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ㆍ25 한국전쟁 (Korean Conflict)"은 1950.06.25일 새벽 4시, "북한 인민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한 전쟁이다. 6ㆍ25사변ㆍ조국해방전쟁 (북조선)ㆍ조선전쟁 (일본)ㆍ항미원조 전쟁 (중국ㆍ抗美援朝) 이라고도 불린다.
1. 6ㆍ25 한국전쟁 (六二五戰爭ㆍKorean Conflict)
한국을 비롯한 세계 대부분에서 전쟁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침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나, "북조선에서는 남한이 먼저 북침했다"고 주장한다. 북한군은 "보병사단(7개)ㆍ기갑사단(1개)ㆍ특수독립연대(수개)"로 구성된 총병력 111,000명과 1,610문의 각종 포, 그리고 280여대의 전차ㆍ자주포 등을 "제1선"에 동시에 투입하였다.
"제1군단"은 "서울"을 목표로 일제히 남진하였다. 북한군 "제1군단 예하 제1ㆍ6사단"은 "제105전차여단의 203전차연대ㆍ206기계화연대"의 지원 하에 "개성"에서 "서울"로 공격하고, 주공부대인 "북한군 제3ㆍ4사단ㆍ제105전차여단"은 각각 "연천ㆍ철원" 일대에서 "의정부"를 거쳐, "서울"로 공격해 왔다.
< 진행 요약 > 1950.06.25일 새벽 4시경→ 08.01 (낙동강 방어선 형성)→ 09.15 (인천상륙작전)→ 09.28 (서울수복)→ 10.19 (평양탈환)→ 11.01 (국군압록강 진격)→ 11.04 (중공군 침공)→ 1951.01.04 (서울 철수ㆍ1ㆍ4후퇴)→ 03.15 (서울 재탈환)→ 04.12 (맥아더 장군 해임ㆍ리지웨이 장군 임명)→ 06.30 (리지웨이 사령관- 휴전회담 제의)→ 1951.07.10~1953.07.27 : 휴전회담(休戰會談) 6ㆍ25전쟁을 평화적 방법으로 해결하기 위한 군사회담→ 1952.01.30 (육군사관학교 개교)→ 08.05 (2대 대통령 선거)
① 피 해
3년 1개월에 걸친 동족상잔의 전쟁은 한반도 전체를 폐허화했고, 참전한 외국의 병력에까지 극심한 해를 입혔다. 45%에 이르는 공업 시설이 파괴되어, 경제적ㆍ사회적 암흑기를 초래했다. 그 밖에도 약 20만 명의 "전쟁미망인"과 10만 명이 넘는 "전쟁고아"를 만들었으며 1천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을 만들었다.
• 1949.04~05.28 : 미군 철수(45,000→ 500(군사고문단)) • 남한(100,000) : 북한(200,000) / 북한군 병력 : 탱크(87)ㆍ비행기(100)ㆍ야포(140)ㆍ소총(15,000)
< 한국군ㆍUN 군 > 군인 : 전사(17만)ㆍ실종(3.2만)ㆍ부상(57만) / 민간인 : 사상(100만여 명 추정)ㆍ납북/월북 (8.5만) / 서울 피난민 (40만/서울인구 145만의 25%) / 공업기반의 50% 손실ㆍ30억 $(국부의 25% 손실) / 한강다리 폭파 피해 : 500~800명 (06.28일 새벽 2:30분 경 공병감 최창식 대령)
< 북한군ㆍ중공군 > 군인ㆍ민간인 사망(최소 250만/인구 1200만의 20%) / 북한 탈출 (월남 300만/인구 1200만의 25%) / 북한 전력 75%ㆍ연료 공업 90%ㆍ화학공업 70% 소실
< 일제강점기 피해자 > 사망자 (314만)ㆍ군인 (238만)ㆍ위안부(23만)ㆍ일반인(53만) / 징용자 (543만)ㆍ일반인(500만)ㆍ위안부 (43만)
• 마오쩌둥 장남 사망 : "중국 인민해방군 장교의 비망록"에 따르면, UN군의 폭격으로 숨진 "마오쩌둥(毛澤東ㆍ1893~1976ㆍ83세ㆍ혁명가ㆍ초대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과 "양카이휘(2번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큰 장남 "마오안잉(毛岸英ㆍ1922~1950ㆍ28세)"은 방공수칙을 어기고, 막사에서 계란 볶음밥을 만들다가 위치가 노출돼, 연기가 "UN군 폭격기"의 눈에 띄어, 폭사했다.
