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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공산주의 (남로당 • 빨치산 • 연안파 • 소련파)

김수임 (39세) : 이강국 애인 (남로당)ㆍ이대 출신 (모윤숙ㆍ노천명)

by 당대 제일 2022.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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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임 (金壽任ㆍ1911~1950.06.28ㆍ39세)"은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 출신으로, 간첩 혐의로 사형당했다. "이강국 (李康國ㆍ1906~1955?ㆍ향년 49세)"의 연인이었으며, "모윤숙"이 만든 "낙랑클럽"에서 "사교계의 여왕"으로 부상했는데, "이화여전" 재학시절,  "모윤숙 (기숙사 룸메이트ㆍ이강국을 좋아했다는 설이 있음)"의 단짝이었다.

 

1. 김수임 (金壽任1911~1950.06.28향년 39)

"베어드 대령(미군 헌병감)"과 결혼을 전제로 동거하고 있었는데, "서촌집""이완용"의 집. 연인 "이강국""김수임"의 도움으로 월북했다고 한다. "여간첩 사건"으로 유명한 "김수임"은 당시 미군 헌병이 운전하는 사령관 차를 "이강국"과 동승해 38선까지 검문을 피할 수 있게 해준 것이라고 전해진다.

•  출 생 : 경기도 연천군개성 선죽교 아래 빈민      •  사 망 : 서울       •  사 인 : 사형

•  동 거 : 이강국   E.베어드 대령 (군정청 헌병대사령관   •  학 력 :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

•  남 편 : 미상 (가난으로 11세에 민며느리로 15세 신랑에게 팔려감) 가출 미국인 독신녀의 양녀   •  가 족 : 아들 김원일 (1949.11월 출생- 베어드 대령)ㆍ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거주 "라 시에라 대학"의 교수

•  경 력 : 1931 이후 : 세브란스병원 미국인 치과과장 비서통역 → 1945 : 미군정청 통역관 → 1946~ 1949 : 미군정청 헌병대사령관 "E. 베어드 대령" 특별자문 → 1949 :"주한미국대사관" 통역관

김수임

"개성 선죽교 아래 빈민촌"에서 홀어머니와 함께 자랐다. 집안은 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해, 불과 11세에 "민며느리", 15세 신랑에게 팔려가다시피 했다명랑하며 솔직했던 그녀는 철없는 신랑의 횡포를 못 이겨 가출했다고 한다외국인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미국인 독신녀의 양녀가 되었고, "이화여전 영문과"에 들어가, 작가지망생 "모윤숙(이화여전 영문과 재학 시, 기숙사 룸메이트)"과 지냈으며, 1932"화여전"을 졸업했다.

뛰어난 외모의 인텔리로 영어회화통역에 뛰어났다고 한다. "모윤숙" 의하면 "마태복음을 줄줄 외는 기독교 신자아주 명랑하고 어떤 장소에서든 웃음을 한 바가지씩 들고 나오는 여자"였다"미군정청 직원주한미국대사관 통역" 등을 지냈으며, 각종 기밀을 "이강국"남로당"에 제공하였다가, 1950.04월 수사기관에 체포되어, 1950.06.15일 사형선고를 받고, 625전쟁이 발발하자, 예정보다 총살형이 앞당겨져 사형 당했다. 하지만, 간첩이었는지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

"전숙희(이화여전 후배)""사랑밖에 몰랐던, 그리고 너무 순진했던 사람"이라고 그녀를 평가했다"반공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라는 주장도 여전히 제기되고 있다2008,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된 기밀 자료를 토대로, 조작 의혹을 제기하는 등 당시 발표된 내용이 사실과 거리가 있다는 주장이 계속되고 있다북한에서 역시 간첩 혐의로 처형당한 "이강국"과의 비극적인 사랑과 죽음에는 극적인 요소가 풍부했고 "반공주의" 고취에도 좋은 소재였기 때문에, 영화 "나는 속았다(1963)특별수사본부 김수임의 일생(1974)연극 : , 김수임(1997)드라마 : 서울 1945 (2006)"등 여러 창작물에서 그의 삶이 다루어졌다논픽션 : 사랑이 그녀를 쏘았다 (2002)"전숙희"가 쓴 것이다.

