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로, "사회주의 혁명 트로이카"는 "주세죽 (1901~1953ㆍ52세ㆍ박헌영 부인)ㆍ고명자 (1904~1950ㆍ46세ㆍ김단야 부인)ㆍ허정숙 (1902~1991ㆍ89세ㆍ임원근 부인ㆍ허헌의 장녀)"이었다.
1. 사회주의 혁명 트로이카 : 주세죽 (52)ㆍ고명자 (46)ㆍ허정숙(89)
"비비안나 박"이 한국을 방문하면서, 어머니 "주세죽" 유품에서 찾아낸 사진 1장을 가져왔다. 가운데가 "주세죽(1901~1953)"이며, 왼쪽이 "허정숙(1902~1991)", 오른쪽이 "고명자(1904~1950)"다. 단발을 하고 "청계천"으로 보이는 곳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진이다. "조선공산당" 여성혁명가 3명의 가장 찬란한 한 때였다.
"우리 3인은 본래 동지로서 친구로서 단발하기로 작정하기는 이미 오랜 일이었습니다. 서로 깍기로 언약하고 곧 머리를 풀고 긴 것만 추려서 집었습니다. 자르고 나니 머리숱이 퍽 많아 보였습니다. 3인 중에서 제일 먼저 자른 사람은 나였습니다. 머리를 잘리우는 그 자신은 쾌활한 용기를 내어가지고 아무렇지도 않았으나, 손에 가위를 들고 남의 머리를 자르는 그때는 이제까지 잠재하였던 인습의 편영(片影)이 나타나며 몹시 참담하고 지혹(至酷)한 느낌을 아니 가질 수 없었습니다. 삽시간에 3인은 결발의 신여성으로부터 단발랑 송락머리가 되어버렸습니다. 다 깎은 뒤에 서로서로 변형된 동무의 얼굴을 쳐다보며 비장하고도 쾌활미가 있는 듯 웃어버렸습니다. 웬일인지 서로 아지 못한 위대한 이상과 욕망이나 이룬 듯이 무조건 기뻤습니다." < 허정숙ㆍ"나의 단발과 단발 전후"중에서ㆍ신여성ㆍ1925.10월호ㆍ1권 P.11 >
2. 주세죽 (朱世竹ㆍ1901~1953ㆍ52세ㆍ함남 함흥ㆍ한세죽ㆍ소련- 한베라ㆍ코레예바)
독립운동가 (사회주의 계열)ㆍ피아노 전공ㆍ언론인ㆍ박헌영 부인(1째)ㆍ김단야 부인(3째)ㆍ최강 미모의 조선혁명가ㆍ 잘 생긴 미모(빛나는 눈ㆍ단정한 코ㆍ넓고 반듯한 이마가 특징)에 통통한 체구를 가지고 있다. "박헌영"과 결혼하였으나, 죽은 줄 알고, "김단야(박헌영의 단짝)"와 재혼ㆍ"심훈(박헌영의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동창)"이 쓴 첫 장편소설 "동방의 애인(1930)"이 이 시절의 "박헌영ㆍ주세죽"을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음악선생이 되기 위해 "상해"로 유학을 떠난다. "박헌영"을 만나 결혼하고 "공산주의자"가 되지만, "모스크바"에서 "김단야"와 재혼하고, "크질오르다"로 강제 이주당하는 등의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결국 1953년에 생을 마친다.