• 1950.06.27 한국은행 서울 본점 : "순금 1070㎏ㆍ은 2,513㎏"을 군 트럭 1대에 싣고 "경남 진해 해군통제부"로 갔으나, 급박한 상황 탓에 "순금 260㎏ㆍ은 15,970㎏은 옮기지 못한 채, 06.28일 "한국은행"이 "인민군"에 접수되면서 약탈당했다고 한다.
② 20개국 참전 : 국제연합군(16개국)ㆍ의료지원국(4개국)
국제연합군 (16개국): 미국ㆍ영국ㆍ프랑스ㆍ태국ㆍ호주ㆍ캐나다ㆍ터키ㆍ뉴질랜드ㆍ이디오피아ㆍ필리핀ㆍ룩셈부르크ㆍ그리스ㆍ남아공ㆍ타이ㆍ벨기에ㆍ콜롬비아 / 의료지원국( 4개국): 인도ㆍ이태리ㆍ노르웨이ㆍ덴마크ㆍ스웨덴
③ 1950.06.25일 새벽 4시경~ 1951.07.10일(제한전쟁)~ 1953.07.27일 휴전협정 (3년 1개월 2일간의 전쟁)
1953.07.27 오전 10시 : "제159차 본회의"에서 "해리슨 중장 (UN유엔군 수석대표)"와 "남일(공산군 측 대표ㆍ조선인민군 총참모장)"이 3통의 "휴전협정서ㆍ부속협정서"에 각각 서명한 뒤,
"클라크(UN군사령관)ㆍ김일성(북한군 총사령관)ㆍ펑더화이(중공군 총사령관)"이 각각 그들의 "후방 사령부"에서 "휴정협정서"에 서명→ "대한민국 대표"는 최후까지 휴전에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끝내 서명하지 않음.
④ 휴전 협정 (휴전회담(休戰會談): 1951.07.10.~ 1953.07.27.)
1951.07월에 정전 회담이 개시된 후, 세계 전쟁사상 처음 있는 "제한전쟁" (휴전이 되면, 각기 점령지역에서 국경이 정해지는 조건으로 싸우는 전쟁)이 벌어졌다. 1951.06.30 : 리지웨이 (UN군 사령관)ㆍ휴전회담 제의 → 07.01 : 공산군ㆍ휴전회담 수락 → 07.10 : 휴전회담ㆍ"개성"에서 개막 → 10.25 : 휴전회담 "판문점"에서 재개
"군사분계선" 문제는 이미 1952.01.27일에 타결되었으며, 1952.05월에 이르러선 "포로 교환문제"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의제에 합의하였다. 1953.03.05일, "스탈린"의 죽음으로 "정전 회담"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어, 1953.03.19일 "소련 내각"은 한국전쟁을 정치적으로 마감한다는 결정을 "중국ㆍ북조선"에 통보하면서 부상포로의 우선 교환에 동의하도록 지시(또는 요청)했다. "북조선"이 "소련"을 통해 휴전을 제의하였고, "UN군" 측의 승인으로 휴전이 되었다.
1953.07.27일 10시,"정전 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년 1개월 만에 한국전쟁 휴전으로 매듭을 지어졌다. 그러나 오후 10시부터 효력이 발생하는 "정전 협정"으로, 12시간 동안 "최후의 전투"가 벌어진다.
2. 6ㆍ25 한국전쟁 막을 수 있었다. < 요약분ㆍ저자- 이선교ㆍ출판사- 빛 된 삶 >
① "인민군 전차" 때문에, 국군이 참패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인민군의 전차"는 국군이 소지하고 있던 "바주카포ㆍ대전차포ㆍ105mm 곡사포"로 전차의 바퀴 줄을 공격하면 파괴되었다. "홍천 국군2연대ㆍ문산 국군1사단ㆍ의정부 자일리"에서 "전차"가 파괴된 것이다.
② "의정부 7사단ㆍ수도 사단"에 실탄만 충분히 있었다면, "인민군"을 막을 수 있었다.
"문산 1사단ㆍ춘천 6사단ㆍ강릉 8사단"은 실탄이 충분하였는데, 서울의 관문인 "의정부 7사단ㆍ수도 사단"에는 실탄이 전혀 없어, 06.26일 "국군 3개 사단"이 "의정부"에서 하루 만에 참패하여 "육군"이 붕괴되었다.
