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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건- 상식 • 논쟁 (개화파 • 북학파)

조선 ② "임금 (王)ㆍ세자"의 독살설 ②

by 당대 제일 2022.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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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高宗ㆍ1852~1919ㆍ재위 1863~1907(44년)ㆍ67세)"은 "덕수궁 함녕전(침전)"에서 무엇인가를 마시다가 갑자기 쓰러졌는데, 시신 상태는 팔ㆍ다리가 심하게 부어올라 바지를 찢어야만 했고, 이가 빠져 있고, 혀가 닳아져 있었으며, 30cm 가량의 검은 줄이 목에서 복부까지 나 있었다.

 

1. 효종 (孝宗1619~ 1659재위 1649~1659(10)40): 17대 왕

 공식 사인 : "종기" "어의 신가귀"가 침으로 터뜨렸다가, "혈락"을 침범하여 과다 출혈사      타살 : 서인 영수인 송시열(이조판서병조판서)사대부(조선 지배세력)의 살해

"효종" "북벌"을 준비하던 재위 10년에 의문사 했다. "송시열"과 독대한 지 2개월이 지난 1659.05 머리에 작은 "종기"가 발생하여, "신가귀의 침"을 맞았는데 피가 멈추지 않고 출혈되어 사망했다"신가귀"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수전증"이 있는 환자로, 왕이 명령하여 침을 놓았는데, 혈맥에 침을 놓아 피가 쏟아지면서 왕은 곧 사망했다. 당시 "종기"의 치료를 놓고, 침으로 피를 빼내어 독기를 제거하자는 "신가귀"와 머리에 경솔히 침을 놓을 수 없다는 "유후성"의 의견이 갈린다.

이에 "효종"이 신가귀의 의견을 취하여 침을 놓았는데, 침구멍에서 피가 쏟아져 왕이 "이제 정신이 좀 든다. 가귀가 아니면 큰일 날 뻔했다"라 하였으나, "신가귀"의 수전증으로 인해, 침이 혈락(血絡) 범하여 피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쏟아져 나온 것이다졸지에 "효종"은 믿었던 "신가귀의 의료사고"로 인한 과다출혈로 승하하고, 책임자인 "신가귀"는 당초 참형에 처해질 예정이었지만, "효종"의 뒤를 이은 "현종"의 배려로 대신 "교수형"에 처해졌다.

"유후성"은 유배형에 처해졌다가, 이후에 "현종"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이후 다시 "어의"로 복귀했다"신가귀 침을 놓지 못하는 의원이었다"는 말이 있지만, "현종실록" 보면, "효종"은 과거 "신가귀가 수전증이 있음에도 침을 잘 놓았다"는 평가를 할 정도로 침놓는 솜씨는 나빴다고 볼 수 없다그렇기에 "신가귀"를 불러 침을 놓게 했던 것이다.

예전부터 "수전증"이 있던 "신가귀"는 당시 "효종"을 치료할 때, 본인 역시 오랜 병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러한 상황이 겹쳐 "혈락"을 범했을 가능성이 높다1626(인조4) "봉림대군(鳳林大君)"에 봉해지고, "병자호란" ,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 볼모(인질)로 잡혀간다. 볼모로 있는 동안 "청나라" "산해관서역"을 치려고 할 때, "소현세자"에게 동행을 요구하자, 자신이 가겠다고 할 정도로,  "소현세자" 지키려 했다

"효종" "북벌"을 위해 체력단련을 하였고, 좋아하던 술을 끊고, 여색도 멀리하며, 기마궁술무도 연마에 시간을 투자했다. "북벌"을 위해 10년 더 준비한다면, "청국"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10년 안에, "정예 포수포병 10만 명"을 양성하여 "청국"이 방심할 때 기습할 계획이었다그러면 중국 민족인 "한족"이 함께 공격할 것이고, "청국"으로 잡혀간 "조선" 포로 수만 명이 "청국" 내에서 호응한다면, 한족 인구의 1% 미만이며, 조선 인구의 10%도 안 되는 인구 100여 만의 "만주족 청국"은 붕괴할 것이라는 확신에 전략을 수립했다. 이 전략계획은 성공 가능성이 컸다.

1659.03(효종10), "효종"은 백성의 복지 우선을 주장하면서, 속마음으로는 "북벌"에 반대하던 "서인" 지도자 "송시열" "북벌"에 관한 대타협을 위해 독대를 했다조선은 왕과 신하가 단둘이 만나는 것을 "경국대전"에서 규제하고 있었다"효종"은 법규를 위반해 가며, "송시열"과 독대를 한 셈이었다.

