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실록"에는 1457년, "단종 (端宗ㆍ1441~1457ㆍ재위 1452~1455(3년)ㆍ16세)"이 16살의 어린 나이로 자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중종" 때까지 장례나 무덤도 제대로 못한 점으로 보아, "세조실록" 기록은 거짓말이고, "세조"의 사약을 받은 것은 확실해 보인다.
1. 문종 (文宗ㆍ1414~ 1452ㆍ재위 1450~1452(2년)ㆍ38세): 5대 왕
• 공식 사인 : 종기 • 타살 : "명의 전순의"의 의료 과실
조선 국왕들의 고질적인 사망 1순위인 "종기"로 인하여 승하한다. 당시에는 이 "종기"가 "폐혈증" 같은 합병증을 유발하여, 심각한 죽음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족질을 앓던 "예종"이 며칠 만에 바로 승하한 일이다) 그래서 이 "종기"에 대해서는 상당히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했고, 특히 가장 중요한 것이 "식습관 조절"이었다. 즉, 먹는 것을 통해, "종기 고름을 통제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당시 최고 명의였던 "전순의"는, 문종의 종기를 대하는 방법에 있어서, 다소 이해 못할 처치를 한다. 그러나 "전순의"는 큰 죄에도 불구하고, 후에 "종2품"에 오른다. 즉, "종기"를 다스리는데 오히려 해로운 "음식(꿩고기)"등을 진상하는가 하면, "활쏘기" 등 "열을 내는 활동"은 당연히 삼가게 하는 것이 이치에 맞았지만, "전순의"는 오히려 "문종"에게 "화를 돋는 활동"을 적극 권유한다.
2. 단종 (端宗ㆍ1441~ 1457ㆍ재위 1452~1455(3년)ㆍ16세): 6대 왕
• 공식 사인 : 자살 • 독살 : "세조"의 사약
1457년 "세조실록"에는 "단종"이 16살의 어린 나이로 자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중종" 때까지 장례나 무덤도 제대로 못한 점으로 보아, "세조실록" 기록은 거짓말이고 타살이 확실해 보이며, "선조실록"에 "기대승"이 "단종"에게 사약을 내린 증거로 "의금부의 공사"와 처형당시, 영월주민들의 증언 기록을 증거로 내세운 것으로 보아, "단종"이 사약을 받은 것은 확실해 보인다.
비공식적으로 사약을 준 뒤 은폐했다는 설, "단종"이 사약을 거부하자 목을 졸라 죽였다는 설, 본인이 스스로 숙부 "세조"가 내린 사약을 마실 수 없다면서, 스스로 목을 매 자살했다는 설 등 다양한 설들이 있다. 일단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것 자체는 거의 사실인 듯 하다.
3. 예종 (睿宗ㆍ1450~ 1469ㆍ재위 1468~1469(1년)ㆍ19세): 8대 왕
• 공식 사인 : 족질 (足疾ㆍ발에 생기는 병)ㆍ"족질"에 자주 시달린 적이 있었다 한다 • 독살 : 한명회ㆍ신숙주
"예종"이 총명하다는 내용은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하지만 아쉬운 점은 젊은 혈기에 강한 추진력이 있었던 반면, 조심성ㆍ 준비성이 매우 적었던 것이다. 특히 "한명회ㆍ신숙주"가 너무 노련한 반면, "예종" 편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은 무엇보다 큰 약점이었다. 의욕적으로 일을 추진하던 "예종"이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은 것에 대해, 여러 설이 있으며 심지어 "복상사"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① 시신의 변색
1469년 "성종"이 즉위한 후, "한명회ㆍ신숙주" 등 9명의 원상(院相)과 승지 등이 어의를 처벌해야 한다고, "대왕대비 정희왕후"에게 주청한다. (성종실록, 성종 즉위년 12.01일) "어제 염습할 때, 대행왕(예종)의 옥체가 이미 변색된 것을 보았습니다. 훙서한 지 겨우 이틀인데 이와 같다는 것은 반드시 병환이 오래 되었는데도 미처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시신이 이틀도 안 돼 변색되었다는 것은 약물 중독 때, 일어나는 현상으로 보이는데, 더 큰 의문은 "대왕대비 정희왕후"가 오히려 "어의 권찬"을 옹호했다는 사실이다. 대왕대비는 "대행왕(예종)께서는 족질에 대한 의원의 치료 요청을 거절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2개월 후에 "권찬"을 "가선대부 현복군(玄福君)"으로 승진시킨 것이다.
