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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사건

사건- 76.10 : 코리아 게이트 ② 한국 경제성장의 진실은?

by 당대 제일 2022.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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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10.25일,"워싱턴 포스트"지는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은 "워싱턴" 거주 한국인 "실업가(박동선ㆍ김한조)와 공작원"이, "미국 의회의원들ㆍ정부 관리들"에게 매년 50~100만 달러를 현금ㆍ선물ㆍ정치 자금으로 제공했다고 폭로했다. 미국언론들은 "닉슨 정권" 하의 불법도청 사건이었던 "워터 게이트"에 빗대어 "코리아게이트 (미국 의회 로비 사건)"이라고 이름 붙였다.

  

1. 수출 주도형 국가의 탄생

 1961.11.03 : "케네디" "AID(국제 개발처,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조직

 "공산주의"를 막기 위한, "경제전문가 부대" 조직 : 친미국가들의 개발계획을 수립하는 것         모든 분쟁지역에, 미국 군대를 파병하는 대신, 분쟁국가의 국민들과 함께 일하면서, 그 나라의 경제를 발전시키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

 1961.11.14 : "워싱턴 백악관"에 박정희 도착

 케네디 :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인 "박정희" 지지       "박정희" "특별 원조" 부탁 : 우리는 "경제개발 계획서"를 작성중이다특별안정 기금으로 25천만$을 지원해 달라  박정희의 "경제개발 계획" "케네디"는 당황  박정희의 허술한 계획에, "케네디"가 원조를 해줄 수는 없었음.

 3달 전인 1961.08, "버거(주한 미 대사)" "박정희"에게 경고를 보냄.

 당신들이 만든 "경제개발 계획은 현실성이 없다 몇 명의 경제학자들이 수 작업했다는 것을 미국은 이미 파악하고 있다.        송정범(경제기획원 부원장): 사실 "1차 계획안"은 통계의 미비와 작성 기술도 문제가 있었다.

 실무진 회담

 "해밀턴 (AID 처장)"은 미국이 원하는 것을 밝힘 : 경제개발 계획을 수정하는 것이 어떤가?  미국과 갈등 시작 : 미국 경제전문가들은 냉정하게 비판 수출 전략도 없고, 성장률 목표 7.1%는 비현실적이다.

 박정희의 수출전략

 토끼털을 깎아 팔고, 생선을 많이 잡아 팔고, 돼지를 키워서 외화를 번다.          수출 기업을 육성하여, 한국경제를 성장시킨다는 계획은 없었음. 투자비가 많이 드는 "중공업(제철소 등)"을 만드는 것은 아직 무리라고 미국은 판단  "박정희"는 자신의 "경제개발 전략"을 바꾸지 않음  "박정희 -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한국의 5천년 역사는 퇴영과 조잡과 침체의 연쇄사다."

 61.01.20 : "케네디" 미 대통령 당선

 친미국가 개발 전략 (케네디 정부의 전략): 핵심 -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는 국가를 도운다 : 맥나마라(국방장관)번디(백악관 안보 보좌관)로스토우(대통령 특별보좌관)

 "공산국가"가 늘어나는 원인을 분석  : "공산주의 혁명"은 가난한 국가들에서 발생한다는 공통점 발견 경제 개발

 61.03.15 : 긴급보고서

남한상황이 위험스런 방향으로 악화되고 있다 : "반정부 심리"가 강력한 "반미 감정"으로 폭발해서, "혁명"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61.04.11. : 주매카니기(주한 미 대사) 보고 : "419혁명" 이후, 남한에서 "민족주의" 감정이 일어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이 개입했다"는 비난을 듣지 않으면서, 남한의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

 "주매카니기(주한 미 대사)" "동아시아 담당 차관보"로 임명

한국의 "Task Force "을 만들어라.  61.05.15일까지 "한국발전 종합보고서"를 만들어라 한국의 축복       한국(장면 총리): 미국과 협의하여, 경제개발을 최우선 목표로 선정(경제개발 5개년 계획 발표)

