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Germany)"은 1871년 "비스마르크"가 "통일 독일제국"을 건설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 (1914.07.28~1918.11.11 : 4년 4개월 14일)"의 패배 후, 많은 영토와 모든 식민지를 잃었다. "세계경제 대공항 (1929~1939)"으로 인한 자본주의 체제가 부실한 "독일"은 심각한 상태에 빠진다. 1939년,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 (1939.09.01~1945.09.02 : 5년)이 유발되었다.
1. 751년, "프랑크 왕국"은 실력자 "카롤루스 가문"에 떨어진다.
로마인들에 의하면, "게르만족"은 "렉스(rex)"라는 부족장들의 왕을 실력 있는 유력가문에서 선출한다.
선거 과정은 형식적이었다.
"카롤루스 왕가"의 개척자 "키 작은 피피누스(Pippinus Brevisㆍ단신왕 피피누스)"는 "프랑크 왕국"의 전 왕가를 폐위시키고, 쿠데타로 왕이 된 사람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 과정에서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교황"으로부터 직접은 아니지만 도유식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이때부터 "프랑스 왕"들은 "교황"의 축성을 받는 전통이 생긴다. "피피누스"는 그 후 756년에 일부 영토를 "교황"에게 바침으로써 "교황령"이 탄생하는 토대를 마련한다.
※ 피피누스 3세 브레비스 (Pippinus III Brevisㆍ714~768) 샤를마뉴의 아버지ㆍBrevis(브레비스) = 키가 작다ㆍ카롤링거 왕조 출신, 프랑크 왕국의 군주
741년부터 네우스트리아/부르군트의 궁재ㆍ748년부터 프랑크 왕국 궁재였ㆍ751년부터 프랑크 왕ㆍ그의 통치 때부터 통일 프랑크왕국의 카롤링거 왕조가 시작된 것으로 본다.
※ 위대한 카롤루스 (Carolus Magnusㆍ742(747?)~814) 샤를마뉴 대제ㆍ카를 대제ㆍ카롤루스 마그누스ㆍ카롤링거 왕조 프랑크 왕국 2대 국왕
800년, "단신왕 피피누스"의 아들 "위대한 카롤루스"는 "교황"의 주도하에 "로마제국의 황제"로 임명된다. 이 황제 자리는 곧 "신성 로마제국"으로 불리게 된다. 제국의 중심부는 "아헨(독일 서쪽인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 속하는 도시ㆍ벨기에/네덜란드와 접한다ㆍ로마 시대에 아쿠이스그라눔이라는 온천지ㆍ8C에 카를 대제가 즐겨 머무른 곳)"이다.
이후 "신성 로마제국" 황제 대관식은 여기서 거행된다. 그러나 "프랑크 왕국"은 이동ㆍ통신의 제약 등으로 곧바로 분할된다. "게르만 법"에 의하면, 상속에 의해서 왕국은 쪼개지게 되어있다. "위대한 카롤루스(샤를마뉴)"의 사후, 유일한 세 손자의 권력다툼에 의해 그의 대제국은 3분할된다. "카롤링거 제국"을 세 왕국(동 프랑크(독일)ㆍ중 프랑크(이탈리아)ㆍ서 프랑크(프랑스))로 분할된다. 이를 "베르됭 조약(843년)"이라고 한다.
최종적으로는 870년 "메르센 조약"으로 "샤를마뉴"의 장손의 아들 3명은 이탈리아(프로방스ㆍ제네바에 이르고, 남쪽은 로마 교황령 위쪽부터 시작한다)를 상속받고, 프랑스 쪽은 "대머리 왕 샤를" 계열이, 독일 쪽은 "루트비히 계열"이 차지한다.
