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10.25일,"워싱턴 포스트"지는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은 "워싱턴" 거주 한국인 "실업가(박동선ㆍ김한조)와 공작원"이, "미국 의회의원들ㆍ정부 관리들"에게 매년 50~100만 달러를 현금ㆍ선물ㆍ정치 자금으로 제공했다고 폭로했다. 미국언론들은 "닉슨 정권" 하의 불법도청 사건이었던 "워터 게이트"에 빗대어 "코리아게이트 (미국 의회 로비 사건)"이라고 이름 붙였다.
1. 수출 주도형 국가의 탄생
① 1961.11.03 : "케네디"는 "AID(국제 개발처,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조직
• "공산주의"를 막기 위한, "경제전문가 부대" 조직 : 친미국가들의 개발계획을 수립하는 것 • 모든 분쟁지역에, 미국 군대를 파병하는 대신, 분쟁국가의 국민들과 함께 일하면서, 그 나라의 경제를 발전시키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
② 1961.11.14 : "워싱턴 백악관"에 박정희 도착
• 케네디 :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인 "박정희" 지지 • "박정희"가 "특별 원조" 부탁 : 우리는 "경제개발 계획서"를 작성중이다ㆍ특별안정 기금으로 2억5천만$을 지원해 달라 → 박정희의 "경제개발 계획"에 "케네디"는 당황 → 박정희의 허술한 계획에, "케네디"가 원조를 해줄 수는 없었음.
③ 3달 전인 1961.08월, "버거(주한 미 대사)"가 "박정희"에게 경고를 보냄.
• 당신들이 만든 "경제개발 계획은 현실성이 없다" 몇 명의 경제학자들이 수 작업했다는 것을 미국은 이미 파악하고 있다. • 송정범(경제기획원 부원장): 사실 "1차 계획안"은 통계의 미비와 작성 기술도 문제가 있었다.
④ 실무진 회담
• "해밀턴 (AID 처장)"은 미국이 원하는 것을 밝힘 : 경제개발 계획을 수정하는 것이 어떤가? → 미국과 갈등 시작 : 미국 경제전문가들은 냉정하게 비판→ 수출 전략도 없고, 성장률 목표 7.1%는 비현실적이다.
※ 박정희의 수출전략
• 토끼털을 깎아 팔고, 생선을 많이 잡아 팔고, 돼지를 키워서 외화를 번다. • 수출 기업을 육성하여, 한국경제를 성장시킨다는 계획은 없었음. 투자비가 많이 드는 "중공업(제철소 등)"을 만드는 것은 아직 무리라고 미국은 판단 → "박정희"는 자신의 "경제개발 전략"을 바꾸지 않음 → "박정희 -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한국의 5천년 역사는 퇴영과 조잡과 침체의 연쇄사다."
⑤ 61.01.20 : "케네디" 미 대통령 당선
• 친미국가 개발 전략 (케네디 정부의 전략): 핵심 -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는 국가를 도운다 : 맥나마라(국방장관)ㆍ번디(백악관 안보 보좌관)ㆍ로스토우(대통령 특별보좌관)
• "공산국가"가 늘어나는 원인을 분석 : "공산주의 혁명"은 가난한 국가들에서 발생한다는 공통점 발견→ 경제 개발
⑥ 61.03.15 : 긴급보고서
남한상황이 위험스런 방향으로 악화되고 있다 : "반정부 심리"가 강력한 "반미 감정"으로 폭발해서, "혁명"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 61.04.11. : 주매카니기(주한 미 대사) 보고 : "4ㆍ19혁명" 이후, 남한에서 "민족주의" 감정이 일어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이 개입했다"는 비난을 듣지 않으면서, 남한의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
⑦ "주매카니기(주한 미 대사)"를 "동아시아 담당 차관보"로 임명
한국의 "Task Force 팀"을 만들어라. 61.05.15일까지 "한국발전 종합보고서"를 만들어라→ 한국의 축복 • 한국(장면 총리): 미국과 협의하여, 경제개발을 최우선 목표로 선정(경제개발 5개년 계획 발표)
⑧ 61.05.16 : "5ㆍ16쿠데타" 발생 이후, "케네디"는 "박정희"에 대한 조사 시작
• 44.01월, "다카키 마사오 중위"는 일본 군사학교에서 임관했고, 만주의 일본군대에서 복무(친일파)
• 49년 : 해방 후, 체포되어(48.10- 여수ㆍ순천사건 관련), 공산주의자로 판결(남조선노동당 군책) 박정희는 약 300명의 동료들이 체포되도록 증거를 제공하고, 대가로 사형을 면했다. "쿠데타"의 리더가 "공산주의자"라서, "케네디" 행정부는 긴장 → 미 군부 : 뱀 같은 인간이라고 "스네이크 박"이라 불렀다.