2. "기지촌"과는 비교할 수 없는 "낙랑클럽 (김활란 총재모윤숙 단장)"

주로 "이화여전" 출신들 100~150명으로 구성됐으며, "이승만 대통령" 후원으로 총재는 "김활란 (金活蘭ㆍ1899~1970ㆍ71세)"이었고, 단장은 "모윤숙 (毛允淑ㆍ1910~1990ㆍ80세)"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영어를 잘하는 교양 있는 여성들에게 주한 외국인을 상대로 고급 외교를 하도록 조직한 비밀 사교단체"였다. (이승만과 메논 그리고 모윤숙ㆍ2012ㆍ기파랑)

"전숙희(이화여전 후배)"가 "김수임 언니"의 진심을 살려내기 위해 쓴 "사랑이 그녀를 쏘았다 (2002ㆍ정우사)"에서는 "낙랑클럽"은 "기지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교클럽"이라고 한다. 실제로, 책 속에서 "김수임ㆍ모윤숙"의 모습은 "고급 직업여성"으로 그려져 있다. 

또 하필이면 그 이름도 "낙랑"이다. 이민족의 침략과 지배를 상징하는 이름이 아니던가. 이웃나라 "호동 왕자"와 사랑에 빠져 침략의 길을 열어주는데, 자신의 목숨을 바친 "낙랑공주"가 연상될 수밖에 없다. 결국 "낙랑클럽"은 당시 "유산계급"을 배경으로 하는 "한민당ㆍ이승만 세력"이 펼친 로비 활동의 일환이었다. "낙랑클럽"이 처음 발족했을 때는 "모윤숙"의 집(회현동)에서 모였지만, "미군정청"과 선을 대고 있던 우익 정치인이 주선해, 일본인 호화 저택을 "적산가옥"으로 불하받아서 그곳에서 활동했다. 여기서 리더인 "모윤숙"이 "이화여전" 후배들을 사로잡았으며, 항상 옆에 있던 "김수임"은 "종달새"의 명랑한 웃음으로 분위기를 이끌었다고 한다.

"김창룡"은 그녀의 "간첩혐의"를 감지하고 체포하려 했지만, 배후에 당시 거물 실세 "베어드 대령(군정청 헌병대사령관)"이 있어 쉽게 체포하지 못하고 있었다천하의 특무대장 "김창룡", 최고의 공안검사 "오제도", 미헌병대 사령관의 집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단짝 "모윤숙" "김창룡" "김수임"을 체포하도록 돕는다.

"모윤숙"의 자서전에는 "언니, 오늘 언니 생일인데, 미역국이나 같이 먹어요"라면서, 김수임이 찾아다고 하지만, 논리적으로나 "모윤숙"의 이력으로 봐서, 그 반대일 가능성이 높다어쨌든 이대 동창이었던 "모윤숙노천명 (盧天命ㆍ1911~1957ㆍ46세)" 3일 연속해서 재판을 방청하러 나왔다. 하지만 "김수임"의 사형선고로 이들과의 인연이 끝났다.

특히 "낙랑클럽 단장"이었던 "모윤숙"은 당시 "태고적부터 통일된 하나의 국가였던 조선을 둘로 가르는 단독선거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공언해 오던 "UN 조선위원장 단장 메논"의 판단을 바꾸게 한 장본인이다이에 대해 모윤숙은 "만일 나와 "메논 단장"과의 우정 관계가 없었더라면, 단독 선거는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이승만 박사가 대한민국 대통령 자리에 계셨다는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신동아 1983.02월호)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메논" 자신도 "외교관으로 있던 오랜 기간 동안 나의 이성(reason)이 심정(heart)에 의해 흔들렸다는 것은, 내가 유엔 조선임시위원단 단장으로 있던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는데, 나의 심정을 흔들었던 여성은 한국의 유명한 여류시인 "매리언 모(모윤숙)"였다고 고백했다.(메논 자서전1974)