843년, 베르됭 조약 : 프랑크 황제인 "경건왕 루트비히 1세(샤를마뉴 아들)"의 생존한 3명의 아들이 맺은 "카롤링거 제국" 분할 조약
"샤를마뉴 제국" 해체의 첫 단계였으며, 훗날의 서유럽 근대국가의 성립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프랑크 황제인 "경건왕 루트비히 1세(샤를마뉴의 아들)"가 829년부터 상당량의 영토를 2번째 부인에게서 얻은 막내아들(대머리 왕 카를 2세(샤를 2세ㆍ프랑스 서프랑크 왕국의 왕ㆍ843~877 재위ㆍ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875~877 재위))에게 주려 하자, 3명의 이복형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루트비히 1세"가 죽고(840) 난 뒤에는 전면전이 벌어졌으며, 3째 아들인 독일인 "루트비히"는 막내 "카를"과 손잡고 큰형인 "황제 로타르 1세"를 공격했다. "로타르"는 "벨기에 퐁트누아"에서 패배하고(841.06), "엑스라샤펠(독일 아헨)"에서 쫓겨나(842) 평화 조약 체결을 간청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듬해 "베르됭(프랑스 북동부)"에서 "로타르"는 "프랑키아메디아(이탈리아 대부분ㆍ스위스/프랑스 동부/독일 서부/네덜란드/ 일부 벨기에를 포함하는 길고 좁은 중심 지역)ㆍ를 차지하고, 황제위를 그대로 보유하기로 확약받았다. "독일인 루트비히"는 "프랑키아오리엔탈리스(라인 강 동쪽 영토)"를, "카를"은 "프랑키아오키덴탈리스(프랑스 중, 위의 2지역을 뺀 나머지 부분)를 얻었다.
870년, 메르센조약 : 870년 동ㆍ서 프랑크가 "로마 황제 카를 대제"의 유령(遺領) 분할에 관하여 맺은 조약으로, 오늘날 독일ㆍ프랑스ㆍ이탈리아의 원형이 마련되었다.
"베르됭조약"으로 프랑크왕국이 동ㆍ중ㆍ서 프랑크의 3갈래로 분열된 이후 서프랑크가 "로트링겐"을 강제 병합하자, 동프랑크가 이에 반발하여 양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상황에 놓였다. 그러나 870년 "메르센조약"이 체결되어" 라인강" 북부를 동ㆍ서프랑크가 분할 점령하는 것으로 상황이 종결되었으며, 그 아래 지역에는 "이탈리아"가 성립되었다. "프랑크 왕국"은 분열 이후 점차 쇠퇴해갔으며, 이는 "노르만족의 침입"을 격화시켜, 정치ㆍ경제ㆍ사회면의 봉건화가 촉진되었다.
919년, "독일"지역의 "카롤루스 대"는 끊기고, "작센족" 계열의 왕이 선출된다. (오토왕조= 작센왕조= 류돌핑어)
당시 "동 프랑크(독일)"에는 "작센ㆍ슈바벤ㆍ프랑켄" 등 많은 공국이 세워졌는데, 가장 센 나라는 "작센 공국" 이었다. 그래서 919년, "작센의 하인리히 공작"이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되었고, 이때부터 "동 프랑크 왕국"은 "독일 왕국"이 된다. 왕이 된 "매사냥꾼 왕 하인리히 1세(873(876?)~936)ㆍ912년부터 작센 공작ㆍ919년부터는 독일 국왕ㆍ오토 왕가의 시조ㆍ프랑크 족이 아닌 최초의 독일 군주)"는 2가지 공을 세우는데, 평생의 노력으로 모든 공국을 단결시켜서, "마자르인(헝가리인)"의 침입을 막아낸 것이고, 위대한 왕인 "오토 대제"를 낳았는데, 936년 그의 뒤를 잇는다.
"오토 대제"는 "이탈리아"로 진군해서, "교황에게 황제의 관을 받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세운다. 961년, 운 좋게도 "이탈리아" 내부에서 싸움이 벌어졌고, 싸움에서 패한 "로마 교황"이 "오토 대제"에게 파병을 요청한다. "오토"는 기다렸다는 듯 대군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출정해 승리한다.
"오토1세(오토대제)"는 "로마 교황령"을 군사적으로 구해주고, 예전 위대한 "카롤루스"에 이어, "아헨"에서 황제의 관을 받는다.(962년) 이때부터 "독일 지역"의 왕들이 황제를 겸임한다. "오토"에게 큰 도움을 받은 "요한12세"가 "오토"에게 "로마 황제"의 칭호를 선물로 주는데, 여기서부터 "신성 로마제국"이 시작된다. 이때부터 약 840년간 "독일 왕국"은 "신성 로마제국"으로 불린다.