③ "문산 1사단ㆍ 춘천 6사단ㆍ강릉 8사단"은 "제1진지~ 제3진지"까지 있는데, "의정부"는 "진지"가 1개도 없었다.
특히 "축석령"은 "진지"만 구축하였다면, "인민군 전차"는 절대 이 진지를 돌파하지 못하여, 국군이 "인민군"을 충분히 막을 수 있었으나, "축석령"에 진지를 구축하지 않아, 인민군이 쉽게 "축석령"을 넘게 되어, 국군이 참패하였다. 또한, "문산 1사단ㆍ춘천 6사단"에는 "폭약(다이나마이트)"이 충분하였는데, "의정부 7사단"에는 폭약이 전혀 없어서, "포천교ㆍ백석천교ㆍ방학교ㆍ창동교ㆍ길음교"를 폭파하지 못하였고, "인민군"의 전차를 저지하지 못하여, 국군이 전투준비를 할 시간이 없어, 개전 4일 만에 국군이 붕괴된 것이다.
④ "채병덕 참모총장"이 06.24일 국군 전 장병에게 "휴가ㆍ외출"을 보내지 않았다면, 국군에 전투력이 있어 "인민군"을 막을 수 있었다.
⑤ "국방부장관 신성모ㆍ참모총장 채병덕", 이 두 사람의 매국 행위 때문에, "인민군"을 막지 못하였다.
만일 "이승만 대통령"이 "이범석 장군(초대 국방부장관)"을 해임하지 않고 그대로 두고, "참모총장"에 "김홍일 소장"을 임명하였다면, 국군은 "인민군"을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신성모"는 "이범석 장군"이 애써 만들어놓은 "호국군 (현, 예비군)"을 해체하였다.
3. 초기 국군 참패 원인
① "라엄광 중위 (채병덕 참모총장의 부관)"는 "남로당 간첩"이었다.
"라엄광 중위"는 육군 병적에도 없는 "남로당 간첩"으로, "채병덕 참모총장"은 공작을 당하였다. "라엄광 중위"는 06.28일 행방불명되었다.
② "채병덕 참모총장"의 매국 행위
• 06.10일(6ㆍ25 15일전): 육군의 중화기ㆍ차량 수리차 "부평"으로 후송 명령 : 육군의 중화기 및 차량 50% 정도를 수리하라고 "부평"으로 후송 명령을 내려, 06.25일 인민군 남침 시 육군의 발을 묶어놓아, 초전 작전에 많은 지장을 주었음.
• 06.10일(6ㆍ25 15일전): 군 인사이동ㆍ군부대 이동 명령 : 연대급 부대이동ㆍ전방 3개 사단장ㆍ육군본부 작전국장ㆍ작전차장ㆍ작전과장을 모두 교체하여, 초전 작전에 많은 지장을 주었음.
• 06.24일(6ㆍ25 1일전): 장병들 휴가와 외출 명령 : 06.24일 12시를 기해 경계령을 해제, 장병들을 휴가ㆍ외출을 보내, 1/3 이상이 병력이 부대에서 빠져나가, 06.25일 인민군 남침 시, 병력 부족으로 "혼성부대"를 편성하여 육군 전체에 전투력이 무력화되었음. "채병덕 참모총장"이 경계령을 해제하고, 장병들 휴가ㆍ외출을 보내게 한 이유는, 장병들이 오랫동안 외출을 못해 사기가 떨어졌고, 외출 시 건빵을 가지고 나가는데, 경계령으로 장병들 외출이 없어 건빵이 남아돌아가기 때문이었다는 것임.
• 06.24일(6ㆍ25 1일전): "육군회관" 개관파티 : 06.24일 밤10시까지 "육군회관 개관파티"에 육군본부 국장ㆍ과장ㆍ실장ㆍ전방사단장 등 50여명이 참석하여 술을 마셨고, 어떤 장교는 새벽 2시까지 술을 마시고 집에 가지 않아, 06.25일 "인민군 남침" 시, "군 수뇌부"의 소집이 안 돼 적절한 대응을 못하였다. 또한, "육본"에서는 인민군 남침을 6시간 30분 후인 9:30분에 확인하였다. 그 시간에도 수뇌부 몇 사람의 연락이 안 돼 회의를 하지 못하고, "채병덕 총장ㆍ김백일 참모부장"이 즉흥적으로 명령을 내렸다.