② 예종실록 의문 (구공신(한명회ㆍ신숙주ㆍ최항)등이 중심이 되어 편찬)
"예종실록"에서는 "예종이 11.18일부터 정사를 돌보지 못했다"고 되어 있는데, 하지만 사료를 보면 계속 정사를 돌본 것을 알 수 있다.
21일, 도승지 권감이 속미면(栗未)을 올리자 음식을 하사했고, 22일, 간부와 함께 남편을 죽인 정금에게 사형을 명했고, 24일, 경기도 양주의 미곡(米穀)에 대한 청과 관련된 일, 25일, 예조의 누각(물시계)과 관련된 일, 27일, 여진족 마금파로와 관련된 일 등을 했는데, "예종"은 28일 갑자기 훙서한 것이다.
③ 주상(主喪)을 정하는 과정 : 왕의 서열상, "자을신 군 (성종ㆍ한명회 사위)"는 서열 3위였다.
왕이 훙서한 후에는 승지나 환관이 나서서, 의견을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갑자기 "정현조(정인지 아들)"이 "대왕대비 정희왕후"에게 가서, "주상(主喪)을 빨리 정해야 합니다." 라고, 원상들의 뜻을 전한 것이다. 그리고 "대왕대비ㆍ신숙주"의 사이를 "정현교"가 몇 차례 왕래한 후, "정희왕후"는 원상들을 불러 의논한다. "누구를 주상자(主喪者)로 하면 좋겠소?" "신들이 어찌 감히 아뢸 수 있겠습니까? 전교를 내려 주십시오."라 청하자, 이에 "정희왕후"가 "자을신 군"을 거명했고, "진실로 마땅합니다."라고 모두 입을 모았다.
정상적으로는 "제안대군(예종 아들)이나, 월산군(세조 장손ㆍ죽은 의경세자(예종 형) 장남)"이 거명되어야 했는데, "자을신 군(13세ㆍ죽은 의경세자 차남)"을 후사로 한 것이다. 그런데 아무 이견 없이 모두 동의한 것은 그전에 "정현교"가 "신숙주"와 원상들의 뜻을 이미 "대왕대비 정희왕후"와 조율을 마친 것이었다. 즉, "정희왕후"와 공신들은 "한명회"의 사위인 "자을신 군"을 왕으로 세우기로 합의를 끝낸 것이었다. 절대적인 권련을 가진 "한명회ㆍ신숙주" 등 구공신들의 의견을 반대할 사람은 당시 조선에 없었다.
④ 승하한 당일의 즉위식
"예종"이 승하한 당일, 조정 신료들 모두 슬픔에 잠기고 경황이 없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문종"은 "세종"이 승하한 후 5일 뒤에, "단종"은 "문종"이 승하한 후 4일 후에 즉위식을 가졌다. 그런데 "한명회ㆍ신숙주" 등은 "성종 즉위식"을 "예종 승하 당일" 강행한 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정희왕후"와 원상들이 의논을 마친 후, "신숙주"는 "사정전" 뒤뜰로 가서 후속 대책을 논의하겠다고 청했다. 그리고 "도승지 권감"을 통해, "당일 즉위한 후, 교서를 반포해 백성에게 알리겠다."고 대신들에게 알린다. "신숙주"는 "사관"의 눈을 피해 뒤뜰에서 의논했으며, 당일 날 쫓기듯이 급히 즉위식을 하도록 "도승지 권감"에게 일을 지시한 것이다.
⑤ 자을신 군 (성종ㆍ한명회 사위)의 입궐
너무 순조롭게 느껴질 정도의 완벽한 준비였다. 모든 대신들은 왕이 갑자기 승하했음에도 슬픔도 당황함도 없이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자을신 군"의 입궐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다. (성종실록, 즉위년 11.28) "위사를 보내 자산군(者山君)에게 아뢰기도 전에, 자산군이 이미 대궐 안에 들어왔다."
"자을신 군"이 왕이 될 것을 어찌 알고, 미리 궐에 들어와 있었을까? "예종 죽음"부터 "성종 즉위"까지 모든 각본이 정해져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13세의 어린 왕, 조선 9대 왕 "성종"의 즉위식은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모든 권력은 "한명회ㆍ신숙주" 등의 손에 들어갔고, 그들 세상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즉위 1개월 후인 1470.01.11일, "한명회ㆍ신숙주"는 공신이 관직 매매를 하는 "분경(奔競)"을 금지한 제도를 철폐해 달라고 요청한다. 합법적으로 비리를 저지르겠다는 뜻이었다.
