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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 서양

세계 3대 악처 : 크산티페 (소크라테스 아내)ㆍ콘스탄체ㆍ소피아

by 당대 제일 2023.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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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실이나 성질이 악독한 아내를 "악처 (惡妻)"라고 부른다. 영어로는 "젠티피 (Xanthippe)"라고 하는데, "소크라테스의 아내"인 "크산티페 (Xanthippe)"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1. 크산티페 (Xanthippe): 소크라테스 (BC 470~399ㆍ71세) 아내ㆍ어린 아내ㆍ아이 3명

"크산티페가 후처였다"는 설도 전해지지만 확실하지 않으며, "소크라테스"가 사형당할 때에 두 아들이 어렸던 것으로 보아, 늙은 "소크라테스"와 결혼한 듯하다. "악처의 노릇"에 대해서도 후세 사람들의 과장이 심하다는 평이 있다.

아내 "크산티페"가 없었다면, "소크라테스"는 유명한 철학자가 될 수 없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편이 "철학자"라는 직업을 갖지 못하게 하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집에서 지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남편을 못살게 굴었다. 그녀는 "소크라테스"가 친구들과 철학적 담화를 나누려는 것조차 못마땅하게 여겼다. 하루는 "소크라테스"가 집에서 제자들과 강론 중이었는데, 아내가 잔소리를 했다. 그가 들은 척 만 척하자, "크산티페"는 큰소리로 욕을 하고, 물을 퍼부었다. 그런데도 "소크라테스"는 태연히 "천둥이 친 다음에는 소나기가 오는 법이지"라고 말했다.

"크산티페"는 심지어 남편을 뒤쫓아가, 시장 한복판에서 옷을 마구 잡아당겨 찢어놓기도 했다. 이런 모습을 보며, "소크라테스"의 친구들은 크산티페를 가장 견뎌내기 힘든 아내라고 비난했다. 정작 소크라테스는 그런 아내를 잘도 참아냈다. 어떤 사람이 "당신은 아내의 잔소리를 어떻게 견뎌냅니까?" 하고 묻자, 그는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도 귀에 익으면 괴로울 것이 없지요" 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한 제자가 결혼을 하는 게 좋은지 하지 않는 게 좋은지 묻자, "소크라테스"는 "결혼을 하게. 온순한 아내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고, 사나운 아내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 테니!"라고 대답했다.

"소크라테스"가 악처와의 생활에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다고, 즉 "크산티페를 잘 견뎌내면 다른 사람들과는 쉽게 어울릴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닐까? 아닌 게 아니라, "크산티페"가 못살게 굴면 굴수록, "소크라테스"는 서둘러 불화가 끊이지 않는 집을 나와 철학적 담화로 빠져들었다. 이리하여 소크라테스는 비로소 소크라테스가 될 수 있었다. 만일 그가 서재에만 파묻혀 지냈더라면, 결코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물질에 대한 아무런 욕심 없이 자신의 처지에 만족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크산티페"에게마저 그것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애를 3명이나 둔, 나이 어린 아내 "크산티페"가 무능한 가장을 들볶았으리라고 상상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 소크라테스 (BC 470~399ㆍ71세) 

외모지상주의가 팽배한 "아테네"에서 못생기기로 5 손가락 안에 꼽혔다. 못생겼으면 깔끔하게라도 하고 다닐 일인데, 옷 한 벌로 1년을 버텼으며, 신발은 아예 신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신발을 사 신을 여유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시장이나 경기장 등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과 아무 쓸모없는 대화나 나누고 다녔다.  지독한 "게으름뱅이"였던 그에게 "크산티페"가 화를 낸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일 것이다.  물론 때때로 돈을 벌어서 가정 살림에 보탬을 주기도 했겠지만, 그런 일은 극히 드물었다.

2. 콘스탄체: 모차르트 (1756~1791ㆍ35세) 아내ㆍ소프라노 가수ㆍ9년 동안 6명 출산ㆍ4명 조졸

 그녀는 "모차르트"의 첫사랑 "알로시아 베버"의 동생이었다. 1782년, 26살의 "모차르트"는 독일어로 된 최초의 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탈출"을 작곡한다. 여주인공의 이름은 "콘스탄체" 바로, 사랑하는 연인의 이름이었다.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1782.08.04.일에 소프라노 가수인 "콘스탄체"와 "빈의 성 슈테판 성당"에서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고, 9년 후 같은 곳에서 초라한 장례식을 치렀다. 

9년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콘스탄체"가 성격이 변덕스럽고, 바람기가 다분했으며, 사치와 낭비가 심해서, "모차르트"를 과로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빨리 죽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이들 부부의 삶을 겉에서만 보면 그다지 행복하다고 하기 힘들 것 같다. 9년이라는 결혼생활 동안, 6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4명의 아이가 1년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콘스탄체"는 남편의 명성을 아주 잘 누리고 살았다. 두 사람의 애정은 각별했다. "콘스탄체"가 "모차르트"를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순전히 세상 사람들의 말일 뿐, 악처가 아니었다. "악처"라 부르는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보다 이 위대한 음악가의 무덤이 행방불명되고 만 것"이었다. "장례식"에 "콘스탄체"가 몸이 아파서 불참했고, 돈이 없어 "묘"를 쓸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시신들과 합장됐는데, 매장할 때 아무도 따라가지 않아, 어디에 묻혔는지 알 수 없게 돼버린 것이다. 현재 "모차르트 묘"로 알려진 곳은 실제 묘가 아니라, 기념비만 세워진 곳이다. 