"송시열"에게 "이조판서병조판서"를 겸하는 권력을 주는 대신, "북벌 준비"의 전 책임을 맡기려 했다"효종" "산당"을 중심으로 한 "송시열 일파"를 아우르면서도 왕권 강화를 시도한 모습은 자주 보인다"송시열"을 필두로 하는 "산당"과 손을 잡고 "북벌"을 추진했다. "송시열"은 실제로는 "북벌"에 심히 소극적이었으며, "효종" "북벌의 당위성"을 설파할 때도 수신(修身)만을 권할 따름이었다"송시열" "북벌파였다"는 이미지는 사관마저 물러가게 하고, "효종송시열" 둘만이 독대한 "기해독대" 내용을 "송시열"이 후일에 진술한 바에 근거한 것이다.

그래서 "북벌"은 군사력을 기르기 위한 속임수였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학자들은 "효종" "송시열"과의 정치적 제휴를 통해, "사림 세력"의 반발을 억제하고, 이들 세력들을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데, "북벌"을 이용했다고 본다. 반면, "송시열" "북벌은 가당치 않은 일"이라 염두에도 없지만, "효종"의 지지를 앞세워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데 열성을 다했다는 것이다 "효종" "송시열"을 전면에 내세워 불안한 정국과 민심을 추스르려 했고, 재야 영수인 "송시열"은 자신의 기반인 "서인들"을 등용하는데 앞장섰다는 것이다.

2. 현종 (顯宗1641~ 1674재위 1659~1674(15)33): 18대 왕

 공식 사인 : 학질과로       타살 : 서인 영수산당파 송시열(이조판서병조판서)사대부(조선 지배세력)의 살해

1674.09.17, 오후 3~5시가 되자, 건강하던 "현종"의 병세가 급속히 악화되었다결국 오후 9~11시에, "학질과로"로 인하여, "창덕궁"에서 승하하였다"효종" 승하하고, "현종" 즉위하자, 뜻밖의 긴 논쟁이 일어난다"인조" 1째 부인 "인열왕후 한씨"이 죽고, 우여곡절 끝에 재혼을 하였으나, 2번째 왕비 "자의대비(장렬왕후 조씨인조 2번째 왕비효종의 계모)" "인조"보다 무려 29살이나 어렸다.

 1차 논쟁 : 효종의 사망

"자의대비"가 상복을 몇 년 동안 입어야할지가 문제였다. 경우에 따라 입는 기간이 달라진다. 이유는 "효종"의 어머니가 "자의대비"이나, 그녀는 "효종"의 친어머니가 아니었다 그런데 "자의대비"처럼 "왕의 새어머니"가 상복을 입게 되는 일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얼마나 입어야할지 정하지 못했다. "현종"은 신하들에게 질문했다.

 송시열의 주장 : 1년만 상복을 입히자고 했다 그 이유는 "자의대비" "효종"의 친어머니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정태화의 주장 : 영의정 "정태화" "자의대비" "효종"의 어머니는 맞으니까, 원래 관습대로 3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차 논쟁의 결과 : "송시열"의 주장을 따라, "자의대비" 1년간 상복을 입었다.

 2차 논쟁 : 인선왕후(효종 왕비현종 모친)의 사망

1674(현종15), "인선왕후(효종 왕비현종 모친)" 죽자, "자의대비"가 며느리의 상중에 상복을 얼마동안 입을 것인가를 두고, 다시 "예송논쟁(2)" 일어났다"서인(송시열)" "기년복(1년 복)"으로 정했다가, "대공복(9개월 복)"으로 수정하자, "남인" "공복(9개월 복)"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기년복(1년 복)"을 주장하였다이때 "현종" "서인"의 주장을 물리치고, "남인의 기년복(1년 복)"을 채택하여, "서인 정권"이 무너지고 "남인"이 실권을 장악했다.(갑인예송)

"현종"은 이후, "2번 다시 예송과 관련한 논쟁을 벌일 시에 좌시하지 않겠다."고 경고하였고, "숙종" "경신환국"을 일으키기 전까지, 6년간 "남인"이 권력을 독점하였다"송시열" "숙종(19대 왕)"에 의해 파직되고 만다시어머니 "자의대비" 상복을 몇 년간 입어야하나?

 송시열의 주장 : 9개월만 상복을 입히자고 했다 그러나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는 정치적 위기까지 겪는다.

 2차 논쟁의 결과 : "송시열" "현종" 독살설?