⑨ 61.05.31 : 한국은 미국에 계속 의지하면서, 우리에게 협조할 것 같다.
06.05 : "케네디" 대통령 직속 "한국 Task Force 팀"의 보고서 → 06.13 : 한국의 운명을 바꾸는 논의→ 한국의 경제발전ㆍ근대화 전략 수립
2. 한국의 발전
① 한국을 발전시켜야 하는 이유?
북한 공산주의와의 대결에서 이겨야 한다. • 미국의 국가 위신이 달려 있다. • 특히 일본을 보호하는데, 중요하다.
② 미국의 원조로도 한국이 발전하지 못한 이유
과거, "미 원조"는 "군사안보 목적ㆍ전후 복구ㆍ한국인의 최저생계 유지"에만 사용됐다 → 한국의 경제발전에 집중 투자
③ 한국발전을 위해서는
정부행정 개혁ㆍ부패방지 프로그램 가동ㆍ교육제도 개혁 • 한국 교육은 유교적 전통에 따라, 인문ㆍ철학을 강조하고, 자연과학ㆍ공업기술ㆍ경영ㆍ사회과학을 경시 → 국가발전을 위해, 과학ㆍ기술ㆍ직업교육 강화
3. 한국 경제성장의 진실
① 누가 한국 경제를 성장시켰는가?
수출주도형 공업화가 주효했다. • 프레이저 보고서는 "박정희가 한 것은 아니다"고 주장
② "2차 대전"에 승리한 "미국"의 최대 적은 "소련"이다. ① 누가 한국 경제를 성장시켰는가?
소련 : 주변국에 군사ㆍ경제 원조를 하면서, 세력을 넓히고 있는 실정 • 미국 : 공산주의 팽창을 막기 위해, "일본"에게 "미국적 민주주의"를 주입 • 애치슨 국무장관 : 유럽과 아시아의 부흥을 위해, 서독과 일본을 세계의 공장으로 만들겠다→ 일본에 전폭적인 지원→ 일본 경제의 급속한 복구→ 한국전쟁 시, 전쟁물자 공급으로 고속성장
③ "이승만 정권"을 남한에 세운 "미국"은 실패
이승만ㆍ친일파 : 부정부패는 극에 달하여, 미국은 막대한 원조를 했으나, 경제는 처참했음 → 60.04.19 : 4ㆍ19혁명 발생→ "이승만" 미국 하와이로 망명
④ 1960년 : 한국 경제력 (세계 101위)ㆍ북한 경제력 (세계 50위)
북한 : 공산국가의 원조를 받아, 전후 3년 만에 전쟁 복구 완료ㆍ"천리마 운동"(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뤄냄 → "아이젠하워"(미 대통령)은 한국 내에서,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킬까봐 걱정함.
4. 1960년대 한국의 상황
1962 (증권시장 붕괴ㆍ화폐 개혁)→ 1964 (경제개발 계획서(3차년도 계획서) 작성) → 1964 (박정희의 경제 과외ㆍ안정화 프로그램)ㆍ"베트남 전쟁(월남전) 참전 (64.09~ 66.04) 움직임
① 1962 : 증권시장 붕괴
한국 경제에 치명타→ 문제를 완전 극복하는데, 10년이 걸림 • "김종필(중정부장)"의 정치자금 마련을 위한 "주가 조작" 사건 • 2~ 3천만 $(현재 약 9천억 원)을 "주가조작"으로 벌어들임.(NSC 국가안보회의 보고서) • 자금 사용처(김형욱 증언): 박정희에게 상납 + 공화당 창당 자금 + 야당 교란작전 자금 • 증권파동 이후, 투자자들은 주식시장에 공포감을 느꼈고, 기업들은 주식으로 사업자금을 마련할 수 없었음.
