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9년(조선 "명종" 때), 성리학자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이 8년간 서한을 주고받으면서,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해 논쟁을 벌인 것으로,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이황(59세)"ㆍ26살이나 어렸던 "기대승(33세)"이 "인간의 본성인 사단칠정"을 놓고, 4번의 만남ㆍ8년간 120통의 편지를 주고받는다.
1. 조선최대 철학논쟁 : 이황ㆍ기대승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
① 개 념 : "유학"의 "수양론(修養論)"에서의 "사단(四端)ㆍ칠정(七情)"
"사단"이란 "4가지 단서(端緖)", 즉 "4가지 인간의 도덕적 본성(本性)에서 우러나오는 마음(情)"을 말하고, "칠정"이란 "7가지 인간의 자연적 감정(情)"을 말한다. 촉발된 것은 "맹자 이론" 때문인데, "맹자"가 펼친 "사단칠정 이론"으로, "도덕률"의 출발점을 "인간의 본성"에서 찾았는데, 후에 "사단"과 "칠정"의 관계에 대한 논쟁이 시작된다.
이를 둘러싼 논쟁을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혹은 줄여서 "사칠론(四七論)"이라고 부른다. 또한 "주자"는 "사단은 이의 발현이요, 칠정은 기의 발현이다(四端是理之發 七情是氣之發)"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사칠론"에 존재론적 범주로 사용되던 "이(理)"와 "기(氣)"의 개념이 도입되고, 또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이라는 개념이 함께 논의됨으로써, 그 논쟁이 한층 복잡하게 되었다.
② 양선생 왕복서 (兩先生 往復書)
조선 최대 철학논쟁인 "사단칠정 논쟁(인간의 본성의 논쟁)"에 대한 퇴계 이황과 기대승이 벌인 논쟁서 /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황ㆍ기대승"이 주고받은 서간집으로, 광해군 6년(1614)에 "기대승"의 아들인 "기효증(奇孝曾)"이 간행하여, "고봉집"에 수록되어 있다. "이황ㆍ기대승"의 사상과 교유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1559년(조선 "명종" 때), 성리학자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이 8년간 서한을 주고받으면서,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해 논쟁을 벌인 것으로,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이황(59세)"ㆍ26살이나 어렸던 "기대승(33세)"이 "인간의 본성인 사단칠정"을 놓고, 4번의 만남ㆍ8년간 120통의 편지를 주고받는다. 이 왕복 서한집을 책으로 묶은 것이 "양선생 왕복서"이다. ("이황" 편지 - "황이 고개를 숙입니다)
"기대승"은 32세에 "이황"의 제자가 되었으며, 34세인 1559년부터 1566년까지 8년 동안 스승인 "이황"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사단칠정"을 두고, "사칠논쟁(四七論爭)"을 하였다. "이황"은 "이(理)ㆍ기(氣)"가 시공간적으로 분리되어, 발동한다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했고, "기대승"은 "이(理)ㆍ기(氣)"가 시공간적으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이기공발설(理氣共發說)"을 주장했다.
③ 조선 중기, "기대승ㆍ이황"의 "사단칠정" 논쟁의 시작
원래 "주자(朱子)"는 "이(理)"란 우주 만물의 근원이 되는 이치로서, "기(氣)"의 활동 근거가 되는 것이고, "기(氣)"란 만물을 구성하는 재료로서, 사물을 낳는 도구라고 설명하였다.
"4단7정(四端七情) 논쟁"은 "이황"이 "정추만"이 지은 "천명도설(天命圖說)"의 일부 구절을 수정하면서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하자, "기대승"이 "이황"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이황"은 "4단은 이(理)가 발현한 것이고, 7정은 기(氣)가 발현한 것이다.(四端理之發ㆍ七靑氣之發)"고 하여, 선악이 섞이지 않은 마음의 작용인 "4단은 이(理)가 발현한 것이고, 인간 감정의 총칭인 7정은 기(氣)가 발현한 것"이라고 구분하고(理氣互發說ㆍ이기호발설), "이(理)를 기(氣)의 우위에 삼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를 주장했다.
이에 "기대승"은 "이황"에게 편지를 보내, 인간감정인 "4단과 7정"은 "7정이 4단의 범위를 포함하고 있으며, 인간감정의 발현에 이(理)와 기(氣)를 구별할 수 없고, 이(理)와 기(氣)가 함께 작용하여 발현된다는 "이기공발설(理氣共發說)"을 주장했다. 이 논쟁은 1559년부터 약 8년간이나 지속되었는데, 후에 "이황"의 입장을 지지하는 "우계 성혼"과 그에 반대하는 "율곡 이이" 사이의 논변으로 전개되었으며, 급기야는 조선 성리학자 대부분이 이 논의에 참가함으로써 "이기호발(理氣互發)"을 주장하는 "이황" 계열의 "주리파"와 "기발일도(氣發一途)"를 주장하는 "율곡 이이" 계열의 "주기파"의 논쟁으로 확대되었다.
