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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 서양

바이올린 (3대 명기) : 스트라디바리우스ㆍ과르네리ㆍ아마티

by 당대 제일 2023.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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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 계의 3대 명기"는 "스트라디바리우스ㆍ과르네리ㆍ아마티 혹은 과다니니"이다. "스트라디바리우스ㆍ과르네리" 악기 이력 중에는 유명한 소유자의 이름이 더해지는 경우가 많다. "과르네리 델 제수 비외탕"은 19C "앙리 비외탕(벨기에 출신 유명 바이올리니스트)"이 소유했던 데서 유래했고, "스트라디바리우스 레이디 블런트"는 "앤 블런트 부인(영국 시인 바이런 경의 손녀)"이 가졌던데서 이름이 지어졌다. "이탈리아 크레모나"는 "바이올린의 고향"으로 불린다.  

 

1. 스트라디바리우스 (Stradivarius)

현악기 제작가문인 "스트라디바리 가문(안토니오ㆍ두 아들)"에서 만든 악기를 지칭하지만, 흔히 "스트라디바리우스"라고 하면, 명장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가 만든 현악기를 지칭한다. 그 중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의 황금기"라고 일컬어지던 1700~1720년대 작품의 가치는 몇 백만 달러는 우습게 나가며, 상태ㆍ소리에 따라서 가격이 달라진다.

현존하는 유명한 관현악기들이 대부분 1700년대에 제작되었고, 대부분 "크로아티아 산 단풍나무"를 썼다. 현재 현존하는 "스트라디바리우스"는 "바이올린(550)ㆍ첼로(50)ㆍ비올라(12)"를 합쳐서 약 650개라고 하며, 실제 연주되는 것은 100대가 채 안 되며, 소장용 가운데 일부는 연주자에게 대여해주곤 한다. "스트라디바리"의 희소성 때문에 팔리는 일은 거의 없으며, 세습되거나 양도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 엄청난 테크닉 때문에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넘긴 바이올리니스트"로 유명한 "니콜로 파가니니  (Niccolò Paganiniㆍ1782~1840ㆍ58세)"는"가 연주회에서 엄청난 연주를 들려주다가, 갑자기 바이올린을 부숴버리는 일이 있었다.  "파가니니"가 외형이 똑같은 "가짜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들고 무대에 올라와 연주를 하였는데, 연주가 끝난 뒤 예전과 같이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 순간 그는 바이올린을 내팽개쳐, 밟아 부숴버렸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는 "가짜 바이올린"으로 훌륭하게 연주를 한 "파가니니"의 연주 실력도 대단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중들의 환호는 역설적으로 "명기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위력을 보여주는 한 예이기도 하다.

• "정경화"도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을 가지고 있다가, "과르네리 바이올린"을 사기 위해 팔아버렸다고 한다. 샀던 당시 4만 달러(약 4800만 원)에 사서 25만 달러(약 3억 원)에 팔았다고 한다.        • 언니인 "정명화"는 "스트라디바리우스 첼로"를 하나 소유하고 있다.

①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 (Antonio Stradivariㆍ1644(1649/1650)~1737ㆍ93세ㆍ이탈리아 크레모나)

"이탈리아 크레모나"는 "바이올린의 고향"으로 불린다.  이탈리아의 현악기 장인ㆍ현대 표준형 바이올린의 창시자ㆍ"니콜로 아마티"의 제자1698~1725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을 그의 가장 좋은 작품으로 여기고, 1715년을 절정기로 본다.  16C 즈음, "아마티 가문"이 중세 시대 현악기를 개량해 "바이올린"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1667~1679년까지 "아마티" 밑에서 견습생으로 배운 뒤, 독립한 스트라디바리는 젊은 시절부터 섬세한 음질과 정교한 세공으로 명성을 얻었고, 평생 1,100여대의 악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1680년, "피아자 산 도메니코"에서 "악기장"으로 독립했고, 악기장으로서 명성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는 "아마티"의 작품에서 벗어나, 그만의 악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② 독특한 목재 처리와 디자인으로 인해, 복제가 거의 불가능한 "특유의 소리"를 낸다.