 61.05.16 : "516쿠데타" 발생 이후, "케네디" "박정희"에 대한 조사 시작

 44.01, "다카키 마사오 중위"는 일본 군사학교에서 임관했고, 만주의 일본군대에서 복무(친일파)

 49 : 해방 후, 체포되어(48.10- 여수순천사건 관련), 공산주의자로 판결(남조선노동당 군책) 박정희는 약 300명의 동료들이 체포되도록 증거를 제공하고, 대가로 사형을 면했다 "쿠데타"의 리더가 "공산주의자"라서, "케네디" 행정부는 긴장 → 미 군부 : 뱀 같은 인간이라고 "스네이크 박"이라 불렀다.

 61.05.31 : 한국은 미국에 계속 의지하면서, 우리에게 협조할 것 같다.

06.05 : "케네디" 대통령 직속 "한국 Task Force "의 보고서 →  06.13 : 한국의 운명을 바꾸는 논의 한국의 경제발전근대화 전략 수립

2. 한국의 발전

 한국을 발전시켜야 하는 이유?

북한 공산주의와의 대결에서 이겨야 한다.        미국의 국가 위신이 달려 있다  특히 일본을 보호하는데, 중요하다.

 미국의 원조로도 한국이 발전하지 못한 이유

 과거, "미 원조" "군사안보 목적전후 복구한국인의 최저생계 유지"에만 사용됐다  한국의 경제발전에 집중 투자

 한국발전을 위해서는

정부행정 개혁부패방지 프로그램 가동교육제도 개혁           한국 교육은 유교적 전통에 따라, 인문철학을 강조하고, 자연과학공업기술경영사회과학을 경시  국가발전을 위해, 과학기술직업교육 강화

3. 한국 경제성장의 진실

 누가 한국 경제를 성장시켰는가?

수출주도형 공업화가 주효했다.       프레이저 보고서는 "박정희가 한 것은 아니다"고 주장

 "2차 대전"에 승리한 "미국"의 최대 적은 "소련"이다 누가 한국 경제를 성장시켰는가?

소련 : 주변국에 군사경제 원조를 하면서, 세력을 넓히고 있는 실정       • 미국 : 공산주의 팽창을 막기 위해, "일본"에게 "미국적 민주주의"를 주입         애치슨 국무장관 : 유럽과 아시아의 부흥을 위해, 서독과 일본을 세계의 공장으로 만들겠다 일본에 전폭적인 지원 일본 경제의 급속한 복구 한국전쟁 시, 전쟁물자 공급으로 고속성장

 "이승만 정권"을 남한에 세운 "미국"은 실패

이승만친일파 : 부정부패는 극에 달하여, 미국은 막대한 원조를 했으나, 경제는 처참했음 → 60.04.19 : 419혁명 발생 "이승만" 미국 하와이로 망명

 1960 : 한국 경제력 (세계 101)북한 경제력 (세계 50)

북한 : 공산국가의 원조를 받아, 전후 3년 만에 전쟁 복구 완료ㆍ"천리마 운동"(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뤄냄  "아이젠하워"(미 대통령)은 한국 내에서,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킬까봐 걱정함.

4. 1960년대 한국의 상황

1962 (증권시장 붕괴ㆍ화폐 개혁)→ 1964 (경제개발 계획서(3차년도 계획서) 작성) → 1964 (박정희의 경제 과외ㆍ안정화 프로그램)ㆍ"베트남 전쟁(월남전) 참전 (64.09~ 66.04) 움직임

 1962 : 증권시장 붕괴

한국 경제에 치명타 문제를 완전 극복하는데, 10년이 걸림     "김종필(중정부장)"의 정치자금 마련을 위한 "주가 조작" 사건       2~ 3천만 $(현재 약 9천억 원) "주가조작"으로 벌어들임.(NSC 국가안보회의 보고서)       자금 사용처(김형욱 증언): 박정희에게 상납 + 공화당 창당 자금 + 야당 교란작전 자금      증권파동 이후, 투자자들은 주식시장에 공포감을 느꼈고, 기업들은 주식으로 사업자금을 마련할 수 없었음.