"4단 7정"에 대한 논란은 "인간의 마음"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이끌어 냈으며, 조선시대 성리학에 있어서 "심리적 인성론"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④ 이황 - 기대승의 논쟁
조선에서의 "사단칠정"을 둘러싼 논의는 처음에 "이황"과 "기대승" 사이에서 벌어졌다. 그 뒤 "이이"가 "기대승의 설"을 지지하고, "이황의 설"을 반대함으로써, 그 논의는 확대되어 "성리학 논쟁"의 핵심 문제로 등장, "사단ㆍ칠정"뿐 아니라 "이기론(理氣論)" 및 정치 사회관에 이르기까지 두 유형의 사고방식의 대립을 보이게까지 되었다.
이로 인하여, "주리학파(主理學派)ㆍ주기학파(主氣學派)"로 학파가 나누어, 그 뒤 많은 학자들이 학파적 관심을 가지고 토론하였다. "주리ㆍ주기"의 문구는 "이황ㆍ기대승" 사이의 논쟁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로서, 각각 "도덕론적 입장ㆍ존재론적 입장"을 상징하고 있다. 즉, "주리ㆍ주기"의 차이의 시원은 "인간의 측면에서 자연을 해명하려는 입장"과 "자연의 측면에서 인간을 해명하려는 입장"의 차이에서 나온 것이다.
이 두 관점의 혼재는 "성리학"의 본래적인 특성, 즉 "자연법 사상"의 특성으로 흔히 "천인합일(天人合一)" 또는 "물리(物理)=도리(道理)"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이황" 이전에 "정지운(鄭之雲)"이 "천명도설(天命圖說)"에서 "사단은 이에서 발현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현한다(四端發於理 七情發於氣)"고 하였는데, 이 문구를 "이황"이 개작하여 "사단은 이가 발현한 것이요, 칠정은 기가 발현한 것이다 (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고 하였다. 이에 대해 "기대승"이 "칠정 이 외에 달리 또 사단이라는 정이 없다"라는 생각에서, "이황"에게 해명을 요구함으로써 문제가 발단되었다.
그 후 "이황"은 "자기설"을 수정하여 "사단은 이가 발현하는데, 기가 거기에 따르는 것이요, 칠정은 기가 발현하는데, 이가 거기에 타는 것이다 (四端理發而氣隨之七情氣發而理乘之)"고 하였다. 그러나 "기대승"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질문을 계속하여 논쟁이 수차 계속되었으며, "이황" 사후에 "이이"가 "기대승의 설"을 지지하여, "칠정은 사단을 내포한 것이며, 사단도 기발이승(氣發理乘)일 뿐"이라고 하여, 이른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하였다.
"이황"은 "대개 사람의 몸은 이와 기가 합하여 된 것이다. 그러므로 양자가 서로 발용(發用)하고 서로 필요로 한다. 호발(互發)하므로 각각 주(主)된 바가 있음을 알 수 있고, 서로 필요로 하므로 서로 그 가운데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칠정 대 사단"으로 분별하여 말하면, 칠정의 기에 대한 관계는 사단의 이에 대한 관계와 같다. 또 "사단도 물(物)에 감(感)하여 동(動)함은 칠정에 있어서와 다름없으나 다만 사단은 이가 발현하는데 기가 따르는 것이요, 칠정은 기가 발현하는데 이가 타는 것이다"라고 하여, "사단ㆍ칠정 논의"를 통하여 이ㆍ기가 상호발현(互發)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이황"은 "주자 학설" 중 "이와 기는 전연 별개"라는 이른바, "이기부잡(理氣不雜)"의 면을 강조하여, "이(理)를 작용이 있는 것"으로 보고, "이와 기를 귀천(貴賤) 관계"로 파악하였다. 즉, "이황"은 "이는 이성(理性), 기는 감성(感性)"으로 보았으므로, "이가 기를 제어하지 못하면, 이욕(利欲)에 떨어져, 짐승이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황"은 "사단ㆍ칠정"을 각각 "도심(道心)과 인심(人心)"에 견주어, 선악으로 대립시켜 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이황"에게 있어서는, "주자"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이ㆍ기의 귀천 관계" 내지 "기에 대한 이의 제어"라는 의미의 우열 관계가 나타나는데, 이것은 그가 "우주론"에서 "이(理)"는 작용하는 것으로 본 사고와 표리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즉, 존재론적 의미로서의 "이ㆍ기"를 "도덕론"을 중심으로 보려 하는 것으로, 여기에 그의 성리학의 특색이 있다. 그러나 "주자"의 "사단은 이의 발현이요, 칠정은 기의 발현이다"라는 명제 및 "정지운"의 "사단은 이에서 발현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현한다."는 명제는 본래 "이ㆍ기"를 대략 선악의 의미로 보아, 그 개념을 빌려 "사단"과 "칠정"을 논하려고 하였던 소박한 입론(立論)이었다.