논쟁이 끝날 때 쯤, "현종"이 승하하는데, "송시열"의 독살로 죽었다는 소문이 떠돈다 "현종" "송시열"의 주장에 반대했으니, 그런 소문이 떠돈 것이다.

3.  (景宗1688~ 1724재위 1720~1724(4)36): 20대 왕 (장희빈 아들)

 공식 사인 : "게장생감"을 먹은 후, 심각한 복통설사구토       타살 : 영조의 독살

1724.10.06, "경종"은 식사로 "게장생감"을 먹은 후, 심각한 "복통설사구토" 증상이 나타났다10.10, 의식마저 혼미해진 상황에서, 18시경에 왕세제 "연잉군(영조英祖1694~1776재위 1724 ~1776(52)8221대 왕)" "인삼부자(附子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는 투구꽃의 덩이뿌리)" " 올렸다. 10.11일 오전 3시 경, "경종"은 훙서하였다.

"이공균" 등 의원들이 "인삼"을 쓰면, "경종"의 기()를 되돌리지 못하여 상태는 더 악화될 것이라며 반대했지만, "연잉군" "인삼부자"를 처방했고, "경종"의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경종"이 갑자기 사망하자, "병사가 아닌 독살 당한 것"이라는 음모론이 "심유현(단의왕후(경종 정비) 남동생)"  "소론 과격파"를 통해 돌기 시작했다.

"소론 과격파" "삼수의 변" 등 과거 "경종 암살세력"과 연관이 있던 "왕세제 연잉군"을 주목했고, 특히 "연잉군"이 올린 "인삼부자"를 먹고, 사망한 점을 주목해, "연잉군이 경종을 독살했다"고 주장했다이후 소문이 와전돼, "연잉군" 식사로 "게장생감을 먹여 죽였다"는 형태로 소문이 퍼진다("경종"이 게장과 생감을 먹은 뒤, 앓다가 죽은 것은 실록 등의 기록에서 확인되는 사실이지만, 그것을 "왕세제 연잉군"이 올렸다는 기록은 없고, 가능성도 부족하다)

"경종" 사후, 독살설은 "소론"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김일경의 모의사건이천해의 난동이인좌의 난(청주성을 중심으로 벌어진 난)나주괘서사건" 등 오랜 시간 "영조" 정통성 시비문제로 비화되었다그 중, "신치운(나주 괘서사건 주모자)" "영조"가 친국 할 때, "신은 갑진년(1724)부터 게장을 먹지 않습니다."라며, "경종 독살설을 비꼬아서 대답했고, "영조" 분통하여 눈물을 흘릴 정도였으며, 1754(영조30), "영조" "경종"을 자신이 독살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해명하는 "천의소감"을 남겼다.

4. 효장세자 (孝章世子진종(眞宗)1719~17289): 영조 서장자정조 양부정빈 이씨 아들 / 사도세자 (思悼世子장조(莊祖1735~176227): 영조 서차자정조 생부

 공식 사인 : 열병안질환           타살 : 궁녀 순정 등에 의한 독살

"영조"의 서장자(庶長子)이며, 사후에 태어나는 "사도세자"는 이복동생이었다어머니 "정빈 이씨" "증 좌찬성 이준철"의 딸로, "동궁전 나인"으로 있다가 아직 왕자이던 "영조" 첩이 되었다. "영조" 즉위 다음해 인 1725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1725.05(영조1) "부스럼"을 앓았고 6월에 나았다. 06.08일의 "약방제조"의 보고에 의하면 "부스럼이 아닌 수두(水痘) 같은 병이었다."고도 한다. 그밖에 한때 "홍역"을 앓기도 했다1728.10.28(영조4) 무렵, 갑자기 가벼운 미열이 올랐다가, 11월초 경, 병을 앓게 되어 누워 있었으며, "안질(眼疾)"도 겹치게 되었다1728.11.16(영조4), "창경궁 진수당"에서 "열병안질환" 등의 합병증으로 훙서하였다.

"영조"는 친히 그의 임종을 지켰다고 하는데, 그는 병석에 누워서도 마지막까지 ""를 다하고 가지 못함을 애통해하였다고 한다"독살설"이 돌기도 하였지만 불확실하나, 다만 1729.03.09(영조5), "순정" 등 궁녀 여럿이 세자옹주들에게 독을 쓰고 저주했던 사실이 발각되어, "영조"의 친국을 받고 처참되었다.