987년, "카롤루스 왕가"의 마지막 프랑스 지역 왕 "루이 5세"가 사망하자, 게르만법에 따라 선출에 의해 "위그 카페(Hugh Capet)"가 그 뒤를 잇는다. "위그 카페"는 "오토1세"의 외조카이다.
"위그 카페" 초창기에 직할령은 "프랑스 섬(일 드 프랑스)"으로 불리는 "파리" 주변부에 국한되서 "브리타니ㆍ아키텐" 등 다른 부족장들에 비해 힘도 없었고, 그래서 "위그 카페"는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런데 이 왕조는 성장하고 1328년까지 유지된다.
1077년, "하인리히 4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 "서임권(성직자 임명권)"을 두고, 분쟁을 일으키는데, 결국 "하인리히 4세"가 "카노사 성"에서 "교황"에게 굴복하게 된다.(카노사의 굴욕)
이후에도, 황제ㆍ교황 사이의 권력투쟁이 지속되다가, 결국 "교황"이 승리하고, 황제 권력은 약화된다. 이후 독일 제후들의 "왕위 쟁탈전"이 이어지다가, 독일에게 가장 쎈 세력인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프리드리히 1세"가 독일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된다.
"프리드리히 1세"는 혼란한 내부 분쟁을 종식시키고, 평생에 걸쳐 "이탈리아"를 6차례 침공하는데, 얼굴 가득 붉은 수염을 덮은 그에게 "붉은 수염"이라는 뜻의 "바르바로사"라는 별명이 붙는다.
손자 "프리드리히 2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ㆍ이탈리아 왕ㆍ시칠리아 왕ㆍ부르고뉴 왕"이 된다.
그의 취미는 자신의 수많은 왕관을 늘어놓고 감상하는 게, 제일 큰 낙이었다. 사후 후계자는 야심 넘치는 제후들을 누를만한 힘이 없었다.
"잉글랜드 왕"도 형식적으로는 "프랑스 왕"의 신하였는데, "카페 왕조"의 "존엄왕 필리프 2세"는 봉건적 계약 위반을 이유로, "잉글랜드 존 왕"의 "프랑스" 영지를 몰수하여 직할 영지로 편입한다. (1214년 부빈전투)
"잉글랜드 존 왕"은 "프랑스"에서 "노르망디ㆍ앙주ㆍ투렝"을 빼앗기고, "아키텐ㆍ가스코뉴ㆍ기엔"의 해안가만 남게 된다. 이 때문에 "존 왕"은 "잉글랜드"내 봉건 귀족들로부터 "마그나 카르타"를 강요받게 된 것ㆍ영국에서 의회제도의 기초가 놓여지게 된 것 등이 유명하다.
프랑스왕국의 7번째 국왕 "필리프 2세(1165~1223ㆍ카페왕조 출신)"는 "남프랑스 툴루즈"도 영토에 편입시킨다. 이런 식으로 "프랑스" 왕들은 골치 아픈 "대봉건 귀족"의 영지를 몰수하여 직할지에 편입하거나 결혼을 통해 합병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해 나간다.
※ 무지왕 존 (Johnㆍ1166~1216ㆍ잉글랜드의 군주(1199~1216)ㆍ플랜태저넷가의 3번째 왕)
프랑스의 "필리프 2세"와의 전쟁에서 "노르망디 공국"을 비롯한 프랑스 내 영토를 대부분 잃었고, 이는 13C "앙주 제국"이 붕괴하고, 프랑스 "카페 왕조"가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존은 치세 말기에 발발한 "제1차 남작 전쟁"에서 오늘날 "영국의 헌법의 기초가 되었다"고 판단하는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했다.