3. 입양간 아들 김원일 (1949.11월 출생: 베어드 대령)

양로원에 있는 "베어드"를 찾아갔으나, "베어드""김원일의 아버지는 스미스씨"라고 말하였으며, 김원일은 아버지 "베어드"는 당시 기밀에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1950.06.18일자, "경향신문""김수임"에게 사형이 언도되었음을 알리면서, "E.베어드 대령" 사이에 14개월 아이가 있다고 보도했다.

그는 1949.11월 출생하였고, 사건 당시 "옥인동" 집에 버려지다시피 했던 인물이다. 다행히 그가 태어난 "청량리 위생병원 수간호사 안귀분"의 양자로 입양됐고, 1970년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갔다그러다 우연히 미국에서 엄마와 함께 세브란스 병원에서 근무한 사람을 만나, 그로부터 아버지 "베어드" 존재를 알게 되었고, 1980년 아버지를 찾아 갔지만, 당시 90세인 베어드는 "나는 사생아 자식이 없다, 넌 내 자식이 아니다"라면서 부인했다고 한다.

"베어드"1950년 조사받을 때도 "사생아가 없다"고 진술했으며, "김수임" 재판 개시 9일 전에 국해 버렸다. 이렇게 엄마에 대한 관심은 그에 대한 자료를 탐색하게 만들었고, 결국 전혀 새로운 기록을 찾아내게 했다그가 찾아낸 "미 육군성 기밀문서"인 일명 "베어드 파일"에 의하면, "베어드 대령"은 민감한 정보에 대한 접근권이 없어, "김수임"이 북에 넘겨줄 비밀도 없었으며, "이강국"을 월북시키는데 미군 지프를 이용했다는 등의 내용도 "입증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2008AP통신은 "미육군정보국 1956년 비밀자료에 의하면, 이강국이 CIA비밀조직인 JACK(한국 공동활동 위원단)에 고용되었다"고 보도했다실제로 "이강국"은 휴전 무렵, "이승엽임화"등과 함께 미군 스파이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아들 "김원일""어머니는 역사라는 장기판의 졸이었다, 역사에 익사한 사람이다"라고 하면서, 구도 자신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 상황에서 외로이 처형당한 어머니를 위로했다.

4. 이강국 (공산주의자)베어드 대령과 만남동거

그녀의 운명은 "이강국"을 만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이미 유부남이었던 그는 "경성제대 법과"를 졸업하고, "베를린 유학"을 다녀온 당대 최고의 엘리트이자, "열혈 공산주의자"였다그녀는 영어회화에 뛰어나, 광복 전 "세브란스병원" 미국인 치과과장의 비서이자, 통역으로 취직했다당시 공산주의자 "이강국"을 만나 사랑하게 되어 동거했으나, 헤어졌다고 한다.

그녀가 언제 "이강국"을 처음 알게 되었는지는 확실한 정설이 없다공판 당시, 김수임은 "이강국을 안 것은 1942년 즉 지금으로부터 약 9년 전 동무의 집에서 윷을 놀다가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다음날 "이강국"으로 부터 점심을 먹자고 하는 청이 있었다. 그리하여 친하게 되었던 것이며, 나 자신도 "이강국"을 처음 보았을 적에 첫 인상이 좋았고, 인격이 고상하고 수재이고, 독일 유학까지 하여서 교제하였다"고 한다.

광복 후, "이강국"은 자신을 찾아온 김수임에게 비서를 제안했으나, 정작 김수임 자신은 미국인 통역을 맡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1945"미군정청 통역관"으로 들어갔다1946년 가을, "헌병감"이 된 "베어드 대령"의 특별자문으로 고용돼 1949.06월까지 미국의 월급을 받았다광복 후, "이강국"이 공산주의 활동에 전념할 때, 그녀는 "베어드 대령"과 동거에 들어갔다.