 1962.06 : 화폐개혁 (지하경제 자금으로, 경제개발을 하겠다는 것)

사전조사 없이, 신 화폐로 바꾸고, 은행인출 금지 돈의 유통이 안 돼, 한국경제가 마비        "버그(미 대사)" : 믿을 수 없을 만큼, 멍청한 짓을 저질렀다.    "병철(삼성 사장) "박정희"에게 달려가서 조언 : (병철) 세계적으로 통화개혁은 해만 있었고, 성공한 예는 거의 없었다. (박정희)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미국 입장 :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 정책을 심각히 재검토해야 한다  박정희 권력집권 후, 최대의 위기

"예금 동결" 조치로 영향 심각

 전국 중소기업에 타격 (55% 가동 중단)      미국은 박정희에게, "예금 동결을 해제하라"고 압박  앞으로 어떤 정책을 추진할 경우에는 사전에 미국과 협의해야 한다 박정희는 단호하게 거부, "미국이 한국문제에 개입할 권한이 없다  버그 (미 대사) : 당신이 더 이상 미국의 원조를 원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리겠다  미국의 힘에 굴복하여, "박정희"가 태도를 바꿈

박정희-경제 참모진(1)교체

 유원식(재경위원)박희범(최고회의 경제자문) 경질      미국과 협조적인 참모진으로 교체 : 새로운 "총리경제기획원장"이 우리와 매우 협조적으로 일하고 있다고 보고

 62.07.11 : 경제참모진들은 다소 수정 필요하다고 발표

62.07.20 : 박정희는 진행 중인 계획까지 공격당한 것에 당황 5개년 계획을 확대해야 한다고 저항      • 62.10.05 : 미국은 한국 언론을 통해, "5개년 계획 결함 때문에 경제원조 전액은 어렵다"고 직격탄을 날림  당시 한국은 미국의 원조가 없으면, 붕괴하는 나라였다. 한국국민들은 동요  권력유지를 위해 국민들의 지지가 필요했던 박정희  미국에 무릎을 꿇음 → 62.11.26 : 1962.02월에 시행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전면 수정

 미국 지시 :  "종합 기계제작소" 같은 대규모 산업화 전략을 포기하라  수출을 증대시키는 정책으로 전환하라.

 1963.10.18 : 킬렌 처장(경제원조 책임자) 돌연 귀국

미국은 인정사정없이, "박정희"가 미국 정책에 비협조적이면, "경제원조 책임자"를 한국에서 수시키면서 실력행사에 나섬

 1964.02 : 새로운 "경제개발 계획서(3차년도 계획서)" 작성

미국의 적극적 개입과 지도로 작성된 계획서        수출의 진흥 : 국제수지를 개선함에는 무엇보다 수출의 증대가 중요하다는 논리 수출 주도형 국가 탄생

 사뮤엘 버거 (주한 미 대사)

 "박정희"에게 통치의 기본을 잘 가르쳐, 미국의 목표를 실현시키는 대리인으로 써야한다는 관점을 가진 사람         교육방법 : 채찍과 당근 정책

 제임스 킬렌 (미국대외원조기관(USOM) 처장)

 세금 제도들을 개혁하라 어렵다 원조 중단한다. 나중에 하겠다. 9개월 동안 원조 중단 개혁정책을 시행 세수증대 효과 발생

 1962~1964년, 환율개혁

1962년 당시 : 133/$ 미국 "비정상 환율" 개혁 착수 300/$으로 조정 작업ㆍ환율이 2배이상 되면, 한국기업은 수출에 매진하게 될 것 →  박정희 : "환율 개혁"에 거부감을 표시 (물가 상승의 위험성)ㆍ수출에는 좋으나, 수입에는 나쁘다는 생각 가난한 서민의 불만이 고조 자신 인기하락 