그는 "헨리 2세ㆍ엘레오노르(아키텐 출신)"의 3째 아들이었다. 아버지 "헨리 2세"는 영국의 영토를 넓히고 새로운 제도를 정착시키는 데 큰 업적을 쌓은 왕으로, 특히 "영국의 보통법 체계"를 정착시키고 재판제도를 제대로 세우는데 기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어머니 "엘레오노르"는 자녀들을 유럽의 여러 왕가들과 결혼시켜 핏줄이 여러 왕가들에 흐른다는 이유로 "유럽의 어머니"라고 불린다. "무지왕 존"이라고 불렸는데, 어떠한 영토도 물려받지 않을 것이라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형제들인 "청년왕 헨리ㆍ사자왕(사자의 심장을 가진) 리처드ㆍ조프리"가 1173~1174년까지 일으킨 반란이 실패한 이후 아버지에게 가장 사랑을 받게 되었다. 1177년 "아일랜드 영주"로 임명되었고, 유럽 대륙ㆍ잉글랜드에 있는 영토도 하사받았다. "헨리 2세"와 아들들 간의 전쟁은 "청년왕 헨리ㆍ조프리"의 사망으로 끝났다.
이후 형인 "사자왕 리처드"가 "제3차 십자군"에 참전했을 때, "리처드"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이후 그는 "리처드"가 1199년 사망했을 때, 왕위에 올랐다
※ 로빈 후드 (Robin Hoodㆍ평민 신분?ㆍ헌팅턴 백작ㆍ민담에 등장하는 가공의 인물)
"존 왕"에 대항하여 "대헌장"을 만들게 한 인물이라는 신화로까지 발전한다. 60여 명의 호걸들과 함께 불의한 권력에 맞서고 "부자들을 약탈하여 가난한 이를 돕는 의적"으로 그려진다.
존 왕은 1199년부터 1216년까지 영국의 왕위에 있었다. 아버지는 플랜태저넷 왕조를 연 "헨리 2세" 당시 영국 영토는 "스코틀랜드"와의 경계에서부터 "피레네 산맥"까지였다고 한다. 지금의 프랑스 땅 대부분이 "헨리 2세"의 통치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아들 "필리프 2세"는 "헨리 2세"와 끝없는 전쟁을 벌여서 프랑스 영토를 넓히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프랑스 왕"은 "헨리 2세"의 아들들을 뒤에서 도와, "헨리 2세"와 어떻게든 다투게 하여, 어부지리의 이득을 얻는 것을 전략으로 하고 있었다.
작전은 성공을 거두어서 "헨리 2세"를 승계한 "사자왕 리처드ㆍ존 왕"을 거치면서 유럽 대륙의 영국령은 점점 줄어들다가, 결국 "존 왕" 대에 대부분을 잃는다. 그래서 "존 왕"을 "실지왕(失地王)ㆍ결지왕(缺地王ㆍ땅 부족)ㆍ무지왕(無地王ㆍ땅 없음)" 등으로 불리기도 하고, 반대로 "필리프 2세"는 프랑스의 땅을 가장 많이 넓힌 왕으로 "존엄왕"이라고 불린다.
몇 년 전 나온 한 영화 "로빈 후드(2010 개봉ㆍ러셀 크로우 주연)"에서 "로빈 후드"는 "사자왕 리처드"의 궁수로서 프랑스와의 전쟁에 참가한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러다가 우연히 "리처드 왕"의 사망을 목격하게 되고, "리처드 왕"의 왕관을 영국에 있던 "존 왕"에게 전달해 주어 "존 왕"이 무사히 왕위 계승을 하도록 돕는다.
그러나 "존 왕"의 폭정으로 백성들이 고달파지자, "로빈 후드"는 "존 왕"에게 대항하기로 결심하고, 시골 귀족들을 모아 전쟁을 일으키게 되고, 결국 "존 왕"은 "로빈 후드"의 요구대로 "대헌장"에 서명하는 것으로 결말이 난다.
1328년, "카페 왕조"의 대가 끊기는데, 상속권은 마지막 "카페 가문"의 왕인 "필리프 4세"의 조카인 "발루아 백작 필리프"와 외손자인 "잉글랜드 국왕"에게 있었다. 프랑스 왕은 "발루아 가문"에게 주어졌다.
잉글랜드 왕은 동시에 프랑스 왕국의 귀족으로 "보르도 와인"이 생산되는 "가스코뉴 지방"을 영지로 갖고 있었다. 1337년 프랑스 왕이 "가스코뉴"를 잉글랜드 왕에게서 몰수하려고 하자, 잉글랜드 왕은 "상속권분쟁"과 함께 "백년전쟁"을 개시한다. 1452년, 결과적으로 잉글랜드 왕은 프랑스 내의 모든 영지를 잃는다.
