도"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문이었다. 

"혜화문"도 1928년에 헐렸는데, 1994년에 복원하였다. 위쪽은 복원한 도성이지만 아랫부분은 조선시대에 쌓은 것 그대로이다. 넓은 도로에서 그 도성을 연결한 선상에 "혜화문"이 있었다. 고개를 많이 깍아내려 도로를 만든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원래는 그 길 한가운데에 "혜화문"이 있었는데, 지금은 오르막길 오른쪽에 "혜화문"이 복원되어있다.

③ 서소문 : 소의문 (昭義門)ㆍ소덕문 (昭德門) → 현재는 없는, 멸실된 문이다.

일제시대 때, "숭례문~돈의문"까지의 구간을 모두 헐었는데, "소의문"은 1914년에 도시계획 때 철거 되었다. 지금은 건물이 가득 들어차서 문이 있던 자리는 물론 도성의 흔적도 전혀 찾을 수 없다.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지만, 서울 도성은 "돈의문" 쪽에서 이화여고ㆍ배재공원(구, 배재고등학교 자리)"를 거쳐, "서소문"으로 해서 "숭례문(남대문)"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서소문로"로 해서, "아현동ㆍ신촌" 쪽으로 나갈 수 있듯이, "소의문"은 "아현동ㆍ공덕동" 쪽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문으로, 그 길은 "마포ㆍ서강나루"와 통한다. 그렇기에 "마포ㆍ서강" 방면에서 들어오는 물산으로 상업이 번성했던 문이었다.

④ 북소문 : 자하문 (紫霞門)ㆍ창의문(彰義門)

"창의문"은 "북한산" 방면에서 들어오는 문으로, 군사적인 의미가 강한 문이었다. 1623년, "인조반정"때는 반정군이 "창의문"을 열고 도성으로 들어왔으며, 1741년(영조17) 성문을 다시 고쳐 짓고, "인조반정" 공신의 명단을 걸게 하였는데, 지금도 남아 있으며, "자하문"이라고 한다.

일제 때, 다른 소문들은 모두 헐렸지만, "창의문"은 헐리지 않고 살아남았다. "자하터널" 위쪽에, 옛길(경복궁 담장을 따라가는 길로 가면 그 길로 통한다)이 있고, 그 길옆에 "창의문"이 있다. "창의문"에 서면, 남산과 서울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경복궁"이 내려다보인다.

"창의문" 밖에는 북한산성을 지키는 "총융청"이란 군대가 주둔하였다. 조선시대 때, 창고가 있어서 "평창동(平倉洞)"이 되었고, "총융청 군대"가 있다가 군영을 옮겨서 처음에 총융청이 있던 곳을 "구기동(舊基洞ㆍ옛 터란 의미)"이라 했고, 새로 옮긴 곳을 "신영동(新營洞ㆍ새로운 군영이란 뜻)"이라 했다. "상명대학" 앞 삼거리에서 "홍은동" 쪽을 보면 산등성이로 성이 지나는데 "탕춘대성(湯春臺城)"이다. "탕춘대성"은 "인조" 때, 서울을 방위하기 위해 쌓은 성으로,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려고 만든 성이었다.

⑤ 창의문 (彰義門) 밖 : 한북문 (漢北門)ㆍ홍지문 (弘智門)

"창의문" 밖, "탕춘대성(湯春臺城)"아래, "개천(모래내)"가에는 "한북문(漢北門ㆍ홍지문(弘智門))"이 있다. 북쪽 문인 "숙정문"은 평소에는 닫아두어, 거의 사용하지 않기에, "탕춘대성의 한북문"에 북쪽에 해당하는 "지(智)"자를 넣은 것이다.

"경복궁"과 가까우면서도 조용한 곳이었다. 그래서 "세종" 때 집현전학자들에게 "사가독서(賜假讀書ㆍ휴가를 주어 책을 읽게 한 제도)"를 실시할 때, "집현전 학자들"에게 그곳에 가서 공부하게 했던 곳이고, 개천 물이 맑아 종이를 만드는 공장인 "조지서(造紙署)"도 있었다. "사가독서"를 하던 곳은 "신영동 신영초등학교" 자리이다.

개천은 경치가 좋기로 손꼽히던 곳이었다. 그곳에 있던 "탕춘대(湯春臺)"란 바위는, 놀기 좋아했던 "연산군"이 연회를 베풀며 놀던 곳이다. "추사 김정희"의 제자로, 난초를 잘 치는 "흥선대원군"의 별장도 이곳에 있었다. 원래는 세도정치를 하던 "안동 김씨"의 별장이었는데,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후에 차지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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