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 (李滉ㆍ이이와 35살차)"은 "훈구파(윤원형 등)"에게 실망하여, 27번 관직제수가 들어왔음에도 관직을 맡지 않고, 1568년에 "성학십도(聖學十圖ㆍ성리학에 이룰 수 있는 10가지 그림ㆍ왕이 주체적으로 수양하라)"를 "선조"에게 바치고, 후학을 양성하였고, "이이 (李珥)"는 과거를 통해 관직생활 진출 후, 죽을 때까지 관직생활을 한다.
1. 이 황 (李滉ㆍ이이와 35살차)ㆍ이 이 (李珥) 의 차이
2. 이황 (李滉ㆍ1502~1571ㆍ68세ㆍ이이와 35살차)ㆍ도산서원(경북 안동)ㆍ예안 향약
주리론ㆍ이기이원론ㆍ"이발(理發)" 주장 / 사상 : 이기이원론 (理氣二元論 : 이가 기보다 우위에 있다)ㆍ이존기비 (理尊氣卑 : 이는 존귀하고, 기는 비천하다)ㆍ이기호발 (理氣互發 : 이와 기, 모두 각자 발할 수 있다)ㆍ성학십도 (聖學十圖 : 왕이 주체적으로 수양하라→ 왕권중시)
조선 명종ㆍ선조 때의 문신(이조판서)ㆍ성리학자ㆍ사상가ㆍ시인ㆍ정치가ㆍ저술가ㆍ"이언적"의 사상계승. "이언적"의 사상을 이어받아, "영남학파"의 중추적 학자가 되었고, 한국을 대표하는 "성리학자"가 되었다. 학맥은 "동ㆍ서 분당" 뒤에 "동인"의 핵심을 이룬다. 다시 "동인"이 "남인ㆍ북인"으로 갈릴 때, "이황" 제자들은 "남인", "조식" 제자들은 "북인"을 이룬다. 제자로는 "서애 류성룡ㆍ학봉 김성일ㆍ소고 박승임ㆍ성암 김효원"등을 문하생으로 배출한다.
"훈구파(윤원형 등)"에게 실망하여, 27번 관직제수가 들어왔음에도 관직을 맡지 않고, 1568년에 "성학십도(聖學十圖ㆍ성리학에 이룰 수 있는 10가지 그림)"를 "선조"에게 바치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3. 기대승 (奇大升ㆍ1527~1572ㆍ44세) : 호- 고봉(高峰)→ "퇴ㆍ고" 논쟁
주기론ㆍ이기공발설 (이기일원론)ㆍ"기발(氣發)" 주장
"조광조"의 지치주의 사상을 이어받아, 전제주의 정치를 배격하고, 민의에 따르고, 민리를 쫓는 "유교주의적 민본정치ㆍ왕도정치"를 이상으로 삼았다. 조선 유학 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주자학자이며, 지치주의적 이념으로 왕도정치를 펼치려 했다. "정몽주ㆍ김숙자ㆍ김종직ㆍ조광조ㆍ기준" 등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했다. 특히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 사상"을 이어받아, "전제주의 정치"를 배격하고, 왕이 스스로 "힘이 아닌 어진 정치로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는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이상으로 삼았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기준(奇遵)"의 조카이며,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김인후ㆍ이항" 등과 교우했고, "고경명ㆍ최경회" 등을 양성했다. "사마시"에 이어, "알성시"에 합격했으나, "윤원형"은 "기준의 조카"라는 이유로 낙방시켰다. 다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일기"를 기록하는 "청요직"의 하나인 "승정원 주서"에 임명됐다.
"기대승"은 32세에 "이황"의 제자가 되었으며, 34세인 1559년부터 1566년까지 8년 동안 스승인 "이황"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사단칠정"을 두고, "사칠논쟁(四七論爭)"을 하였다. 그의 주자학설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사단칠정론"은 "이황ㆍ정지운ㆍ이항"등과의 논쟁을 통하여 체계가 이루어졌다. "조광조"의 지치주의 사상을 이어받아, 전제주의 정치를 배격하고, 민의에 따르고, 민리를 쫓는 "유교주의적 민본정치ㆍ왕도정치"를 이상으로 삼았다.
1558년, "이황"과의 만남은 사상 형성의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그 뒤 "이황"과 13년 동안 학문과 처세에 관한 편지를 주고받았다. 1559~ 1566년까지 8년 동안에 이루어진 "사칠논변"은 조선유학사상 깊은 영향을 끼친 논쟁이다.