1901년, "함남 함흥"의 농가에서 출생하였고,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경성"으로 유학하여 "중등학교"로 진학했다. 중등학교 시절에 "3ㆍ1운동"에 참가하여 구금되면서 학업을 중단한 뒤, 1921년 "상하이"로 유학을 떠나 "피아노" 공부를 하였다. 이후 "박헌영ㆍ김단야" 등을 만나, "상하이"를 무대로 항일과 조선공산당 조직 활동을 하였다. "박헌영"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청년회"에서 함께 활동했고, 1921년에 결혼했다. 1921.04월, "상하이 음악학교"에 입학하여 1922.05월 졸업한 후 귀국하였다. "사회주의" 여성 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ㆍ조선여성해방동맹" 등을 조직ㆍ결성하였으며, "조선공산당"에 입당ㆍ활동하다가 투옥당하기도 했다. "신간회ㆍ근우회"에도 가입하여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유학 중 "중국 상하이"에서 "박헌영ㆍ김단야" 등과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했다. 1928년, "소비에트 연방"으로 정치적 망명을 한 이후로 귀국하지 못하였다. 1928년, 일제의 체포를 피해 "소련"으로 피신하여 생활하다 "일제 밀정"이라는 누명을 쓰고, 1938년부터 5년간 유형당하였다. "소련"의 불허로 광복 후에도 귀국하지 못하였고, 사후 "러시아"에서 복권되었다.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아 2007년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① 박헌영과 초혼 (1921~1933)ㆍ김단야와 재혼 (1933~1937)
그녀는 "박헌영"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역시 아내 "고명자"와 소식이 끊긴 독립운동가 "김단야"와 1933년 재혼했다. 그러나 이미 1929년경부터 "주세죽ㆍ김단야"가 불륜 관계였으며, 이를 안 "박헌영이 주세죽과 결별하였다"는 소문도 퍼졌다. 또 "박헌영"과 헤어진 후 주세죽은 남편이 죽은 줄로 알았으나 "김단야"가 그의 생존 사실을 알면서도 "주세죽"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설도 있었다.
1937년, "주세죽"이 "김단야"의 아이를 임신하였으나, "김단야"는 "조선공산당원들"의 밀고로, "화요파" 인물들과 함께 "일본 간첩 혐의"로 "소련"에서 체포되어 곧바로 처형되었다. 그녀도 체포되어 1938년 "카자흐스탄"으로 유형을 가서 5년간 복역하였다. 유형 생활 중, "김단야"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김비탈리는 1~2살 무렵 사망했다.
1939년, "박헌영"은 출소 직후 국내에서 "주세죽"의 재혼 소식을 처음으로 접하였다. "박헌영"이 살아있음을 확인한 국외의 공산주의 운동가들까지도 "주세죽ㆍ김단야"를 비난하였지만, "박헌영"은 묻어두고 함구하라고 하였다. "카자흐스탄 지역 협동농장"에서 계속 일하던 중에 광복을 맞았고, "스탈린"에게 귀국을 청원하였으나 거절당했다. 전 남편 "박헌영"은 "북한 부수상"이 되었고, 1946.07월 "소련"을 방문했을 때, "딸 박 비비안나"를 만났으나 "주세죽"과는 만나지 않았으며, 1949.08월 비서였던 "윤 레나"와 재혼했다.
※ 김단야 (金丹冶ㆍ김태연 (金泰淵)ㆍ1901~ 1938ㆍ향년 37세)
독립운동가 (사회주의 계열)ㆍ언론인ㆍ고려공산당 당무위원ㆍ남로당 (박헌영 동지ㆍ주세죽ㆍ고명자 남편)ㆍ1920년대, "삼인당(三人黨- 박헌영ㆍ임원근)"이라고 불리며, "공산주의 활동"ㆍ1925.10.15일, "조선일보"는 "총독부"의 압력에 의해 17명의 기자를 해직시켰는데, "김단야ㆍ 박헌영ㆍ임원근"도 해직당했다. 큰 키에 가는 몸매ㆍ성격도 사교성이 풍부해 외향적인 성격이었다고 한다. "조선일보" 기자 재직하면서, 글 쓰는 솜씨는 뛰어난데다, 밝은 성격에 재치가 넘쳐 동료 기자들에게 인기가 좋았으나, 퇴근 후 동료들과 어울려 다니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② "박헌영"과 만남
"박헌영"은 1925.04.18일, "조선공산당"을 창당하여 이끌어가던 중, 1925.11월 "신의주"에서 술김에 친일 변호사 "박유정(朴有楨)"과 일행인 경관을 폭행한 사건으로 조사를 받았다. 이때 가택수색으로 조직이 폭로되어 체포되었으나, 광인(狂人) 행세를 하여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미친 사람 행세가 어찌나 천연스러웠던지 수사관들도 속았다.