분석결과, 여타 바이올린과 구조가 조금 달랐다고 한다. "울림통의 f-형 구멍"은 대부분의 바이올린에서 대칭이지만,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은 살짝 대칭이 어긋났다고 한다. 시각적 완벽함을 버리고 오직 청각적인 완벽함을 추구한 장인정신과 그 연구결과라고 보여진다.  악기 위에 칠해진 완벽한 비율의 "바니쉬"가 특별하게 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 한다.  또한 제작될 당시, 유럽은 "소(小)빙하기"라고 말하는 기간이었다고 한다. 이 기간은 1645~1750년까지 지속되었고, 당시 유럽은 여타 세기 때보다 추웠다고 한다.

거기다가 "북 크로아티아의 단풍나무"를 썼던 것도 큰 요인이었다. "북 크로아티아"의 목재는 추운 겨울로 인해 상당히 밀도가 높았는데, 이 "소빙하기" 동안의 "크로아티아"는 더 추웠고, 그 때문에 더더욱 밀도가 높았다는 것이다. "스트라디바리우스"만의 독특한 "목재 방부제"도 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분석결과, "붕사ㆍ크롬ㆍ염철 (iron salt)"로 처리된 것 같다는 결과가 나왔다.

2. 과르네리 델 제수 (Guarneri del Gesu)ㆍ과르네리 (Guarneri)

"안드레아 과르네리(1626~1698ㆍ72세)"로부터 시작된 "과르네리 가문"의 현악기를 통칭한다. 주로 "바이올린"이지만 "첼로"도 좀 있다. "주세페 과르네리"가 40대의 젊은 나이로 죽었기에, 현재 현존하는 "과르네리"는 평생 200개 정도를 만들었으나, 전 세계에 150여 개밖에 없고, 거기다가 20~30개는 가짜로 추정되는데다가, 많은 수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기에 희소성까지 더해져 가격은 거의 부르는 게 값이다.

"과르네리" 가문에서 처음으로 현악기를 제조하기 시작한 1650년대에는 "안드레아"가 "아마티 공방의 견습생"이었던 터라 주로 "아마티 방식"을 따랐지만, 이후에는 "과르네리" 고유의 양식을 발전시켜 독립된 장인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안드레아"의 손자인 "바르톨로메오 주세페 과르네리"가 가장 유명하다. "과르네리" 중에서도 "스트라디바리"와 비교되는 "과르네리 델 제수"는 특히 "주세페"가 만든 현악기들로 주로 바이올린이 대부분이다. 가톨릭 신자였던 "주세페"는 항상 자신이 만든 악기에, "인류의 구원자 예수"란 뜻의 그리스어 약자 I.H.S(iota-eta-sigma)와 십자가를 "라벨 문양"으로 넣었는데 그 때문에 "예수"란 뜻의 "델 제수(del Gesu)"라는 별명을 얻었다.

•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넘긴 바이올리니스트"인 "니콜로 파가니니"가 가장 아끼던 악기 역시 "캐논"이라는 이름이 붙은 "과르네리"였다.     • "사라장(장영주)"도 1717년 "과르네리 델 제수"를 소유 중이고, "정경화"는 무려 2대를 소유 중이다.

① 바르톨로메오 주세페 과르네리 (Bartolomeo Giuseppe Antonio Guarneriㆍ1698~1744ㆍ46세)

이탈리아의 현악기 제작 명가 과르네리 가문의 3번째 제작자ㆍ별명은 "델 제수(예수)"바이올린 제작자중 역대 최고로 평가되며,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와 쌍벽을 이룬다.  "과르네리 패밀리"를 "스트라디바리"와 같은 반열에 올린 1등 공신으로, 이 사람이 태어나기 전의 "과르네리 가"는 당대에도 최고로 평가받았던 "스트라디바리"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는데, 46년이란 짧은 기간 만으로도 92세까지 장수한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에 비견되는 악기들을 남겼다

