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혼 (成渾ㆍ1535~1598ㆍ52세ㆍ우계(牛溪))"은 1554년(19세), 같은 고을의 "이이 (李珥ㆍ1537~1584ㆍ46세ㆍ율곡(栗谷))"와 평생지기가 되었다. "성혼"은 성리학의 대가이고 뛰어난 업적에도 불구하고, "이이ㆍ이황"에 비해 훨씬 덜 알려진 것에 대해 안타깝다.
1. 인심도심설 (人心道心說) : 이이ㆍ성혼(이황) 기호학파 논쟁
• 성혼 (成渾ㆍ1535~1598ㆍ52세) : 조선 선조 때의 학자ㆍ호- 우계(牛溪)
1554년(19세) 같은 고을의 "이이"와 평생지기가 되었다. 1551년(명종6ㆍ16세) "생원ㆍ진사"의 양장(兩場) "초시"에 모두 합격하였지만, "복시"에 응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고, 1568년(선조1ㆍ33세) "이황"을 만나, 깊은 영향을 받았다.
• 이이 (李珥ㆍ1537~1584ㆍ46세ㆍ이황과 35살차)ㆍ자운서원(경기도 파주)ㆍ해주 향약
기대승의 이론에 부응ㆍ과거를 통해 관직생활 진출 후, 죽을 때까지 관직생활을 한다→ "조헌ㆍ김장생"에게 영향을 준다 / 사상 : 이기일원론 (理氣一元論 : 이와 기는 하나다)ㆍ이통기국 (理通氣局說 : 이는 통하고, 기는 국한된다)ㆍ이발이승일도설 (氣發理乘一途說 : 기는 발현되면, 이는 그것에 편승한다)ㆍ성학집요 (聖學輯要 : 뛰어난 신하의 말을 경청하라)→ 신권중시
① 개 념
성리학(性理學)에 있어서 인성론 (人性論)의 주요한 문제의 하나. "인심도심설 (人心道心說)"은 "사단칠정론 (四端七情論)"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다.
"인심"과 "도심"은 서로 쌍립하여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 "인심"이던 것이 나중에 "도심"이 되고 처음에 "도심"이던 것이 나중에 "인심"이 된다는 것으로, "인심ㆍ도심의 상호작용"을 밝혀주는 의미가 되고, 현대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인심은 감성적인 것이고, 도심은 이성적인 것"이다.
② 발 단
"서경- 대우모(大禹謨)편"에 "인심(人心)은 위태하고, 도심(道心)은 미묘하나니, 정밀히 하고 한결같이 하고서야, 진실로 그 중(中)을 잡으리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주희(朱熹)"가 이것의 해설을 시도함으로써, "인성론"의 중요한 주제로 끌어들였다. 그는 "마음(心)의 허령지각(虛靈知覺)은 하나뿐인데,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이 다른 이유는 형기(形氣)의 사(私)에서 생겨나고, 혹은 성명(性命)의 정(正)에 근본함으로써 그 지각(知覺)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람은 이 형기(形氣)가 없을 수 없어,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도 인심(人心)이 있고, 또 성명(性命)이 없는 사람이 없는 까닭에, 가장 우매한 사람도 도심(道心)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가 말한 형기(形氣)는 감각이나 감성이요, 성명(性命)은 지성이나 이성이다. 또한 "인심(人心)"은 사욕(私欲)ㆍ인욕(人欲)으로서 개인적인 감각적 감성으로 선악(善惡)이 모두 있을 수 있다. "도심(道心)"은 천리(天理)로서 보편적 공공적(公共的) 이성으로 승화된 것으로 순선(純善)으로 간주되었다. 이 "인심도심(人心道心)"의 문제는 후에 "명나라 나흠순(羅欽順)"에 이르러, 형이상학적 해명"을 거치고, 또한 "조선 성리학"의 주요 과제로 등장하였다.
특히 "이황"은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을 사단칠정(四端七情)과 이기설(理氣說)의 관점에서 설명했다. 인심(人心)은 칠정(七情)이요, 도심(道心)은 사단(四端)으로 보았고, 인심(人心)은 기(氣)에서 발(發)하는 것이요, 도심(道心)은 이(理)에서 발(發)한다고 했다. 이것은 그가 "도심(道心)을 중히 여기고, 인심(人心)을 폄천(貶賤)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편 "이이"는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이 비록 이름은 다르나, 그 근원은 한마음(一心)이라고 설명했다. "도심(道心)" 곧 의리의 마음은 성명(性命)의 정(正), 즉 "이성"에 근원하고, "인심(人心)" 곧 식색(食色)을 위한 마음은 형기(形氣)의 사(私), 즉 "감성"에서 생기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이황ㆍ이이"의 기본적인 입장의 차이는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의 논변만이 아니라,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ㆍ이발(理發)ㆍ기발(氣發)" 문제와 어울려, 조선성리학의 양대 분파인 "주리파(主理派)ㆍ주기파(主氣派)"의 커다란 논쟁점이 되었다.