5. 1948~1950.04월까지, "김수임베어드 대령""이완용 가옥"에서 동거

해방 후, "이완용"의 집은 미 군속들에게 불하됐다. 1948"이완용"의 집 가운데, 가장 중심인 "옥인동 19번지"의 바깥채에 거주한 사람은 당시 "이화여전 영문과"를 나와 미군정 통역관을 하고 있었던 "김수임"이었다군정청 헌병대사령관 "E.베어드 대령"이 동거인 "김수임"을 위해 마련한 것이다

1948~1950.04월까지 "김수임베어드 대령"은 이곳에서 동거했다한편 "김수임""이화여전"의 단짝인 "모윤숙"이 조직한 미군장교를 상대로 한 사교클럽이었던 "랑 클럽"의 주요 멤버로 활동했으며, 그의 활발한 성격으로 "종달새"라 불렸다"낙랑클럽"이라는 주한미군 대상의 사교클럽에서 미국인들과 친하게 지냈는데, "베어드"와 종로구 옥인동에서 동거하면서 "사교계의 여왕"으로 부상했다"모윤숙의 낙랑클럽"에 참가하면서 운명이 바뀌게 된 것이다.

6. 이강국 월북에 협조

1946년 말, "이강국"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자, 그를 "미국인 고문관"의 집에 숨겨두었다가, 1947 월북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강국""김일성 정권"에서 "초대 외무상"으로까지 발탁되었다그 뒤 "이강국""대남공작"을 펼치자, 김수임은 "비밀 연락원"을 통해 그의 계획에 동조하여, 자기 집을 "남조선노동당"의 비밀 거점으로 사용하도록 빌려주었으며, 자신도 각종 기밀을 빼돌려 "남로당"제공하였다. 한편 "남로당원"으로, 검거 후 "육군 특무대"에 사형수로 수감되어 있던 "이중업" 비밀리에 빼내 숨겨주었고, 의사로 가장시켜 월북시켰다. 1947, "이강국"은 남한에 연락원을 파견했는데, 이때부터 1년 여 동안 "이강국"의 연락원들을 여러 번 자기 집에 숨겨주었다.

7. 1950.04: 김수임 간첩사건 (김창룡에 의해 체포 오제도 검사가 기소)

"김창룡"에 의해, "김수임""북한의 주요 인사를 월북시켰다는 점기밀문서를 북한에 유출했다" 혐의로 04.17일 체포되어, 간첩으로 몰려, 06.16"육군본부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06.28 총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베어드"와의 동거기간 동안 공산주의자 "이강국" 지시에 따라 각종 간첩 활동을 한 혐의로, 수사국에 전격 체포되었으며, 가택 압수수색에서 "권총 3자루실탄 180북한에 보내려던 기밀 "들이 압수되었고, 적용된 혐의는 "베어드 대령"을 통해, 취득한 정보를 "남로당"에 넘겨줬고, 1942년 알게 된 "이강국" 대령의 지프로 월북하게 했다는 것 등 총 13가지 혐의다.

관련자 : 이강국 (북한 정치인)베어드 대령 (미군정청 헌병대 사령관)

간첩혐의죄명 : 간첩이적행위 (방경비법 제33)

1949년의 미군철수계획 등 미군의 중요 기밀문서를 북한에 유출했다    남로당 주요 인사인 "이강국"이 월북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북한에서 제조한 위조지폐를 서울로 운반했다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인 "이중업"을 월북시켰다는 등 무려 19가지 혐의였다.

동거 중이던 "베어드 대령"로부터 비밀정보를 빼내, 전 애인이었던 "이강국"을 통해 "남로당"에게 건네주었고, 1946.09월 대령의 지프로 "이강국"을 개성까지 데려다 주었다거나, 1947.12 "이강국""남로당"에 보낸 "공작비(日銀券)"를 땔감으로 가장, 대령이 제공한 군용트럭으로 서울로 옮겼다는 것이다1946.09, "이강국"의 월북 문제는 당시 아직 "베어드 대령" 그렇게 가깝지는 않았던 시점이기에 추가 조사가 필요했던 부분이었다.