"콘스탄체"는 남편이 죽은 후, "추모 음악회ㆍ미발표 작품의 출판" 등으로 경제적으로 성공하였다. 1809년, 그녀는 "덴마크" 출신 외교관이었던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Georg Nikolaus von Nissen)"과 재혼했고, 그들은 "덴마크"로 이주했다가 다시 "잘츠부르크"로 돌아와 여생을 마감한다. 결혼 후,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ㆍ돈 조반니"가 큰 성공을 거뒀지만, 근검절약과는 거리가 멀어 갈수록 빚이 늘었고, "모차르트"의 마지막 4년은 몹시 궁핍했다고 한다. 돈을 마련하기 위해, 유럽의 각 도시를 돌며, 연주회를 열었지만, 어느 하나 성공하지 못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병마가 드리우고 있었다. 1790년, 세상을 떠나기 바로 1년 전에도 "모차르트"는 돈을 벌기위해, 집을 떠나 "독일"의 각 도시를 전전하고 있었는데, 틈틈이 아내에게 편지를 써서 부쳤다.

< 추신 > 내가 마지막 페이지를 쓰는 동안 종이 위에 눈물이 뚝 뚝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나는 힘을 내야겠지요. 잡았다! 수많은 키스가 날아다니고 있어요.  2개 잡았다! 키스들이 거대하게 모여 있는 것이 보여요.  하하 방금 3개를 잡았어요. - 정말 맛있군요. -  안녕, 친애하는 가장 사랑하는 아내여, 건강을 돌보세요.  안녕, 당신에게 백만 번의 키스를 보냅니다.

"모차르트"는 명성에 걸맞게 많은 돈을 벌었다. 하지만 그는 항상 돈을 빌리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이유는 버는 것보다 쓰는 것이 많은, 즉 "과소비의 화신"이었기 때문이다. "당구ㆍ고급 옷ㆍ파이프 담배ㆍ여행" 등으로 그는 인생을 즐겼다. "모차르트"가 가난ㆍ무관심 속에서 죽었다는 이야기와 달리, 그는 나름대로 만족할 만한 수입이 있었고 "프라하" 같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꾸준한 작곡 위촉을 받았다. 그가 말년에 전성기 때만큼의 명성을 누리지는 못했으며, 돈을 꿔 달라고 쓴 편지가 있지만, 이는 그가 가난해서가 아니라 번 돈보다 더 많이 썼기 때문이었다. 실례로 "모차르트"가 입은 옷은 보석으로 장식된 화려한 의상이었다. 기록에는 "모차르트"가 "무수히 난 좁쌀 만한 발열로 죽었다"고 되어 있는데, 현대 의학으로 진단할 수 있는 것에 비해서는 충분한 정보가 되지 못하고 있으며, 사인에 대한 학설 중에는 "선모충병ㆍ수은 중독ㆍ류머티스 열ㆍ덜 익힌 돼지고기에 의한 식중독" 등이 있다.

3. 소피아 : 톨스토이 (1828~1910ㆍ82세) 아내ㆍ공작의 딸ㆍ17살 차이ㆍ13명 출산

"공작"의 딸인 17세의 "소피아"는 34세인 "백작"의 아들 "톨스토이"와 결혼하여, 13남매를 낳아 길렀고, "고도 근시"인 그의 원고 대필은 물론, 그의 셔츠를 손수 만들어 주고, 양말에도 "톨스토이"의 약자를 새겨줄 정도로 남편을 사랑하는 알뜰한 아내였다.

실제로 "소피아"는 극도로 과중한 업무에 시달렸다. 자녀를 13명이나 낳았는데, "톨스토이"가 모성으로 길러야 한다는 명분을 들어, 절대 "유모"를 들이지 못하게 했고, "소피아"가 해야 했던 일은 "자녀 양육ㆍ가사" 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시달린 "온갖 일"에는 "톨스토이"가 "초고"로 쓴 글을 반듯하게 옮겨 적는 일도 포함돼 있었다. 워낙 "악필"이라서, 편집자들이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톨스토이"의 작품들은 대부분 장편이고, 게다가 "전쟁과 평화"는 대하소설이라고 부를만한 분량이다. 그렇게 평생 극도로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며 살았는데, 어느 날 "톨스토이"가 "자신의 전 재산의 토지를 모두 농로에게 나누어주고. 저작권을 사회에 환원하겠노라"고 한 것이었다.

"소피아"는 극도로 분노했고, 분노는 극심한 갈등ㆍ다툼으로 이어졌다. "톨스토이"가 자신의 기득권 속에 안주하지 않고, "구도자의 삶"을 실천하면서 자신의 뜻을 반대하는 아내에 대한 사랑이 달라진 것이다. "톨스토이"는 결국 "가족에게 상속한다."는 통보를 하고 가출해버렸다. 만년에 집을 나온 "톨스토이"는 "야스나야 폴랴나"의 작은 "간이역"에서 숨을 거두면서도 아내를 그의 곁에 오지 못하게 하였다. "소피아"가 밖에서 창문을 통해, 남편의 임종을 지켜보는 사진에서 "톨스토이"가 얼마나 아내를 철저히 멀리 했는가를 알 수 있었다.

"소피아"는 훗날 이런 회고를 남겼다. "그는 진정한 온정이라고는 찾기 힘든 사람이에요. 그의 친절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조에서 나온 거예요." "그의 전기에는 그가 물통을 나르는 노동자들을 어떻게 도와주었는가 하는 이야기가 기록되겠지만, 정작 자신의 아내를 마음 편하게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는 지금까지 서른두 해를 같이 살아오면서 아이들에게 물 한 모금 먹이거나, 아이들의 잠자리를 단 5분이라도 보살펴 온갖 일에 시달리는 나에게 잠시라도 쉴 틈을 준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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