4. 연산군 (燕山君ㆍ1476~ 1506ㆍ재위 1494~1506(12년)ㆍ30세): 10대 왕ㆍ성종 장자ㆍ폐비 윤씨 소생
• 공식 사인 : 학질(말라리아) • 타살 : ?
폐위된 후, "군"으로 강등되어 유배되었을 때, 의혹이 제기되었다. 1506.09.24일, "연산군" 아들인 "폐세자ㆍ창녕대군ㆍ양평군"이 먼저 사사된다. 후일 만약 일어날 일을 우선적으로 제거하기 위해서, "연산군"의 핏줄들을 모두 저세상으로 보내버린 것이다.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어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연산군"에게 있어 아들들의 죽음은 자신의 죽음만큼 처절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반정세력의 "연산군 제거 작전"은 보다 치밀하고 섬세하게 진행된다.
"연산군 일가"가 일시에 사약을 마시고, 죽은 지 2개월이 지난 11.08일 "연산군" 역시 병사했다는 소식이 "중종"에게 전달된다. 사인은 "학질(말라리아)"였다. "연산군"이 병에 걸려, 눈도 뜨지 못하고, 말도 하지 못하다가, 폐위된 지 2개월 만에 갑자기 사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평소 건강은 그리 나쁘지 않았던 "연산군"이 "위리안치" 2개월 만에 병사했다는 사실은 어딘가 석연치 않다. "강화도"에 갇혀 지옥과 같은 "위리안치" 생활을 지속했다고 하더라도, 2개월 만에 "말라리아"로 숨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중종ㆍ반정세력"은 "연산군"의 죽음을 그대로 수용했다.
서둘러 "왕자의 예"로 "연산군"의 장례를 치렀다. "연산군"의 급작스러운 죽음에는 이복동생 "중종"의 방관과 "반정세력"의 독살 시나리오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산군"이 숨을 거둔 계절은 11~12월. 매서운 강추위가 세상을 휩쓸 때다. 그런데 사인은 "말라리아"이다. 여름 7~ 8월에나 등장하는 "학질 모기"가 뜬금없이 "겨울"에 등장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것이다. 게다가 "학질"의 잠복기간이 짧아도 2~3주는 된다는 것을 볼 때 급사한 "연산군"의 죽음은 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다.
5. 인종 (仁宗ㆍ1515~ 1545ㆍ재위 1544~1545(8개월)ㆍ30세): 12대 왕
• 공식 사인 : 학질(말라리아) • 타살 : 계모인 "문정왕후"가 아들인 "경원대군(명종ㆍ明宗ㆍ1534~1567ㆍ재위 1545~1567(22년)ㆍ 34세ㆍ13대 왕) 보위에 올리기 위해, 독살하였다는 민간 설화가 있다.
"인종"은 재위 8개월 만에 죽는데, 이는 조선 왕 중 가장 재위기간이 짧은 것이었다. 참고로 "영조(52년)ㆍ선조(41년)" 이었다. "인종"은 천성이 어질고, 효성이 지극했다. 계모 "문정왕후"를 극진히 모셨고, 아들 나이인 이복동생 "경원대군(명종ㆍ明宗ㆍ1534~1567ㆍ재위 1545~1567(22년)ㆍ34세ㆍ13대 왕)"을 언제나 우애로 대했다.
그러나 "문정왕후"는 "인종"의 어진 성품을 이용하여, "인종"에게 강짜를 놓기 일쑤였고,(주상, 우리 집안은 살려주시는 겁니까. 뭐 죽여도 도리는 없지만~ 늙은 문정왕후는 늘 이런 식이었다) 그럴 때마다 "인종"은 "문정왕후"를 더욱 지극히 대우하였다. 이는 "인종"을 방패막이로 하여, "대윤" 측으로부터 "소윤" 측의 세력을 지키겠다는 "문정왕후"의 고도의 술수였다. 어쨌든 촉망 받던 "인종"은 30세 나이에 즉위 8개월 만에 죽고, 이복동생 "경원대군"이 13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르니 곧 "명종"이다.
"명종" 모후인 "문정황후"는 왕이 어린 관계로 자연스럽게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고, 조선 최고의 여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 이상, 대립했던 자들은 살아남기가 어렵게 되었다. "인종"이 이렇게 단명한 데 대해, 사망 원인으로 보통 2가지가 거론된다.