 미국 : "환율 안정금"이라는 당근 준비 "환율개정"의 아이디어는 USOM (미국대외원조기관)  250,000 톤 규모의 식량지원 (1,000$ )

 1964.05.05. : 환율개정 (133/$  255/$) : 환율은 인상됐고, 5월부터 안정화 프로그램이 가동됨ㆍ결과는 매우 우수→ 사뮤엘 버거 (주한 미 대사): 박정희는 우리의 지원을 받아 물가인상의 위험에도 환율개혁에 동참→ 모든 부분에서 생산이 급속히 향상 (1964~1965 : GNP 6% 성장)  수출 : 1964 12천만 $, 1965 17천만 $ (1961년 대비 6배의 신장률)

 64.07 : 조엘 번스타인 (박정희의 경제 과외교사) "안정화 프로그램"을 가동하는 것

 저축증대수출증대  한국인의 자신감 고취  금융과 재정구조 개혁

 64.09 : "베트남 전쟁(월남전)"에 참전 (64.09~ 66.04)

 1964.09.11, "1차 파병"을 시작으로, 1966.04월까지 "4"에 걸친 "박정희" 정부 하에서 "베트남 전쟁" "대한민국 전투부대"를 파병한 일

5. 일본 (사무라이)의 전략 : 한국을 재정복하라

① 1961.06.20 : "케네디- 이케다(일본 수상)" 접견

 한국 경제개발에 일본의 참여도 필요하다빨리 한국과 국교 정상화를 하라  미국의 뜻에 협조 하겠다  일본 "극우파" 정치인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임          "요시다(전 수상)" "케네디"와 한국 문제를 협의  이유 :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의 길을 따라, 재차 "조선 땅"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의무

 기시 노부스케 (전 수상극우파의 대부1896~198791내각총리대신(5657))

 한국을 일본의 경제 식민지로 만들겠다  일본 의존 형, 산업구조를 추진          한국 전쟁 후, 10년만의 절호의 기회  "친일파"였던 "박정희"를 움직이자.

6. 박정희 대통령의 움직임

 61.07.04 : "미국 독립기념일" "박정희" "반공법"을 선포

 "박정희" "공산주의와 손을 끊었다"는 메시지를 미국으로 전달

 61.10.31 : "조용수"(당시 31민족일보 사장) 을

"북한찬양 죄"를 덮어씌워 사형선고  (조용수 : 재일동포 강제북송에 대해, 반대운동을 폈던 인물  미국에 과감한 반공적 행동을 보여주기 위함 47년 후, "무죄" 선고

 61.11 : "미 정보부"는 박정희가 더 이상 "공산주의"에 동조접촉하지 않을 것이다 고 결론을 내림

 61.11.11 : "미국일본 순방"에서의 "박정희"의 파격행동

 "나구모"(육군 중장만주군관학교에서 천황의 군인을 양성)에게 고개를 숙이며, 선생님께서 저를 이렇게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시 노부스케"(극우파 대부) "아카사카 요정"에 초대, 술잔이 무르익자, 박정희는 일본어로  : 혁명을 했을 때, 일본 명치유신의 지사들을 떠올렸다. 저는 명치유신의 지사들을 존경하고 있다 (명치유신의 지사 : 사이고 다카모리(조선침략의 선봉장)이토 히로부미

 "일본 극우파"는 확신을 하고, 박정희 정부에 "검은 돈"을 상납 : 1961~ 65년까지 박정희의 "공화당"이 일본으로부터 받은 돈은 6,600 $ (현재 약 21천억 원)이다 (CIA 보고서 : 그들은 "한일회담"을 추진해준 대가와 한국에서 특혜를 받기위해 돈을 주었다.  "대일 무역 적자"의 수렁으로 빠져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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