이때 운명의 2번째 여인인 "주세죽(朱世竹)"을 만났다. 그보다 2살 연상인 그녀는 "함흥 출신"으로서, "관북" 제일의 명문인 "함흥 영생고보"를 마치고, "상하이 안정씨(晏鼎氏)여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 이들은 "허정숙"의 소개로 알게 된 사이였는데, 1925.02.19일자 "동아일보" 1면 하단에 광고로 게재된 "화요회 주최의 전조선민중지도자대회 준비회의" 명단에 "박헌영ㆍ주세죽ㆍ허정숙"이 함께 "경성" 대표로 등재되어 있고, 1926년 제2차 "공산당 체포" 기록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에 그들은 이미 이념의 동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첫 아내 "주세죽(朱世竹)"은 "3ㆍ1운동" 이후 "마르크스주의"를 내면화한 첫 세대 사회주의자였다. "주세죽"은 "3ㆍ1운동" 당시 "함흥"에서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1개월간 "함흥경찰서"에 수감된 바 있다. 이후 "서울"에서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등을 주도하며 여성운동을 이끄는 한편, "고려공산청년동맹" 중앙 후보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사회주의 운동의 핵심에 있었다. 일제는 그녀를 "여성 사회주의자 가운데 가장 맹렬한 자"로 평가하며 요시찰인물(要視察人物)로 감시했다.
1924.05월 서울에서 사회주의 여성단체 "여성동우회"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고, 이듬해 1월 "경성 여자청년동맹" 결성을 주도했으며, 4월에는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5.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으로 "박헌영"이 일경에 붙잡힌 뒤, 그녀 또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박헌영ㆍ주세죽"은 결국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딸(비비안나)도 낳았다. 결혼 연도는 1921년이라고 했다가 1924년이라고 했다가 법정에서 한 말이 다르다. 호적등본에는 1926년에 신고한 것으로 되어 있다. 1926.06월, "주세죽"은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던 일경에 다시 붙잡혔으나 2개월 만에 풀려났다. 1927.05월, "근우회(槿友會) 임시집행부"에서 활동하던 그녀는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망명ㆍ도피ㆍ투옥 생활을 거치면서 그들은 가정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어느 날 오랜만에 박헌영이 아내를 만났을 때 그녀의 배가 불러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 아이가 아니었다. "박헌영"은 "김단야(金丹冶)"를 의심했고, "주세죽"도 그가 아기의 아버지라고 시인했다. 이것을 불륜이니 치정이니 따질 일은 아니다. 궁핍한 혁명가의 삶을 살면서 비좁고 불편한 주거 환경 속에서 벌어진 "접촉 사고"였을 뿐이다. 어쨌든 둘은 이 일로 헤어졌다. "주세죽"은 "소련"으로 건너가 "한베라"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거기서 그는 1934년 "김단야"와 재혼하여 아들을 낳았다. "소련"에서도 "주세죽"은 "사회적 위험분자"로 낙인찍혀 박해를 받았다.
그녀는 1938년 "일본의 밀정"이라는 혐의로 체포되어, "모스크바"로 주거가 제한되었다가 "카자흐스탄"으로 추방되어 1946년 형기를 마친 뒤에도 그곳에서 살다가 1950년대 중엽에 죽었다. 한국의 좌파정권 시절인 2007년에 "주세죽"은 "독립유공자 애족장(7등급 가운데 5등급)"을 받았다. 좌익이라고 해서 서훈을 받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공적으로 볼 때 과연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서 우익들은 다른 의견을 피력했다. 그녀가 "박헌영의 아내였다"는 후광(?)이 작용했을 것이다.