4. 성혼 (成渾ㆍ1535~1598ㆍ52세) : 조선 선조 때의 학자ㆍ호- 우계(牛溪)
1554년(19세) 같은 고을의 "이이"와 평생지기가 되었다. 1551년(명종6ㆍ16세) "생원ㆍ진사"의 양장(兩場) "초시"에 모두 합격하였지만, "복시"에 응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고, 1568년(선조1ㆍ33세) "이황"을 만나, 깊은 영향을 받았다.
5. 이이 (李珥ㆍ1537~1584ㆍ46세ㆍ이황과 35살차)ㆍ자운서원(경기도 파주)ㆍ해주 향약
기대승의 이론에 부응ㆍ과거를 통해 관직생활 진출 후, 죽을 때까지 관직생활을 한다→ "조헌ㆍ김장생"에게 영향을 준다 / 사상 : 이기일원론 (理氣一元論 : 이와 기는 하나다)ㆍ이통기국 (理通氣局說 : 이는 통하고, 기는 국한된다)ㆍ이발이승일도설 (氣發理乘一途說 : 기는 발현되면, 이는 그것에 편승한다)ㆍ성학집요 (聖學輯要 : 뛰어난 신하의 말을 경청하라)→ 신권중시
조선 선조 때의 문신(우찬성)ㆍ성리학자ㆍ사상가ㆍ정치가ㆍ저술가ㆍ신사임당의 7남매 중 3째 아들
1548년(명종3) 진사시에 합격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 해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23세에 예안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하였다. 그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9번 과거를 봐서 9차례의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일선 정치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하였고, 이러한 정치적 식견과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40세 무렵,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동호문답(東湖問答)ㆍ만언봉사(萬言封事)ㆍ성학집요(聖學輯要)"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고, "성혼"과 "이기 사단칠정ㆍ인심도심설(理氣四端七情人心道心說)"에 대해 논쟁하였다.
1576년(선조9ㆍ40세) 무렵, "동인(영남학파(퇴계학파ㆍ남명학파)ㆍ화담학파)와 서인(기호학파(율곡학파ㆍ우계학파))"의 대립 갈등이 심화되면서, 그의 중재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더구나 건의한 개혁안이 "선조"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그만두고, "파주 율곡리"로 낙향하였다. 이후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저술하고, 해주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건립하여 제자 교육에 힘썼으며 "향약ㆍ사창법(社倉法)"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산적한 현안을 좌시할 수 없어, 45세 때 "대사간"의 임명을 받아들여, 복권하였다.
이후 "호조ㆍ이조ㆍ형조ㆍ병조판서" 등 전 보다 한층 비중 있는 직책을 맡으며, 평소 주장한 개혁안의 실시와 동인ㆍ서인 간의 갈등 해소에 적극적 노력을 기울였다. 이 무렵 "기자실기(箕子實記)ㆍ경연일기(經筵日記)"를 완성하였으며, 왕에게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지어 바치는 한편, 경연에서 "십만양병설(十萬養兵設)"을 주장하였다.
"선조"는 그의 개혁안에 대해 계속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여,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으며, "동인ㆍ서인" 간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면서, 그도 점차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동인"이 장악한 "삼사(三司)"의 강력한 탄핵이 뒤따르자, 48세 때 관직을 버리고 "율곡"으로 돌아왔으며, 다음해 "서울의 대사동(大寺洞)" 집에서 죽었으며, "파주의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었다.
※ 십만양병설
"이이"가 왜군의 침입을 예견하고, 잘 훈련된 정예병으로 "서울(한성)에 2만, 각 8도에 1만씩"의 10만 명의 군사를 기르자는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 (근거: 문인이었던 사계 김장생의 행장) "십만양병설"이 보다 구체적으로 나와 있는 곳은 "김장생"의 제자인 "우암 송시열"이 편찬한 "율곡연보"인데, "이이"가 경연에서 이 주장을 했을 때가 1583.04월(선조16)이라고 적고 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 전이다.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된 사람은 "황윤길(통신정사ㆍ서인)와 김성일(통신부사ㆍ동인)"이었다. "황윤길"은 일본이 침략해 올 것이다. "김성일"은 일본이 침략하지 않을 것이다.
"동인ㆍ서인"은 격렬한 논쟁을 펼쳤고, "이이"는 왜군의 침입을 예견하고, 당시 조선은 군역을 피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군의 질도 떨어져 있어, 10만 명의 군사를 기르자는 "십만양병설"을 주장했으나, 당파싸움에 골몰하던 "류성룡" 등 조정 대신들이 "평화 시에 군사를 기르는 것은 화를 양성하는 것" 이라고 반대해, 무위에 그쳤다. 후일 건의에 반대하던 "류성룡"은 그의 선견지명을 추억하면서 "이이는 진성인(眞聖人)이라"고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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