① 지극한 효심으로 몸을 혹사
실록에는 "인종"이 효심이 지극하여, 부친인 "중종"의 제사를 예법에 맞게 원칙적으로 지낸 관계로 몸이 혹사되었다. 이로 인해 신하들은 짧은 재위기간 내내, "수라를 드시옵소서. 고기를 드시옵소서. 옥체보존은 선왕에 대한 제사 못지않게 중요하옵니다."는 주청을 올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으며, 결국 "인종"은 쇄약해진 몸을 회복하지 못하고,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② 계모 "문정왕후"의 독살설
"문정왕후"의 전후 행태, "인종" 사망 전까지의 각종 사건사고, "인종"이 장수할 경우 동생 "윤원형" 등의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던 당시 정세, 세자 시절에 특별히 지병이 있다는 기록이 없는 점, 그런데도 보위에 오른 지 8개월 만에 사망한 점이다.
6. 선조 (宣祖ㆍ1552~ 1608ㆍ재위 1567~1608(41년)ㆍ56세): 14대 왕
• 공식 사인 : "선조실록"에는 "찹쌀밥"을 먹다가, 갑자기 위독해져 죽었다 • 타살 : 광해군ㆍ궁녀 개시(개똥이)의 독살설
등장하는 인물이 "궁녀 개시(개똥이)"이다. 세자를 교체하려는 "선조"의 뜻을 알고, "광해군"과 음모해, "개시"가 "선조"를 독살했다는 것이고, "광해군" 즉위 후, "이이첨"과 함께 국정을 맘대로 했으며, "매관매직"까지 했다고 한다. 반대파인 "서인" 측의 이야기이니, 큰 신빙성을 두기는 어렵다.
하지만 "독살설"을 본격적으로 제기한 사람은 "인목대비(선조 계비)"다. "능양군(인조ㆍ仁祖ㆍ1595~1649ㆍ재위 1623~1649(26년)ㆍ54세ㆍ16대 왕)ㆍ반정군"이 "반정"에 성공하자 그녀는 "그는 하늘 아래 같이 할 수 없는 원수다. 내가 그의 목을 잘라 망령에게 제사지내겠다. 원수를 갚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반정 주역들"이 뜻을 따르지 않자, "역괴는 부왕을 시해하고 형을 죽였으며, 부왕의 첩과 간통하고 서모를 죽였다."고 주장한다. "서인"들이 주장했던 "찹쌀떡"은 거론되지 않았지만, 서인들은 이런 호재를 기정사실화시키고, "광해군" 폐위의 정당성으로 삼았다. 결국 "선조 독살설"의 근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7. 소현세자 (昭顯世子ㆍ1612~ 1645(23세)): 인조(16대)의 장남
• 공식 사인 : "전의 이형익"의 침을 맞고, 3일 만에 "창경궁 환경전"에서 숨을 거둔다. 세자의 치료를 맡은 "전의"는 책임을 물어 처벌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이 없고, 오히려 그의 처벌을 주장한 자가 처벌되었다.
• 타살 : 부왕 "인조"에 의한 독살ㆍ일설에는, "인조"가 벼루를 던져서 죽었다지만 신빙성이 없다.
1627년, "정묘호란(1627.01~03)" 와중에 "전주"에서 "강빈(강석기 딸)"과 가례를 올렸지만 처음엔 가까이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세자는 원래 "윤인발 딸"과 정혼한 사이였으나, "윤인발"이 1624년 "이괄의 역모"에 연루되어 죽었기에 파혼이 된 것이다. 참혹했던 "병자호란(1636.12~1637.02)"의 와중에도 "부왕 인조"와 "남한산성"에서 45일간 항전하던 세자는 "삼전도 치욕의 댓가"로 볼모로 끌려가는 처지가 된다. "인조"는 "삼전도(송파구 잠실)"에서 "청 태종"에게 머리를 9번이나 피가 나도록 찧었다. "청"은 인질을 통해, "조선ㆍ명"의 소통을 막고자 함이었다.
이 일이 "소현세자"의 운명을 화려하게 또는 비참하게 바꾸는 계기가 된다. 1637년, "심양(청나라 수도)"에 끌려간 세자는 "아담 샬 신부(예수회 선교사)"와 접촉하면서 서양문물을 접하여, 조선의 부국강병ㆍ개방에 대하여 지대한 꿈을 가지게 된다. 1644년, "숭정제(명의 마지막 황제)"가 "이자성의 농민반란"으로 목을 매고, "청"은 "이자성"을 물리치며 "북경 자금성"에 쉽게 들어온다.
"청"은 이제 자신만만하여, "소현세자ㆍ봉림대군" 형제를 조선으로 돌려보낸다. 이듬해 세자는 기쁜 마음으로 귀국을 재촉하지만, 세자의 귀국을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의심이 많고, 권모술수에 능한 "인조"는 그의 귀국을 심히 못 마땅히 여긴다. 사실 쿠데타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정통성 시비에 항상 휘말리고, 언제 "청"이 왕위를 세자에게 선위하라고 명할지 모르는 파리 목숨 같은 운명이었다.