그런데 "이황"은 이를 "사단은 이발이기수지, 칠정은 기발이이승지(四端理發而氣隨之 七情氣發而理乘之)"라고 고침으로써, "발(發)"에 더욱 강조점이 옮겨지게 되고, 또 "수(隨)"자와 "승(乘)"자를 대치시켜 은연중 "이(理)를 강조"하려는 생각을 표현하게 되어, 결국 존재론적 개념인 "이ㆍ기"의 개념에 혼란을 가져오게 했던 것이다.
즉, "이(理)"는 발현할 수 없는데, 이러한 능동적 발현이 있다고 한 것이다. 이는 "이ㆍ기 개념"으로는 그의 도덕론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위의 명제에서 나타난 그의 사상적 특성과 그의 언어 사용상의 착오와 한계는 구분해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황"의 입론에 담긴 사상의 특성을 잘 알 수 있다.
"이황"의 "이발론(理發論)"과 관련하여, 고려할 점은 "성리학의 심성구조론(心性構造論)"인 "성(性)이 발현하여 정이 된다(性發爲情)"는 명제다. 이는 "성ㆍ정"을 본체와 작용으로 나누어, "심성"의 구조를 말한 것으로서, "성(性)"의 본체의 운동이나 작용을 말한 것이 아니다. "이황"의 "사단은 이(理)의 발현(發)"이라는 입론에서의 "발(發)"의 의미와는 언어상의 큰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이황"의 "이발론"은 "왕수인(王守仁)"의 "심즉리(心卽理)"가 "심을 이에 합치시켜라"라고 하는 "수양론적 의미"가 강한 것과 같이, "이가 기를 제어하여, 금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도덕론적 강령"으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이황"의 이러한 "주리적 사고"는 그 뒤 "이진상"에 이르러, "왕양명"과는 다른 "심즉리 설"을 주창하게 되는데, 이는 "주리적 사고"의 필연적 결과라고 볼 수 있다.
⑤ 이이의 논쟁
"이이"는 "이황"이 "사단을 이(理)의 발현 즉, 이성적 작용으로 파악"한 데 대해, 이성적 작용도 작용인 이상 "기에 의한 것"이라고 보고, 이는 "무위(無爲)"라는 "주자의 설"을 계승, 존재와 도덕을 일괄하여 "이ㆍ기 관계"를 이른바 "기발이승일도설"로 제시하였다. 따라서 "사단"과 "칠정"의 관계는 "칠정은 기의 발동의 총칭이므로, 사단은 칠정에 포함된다"고 본다.
"이이"는 "사단과 칠정은 본연지성(本然之性)·기질지성(氣質之性)과의 관계와 같다. 본연지성은 기질을 겸하지 않고 말한 것이며, 기질지성은 도리어 본연지성을 겸한다. 그러므로 사단은 칠정을 겸하지 못하나 칠정은 사단을 겸한다."고 하였다.
그는 "인심ㆍ도심"은, "이황"에서처럼 대립적이기는 하나, 그것이 "사단ㆍ칠정"과 같은 대립 관계는 아니라고 하였다. "칠정이 사단을 포함한다"는 주장에서 "이이"는 다시 "칠정"과 "사단"을 비슷한 것끼리 연결시켜, "측은은 애(愛)에ㆍ수오는 오(惡)에ㆍ공경은 구(懼)에ㆍ시비는 희로(喜怒)의 당연성 여부를 아는 것"에 배속시킨다. 그러나 "주자"는 "칠정과 사단은 비슷한 점이 있지만, 그 성격상 나누어 붙이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이의 "사칠배속"은 그의 "기발이승일도설"의 필연적 결과로 나타난 것으로 지나친 천착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칠정의 선한 것"과 "사단"은 다르기 때문이다.
"사단"은 도덕의 표준이라는 성격을 갖는 것이므로, "칠정"의 선한 것과 같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이"는 "존재론"의 입장에서 "도덕률"을 규정하려고 하였으므로, "천지의 변화(天地之化)"는 바로 "내 마음의 발현(吾心之發)"이라고 하여, "천지에 이화(理化)ㆍ기화(氣化)의 구분이 없다면, 우리 마음에도 이발ㆍ기발이 없다"고 하였다.
"이이"의 이러한 입장은 그의 "이통기국(理通氣局)"의 명제에도 잘 표현되어 있다. 즉, "기는 물질적ㆍ시간적 유한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기국(氣局)"이고, 이는 초월적 존재로 보편적 존재이기 때문에, 시공(時空)에 국한되어 있지 않으므로, "이통(理通)"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의 "기발이승일도설"은 더 나아가, "심시기(心是氣)"를 주장하게 되고, 이 설은 그 뒤 "주기학파"의 "송시열ㆍ한원진"등에게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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