5. 정조 (正祖1752~ 1800재위 1776~1800(24)48): 22대 왕사도세자 아들

 공식 사인 : "연훈방(煙熏方)"을 써서 "수은"에 중독 사망    타살 : 정순왕후 김씨(영조 계비)에 의한 독살설

1800.07월 중순(정조24) "정조" "종기"를 앓았다. 하루 이틀이 지나자 "종기"는 등으로 번졌고, 기가 점점 커지기 시작하여, "피고름"이 나올 정도로 상태가 눈에 띄게 악화되었다"심환지(좌의정)이시수(우의정)"의 지휘아래 내의원들이 온갖 처방을 하여 치료하였고, "정조" 역시 매번 처방을 묻고 확인하였다. "정조"는 차도가 없자, "수은 증기"를 쐬는 "연훈방(煙熏方)"을 받기로 하였고, "연훈방"을 시술하면서 "탕약"도 곁들였다그러나 병세는 더욱 악화하여, 미음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결국 혼수상태에 빠진 "정조" 08.18일 오후 5~7시에 "창경궁 영춘헌" 승하하였다"정조"가 승하하기에 앞서, "양주장단" 등 고을에서 한창 잘 자라던 벼 포기가 어느 날 갑자기 하얗게 죽어, 노인들이 그것을 보고 슬퍼하며, "이것은 이른바 거상도(居喪稻상복을 입은 벼)이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대상(大喪)"이 났다.

사후 "독살설"이 제기되었는데, "연훈방"을 써서 "수은에 중독되어 죽었다"는 것이다더욱이 이 방법을 주선한 "심환지(좌의정)이시수(우의정)" "노론 벽파"라는 것과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1745~180560영조 계비)" "정조"를 독대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정조가 사망하였다"는 것이 이러한 독살설을 부추겼다

"남인"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정황 때문에, "정조가 독살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파다하였다08.18, "장현광(경상도 안동의 남인 출신 거족)"의 후손 "장현경"과 친족인 "장시경" 3형제 등은 "정조의 독살을 주장하며, 원수를 갚겠다."고 거병하였다가, 실패하고 일족이 처형당하였다"정약용"은 여성 유배인이 현지에서 성희롱을 당하는 일을 개탄한 "고금도장씨녀자사(紀古今島張氏女子事)"를 적으면서, "심환지" "심인"을 추천하여 "정조"를 독살하였다는 의심을 남겼다.

"정조" 보위에 오른 후에도 안위는 그다지 안전치 못하여,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둘 정도다"장용영(壯勇營)" 1785 "정조"가 만든 호위군대로, 대장 칭호는 "장용사(壯勇使)"이다초기에는 "장용위(壯勇衛)"였으나, 1788 "장용영"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500여 명의 군사를 "5()"로 나눠 만들었고, 1793 "한양의 내영(內營)수원 화성의 외영(外營)"으로 나눴다. 다른 군영보다 규모가 컸다.

1795, 다른 군영의 병사들을 편입하여, "5() 23()"의 큰 규모로 군대를 편제하였다왕권 강화에 큰 역할을 하였으나, 1800 "정조"가 승하하고 왕권이 급격히 약화되면서, 1802년 당시 "정순왕후(대왕대비)"에 의해 폐지되었다.

6. 문효세자 (文孝世子1782~ 17864): 정조 장자순조(23)의 이복형

 공식 사인 : 홍역         타살 : 내의원들의 소홀독살

"노론세력" "천민" 출신의 "의빈 성씨"서 태어난 "원자(문효세자)"를 두고, 출신정통성을 문제 삼아, "세자책봉"을 반대하는데, 이런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정조"는 기어이 "원자"를 세자로 책봉한다하지만 안타깝게도 1786(정조10) 4살의 어린 나이로 사망하는데, 죽음을 두고 몇 가지 가설이 있다.

 "홍역"으로 인한 사망        "홍역"에 걸렸으나, 거의 완치될 무렵 독살 당함.    원래 나약하여, 병이 많았으며, "노론"의 사주를 받은 "내의원"들이 소홀했음.

7. 의빈 성씨 (성덕임(德任)宜嬪 成氏1753~ 178633): 정조 후궁문효세자 모

 공식 사인 : 출산 시 사망        타살 : 독살

1762(영조38)이후 "궁녀"로 입궁했고, "헌경왕후(정조 모친혜경궁 홍씨)"가 친히 길렀다.  1766(영조42), 당시 왕세손이었던 "정조"가 승은을 내리자, 사양했다"정조"는 뜻은 받아들이되, 그 때부터 "후궁"의 반열에 뒀다. 1780(정조4), "정조"가 다시 승은을 내리자 거듭 사양했고, 이에 "정조" "의빈"의 하인을 꾸짖고 벌을 내리자 후궁이 되었다.