그 후, "루이 11세(1461~1483)"는 결혼 등을 통하여, "브르고뉴ㆍ앙주ㆍ프로방스ㆍ가스코뉴" 등을 흡수하여 명실공히 프랑스의 거의 모든 영토를 왕령지로 합병한다.
"독일"은 "오토 왕조"부터 "이탈리아"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독일 본토의 정치보다 더 중요시했다.
"독일 왕(=신성로마제국 황제)"들은 제국을 남부 이탈리아까지 확장하는데 신경썼다.
또한 "프리드리히 황제(1122~1190)"는 "웰프가문의 하인리히"로부터 영지 "바이에른"을 몰수하여 자기 영지에 편입하지 않고 다른 제후들에게 나눠준다. 이는 프랑스와는 다른 처리 방식인데, 독일 왕들은 프랑스 왕들과는 달리 그럴 수밖에 없었고, 이는 독일 지역에 "영국ㆍ프랑스"와 같이 강력한 왕국이 등장하지 못한 또다른 이유가 된다.
이런 상태에서 15C 말경에는 "영국ㆍ프랑스"에 강력한 왕권이 성립한 것과는 달리 독일 지역은 "비텔스바흐가문(바이에른ㆍ팔츠선제후국ㆍ스웨덴왕국ㆍ그리스왕국)ㆍ웰프가문(지금 니더작센 지역ㆍ영국 하노버왕가)ㆍ안할트(아스카니아)가문(작센-안할트 지역)ㆍ베틴가문(튜링겐ㆍ작센주ㆍ폴란드왕국)ㆍ룩셈부르크가문(룩셈부르크 공국ㆍ보헤미아 왕국)ㆍ합스부르크가문" 등의 대가문들로 세력 균형을 이루어, 일종의 "부족국가 형태"로 존속하였다.
16C에는 "종교개혁"으로 공식적으로 분열이 고착화되고, 17C초에 "30년 전쟁"으로 1871년까지 그런 부족국가 상태가 유지된다. 같은 "비텔스바흐 가문"이지만, "바이에른 선제후국"은 가톨릭이었고, "팔츠선제후국"은 장로교국으로 선언했으니, "독일 왕"이라는 개념은 흐릿해지고, 대신 주로 "합스부르크 가문" 중심의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오스트리아" 등의 가톨릭 계열 가문 영지와 "이탈리아"에 신경쓰는 모양새가 된다.
"독일" 지역의 제후들이 통일을 논의하기 위해 모인다면, 자연스럽게 "슐레스비히 공작ㆍ하노버 왕ㆍ룩셈부르크 공작ㆍ작센 선제후" 등이 주요 멤버가 되는데 이들이 각각 "덴마크 왕ㆍ영국 왕ㆍ네덜란드 국왕ㆍ폴란드 왕"을 개인적으로 겸임하고는 했으므로, 민족국가로서의 "독일"이라는 협상에 의한 국가의 성립 비준은 어려운 일이 된다.
1254~1272까지 독일에서는 왕이 없거나, 있어도 명분뿐인 왕이 선출되면서, 왕좌가 비어있는 "대공위 시대"가 이어지게 된다. 그러다가 1273년 "루돌프 1세"가 왕으로 선출되면서, 막이 내려진다. 그런데 이는 제후들이 일부러 힘이 약한 "루돌프 1세"를 꼭두각시로 앉힌 것이라서, 제국은 계속 분열되면서, 혼란에 빠지게 된다.
"중세"에 "독일 왕ㆍ교황" 사이에 100년에 걸친 힘겨루기 싸움이 지속되고, 양측이 승패를 주고받던 와중에 "종교개혁"이라는 소용돌이가 독일을 휩쓸게 된다. 이 운동을 이끈 사람이 바로 "마르틴 루터 (독일 농민의 아들)"이었다.