• 06.26일 : 남침에 대한 준비소홀 : 06.26일, 서울 방어사단인 "수도 사단ㆍ7사단(의정부)"에 탄약이 전혀 없어, 하루만에 "3개 사단"이 붕괴되어, 국군이 참패하게 되었다.
• 06.28일 : "한강교" 조기 폭파명령 :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기 전, "채 총장"은 군 차량은 1대도 한강교를 건너지 못하게 하였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였을 때, "국군 1사단"은 "문산"에서, 주력부대는 "미아리"에서 싸우고 있었고, 미군의 엄청난 보급품ㆍ국군의 군수품이 창고에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채 총장"은 군수품ㆍ보급품, 싸우고 있는 국군에게 후퇴명령도 내리지 않고, "최창식 공병감"에게 "한강교 폭파"를 명령하여, 06.28일 새벽 2:30분 "한강교"를 폭파하였다. 06.28일까지 "국군 6개 사단"이 붕괴되었고, 군수품ㆍ보급품은 고스란히 "인민군"에 넘어갔다. 국군의 거의 절반인 44,000여 명이 죽거나, 포로가 되어 사실상 국군이 참패하게 되었다.
4. 북한 패전 책임
1953.02.16일, "김일성"은 "한국전"이 끝나갈 무렵, "남로당"이 필요 없게 되었다. 남로당원 50,000여 명을 3등급으로 나누어, 처형하였다. 결국 "김일성"은 "한국전 패전"의 책임을 "박헌영ㆍ남로당"에 뒤집어씌웠다. "남로당원"들을 "미국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뒤집어 씌워, "이승엽ㆍ조일명ㆍ이강국ㆍ임화" 등 "남로당 간부"들을 사형하고, 지리산의 "이현상"도 처형하였다. 1956.03월, "대성산 임시 사형장"에서 "박헌영"에게도 사형이 집행되어, "남로당"은 엄청난 힘을 갖고도 잘 활용하지 못하고, 뿌리까지 뽑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 북한군 구성 >
• 인민군 전선사령부 사령관 : 강건 (중국 공산당 예하의 동북항인연군 "주보중(周保中)"의 비서로 활동)
① 인민군 6사단 : 방호산 : "국군 1사단"을 깨고, "파주시"를 거쳐 "서울"로 들어가는 부대ㆍ"중국 인민해방군 166사단(사단장 방호산)"이 북한으로 들어와, 옷만 인민군복으로 갈아입은 사실상 "중국군 부대"로 "방호산"이 자신의 사단 전체를 데리고 북한으로와서, "인민군 6사단"이 된다. 06.25일, 전쟁발발 당일, "개성"을 점령하고, 예하 "13연대"가 "인천"을, 15연대는 "강화도"를 초고속으로 점령한 후, "김포반도"를 통해 나와, 한강을 건너, "충청도ㆍ전라도"를 휩쓸고 "경남"방면으로 진격한다. 김일성은 "6사단" 전체 군인에게 "1계급 특진"과 함께, 전체 병력의 봉급 50% 인상, 사단장인 "방호산"을 중장으로 진급시키고, "영웅" 칭호를 수여한다.
※ 방호산 (方虎山ㆍ1916~ ? ㆍ함북) : 공산주의 항일운동가ㆍ군인ㆍ연안파로 분류ㆍ인민군 제5군단장(1958.08)ㆍ육군대학 총장 역임ㆍ1956.06월 "영웅칭호"를 받았다. 1959년, "연안파"가 기도한 반당ㆍ반정부 활동을 했다는 "8월 종파 사건"에 연루되어 숙청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 직후, 중국에서 "동북항일연군 제4군"의 전신인 "중국 공산당 헤이룽장성 미산현(密山縣) 유격대"에 합류하여 항일운동을 벌이다가, 1937년 "모스크바 식민지반식민지이익연구학원(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다녔다. 1945~1948년까지 "중국 공산당의 반국민당 전투"에 참전하였다. 1949.07월, 조선인들이 절대다수인 "중국인민해방군 제166사단 사단장"으로 부대를 이끌고 입북하였다. 동 부대를 "제6사단"으로 개편하고, "초대 사단장"이 되었고, 1950.10월, "제5군단장"에 임명되어 "동부전선" 전투를 지휘하였다.
