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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사건

사건- 80.04 : 4ㆍ21 사북탄광 노동항쟁 (사북사태ㆍ사북사건)

by 당대 제일 2022.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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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북탄광 노동항쟁"은 1980년 "노동 운동"의 시작을 알린 중요한 사건으로, "독재 권력에 항거하고, 부도덕한 기업, 철저하게 어용인 노조와 맞서 싸운 것"이며, 당시 "신군부"의 억압 속에서도 "생존권 사수"를 위해 분연히 광부들이 일어났던 사건이다.

 

1. 사북탄광 노동항쟁사북사태 (舍北事態)사북사건 (舍北事件)

일 시 : 1980.04.21~24        장 소 :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국내 최대의 민영탄광

인 원 : 3,500여 명(동원탄좌 노동자)6,000여 명(지역 주민 합세)      결 과 : 경찰- 사망(1)부상(70여 명)

처 리 : 사북사건 합동수사단 (정선경찰서에 설치전두환 계엄사령부 하) 연행- 200여 명 : 광부와 주민들을 연행해 가혹행위ㆍ검찰- 구속 (31)불구속 (50)구속 군법회의 송치 (81) "보안사 고문기술자들"에게 고춧가루 고문물 고문통닭구이 고문과 폭력 실형(이원갑 등 7)집행유예(21)

사북탄광

1980.04.21.,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에 위치한 "동원탄좌 사북광업소(국내 최대의 민영탄광)"에서 "어용 노조임금 소폭 인상"에 항의해, 탄광 노동자들의 시위가 발생하면서 시작되었다광부들은 회사 입장에 서서, 임금 인상을 결정한 "어용 노조의 위원장"에게 사퇴를 촉구하며, 투쟁을 벌였다04.18일 오후, "노조지부장사북지서장""사북지서" 앞마당에서, 노조원들에게 집회를 열어, 토론할 것을 약속한다.

하지만 04.2114시경, 노조원들은 예정된 집회가 불허된 사실을 알고, 이에 항의하고, 이 광경을 찍고 있던 "사복 경찰관(정선경찰서 소속)"이 도주하면서, 광부들을 경찰차로 치고 달아나는 교통사고가 발생하고 이에 흥분한 광부들은 "사북지서" 등 주요 건물들을 습격하고, 기물을 파괴하면서, "사북사건"이 발생한다.

04.22일 오전, 일단의 광부부녀자들은 "노조지부장의 부인"을 기둥에 묶어놓고, 집단폭행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강원도경 경찰"의 진압작전에서는 광부주민들이 던진 돌에 "경찰관 1"이 사망하고, 70여 명이 부상당하는 유혈사태가 발생한다04.24, "노사정 대표""합의사항(11개 항)"을 발표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2. 사 건

1980.04.21"강원도 정선군 사북읍"에 위치한 "동원탄좌 사북광업소"에서 노동자들의 시위가 발생하면서 시작되었다광부들은 회사 입장에 서서, 임금인상을 결정한 "어용노조의 위원장"에게 사퇴를 촉구하며 투쟁을 벌였다경찰이 동원되었고, 광부들과 경찰의 충돌과정에서 광부 1명이 경찰차에 깔려서 부상을 입었다이에 흥분한 광부들에 의해 1명의 경찰이 사망하였으며, 광부들이 사북 지역을 장악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계엄사"의 보도 통제 때문에 24일에야 언론에 보도되었지만, "임금인상""어용노조 지부장"사퇴를 요구하며 시작된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이 민중봉기에 다름 아닌, 이른바 "사북사태"로 비화한 것은 04.21일이었다"강원 정선군 사북읍 사북리"에 소재한 "동원탄좌"는 당시 연간 채탄량 160t에 종업원 수가 3,000명이 넘는 국내 최대의 민영 광산이었다3만 명에 이르는 "사북리"주민의 대부분은 "동원탄좌" "군소 덕대"(광산업자와 계약을 맺고 광산의 일부를 맡아 채광하는 사람) 밑에서 일하는 광부와 그 가족들이었다.