그런데 "청"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소현세자"의 귀국은 곧 그의 왕위를 위협하는 대상이었다. "인조"는 "김자점ㆍ김유" 등 반정공신들의 정권유지 압력도 무시할 수 없었고, 특히 "김자점"은 "효명옹주(인조 서녀) "를 며느리로 맞아, 그의 권세가 하늘을 찔렀다. "인조"는 곧 "소현세자"를 냉대하고 문안조차 받기를 거부했다. 그의 상처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귀국 후 3개월 만에 몸져 눕고, "전의 이형익"의 침을 맞고 3일 만에 "창경궁 환경전"에서 숨을 거둔다. "이형익"은 "후궁 조귀인(조소용)"의 친정과 관련된 의사였다. 세자의 치료를 맡은 "전의"는 책임을 물어 처벌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이 없고 오히려 그의 처벌을 주장한 자가 처벌되었다. "세자 이모"로 염습에 참여한 "이진원의 아내"는 회고록에 이렇게 남겼다. "세자의 사체는 검고 온몸의 구멍에서 피가 나왔다고 들었다고 한다. 그것은 전형적인 독살 시체의 모습이 아닌가? "
사실 세자는 그리 약골이 아니었다. 학질을 앓았다느니 소문을 무마시키려 애를 썼지만, 자연사에 수긍하는 이는 궁중에 아무도 없었다. 장례는 매우 초라하게 치러지고, 그가 가져온 "천리경ㆍ화포ㆍ과학ㆍ천주교 서적(마떼오 리치의 천주실의)"는 모두 불태워졌으며, 그가 북경에서 데려온 "천주교 신자"인 옛 "명나라 궁녀들"은 모두 추방당한다. 세자를 따르던 "임경업 장군"은 "김자점"의 고문으로 숨을 거둔다.
그의 사후, 당연히 원손 "석철"이 "세손"에 책봉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엉뚱하게 동생 "봉림대군(효종ㆍ孝宗ㆍ1619~1659ㆍ재위 1649~1659(10년)ㆍ40세ㆍ17대 왕)"이 세자에 책봉되었다. 4년 후인 1649년 "인조"는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했는데, 이때 "봉림세자"가 자기 손가락을 뜯어 "인조"에게 피를 먹였다고 전한다.
그의 죽음은 모든 것을 침묵과 공포로 몰아갔다. 이후 "인조"와 사악한 후궁 "양화당 조귀인(김자점 사돈)"은 "세자빈 강씨" 마저 죽이려는 음모를 꾸며, 어느 날 "인조" 수라상에서 독이 나왔다고 소동을 피워, "동궁전" 상궁들이 죽을 때까지 모진 고문을 당했다. 당시 "강빈"이 감시 상태에 있던 것을 보면, "독살 음모"는 조작일 가능성이 크다. "강빈"은 "인조"가 거처하는 대전 근처에서 서럽게 목 놓아 울고, "대전" 문안까지 거부하다가 폐위되어, 친정에 나가 있다가, "사약"으로 끝을 맺고, 친정 식구들은 몰살당한다.
"병자호란" 당시, "강빈"은 "강화"로 피신해 있었는데, 이때부터 "조소용"과 갈등을 빚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중전(인열왕후)"이 승하한 뒤라, 왕실의 어른이 아무도 없는 상태의 암투였다. "강빈"도 "봉림대군(효종) 내외"와 함께 8년간의 볼모생활을 견딘 몸이었다. "강빈"은 비굴하게 살아남느니, 당당한 죽음을 택했다. 그녀의 세 아들 역시 유배당하여, "효종" 때, 둘이 죽는다. "밀풍군(세자의 증손자)"는 1728년 "영조" 때, "이인좌"의 역모에 연루되어 죽는다.
세자의 죽음으로, 조선은 서양문물을 일찍 접할 기회를 잃었다. 청운의 꿈을 안고 적지에서, 학문ㆍ 연구에 힘쓴 그의 노력은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대신 무모한 북벌 등을 기획한 "효종"이 집권하면서 유교ㆍ보수를 고집하는 나라로 변해갔다. (여기에는 송시열의 노력도 컸다) 세자의 묘는 당연히 "원"으로 해야 함에도, "소경원(서삼릉 내)"은 "고종" 때까지 "소현묘"라고 낮춰 불렀으니, "인조"의 미움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만하다. "강빈"도 "고종" 때 "민회빈"으로 복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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