부패한 "교황청"이 신도들에게 재물을 착취하기 위해, "면죄부"를 팔기 시작하고, 이에 분노한 "루터"가 1517년, "비테베르크 궁성교회" 출입문에 "95개조 반박문"을 걸어, "교황청"을 비판한다. "교황 레오10세"는 이를 "교회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루터"를 "로마"로 소환하라고 명령하는데, 당시 "작센 선제후"인 "프리드리히 3세"가 발 벗고 나서, "루터"를 보호한다. 1520년, "루터"는 종교개혁에 대한 3권의 책을 출판했고, 이 책은 날개 돋힌듯 팔려나가고 "루터"는 영웅이 된다.
분노에 이를 갈던 교황은 "루터"에게 참회하라는 조서를 보내는데,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조서를 불태워 버린다. 이 용감한 행동을 본 독일인들은 교회의 억압에 맞서 싸우겠다는 의지를 불태운다.
민중의 눈치를 보던 교황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에게 "루터"의 죄를 물어달라고 요청했고, "루터"는 결국 "바르트부르크 성"에 은신하게 된다. 이때까지 독일어로 쓰인 성경이 없었기에, 독일인들은 성직다의 거짓 가르침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1543년, 은신하던 "루터"가 마침내 독일어로 번역한 "신약성경"을 완성한다.
"가톨릭교"계에 대항할 사상적 무기가 완성된 것이다. (이후 "종교개혁"이 "농민운동"으로 발전하려 하자, "루터"가 태도를 바꾸기도 한다.) "루터"가 불붙인 "종교개혁"이 독일 전역을 휩쓸게 되는데,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이러한 "종교개혁"에 반대하면서, "신교도"들을 탄압하자, 결국 "30년 전쟁"이 발발한다.
"가톨릭교-개신교의 대립ㆍ정치적 모순"등이 한순간에 폭발하면서, 점차 유럽 주요 강대국들이 참전하면서, 결국 유럽이 거대한 전쟁터로 돌변한다.
"30년 전쟁"에서 전투는 늘 "독일 땅"에서 치러졌고, "프랑스ㆍ스웨덴" 군대가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결국, "신성로마제국 황제ㆍ가톨릭교도 제후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신교국가들"에게 화해를 청한다. 1648년, 참전국 모두 "베스트팔렌 조약"에 조인하면서, 전쟁이 막을 내린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ㆍ스웨덴" 같은 전승국은 큰 이득을 취했지만, "독일"은 "전쟁배상금" 같은 부채를 떠 안게 되었으며, 영토는 폐허만 남게 된다. 때문에 독일 경제는 붕괴 직전, 정치적 분열까지 심각해진다. "신성로마제국"은 수백 개의 나라로 해체되고, 사실상 "황제"라는 자리도 껍데기만 남는다.
한편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가장 빠르게 성장한 "독일영방 제후국"이 "프로이센"이다.
1525년에 세워진 "프로이센 공국"이 점차 세력을 넓히다가, 1701년 마침내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왕위를 인정받고, "프로이센 왕국"으로 승격하고, 1709년 "베를린"을 수도로 삼는다.
1713년 "군인 왕"으로 유명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프로이센 2대 왕"이 되는데, 그는 아주 검소하고, 부지런하며, 규칙을 철저히 지키는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특성은 이후 "독일인의 성격"에 고스란히 반영되는데, 역사학자들은 이를 "프로이센 정신"이라 평가한다. 그가 사망할 때 쯤, "프로이센"은 이미 유럽의 강국 반열에 올라 있었다.
이후 왕위를 이어받은 "프리드리히 2세"는 아버지가 잘 닦은 군사력을 활용하여, "오스트리아"와의 "슐레지엔 전쟁"에서 승리해, 영토를 확장한다. 그는 진보적인 정책을 펴는데, 귀족 자제뿐 아니라, 평민 자녀도 의무교육을 받도록 했고, 거액의 장학금으로 "프로이센" 사람들이 과학을 탐구하도록 한다. 또한 출판과 언론의 자유를 허용한다. 그의 이러한 사고방식은 독일인의 사고방식에 깊은 영향을 준다.
이렇게 그가 국내 정무를 돌보는 동안, 유럽 한편에서는 "프로이센"을 꺾기 위한 계획이 세워지는데, "프랑스ㆍ오스트리아ㆍ러시아"가 뭉쳐서, 남서동쪽 사방에서 "프로이센"으로 진격한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침착하게 "영국"과 동맹을 맺고, 기선제압을 위해, "오스트리아" 앞잡이인 "작센"을 공격해서, "7년 전쟁"이 시작된다. 치열한 접전으로 "프로이센"이 무너져갈 무렵, 뜻밖의 일이 벌어진다.