04.24, 경찰과 노동자들이 "노조위원장의 사퇴" 등으로 합의를 보면서, 종결되었다한편 "합의서"에는 "주동자를 처벌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들어있었지만, ""으로 구성된 "합동수사본부"는 현지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을 기다린 뒤, 05.0770여명의 광부와 부녀자들을 연행해, 가혹한 구타와 고문을 가했다그 가운데 "이원갑신경"을 비롯한 25명이 "보통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사건 이후 오랫동안 "폭동"으로 취급되었으나, 2005년 사건의 주역인 "이원갑"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은 바 있는데, 당시 지도부 "이원갑"씨는 (사북항쟁 명예회복에 온 힘을 바친다

"순박하고 약해빠졌던 광부들의 한과 용기가 동시에 표출된 사북항쟁은 정치적 함의가 컸던 부마광주항쟁에 묻혀 지금까지도 명예회복이 안 된 채, "사북사태"로 남아있습니다."사북항쟁"은 고립된 지역에서 일어난 우발적이고 비조직적인 싸움이었지만, 1980년 봄의 노동운동 흐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는데, "사북항쟁"이 끝나자마자, "일신제강인천제철부산파이프" 중화학공업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이 격렬한 형태로 터져 나왔다1980.04월 들어 봇물처럼 터져 나온 노동자들의 투쟁은 학생시위와 더불어, "신군부""권력 장악 프로그램"을 위협했고, "사북"에 검거 바람이 불어 닥친 열흘 뒤인 05.17"신군부""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본격적인 "권력 장악"에 들어갔다.

3. 사북탄광의 상황

"사북"은 결코 "평화로웠던 광산촌"이 아니었다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은 "어용노조의 반 노동자적 행태""경찰의 과잉 개입"이었으나, 더욱 본질적인 원인은 "광산촌"의 절망적인 생존 환경이었다보통 수백, 깊게는 수천지하로까지 내려가야 하는 막장 노동 속에서 한해 평균 200명의 광부가 목숨을 잃고, 5,000명 이상이 중경상을 입었다10명 가운데 1명꼴로 일어나는 "막장 사고"를 운 좋게 피한다고 하더라도, "진폐증규폐증"이 광부들을 기다렸다.

1979"가톨릭대 부설 산업의학연구소""민영탄광" 노동자 9,15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조사 대상자 가운데 16.1%"진폐증 환자"였다하루 3교대로 8시간씩, 1달 평균 28일씩의 중노동을 하면서도, 이들이 받는 임금은 1979년 당시 평균 164천원으로, 5인 가족 최저생계비에도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광부들이 거주하는 "사택촌"은 거의 "집단수용소"와 같았다가구당 주거면적 5~ 6평에 30~ 40가구가 1곳의 공동변소를 이용했다공동수도의 물마저 제한 급수를 받고 있었다"탄광촌"의 유일한 후생복지시설이라고 할 수 있는 "목욕탕""중앙 사택"의 단 1곳뿐이었다이런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노조"였으나, 회사는 "지부장"에게 "자재 납품권덕대 하청권식당 운영권"등을 주는 방식으로 "노조"를 철저히 어용화 시켰다.

4. 과 정

오지의 탄광촌에 심상찮은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한 것은 그해 4월 초였다"노조 지부장 직무대리 이재기"가 노조원들 몰래 회사 측과 20%의 임금인상에 합의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던 것이다.(당시 광산노조는 전체 지부장 회의를 통해 42.75% 임금인상을 목표로 제시해 놓고 있었다

"이재기"1년 전 "지부장"으로 선출되었으나, 선거 부정 때문에 "광산노조"로부터 선거무효 판정을 받은 상태였다하지만 그는 "광산노조"의 미온적인 조치와 회사 측의 비호에 기대어, 재선거를 1년간이나 미루면서 온갖 편법을 동원해 자리를 보전했다이 와중에 "임금인상 합의 소문"이 떠돌았고, 04.15일 소문이 사실로 확인되었다노조원들이 "광산노조"에 격렬하게 항의한 결과, 04.18"이재기"와의 면담이 이루어졌다그러나 "이재기"의 요청을 받고 출동한 경찰이 광부들의 대표인 "신경"을 연행해 가자, 흥분한 광부 300여명이 "사북지서"로 몰려들어, 시위와 농성을 하기에 이르렀다.

"계엄사령부"의 집회 불허 벽보가 나붙은 가운데, 04.21일 오후 노조원 200여명이 지부 사무실에서 농성에 들어갔다"정선경찰서" 간부들이 해산을 종용하고, 기동경찰 60여명이 사무실을 에워싸고는 있었으나, 노조원들은 별다른 과격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그런데 오후 5시쯤, 농성을 "유혈폭동"으로 비화시키는 사건이 일어났다.