1946.09, "이강국""박헌영"의 지시로 "미국차관 도입 반대 명령서""민전명의"로 발표했는데, 이로 인해 "체포명령서"가 내려졌다는 것이다. 또한 북의 자료에 의하면, 이때 "박헌영"이 월북하라고 지시하여, 월북 문제를 "베어드"와 상의했다고 한다북에 있는 "이강국"과 연락했으며, 1948년에는 지하에 숨어있는 남로당원 "박민호김용봉" 등에게 계속 한국에 불리한 정보를 제공하였다는 것이었다. 또한, 남로당원 "최만용(이복동생)"박민호"에게 각각 지프차를 제공하여, "남로당 사업" 방조하는가 하면, 그들에게 금품을 제공하는 등 이적행위를 수없이 감행하였다는 혐의였다. 심지어는 "육군특무대"에 사형수로 수감 중이던 "남로당""빨치산 (군사부 프락치 총책)""이중업(李重業)"을 빼내, 의사로 가장시켜 월북시켰다는 소설 같은 얘기도 혐의로 등장했다.

불과 "한국전쟁" 발발 2달을 남겨놓은 시기에 "김창룡"에 의해 체포돼, "오제도" 검사에 의해 "간첩혐의" 기소됐다. 체포된 시기는 "김삼룡이주하"가 체포된 직후였고, "김수임" 체포 뒤에는 바로 "북로당"에서 파견한 "성시백"도 함께 체포됐다.

"이강국"은 북에서 "초대 외무상"을 했을 정도의 거물이었다. 그녀는 민간인임에도 불구하고 "군사법정"으로 넘겨졌고, 06.14~16(3일간)까지 진행된 "군법회의"는 당시 장안의 화제였다당시 재판부가 인정한 증거 중의 하나인 "베어드 대령"에게 건네받았다는 정보는 이미 한 간행물에 게재된 내용이었다. "오제도 검사"가 증거로 제출한 권총은 재판과정에서 기각되었다.

또한 "오제도"는 간첩으로 지목된 "이중업""김수임"을 서로 연관시키려했으나, 검찰 상부에서는 억지라고 판단해, 당시 기소항목에서도 제외됐다마지막 재판에서 법정은 "사형"을 언도했다. 재판장은 "한 남자에 대한 애정이 간첩 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요지로 판결했다. 그러나 군법회의 판결문은 규정상 "영구 보존"되어야 하지만, 현재 "김수임 판결문"은 사라진 상태이다.

"김창룡"은 그녀의 "간첩혐의"를 감지하고 체포하려 했지만, 배후에 당시 거물 실세 "베어드 대령(군정청 헌병대사령관)"이 있어 쉽게 체포하지 못하고 있었다천하의 특무대장 "김창룡", 최고의 공안검사 "오제도", 미헌병대 사령관의 집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단짝 "모윤숙""김창룡""김수임"을 체포하도록 돕는다"모윤숙"의 자서전에는 "언니, 오늘 언니 생일인데, 미역국이나 같이 먹어요"라면서, 김수임이 찾아다고 하지만, 논리적으로나 "모윤숙"의 이력으로 봐서, 그 반대일 가능성이 높다어쨌든 "모윤숙노천명"3일 연속해서 재판을 방청하러 나왔다. 하지만 "김수임"의 사형선고로 이들과의 인연이 끝났다. "사형선고 9일 뒤"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그로부터 3일 뒤 급히 이들에 대한 사형집행이 이뤄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민간인을 군사법정에 세운 점, 김수임이 들것에 실려와 재판을 받아야 할 정도의 고문과 강압수사 흔적, 그리고 그에게 적용된 "국방 경비법" 자체가 근거가 불확실하다는 등의 문제가 제기됐다하지만 전쟁이란 폭풍 속에 이미 당사자는 세상에 없었고, 전쟁 후에도 전후 복구 등으로 그에 대한 관심은 희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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