② "스트라디바리우스"와는 또 다른 개성의 뛰어난 사운드로 유명하다.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이미 갖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들이 함께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스트라디바리우스"에 비해 디자인은 거칠지만, 깊고 풍부한 소리를 낸다.  유럽 궁정에선 수요가 거의 없었지만, 높지 않은 가격에 좋은 소리를 원하는 일반 음악가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3. 아마티 (Amati)

"이탈리아 크레모나" 지방에 기점을 두고 1549~1740년경까지 성행하였던 명품 바이올린 제작 가문"아마티 가문"은 유서 깊은 악기 제작의 명가로서,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를 키워낸 스승으로도 유명하다. 이들은 근대 바이올린 형태ㆍ구조를 확립시켰고, 많은 명기(名器)를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하다.  "크레모나"에서 만들어진 바이올린들은 특히 "바니시"에 비법이 있어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시 "바이올린" 특성상 음량이 작아서, 일반 연주자들이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고전적이며, 당시의 느낌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악기로 유명하며, 주로 고악기ㆍ시대연주를 하는 연주자가 많이 찾는 악기이다.

 안드레아 아마티 (1500~1577ㆍ77세)

근대 바이올린의 형태와 구조를 재정립하여 바이올린을 제작하였다.  바이올린 제작 기술을 어디에서 배워왔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그가 원래 "비올 제작자"였는데, "브레시아의 바이올린"에서 영감을 받아 바이올린 제작을 시작하였다는 설이 제일 믿을만하다.  그가 "크레모나" 지방의 첫 바이올린 제작자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의 작품은 현재 225개밖에 전해지지 않고 있는데, 학자들은 그 이유를 16C 교회가 바이올린의 연주를 금하고 심지어는 바이올린을 파괴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으로 생각하고 있다.  좋은 목재를 찾기 위하여 남부 알프스를 해메고 다녔고, 좋은 바니시를 만들기 위해 직접 베니스까지 찾아가 재료를 구해왔다고 한다.  "아마티" 명기의 탁월성을 그가 분명히 처음 사용한 크레모나 바니시 덕분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엄밀한 증거가 없어 아직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마티"는 바이올린의 자매 악기들인 "비올라(4대)ㆍ첼로(6대)"의 견본까지 만들었다.

 아들 : 안토니오 아마티 (1540~1607ㆍ67세))ㆍ지롤라모 아마티 (1561?~1630ㆍ69세)

"안토니오ㆍ지롤라모" 형제는 바이올린 제작을 거의 함께 하였으며, 550~650개의 바이올린이 둘의 합작으로 여겨진다.

 니콜로 아마티 (1596~1684ㆍ88세)

"지롤라모 아마티"의 아들로, 가문에서 가장 위대한 "바이올린 제작자"

지롤라모 아마티 (1649~1740ㆍ91세)

"니콜로 아마티"의 아들로, "아마티" 가의 가업을 4대째 계승했다.  하지만 그는 "스트라디바리ㆍ과르네리" 등의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였다. 게다가 그의 작품은 널리 복제되었고, 그의 라벨이 붙은 채로 판매가 되었는데, 사람들 사이에 가짜 복제품이 퍼지면서 "지롤라모"에 대한 인식이 나빠지기 시작하여 그를 둘러싼 상황은 점점 더 안 좋아졌다.  그는 일생에 거쳐 280개밖에 안 되는 악기를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롤라모의 작품들은 선대의 작품보다 힘찬 음색을 가지고 있다.

4. 과다니니 (Guadagnini)

"이탈리아 피아첸차"에서 "로렌초 과다니니 (Lorenzo Guadagniniㆍ1695~1745ㆍ50세)"를 시작으로 "파올로 (Paoloㆍ1908~1942ㆍ34세)"때 까지 제작되었던 "과다니니 가문"의 악기를 지칭한다. 보통 "과다니니"의 명성이 알려졌던 "조반니 바티스타 (Giovanni Battistaㆍ1711~1786ㆍ75세)"때의 악기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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