"이이"는 1582년(47세) "인심도심도설"이라는 글과 그림을 그려, 임금에게 올리면서, "인심도심설"의 문제를 논리적이고 명석하게 정리하였다. "이이"는 사람의 기질이란 고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여, 인간의 도덕성을 함양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황"과는 달리 "이이"는 "사단이 도심인 것은 가능하지만, 칠정은 인심ㆍ도심을 합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이"는 "인심ㆍ도심"은 서로 시작과 끝의 관계가 있다는 이른바 "인심도심종시설(人心道心終始說)"을 주장하고 있다.
2. 인물성동이론 (人物性同異論) : 기호학파내 논쟁ㆍ호락논쟁
① 개 념-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
조선 후기, 성리학에서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은가? 다른가? (인간과 동식물의 본성이 같은가? 다른가?)"에 대한 논쟁으로, "같다"고 주장하는 이론이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이고, "다르다"고 주장하는 이론이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이다.
조선 중기까지의 성리학자들의 주요 관심사가 된 것은 "하늘과 사람의 관계"였다. 그 결과, 사람의 삶의 바탕이 되는 하늘의 이치를 근거로 하여, 하늘과 사람이 본래 하나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는데, 이러한 논리에서 보면, 동물ㆍ식물의 삶도 본질적으로 하늘의 이치를 바탕으로 하므로 역시 하늘과 하나라는 사실이 성립된다.
이러한 이론이 성립되면, 관심의 대상이 저절로 "사람과 동식물의 관계"로 옮겨갈 수밖에 없다. 조선 후기에 "인물성동이론"이 활발하게 전개된 까닭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성리학"에서는 원래 인간의 본성을 "본연지성(本然之性)ㆍ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이에 따르면, "본연지성"의 입장에서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존재가 되지만, "기질지성"의 입장에서는 사람들이 각각 기질에 따라서, 구별되는 존재로 파악된다. 그런데 이때 의문이 일어나는 것은 "본연지성"의 입장에서 볼 때, 동물ㆍ식물까지도 모두 "동일한 존재가 되는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② 발 단
이러한 의문은 주로 "송시열(宋時烈ㆍ우암(尤庵)ㆍ1607~1689ㆍ시대를 대표하는 정치가 사상가)"의 문하에서 제기되었다. 1678년(숙종4), "권상유(權尙游)"가 "주희"의 "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에 있는 "혼연한 태극의 전체가 모든 물체에 각기 갖추어져 있지 않음이 없다"는 말에 의심을 품고, 형인 "권상하(權尙夏ㆍ1641~1721ㆍ송시열ㆍ송준길의 문하생ㆍ기호학파의 적통)"에게 질문하였을 때, "권상하"는 "이(理)를 말하면 온전하지 않음이 없으나, 성(性)을 말하면 편벽된 것과 온전한 것이 있다"고 답하였다.
이로부터 "권상하"의 문하에서 "인물성동이론"에 관한 논의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간(李柬)ㆍ한원진(韓元震)"이 중심이 되었다. "이간"은 사람과 동물이 다르고, 사람들 상호간에도 서로 다른 것은 기질의 차이 때문이므로, "본연지성"의 입장에서는 모두 같다고 파악함으로써, "인물성동론"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한원진"은, "본연지성"을 주장하는 근거는 "성즉리설(性卽理說)"인데, "성즉리"란 "성즉리지재기(性卽理之在氣)"의 줄임말로 볼 수 있으므로, "본연지성"이라 하더라도 실제로는 "기(氣)"에 내재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고 파악함으로써, "기질지성"의 실재성을 부각시키고, 이를 근거로 해서 "인물성이론"을 주장하였다.
"인물성동론"을 주장하는 "이간"을 중심으로 하는 성리학자들은 대부분 "서울"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낙학(洛學)ㆍ낙론(洛論)"이라 하였다. "인물성이론"을 주장하는 "한원진"을 중심으로 하는 성리학자들은 대부분 "충청도 지방"에 살고 있어, "호학(湖學)ㆍ호론(湖論)"이라고 칭하였다.
이들 사이에 벌어진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의 논쟁을 "호락논쟁(湖洛論爭)"이라고 한다. 이런 논쟁은 비록 "현실사회의 실용적인 논쟁이 아니다"는 비판을 받기는 했지만, "인성과 물성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룸으로써 인간의 주체성과 도덕의식을 함양하는데 기여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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