② 1군단장 : 김 웅 (중국 팔로군 연대장 출신) ③ 2군단장 : 김광협 (중국 팔로군 연대장 출신) ④ 4사단장 : 이권무 (중국 팔로군 출신) ⑤ 5사단장 : 김창덕(마상철) (중국 팔로군 출신) ⑥ 10사단장 : 이방남 (중국 팔로군 출신) ⑦ 12사단장 : 최 인 (중국 팔로군 출신) ⑧ 15사단장 : 박성철 (김일성 측근) ⑨ 105 전차 사단장 : 유경수 ⑩ 38 경비 3여단장 :오백룡
⑪ 766 유격 부대장 : 오진우 (인민무력부장)
※ 오진우 (吳振宇ㆍ1917~1995ㆍ함남) : 북한의 "혁명1세대"로, "김일성 유일 지도체제ㆍ김정일 후계체제 구축"에 앞장섰다. "김일성 반대파 숙청"에 앞장서며 권력기반을 다졌고, 1976년 이후 19년 동안 "인민무력부장"을 지내는 등 사망하기 직전까지 권력의 핵심부에 머무르며, "김일성"과 같은 원수 칭호를 받았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16세 때인 1933년부터 "빨치산 할동"을 했으며, "소련 보병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았다. 6ㆍ25전쟁 당시 "766 유격부대장"으로서 한국군ㆍUN군에게 커다란 타격을 준 전과를 기반으로 1961년 "노동당 중앙위원"이 되었으며, 이후 권력의 핵심으로 진입하고, "김일성 유일체제 구축"에 크게 기여했다.
5. 발발 원인
① 1948.04 : 제주 4ㆍ3폭동
1948.04.03.일, "김달삼(제주도 남로당원)" 외 320명이 무장을 하고, 제주 12개의 지서와 우익을 기습 공격하여, "고일수 순경"외 수많은 경찰과 우익을 살해한 "제주 4ㆍ3폭동"이 발생ㆍ후에는 무장 폭도들이 3,000명으로 증가하여, 1년 넘게 "남로당" 폭도들을 진압군이 진압.
② 1948.10 : 여수 14연대(1948.10)ㆍ광주 4연대(1948.10)의 반란
1948.10.19일, "전남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의 일부 군인들이 일으킨 사건ㆍ"제주도 4ㆍ3사건" 진압출동을 거부하고, "대한민국 단독정부"를 저지하기위해 군인들이 일으킨 사건ㆍ결국 "여수 14연대ㆍ광주 4연대ㆍ대구 6연대"는 해체되었다.
"여수"에 있는 "14연대"에 "제주도 폭동을 진압하라"는 명령이 내려오자, "14연대" 안의 "남로당(조선공산당)원 지창수 상사" 외 40여 명이 명령을 거역하고, 1948.10.19일 "김일영 대대장"외 우익장교 20여명과 반란을 거부하는 사병 40여명을 사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여수ㆍ순천ㆍ벌교ㆍ광양"을 점령하고, "구례"에서 "진압군 12연대" 1개 대대를 격파하고, 포위된 "12연대장"이 자살할 정도로 "좌익 반란군"은 막강하였다. "여수 14연대 반란"을 시작으로 국군의 연속 반란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광주"의 "4연대" 나주 파견부대인 "중대장 김남근"은 "2대대장"을 총으로 쏘아 죽이고, 중대원을 "반란군"으로 만들어 "장성"으로 도망쳤다가, "부연대장"이 2대대를 인솔하여, "김남근 반란군"을 전원 체포하였다.
③ 1948.10 : 대구 6연대의 반란 (3차)
1차 반란 : 1948.11.02일, "6연대 정보과 선임하사 이정택 상사"는 "남로당 군사부장 이재복"의 레포를 통해 "진압군 출동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고, "곽종진 중위"와 세포원들과 모의한 후, 우익장교 "조장필 소위"를 총으로 쏘아 죽였다. 반란군의 집중사격을 피하여 간신히 탈출한 "최경만 부연대장"이 "미1연대"에 지원을 요청하여 전차가 출동하여 "6연대"를 포위하자, "이정택ㆍ곽종진" 등 40여명의 반란군들은 차량으로 돌파하고 "다부동" 쪽으로 도망쳤고, 190여 명은 체포되어, 반란이 수습되었다.
2차 반란 : "여수 14연대 반란" 진압 차, "함양"에 있던 "1대대 하사관" 중 남로당원이 여러 명이라는 보고를 받은 "김종갑 6연대장"은 "1대대장 차갑준 대위"에게 1대대원 380명을 이끌고 복귀하라고 명령을 하였다. 부대 복귀를 이상하게 생각한 "남로당원 이동백 상사"가 중심이 되어, 장교 9명을 순식간에 사살하고, 하사관 38명ㆍ사병 14명이 "반란군"이 되어 "달성지서"를 기습한 후, "팔공산"으로 도망쳤다.