3. 고명자 (高明子ㆍ1904~ 1950(?)ㆍ46세(?)ㆍ충남 부여ㆍ김정조ㆍ시베리스카야)
김단야 부인ㆍ"강경"의 유복한 집안의 외동딸ㆍ"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ㆍ조선부녀총동맹 총무부위원ㆍ근로인민당 중앙위원으로 활동ㆍ동양지광(東洋之光) 기자ㆍ"이화학당"을 다니다가 "김단야"와 사귀고,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났다. "경성"에 돌아와,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전향하여, "친일행로"를 걸었다. 해방 뒤에도 "좌익운동"을 하였으며, 1950.02월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한국전쟁" 중 실종
1925년, "경성여자청년동맹"에 가입해 중앙집행위원으로 활약하였으며, "조선여성동우회ㆍ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였다. "고려공산청년회"가 유망한 청년 21명을 선발하여 "소련"으로 유학시킬 때, 여자로서 "김명시ㆍ김조이"와 함께 선발되어, 11월에 "모스크바"로 유학,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였다. 1929.05월, "공산대학"을 졸업하였고, 10월경에 "일제"의 탄압으로 무너진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블라디보스톡ㆍ함흥"을 경유, "서울"로 잠입했다.
1929.09월부터 "경성"에서 "조선박람회"가 개최중이어서 삼엄한 경계가 펼쳐진 가운데, "청진"을 통해 들어온 "김단야"와 "마포구 도화동 85번지"에 방을 빌려 동거하였다. 이곳 "도화동 집"에서 "조선공산당 조직위원"을 선정하고 여러 차례 회의를 가졌다. "일경"의 수사망이 좁혀오는 가운데 "김단야"는 피신했으나, "고명자"는 추적을 피하지 못하고, 1930.04월 "강경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23명은 예심을 거쳐 1931.10.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최고 10년에서 미결구류 240일까지를 언도받았다. "일제"는 "고명자"에게 징역 2년ㆍ집행유예 4년 형을 언도했으나, 그녀에게 회유책을 펼쳐 곧바로 출감할 수 있었다. 그 이후 "김명시ㆍ김형선ㆍ박헌영" 등이 체포되며 공산당 재건 조직이 와해되었다.
1939년에 창간된 친일잡지 "동양지광(東洋之光)"의 기자로 활동하며 친일 논조의 글을 발표하였고, "국민총동원 운동"에 참여하는 등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협력하였다. 창씨명은 "오하라 아키코(大原明子)"이다. 해방 후, 다시 좌익 여성운동에 뛰어들어 1945.11월에 개최된 "전국 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와 12월의 "조선부녀총동맹 결성대회"에 서울 대표로 참가하였다. 1945.12월에 "조선부녀총동맹 총무부위원ㆍ서울지부 부위원장"에 선출되었으며, "독립동맹환영준비위원회"에도 참석하였다.
1946.02월에는 "좌익계열"의 통일전선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서울지부 선전부원"이 되었고, 10월에는 "사회노동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1947.05월, "여운형"과 함께 "근로인민당"을 창당하고,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8.04월,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 정당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에 "근로인민당 대표"로 참석하고 회의가 끝난 후 남행하였다.
4. 허정숙 (許貞淑ㆍ1902~1991ㆍ89세ㆍ한성 관철동ㆍ정은주ㆍ필명- 수가이(秀嘉伊))
허헌의 장녀ㆍ독립운동가ㆍ여성운동가ㆍ사회주의자ㆍ북조선 정치인ㆍ법관ㆍ무장항일투쟁 전력에서 알 수 있듯, 투철한 공산주의자ㆍ독립운동가ㆍ팔로군 육군 대좌ㆍ일제 강점기 당시, 언론 활동ㆍ사회주의 운동ㆍ신간회/근우회의 조직 등에 참여ㆍ"자유연애주의자"로도 유명ㆍ페미니스트ㆍ조선의 콜론타이(러시아의 혁명가ㆍ자신의 사회적 특권을 버리고, 여성노동자들에게 혁명을 선동)
일제시기, 일본 유학 중 사회주의를 공부하고, 조선에서 "박헌영-주세죽 부부ㆍ조봉암-김조이(고명자와 소련행)부부"와 함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 활동ㆍ해방 후, 이북 "소련 군정 지역"에서 활동하였고, "연안파" 간부 활동을 하다가 "김일성 계열"로 넘어가 북한 고위정치인이 되었음ㆍ"고베ㆍ미국ㆍ대만" 유학을 거쳐, "상해ㆍ경성ㆍ모스크바ㆍ뉴욕ㆍ타이베이ㆍ남경ㆍ연안ㆍ태항산"을 거쳐 "평양"에서 최고 권력을 누리다가 사망한다.