② 1962.06 : 화폐개혁 (지하경제 자금으로, 경제개발을 하겠다는 것)
사전조사 없이, 신 화폐로 바꾸고, 은행인출 금지→ 돈의 유통이 안 돼, 한국경제가 마비 • "버그(미 대사)" : 믿을 수 없을 만큼, 멍청한 짓을 저질렀다. • "이병철(삼성 사장)이 "박정희"에게 달려가서 조언 : (이병철) 세계적으로 통화개혁은 해만 있었고, 성공한 예는 거의 없었다. (박정희)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③ 미국 입장 :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 정책을 심각히 재검토해야 한다 → 박정희 권력집권 후, 최대의 위기
④"예금 동결" 조치로 영향 심각
• 전국 중소기업에 타격 (55% 가동 중단) • 미국은 박정희에게, "예금 동결을 해제하라"고 압박 → 앞으로 어떤 정책을 추진할 경우에는 사전에 미국과 협의해야 한다. 박정희는 단호하게 거부, "미국이 한국문제에 개입할 권한이 없다" → 버그 (미 대사) : 당신이 더 이상 미국의 원조를 원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리겠다. → 미국의 힘에 굴복하여, "박정희"가 태도를 바꿈
⑤박정희-경제 참모진(1차)교체
• 유원식(재경위원)ㆍ박희범(최고회의 경제자문) 경질 • 미국과 협조적인 참모진으로 교체 : 새로운 "총리ㆍ경제기획원장"이 우리와 매우 협조적으로 일하고 있다고 보고
⑥ 62.07.11 : 경제참모진들은 다소 수정 필요하다고 발표
62.07.20 : 박정희는 진행 중인 계획까지 공격당한 것에 당황→ 5개년 계획을 확대해야 한다고 저항 • 62.10.05 : 미국은 한국 언론을 통해, "5개년 계획 결함 때문에 경제원조 전액은 어렵다"고 직격탄을 날림 → 당시 한국은 미국의 원조가 없으면, 붕괴하는 나라였다. 한국국민들은 동요 → 권력유지를 위해 국민들의 지지가 필요했던 박정희 → 미국에 무릎을 꿇음 → 62.11.26 : 1962.02월에 시행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전면 수정
⑦ 미국 지시 : "종합 기계제작소" 같은 대규모 산업화 전략을 포기하라. • 수출을 증대시키는 정책으로 전환하라.
⑧ 1963.10.18 : 킬렌 처장(경제원조 책임자) 돌연 귀국
미국은 인정사정없이, "박정희"가 미국 정책에 비협조적이면, "경제원조 책임자"를 한국에서 철수시키면서 실력행사에 나섬
⑨ 1964.02 : 새로운 "경제개발 계획서(3차년도 계획서)" 작성
미국의 적극적 개입과 지도로 작성된 계획서 • 수출의 진흥 : 국제수지를 개선함에는 무엇보다 수출의 증대가 중요하다는 논리→ 수출 주도형 국가 탄생
⑨ 사뮤엘 버거 (주한 미 대사)
• "박정희"에게 통치의 기본을 잘 가르쳐, 미국의 목표를 실현시키는 대리인으로 써야한다는 관점을 가진 사람 • 교육방법 : 채찍과 당근 정책
⑩ 제임스 킬렌 (미국대외원조기관(USOM) 처장)
• 세금 제도들을 개혁하라→ 어렵다→ 원조 중단한다.→ 나중에 하겠다.→ 9개월 동안 원조 중단→ 개혁정책을 시행→ 세수증대 효과 발생
⑪ 1962~1964년, 환율개혁
1962년 당시 : 133원/$→ 미국 "비정상 환율" 개혁 착수→ 300원/$으로 조정 작업ㆍ환율이 2배이상 되면, 한국기업은 수출에 매진하게 될 것 → 박정희 : "환율 개혁"에 거부감을 표시 (물가 상승의 위험성)ㆍ수출에는 좋으나, 수입에는 나쁘다는 생각→ 가난한 서민의 불만이 고조→ 자신 인기하락
• 미국 : "환율 안정금"이라는 당근 준비→ "환율개정"의 아이디어는 USOM (미국대외원조기관) → 250,000 톤 규모의 식량지원 (1,000만$ 분)
