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분할 (分割)"은 1880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있었던 1914년까지 "유럽의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아프리카"가 몇몇 열강의 식민지로 분할된 사건을 말한다.
1. "아프리카 분할 (分割)
15세기 경, "유럽 대항해 시대"의 널리 알려진 "탐험가 바르톨로뮤 디아스"의 "희망봉 탐험"과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이 있었다. 이 당시 아프리카에는 이페ㆍ에티오피아ㆍ만딩고 제국ㆍ송가이 제국ㆍ다호메이ㆍ콩고 왕국ㆍ모노모타바 왕국ㆍ보르누 왕국과 같은 여러 나라들이 있었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아프리카를 "미개척의 황무지와 야만의 땅"으로 보았고, 이러한 의미에서 "검은 대륙"이란 별칭으로 불렀다. "유럽 대항해 시대" 이후, 아프리카의 서해안 항로를 따라 유럽인들이 건설한 여러 항구들을 중심으로 식민지화가 시작되었다.
아프리카 서해안에 붙여졌던 "상아해안ㆍ황금해안ㆍ노예해안"등의 명칭은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에서 무엇을 가져갔는지를 잘 보여준다. 1830년대에 이미 "프랑스"가 "알제리"를 자국의 식민지로 만들었고, 영국은 "나폴레옹 전쟁"의 결과로 "케이프타운"을 점령하였다.
18세기 무렵 유럽은 "아프리카 내륙"의 탐험에 열중하였고, 19세기에 이르러 아프리카 전체의 지도 제작을 완료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중반까지도 아프리카의 "사하라 이남지역"은 유럽 제국주의가 지배하지 못한 곳이었다.
1873년에서 1896년까지 장기 불황이 지속되자, 영국ㆍ프랑스ㆍ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하고, 세계 자본주의 시장에 편입시키려 하였다.
19세기 말, 유럽의 열강들은 세계 각지에 대한 "식민지 경쟁"에 나섰으며, 아프리카 역시 이러한 식민지 쟁탈전의 각축장이 되었다. 1884~1885년에 걸쳐 열린 "베를린 회의"는 "영국ㆍ프랑스ㆍ독일"의 "아프리카 분할"과 "벨기에"의 "콩고"에 대한 식민 침략을 정당화했다.
1914년경 아프리카의 식민지화 상황 : 독립국 2곳 (에디오피아ㆍ라이베리아)을 제외한 전 지역이 식민지화 되었다.
2. 베를린 회의 (1884~ 1885)
1884.11.15일, "독일 총리 비스마르크"의 주재로, 영국ㆍ프랑스ㆍ독일의 고위 정치가들을 포함한 유럽 15개 나라 대표가 "베를린"에 모였다.
참가국들은 "아프리카에서 열강들 사이에 무력 충돌이 벌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한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국가가 그 지역에 대한 우선권을 갖는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이로 인해 열강들은 다른 나라보다 한발 먼저 식민지를 확보하는 데 혈안이 됐고, 훗날 아프리카의 국경선이 현지 주민들의 민족과 문화를 무시한 채, 그어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베를린 회의"에서 합의된 사항은
① "벨기에 국왕"은 개인 자격으로 "콩고"의 통치자가 되며, "콩고"는 자유무역 지역으로 한다.
② 아프리카의 특정 지역을 자국의 식민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실제 그 지역에 대한 통치 능력이 있음을 입증하여야 한다.
이에 따라 "벨기에"는 "콩고"를 자신들의 식민지로 할 수 있었으며, "베를린 회의"가 있은 지 30년 만인 1914년 무렵에는 "에티오피아ㆍ라이베리아"를 제외한 아프리카 모든 지역이 유럽의 식민지로 분할되었다.
1876년, "벨기에 국왕 레오폴 2세"는 개인 자격으로 "국제 중앙아프리카 탐험 및 문명 협의회"를 조직하고 "헨리 모턴 스탠리"를 "콩고 분지"에 파견하였다. "스탠리"의 탐험 결과, "벨기에"가 "콩고 지역"에 진출하게 되자, 유럽 각국은 앞 다투어 아프리카에 탐험가를 파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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