3차 반란 : "영일비행장"을 경비하고 있던 "6연대 4중대 경리하사관"이 중대 내의 "남로당 세포원" 20명을 규합하여 반란을 모의, "백달현 소대장"과 사병 1명을 사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우익 하사관들도 무장을 하고 이들에 대항하며, 모두 죽여 버리자고 하니, 20여명의 "반란군"들은 모조리 도망쳤다. 결국 "6연대"도 좌익들의 반란으로 인해 해체되었다.
④ 춘천 8연대 (2개 대대)의 월북
"춘천 8연대 1대대장 남로당원 표무원 소령ㆍ2대대장 강태무 소령"이 부하 368명을 완전무장 시킨 후 38선에서 야간훈련을 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월북하여 "평양"에서 시가행진을 하였다.
⑤ 박헌영(남로당 당수)의 선동
"남로당 대표 박헌영"은 이상의 사건을 유발시키면서 "남한에서 남로당원들이 죽으면서 투쟁하고 있는데 북한에서는 가만히 보고만 있을 것인가?"라며 김일성을 설득, "인민군이 38선만 넘으면 남로당원 20만 명이 봉기하면 남한은 쉽게 점령할 수 있다"고 선동하여, 김일성은 무기는 소련에서, 인력은 중공에서 지원받아, 1950.06.25일 240대의 전차ㆍ11만 대병으로 남침하였다.
6. 국군 반격ㆍ중공군 한국전 참전
① 1950.06.28 : 인민군이 서울 점령 후, 3일 동안 한강을 건너지 않은 이유?
1950.06.28일 11:30분 "인민군"은 서울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인민군"이 즉시 한강을 건넜다면, 06.28일 오후에는 국군의 저항 없이 "한강"을 건널 수 있었고, "인민군 1사단ㆍ3사단ㆍ4사단ㆍ6사단" 등 6만 여명과 전차 190대로 한강을 건넜다면, 늦어도 07.10일까지는 부산을 완전히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처럼 천금같이 귀중한 3일 동안, "인민군"은 서울에서 먹고 자고 놀면서, 남한에서 "남로당의 폭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이 국군은 한강 남쪽에서 처음 500여 명이었던 장병이 3,000여 명으로 늘어 한강 방어를 하게 된다. "인민군"이 07.0일부터 한강을 건너려 하자, 국군은 3일을 저지하여, "인민군"이 서울에서 쉰 3일을 포함하여 도합 6일을 방어하게 되어, 그 사이 "미군"이 "부산"에 상륙하여 "오산 죽미령"에서부터 "인민군"의 남진을 막았다. 결국 "인민군"은 서울에서 3일을 쉰 것이 패전의 원인이 되었다.
② 1950.09.15 : 인천상륙작전
"미군ㆍ국군"은 76,000여 명의 장병과 260척의 군함을 동원하여, 09.12일부터 "일본ㆍ부산항"에서 출발, 09.15일 "인민군"의 큰 저항 없이 "인천 앞 월미도"에 상륙하였다. 이렇듯 "미군ㆍ국군"이 "인천상륙 작전"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김일성"이 "인천"을 방어하고 있던 "인민군 18사단"을 "왜관 전투"에 투입하여, "인천"의 방어가 허술하였기 때문이었다. "UN군"의 "인천상륙"으로 말미암아 "인민군"의 보급품이 차단되어, "낙동강"에서 싸우고 있던 "인민군"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고,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한 "인민군"은 손 쓸 새도 없이 무너져 버렸다.
③ 1950.10.19 : 모택동의 한국전 참전 결정 이유
1950.09.30일, "서울"을 완전히 탈환한 "미군ㆍ국군" 23만 명이 수많은 전차ㆍ항공기ㆍ함대를 동원하여 "청천강"까지 북진하자, "모택동"은 "미군"이 "만주"까지 북진할 것을 우려하였다. 그래서 1950.10.19일, 20만 명의 "중공군"을 "압록강"을 건너게 하여, 한국전에 참전하였다.