• 1964.05.05. : 환율개정 (133원/$ → 255원/$) : 환율은 인상됐고, 5월부터 안정화 프로그램이 가동됨ㆍ결과는 매우 우수→ 사뮤엘 버거 (주한 미 대사): 박정희는 우리의 지원을 받아 물가인상의 위험에도 환율개혁에 동참→ 모든 부분에서 생산이 급속히 향상 (1964~1965 : GNP 6% 성장) → 수출 : 1964년 1억2천만 $, 1965년 1억7천만 $ (1961년 대비 6배의 신장률)
⑫ 64.07 : 조엘 번스타인 (박정희의 경제 과외교사)→ "안정화 프로그램"을 가동하는 것
• 저축증대ㆍ수출증대 • 한국인의 자신감 고취 • 금융과 재정구조 개혁
⑬ 64.09 : "베트남 전쟁(월남전)"에 참전 (64.09~ 66.04)
• 1964.09.11일, "1차 파병"을 시작으로, 1966.04월까지 "4차"에 걸친 "박정희" 정부 하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민국 전투부대"를 파병한 일
5. 일본 (사무라이)의 전략 : 한국을 재정복하라
① 1961.06.20 : "케네디- 이케다(일본 수상)" 접견
• 한국 경제개발에 일본의 참여도 필요하다ㆍ빨리 한국과 국교 정상화를 하라 → 미국의 뜻에 협조 하겠다 → 일본 "극우파" 정치인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임 • "요시다(전 수상)"도 "케네디"와 한국 문제를 협의 → 이유 :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의 길을 따라, 재차 "조선 땅"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의무
② 기시 노부스케 (전 수상ㆍ극우파의 대부ㆍ1896~1987ㆍ91세ㆍ내각총리대신(56ㆍ57대))
• 한국을 일본의 경제 식민지로 만들겠다 → 일본 의존 형, 산업구조를 추진 • 한국 전쟁 후, 10년만의 절호의 기회 → "친일파"였던 "박정희"를 움직이자.
6. 박정희 대통령의 움직임
① 61.07.04 : "미국 독립기념일"에 "박정희"는 "반공법"을 선포
→ "박정희"는 "공산주의와 손을 끊었다"는 메시지를 미국으로 전달
② 61.10.31 : "조용수"(당시 31살ㆍ민족일보 사장) 을
"북한찬양 죄"를 덮어씌워 사형선고 (조용수 : 재일동포 강제북송에 대해, 반대운동을 폈던 인물) → 미국에 과감한 반공적 행동을 보여주기 위함→ 47년 후, "무죄" 선고
③ 61.11 : "미 정보부"는 박정희가 더 이상 "공산주의"에 동조ㆍ접촉하지 않을 것이다 고 결론을 내림
④ 61.11.11 : "미국ㆍ일본 순방"에서의 "박정희"의 파격행동
• "나구모"(육군 중장ㆍ만주군관학교에서 천황의 군인을 양성)에게 고개를 숙이며, 선생님께서 저를 이렇게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 "기시 노부스케"(극우파 대부)가 "아카사카 요정"에 초대, 술잔이 무르익자, 박정희는 일본어로 : 혁명을 했을 때, 일본 명치유신의 지사들을 떠올렸다. 저는 명치유신의 지사들을 존경하고 있다" (명치유신의 지사 : 사이고 다카모리(조선침략의 선봉장)ㆍ이토 히로부미)
• "일본 극우파"는 확신을 하고, 박정희 정부에 "검은 돈"을 상납. : 1961~ 65년까지 박정희의 "공화당"이 일본으로부터 받은 돈은 6,600만 $ (현재 약 2조1천억 원)이다. (CIA 보고서) : 그들은 "한일회담"을 추진해준 대가와 한국에서 특혜를 받기위해 돈을 주었다. → "대일 무역 적자"의 수렁으로 빠져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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