광부를 가장해 농성장에 들어간 형사 1명이 발각되었고, 이에 겁을 먹은 경찰들은 사무실 앞에 있던 지프에 올라타, 농성장을 빠져나가려 했다노조원 몇몇이 앞을 가로막았으나, 지프는 그대로 돌진했다4명의 노동자들이 지프에 치여 쓰러졌고, 동료들이 차에 깔리는 것을 본 광부들은 극도로 흥분했다"동료 광부가 경찰차에 치여 죽었다(실제로 죽지는 않았으나 당시 광부들은 그렇게 알았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삽시간에 수백 명의 광부들이 모여들었고, 흥분한 광부들은 "사북 읍내"로 진출해 사실상 지역을 장악했다.

"사북지서"와 광업소 사무실이 파괴되었고, "동원탄좌" 귀빈숙소에 있던 "장성경찰서장광업소장" 등이 몰매를 맞고 쫓겨났다밤이 되면서 시위대에는 가족들까지 가세했고, 이들은 수백 명씩 떼 지어 다니며, 과장급 이상 회사 간부와 "이재기"를 비롯한 노조 간부들의 집을 파괴했다시위가 밤새 이어지면서 이튿날 아침 시위대는 2,000여명으로 불어났고, 시위대의 일단은 "이재기" 처를 붙잡아 옷을 벗겨 끌고 다니며, 린치를 가했다"어느 누구도 진정시킬 수 없는 극한 상황이요, 한 맺힌 분풀이"였다.(신경의 회고)

04.22일 오전 10시쯤, 소총으로 무장한 경찰 200여 명이 "사북읍"으로 진입했다"읍내 시위대"는 일단 "동원탄좌"로 후퇴해, "탄좌" 내에 있던 시위대와 합류했다5,000여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철길을 경계로 바리 케이트를 설치하고, 철로에 있던 돌과 갱목을 던지며 격렬하게 저항했다대치한 지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경찰 대열이 무너졌고, 오후 2시쯤 경찰은 "사북읍"에서 완전히 철수하고 말았다이 과정에서 경찰 70여명이 중상을 입었고, 그중 "순경 이덕수"23일 새벽에 사망했다경찰이 철수하자, 시위대는 "38번국도""태백선 철로"를 봉쇄하고, 외부인의 출입을 막았다.

역설적이게도 "사북읍"이 완전히 광부들에게 장악되면서, 상황은 오히려 진정되기 시작했다광부들은 "자치방범대"를 조직해 과격한 행동을 막았으며, "예비군 무기고지서 무기고광산 화약고" 지켰고, "항쟁 지도부" 역할을 한 "이원갑신경"을 중심으로 20여명의 협상단이 꾸려졌고, 이들은 04.22일 오후 인근 "삼척탄좌 사무소"에서 "정부 측 대책위원"들과의 대화를 시작했다지루한 협상 끝에 04.24일 아침 "11개 항의 협상안"이 타결되었다"이재기"를 비롯한 노조 집행부의 사퇴, 상여금 인상을 빼면 나머지 조항은 대부분 부상자 치료 보상피해 주택 복구 등의 사태 수습책이었다. 격렬했던 싸움치고는 허무하기까지 한 결과였다.

① "이원갑(사북 노동항쟁 주역)" 의 증언

2005.08.16., "이원갑" "한겨례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증언했다"탄광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인 "사북 노동항쟁이 폭동"이라는 멍에를 벗어던지고,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은 데 대해,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 해고당하고, 징역살고 나오니까, 블랙리스트에 올라, 막노동판에서도 잘 안 써줬다 경제적인 고통도 고통이었지만, 아이들 교육을 제대로 못 시킨 게 가슴이 아프다 그 때, 동원탄좌 노동자는 3,500여명 정도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지역주민들도 합세해 시위를 벌인 인원은 총 6,000여 명에 이르렀다.

사북항쟁은 독재 권력에 항거하고, 부도덕한 기업, 철저하게 어용인 노조와 맞서 싸운 것이며, 당시 신군부의 억압속에서도 생존권 사수를 위해 분연히 일어났던 광부들이 더 이상 역사의 죄인으로 남지 않도록 정부의 재평가가 이뤄져야 한다 그때 고문을 받았던 사람들이 18명쯤 되는데, 이들도 "민주화 운동자"로 인정받았으며 한다 온갖 고문과 폭행으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피해자들에게도 적절한 치료와 보상이 이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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