6. 맥아더 장군의 종전 총진격 명령ㆍ총퇴각 명령
① 1951.01.08 : "팽덕회(중공군 사령관)"의 "남진 중지" 명령
"모택동"은 1950.11.06~ 25일까지 추가로 "중공군" 20만 명을 "북"에 투입하였다. 그런데 "맥아더 장군"은 "중공군"이 6만 명 정도가 참전한 것으로 추정하여, 1950.11.24.일 "총 진격명령"을 내려, "미군ㆍ국군"은 "압록강"을 향해 북진하였다. 그러자 "북한"의 험한 산골짜기에 숨어 있던 "중공군" 40만 명의 "매복기습"공격에 "미군ㆍ국군"은 처참하게 패하여, "맥아더 장군"은 "총 진격명령" 6일 만인 11.29일 "총 퇴각명령"을 내렸다.
"미군ㆍ국군"은 평양(12.04)ㆍ38선(12.15)ㆍ"서울(51.01.04)"까지 버리고, "평택"까지 도망쳤다. "팽덕회(중공군 사령관)"은 "미군"이 "평택"까지 후퇴하자, 보급선이 길어진 데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군단장ㆍ참모"들의 반대와 "모택동"의 추격명령에도 불구하고, 01.08일 "추격정지" 명령을 내렸다. "스탈린" 역시 계속 남진을 원하였다.
② 리지웨이 장군 (미 8군사령관)의 반격
"리지웨이 장군"은 참모들의 전황 분석에 따라, "중공군"의 보급이 충분치 못하여 반격을 하면 승산이 있을 것으로 보고 "중공군"의 전략을 파악하고, 반격 전략을 세워, 1951.02.21일 오전 8시 "미군ㆍ국군"에 "총 반격명령"을 내려, 1951.04월 중순, "중공군"을 일제히 "38선 이북"으로 몰아내 버렸다. 04.12일, "38선"을 넘어 20km까지 밀어내고, "간성"까지 몰아냈다. "국군 1군단"이 "원산"까지 북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 회담 장소인 "판문점"에서 발목이 잡혀 북진하지 못하였으며, 결국 1953.07.27일 오전 10시 휴전이 되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7. 한국전쟁 연표
1948.02.08 : 북한 조선인민군 창설 선포 → 04.03 : 제주도 4ㆍ3 사건 → 05.10 : 남한 UN한위 감시하의 총선거 실시 → 08.15 : 대한민국 정부수립 → 08.16 : "국방경비대"를 "국군"으로 명명 → 09.09 : 북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 10.19 : 여순10ㆍ19 사건 (여수 14연대ㆍ광주 4연대) → 11.02 : 대구 반란사건 (대구 6연대)
1949.03.05 : 김일성- 스탈린 회담 → 03.17 : 조선-소련 군사ㆍ경제ㆍ문화협정 체결 → 04.28 : 김일성- 모택동 회담 → 1949.06.29 : 주한미군 철수 완료 ㆍ북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 → 07.01 : 주한 미 군사고문단 설치 → 10.01 : 중공- 중국 인민공화국 수립 → 12.16 : 소련(스탈린)- 중공(모택동) 회담
1950.01.12 : 미 애치슨 국무장관, 태평양방위선 연설 → 01.26 : 한ㆍ미 상호방위 원조협정 체결 → 04.05 : 김일성- 스탈린 비밀회담 → 05.13 : 김일성- 모택동 회담 → 05.29 : 북한- 남침선제타격계획 완성 → 1950.05.30 : 국회의원 선거 → 06.12 : 북한- 전투부대 38선 부근으로 이동 → 06.22 : 북한- 남침정찰명령 하달 → 06.23 : 국군- 비상경계 해제
1950.06.25 : 북한- 전면 남침 → 1950.06.26 : UN안전보장이사회- 북한군 공격 중지ㆍ철수권고 결의 → 06.27 : 정부- 대전으로 이동ㆍ미 제7함대, 타이완해협(대만해협) 봉쇄 결정 → 06.28 : 북한- 서울점령ㆍUN안전보장이사회- 한국 군사지원 결의안 채택 → 06.29 : 맥아더 원수- 한강방어선 시찰 → 06.30 : 미 지상군 투입결정ㆍ정일권 소장- 국군 육해공군총사령관 겸 육군총참모장 임명