1762년, "옐리자베타(러시아 여제)"가 세상을 뜨고, "표트로 3세"가 황위를 이었는데, 그는 "프리드리히 2세"를 "신"처럼 여기고 있었고, 그는 "프리드리히 2세"를 돕고 싶어 했다. 결국 그는 전투를 중단시키고, 함께 싸우던 "프랑스ㆍ오스트리아"를 단번에 배신한다. "프로이센"은 위기에서 벗어나고, 결국 "7년 전쟁"을 승리하게 된다. "프리드리히 2세"는 "러시아"와 사이좋게, "폴란드"를 나눠 가지고, "미국독립전쟁"을 지원하면서, 유럽강대국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던 중, "프랑스"에 "나폴레옹"이 등장하면서, 유럽 역사에 새 시대가 열린다.
1806년, 1,000년의 역사를 이어온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되고, "프로이센" 역시 타격을 입게 된다. 이후 독일 재상 "비스마르크"가 능수능란하게 전쟁을 이끌면서 "오스트리아"를 꺾어 버린다. 이어서 유럽 최고의 군대인 "나폴레옹의 프랑스군"까지 격파하면서, 독일의 통일을 이뤄낸다. "프랑스"를 이긴 "비스마르크"는 "프랑스" 교외의 "베르사유"로 진군하여,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하는 "독일 제국"을 선포한다.
이후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왕"에서 "독일제국 황제"가 된 "빌헬름 1세"를 열심히 보좌하면서, 독일경제를 끌어 올린다. 독일은 차츰 유럽 강국으로 변모한다. 그러다가 29세에 황제가 된 "빌헬름 2세"가 권력을 두고, "비스마르크"를 견제하다가, 결국 "비스마르크"를 몰아낸다. 모험심이 넘치는 "빌헬름 2세"는 적극적인 "팽창주의 정책"을 추진하면서, 국제적인 긴장감을 조성한다. 이런 긴장으로 인해, 결국 1914년 "세계 제1차 대전"이 터진다. 독일은 "프랑스ㆍ영국ㆍ러시아" 연합군을 상대로 싸우다가, 1918년에 결국 패배하고, "독일제국"이 붕괴된다.
그리고 1919년 전쟁의 폐허 위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이 탄생한다.
이 공화국은 독일 최초로 "공화정ㆍ민주주의"를 실시하는데, 1933년 "나치"가 제1정당으로 집권할 때까지 지속된다. 여러 정치적 시련을 겪으며, 나라를 재정비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1923년 천재지변 같은 인플레이션이 터지면서, "독일 마르크화"의 가치는 휴지조각이 된다. 수많은 독일인들은 모든 재산을 잃었고, 수백만은 직장을 잃고, 국가경제는 무너진다.
이렇게 "바이마르 공화국"이 쇠락의 길을 걸을 때, "독일 노동당"이라는 단체가 설립된다. "아돌프 히틀러"는 이 단체에 "나치(Nazi)"라는 이름을 붙인다. 어린 시절, 화가를 꿈꾸던 "히틀러"는 커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전쟁이 끝난 후, "육군 정치부 정보국"에서 일하던 "히틀러"가 "독일 노동당" 집회에서 뛰어난 연설 실력을 발휘하게 된다.
"히틀러"가 "독일 노동당" 입당을 결정한 순간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이었다고 한다.
"독일 노동당" 당원이 된 그는 극적인 표정과 연극 톤의 목소리로 수많은 독일인의 감정을 동요시키기 시작한다. 그는 당의 이름을 "민족 사회주의 독일 노동당"으로 바꾸는데, 이것이 훗날의 "나치당"이다. 그는 생활고에 지친 독일인의 마음을 "빵과 일자리를 주겠다."는 감언이설로 사로잡는다. 결국 정계를 꽉 잡은 그는 "제3제국"을 선포하면서, "나치 독일" 시대가 시작되고, 독일은 "독재자의 치하"에 들어간다. 1939년, "히틀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전쟁인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게 되고, 세계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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