2번의 유산을 겪고, "문효세자옹주"를 낳았으나 모두 요절했으며, 1786(정조10) "문효세자"가 죽은 해에, "창덕궁 중희당"에서 3번째 아이를 출산하다가, "만삭"으로 사망했다이에 안타까운 "정조"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제부터 국사를 의탁할 데가 더욱 없게 되었다"라며, 상실감을 드러냈다.

"실록"에 따르면, 처음 "의빈 성씨"가 임신했을 때, 신하가 "호산청(護産廳후궁의 출산을 도와주는 기관)을 설치하자고 청하자, "정조"가 출산할 달을 기다려 하라고 명했던 만큼, 건강상태가 원래 안 좋았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이므로, 그녀의 죽음에 의문이 생긴다그녀가 죽은 후, "대체로 의빈의 병 증세가 심상치 않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무슨 빌미가 있는 가 의심하였다."라고 "정조실록"에 기록된 바, "정조" 또한 그녀의 죽음에 누군가 개입한 것으로 의심한 듯하다.

8. 효명세자 (孝明世子문조(文祖)1809~ 183021): 순조 세자헌종 부친고종 양부

 공식 사인 : 각혈            타살 : "안동 김씨" 세력에 의한 독살

1827, 부왕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했으나, 청정 4년만인 1830년 병사했다3살 때 "수두", 13살 때 "홍역"을 앓긴 했지만, 왕자(헌종憲宗1827~1849재위 1834~1849(15)2224대 왕)도 순조롭게 낳으며, 건강에 큰 문제는 없는 듯 했다1830, "각혈"을 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죽음으로써, 독살이 아니냐는 의문이 남게 된다.

18살이 되었을 때, "순조"가 건강이 안 좋아졌다는 이유로 "대리청정"을 하게 된다문학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갖추고 있던, "효명세자" "청정"에 나서기 1년 전부터, "경세"와 관련한 책을 필사하기도 했다이는 "순조"로부터 "청정"을 통보를 받고서, 미리 "대리청정"에 대비한 행동으로 보인다. "청정"을 의욕적으로 실시했는데, 먼저 "안동 김씨" 계열을 배제시키고, 새 인물들을 다양하게 등용케 하였다"효명세자" "안동 김씨" 권력을 약화시키고, "풍양 조씨"를 등용하게 하면서, 권력을 잃을까 우려한 "안동 김씨" 세력이 주도하여, "효명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9. 고종 (高宗1852~1919재위 1863~1907(44)67): 26대 왕

 공식 사인 : 뇌일혈 (조선총독부 발표)      타살 : 비소 성분의 독살설 의심 인산일(장례일 31) 31 만세운동

01.21 "덕수궁 함녕전(침전)"에서 고종이 사망 독살설 소문 뇌일혈 (01.22일 조선총독부 발표 01.21 아침 6, 덕수궁에서 무엇인가를 마시다가 갑자기 쓰러졌는데, 뇌일혈 또는 심장마비가 사인이라는 "자연사설"이 있는 반면아침에 한약식혜커피 등을 마신 뒤 이들 음료에 들어 있던 독 때문에 사망했다는 주장이 있다.

고종 시신 상태 : 다리가 심하게 부어올라 바지를 찢어야만 했고, 이가 빠져 있고, 혀가 닳아져 있었으며, 30cm 가량의 검은 줄이 목에서 복부까지 나 있었다.

10. 순종 (純宗1874~1926재위 1910~1926(16)52): 27대 왕

 공식 사인 : 심장마비 (라디오를 들으면서 심장마비로 사망)    인산일(장례일 610) 610 만세운동

몸이 허약했고, 선천적인 자폐아가 아니었으나, 남자 구실을 못했다고 한다. 김홍륙 (친일파역관? ~ 1898)이 고종의 각별한 총애와 러시아의 세력을 배경으로 온갖 전횡을 자행하던 중, 러시아와의 통상에서 거액을 착복한 사실이 드러나서 전남 신안군 흑산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러나 떠나기 직전인 1898.07.26, 원한을 품고, 고종이 즐겨 마시는 커피에 독약(아편)을 넣어 살해하려고 한 독살사건이 발각되자, 반역죄로 교수형에 처해진다고종은 냄새가 이상하여 마시지 않았는데, 황태자는 마시다가 토하고 기절했다약의 부작용으로 총명했던 순종은 저능아자폐아로 전락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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