1950.07.01 : 미 지상군 선발대- 부산 도착 → 07.05 : 미 스미스 부대- "오산 죽미령"에서 최초 전투ㆍ국군 제1군단 창설 → 07.07 : UN안보리- UN통합군사령부 설치 결의 → 07.08 : 정부- 전국 비상계엄 선포 (전라남북 제외) → 07.14 : 국군작전지휘권- UN군 총사령관에게 이양 → 07.16 : 정부- 대전에서 대구로 이동 → 08.01 : "낙동강 방어선" 형성 → 08.18 : 정부- 대구에서 부산으로 이동
1950.09.15 : 인천상륙작전 → 09.23 : 김일성- 북한군 총 후퇴 명령 하달 → 09.29 : 수도 환도식 거행 (중앙청) → 1950.10.02 : 주은래(중공 외상)- 중공군 개입 경고 → 10.09 : UN군- 북진작전 개시 → 10.19 : 평양 탈환
10.25 : 중공군- 참전 → 11.30 : UN군- 전면 철수 → 12.14 : 원산ㆍ흥남 철수작전 → 12.23 : 워커 중장(미 제8군사령관) 전사 → 12.26 : 리지웨이 장군(신임 미 제8군사령관) 부임 → 12.31 : 중공군- 제3차 공세 (신정 공세)
1951.01.04 : UN군- 서울 철수(1ㆍ4후퇴) → 01.17 : 정부- 정전안 반대 → 02.01 : UN 총회- 중공을 침략자로 결의 → 02.12 : "거창" 양민 학살사건 발생 → 03.15 : 서울 재탈환
1951.04.12 : "맥아더 장군" 해임ㆍ"리지웨이 장군" 임명 → 05.07 : 신성모- 국방장관 퇴임ㆍ이기붕- 국방장관 취임 → 05.12 : 국민방위군 설치법 폐지 → 06.01 : UN 사무총장- 38도선에서 휴전성명 발표 → 06.23 : 이종찬 소장- 육군총참모장 취임 → 06.30 : 리지웨이 사령관- 휴전회담 제의 → 07.01 : 공산군- 휴전회담 수락 → 07.10 : 휴전회담- "개성"에서 개막 → 10.25 : 휴전회담- "판문점"에서 재개
1951.07.10.~ 1953.07.27. : 휴전회담(休戰會談) 6ㆍ25전쟁을 평화적 방법으로 해결하기 위한 군사회담 → 1952.01.30 : 육군사관학교 개교 → 02.18 : "거제도" 포로수용소 폭동 → 02.24 : 공산군- 미군 세균전 살포 조작ㆍ비난 → 03.29 : 이기붕- 국방장관 퇴임ㆍ신태영- 국방장관 임명 → 04.28 : UN군- 일괄타결안 제의 → 05.07 : "거제도" 포로수용소- "돗드 소장" 피랍 → 05.09 : UN군 사령관- "클라크 대장" 부임 → 05.20 : "거제도" 포로수용소 폭동 → 06.21 : UN군- 포로 강제송환 강력 반대 → 07.23 : 백선엽 중장- 육군참모총장 취임
1952.08.05 : 정ㆍ부통령 선거- 대통령 이승만ㆍ부통령 함태영 당선 → 09.28 : UN군- 포로의제 선택적 제안 → 10.06 : 한국군 제9사단- 백마고지 전투 → 12.02 : 아이젠하워(미 대통령당선자)- 서울 도착
1953.01.20 :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 취임 → 02.11 : "밴플리트" 후임으로 "테일러 중장" 부임 → 03.04 : 이승만- 클라크 대장(UN군 사령관)ㆍ테일러 중장 회동 → 03.05 : "스탈린" 사망 → 03.28 : 공산군- 부상병 포로교환 제의 수락 → 04.20 : 부상병 포로- 교환 개시 → 05.25 : 한국대표- 회담 불참 선언 → 06.18 : 이승만- 반공포로 석방 → 06.30 : 신태영- 국방장관 퇴임ㆍ손원일- 국방부장관 임명 → 07.13 : 중공군- 최후공세 개시
• 1953.07.27 오전 10시 : "제159차 본회의"에서 "해리슨 중장(UN유엔군 수석대표)"와 "남일(공산군 측 대표ㆍ조선인민군 총참모장)"이 3통의 "휴전협정서ㆍ부속협정서"에 각각 서명한 뒤, "클라크(UN군사령관)ㆍ김일성(북한군 총사령관)ㆍ펑더화이(중공군 총사령관)"이 각각 그의 "후방 사령부"에서 "휴정협정서"에 서명→ "대한민국 대표"는 최후까지 휴전에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끝내 서명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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