※ 허헌 (許憲ㆍ1885~1951ㆍ65세)
대표적 항일변호사(1호 변호사)ㆍ독립운동가ㆍ변호사 출신의 북조선 정치인ㆍ통일운동가ㆍ김일성대학 총장ㆍ일제시기, 독립 운동가들을 변호하던 "3대 민족인권 변호사"(이인ㆍ김병로)
① 남성 편력 : 임원근 (1혼)ㆍ송봉우 (2혼)ㆍ최창익 (3혼)ㆍ신일룡 (연인) >
그녀는 "남편ㆍ파트너"가 여러 번 바뀌었다. "조선공산당" 간부인 "임원근 (1혼ㆍ조선일보 기자ㆍ1째 아이)ㆍ송봉우 (2혼ㆍ북풍회ㆍ3째 아이)ㆍ최창익 (3혼ㆍ조선독립동맹 부주석ㆍ부수상ㆍ연안파)"의 부인이고, "신일룡 (2째 아이)"의 연인이었다. (삼인당(三人黨): 1920년대, "조선일보" 기자인 "임원근ㆍ박헌영ㆍ김단야"가 공산주의 활동)
"사랑 없이도 성관계를 가질 수 있고, 사랑 없이도 결혼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 화제가 되었다. 1924.01월, "주세죽"과 함께 "평양형무소"에서 출소하는 "박헌영ㆍ임원근"을 마중나갔다. 1922.06월부터 "임원근"은 공산주의 전파를 위해, "박헌영"과 함께 국내로 잠입하다 검거돼 "평양형무소"에서 1년 반을 복역하였다. "허정숙ㆍ주세죽"은 흰옷을 지어 함께 이들을 마중했고, "허정숙ㆍ임원근"은 곧 결혼했다. 아버지 "허헌"이나 집안의 의향을 묻지 않고 자기 스스로 결혼을 결정했다. 이 일로 집안 어른들의 비판이 있었지만, 아버지 "허헌"과 어머니 "정보영"이 막아주었다.
"동아일보" 재직 당시, "허정숙ㆍ임원근"을 "원앙 기자"라 부르며 부러워하였지만,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남편 임원근"이 옥살이를 하자, "허정숙"은 "임원근"의 면회를 다니면서도 여러 남자들과 어울리던 중, "북풍회의 송봉우"와 연애하여 동거하였다. 그는 당시 흔치 않은 "자유 연애"와, 같은 사회주의자에 대한 동지애에 뿌리를 둔 "붉은 연애"로 화제가 되었다. "송봉우"와 사랑에 빠져 동거한 이후, 붙여진 꼬리표는 "콜론타이식 붉은 사랑의 구현"이라는 표현이었다.
"임원근"이 감옥에 있는 동안, "동지 송봉우"와 사랑에 빠져 동거한 뒤, 주위로부터 "정조관념이 희박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개의치 않고 다른 남자들과도 만나며, 자유롭게 연애하고, 동거하였다. 30대가 되기 전에 "남편 임원근"을 비롯하여, 3명의 남자 연인을 둔 그녀에 대한 주변의 시선은 따가웠다. 시중에서는 "꼬리 잘린 여우가 자신이 꼬리가 잘렸으니, 꼬리 잘린 것을 자랑하는 것"이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1931.07월, "삼천리지(1931.07월호)"에 "붉은 연애"의 주인공들을 소개할 때, "허정숙"에 대해서 "아직 나이 30살 이전에 애인을 3번" 가지게 된 과정만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송봉우"와의 동거는 그녀가 미국 여행을 갔다 온 이후에도, 다시 "송봉우"와 동거하였다. 1932.03월, 출감한 뒤에도 "송봉우"와 동거하였다. 그러나 후일 "송봉우"가 "공산당 사건"으로 체포된 이후 전향하였다. 여러 번 "송봉우"를 설득하였으나 결국 전향하자, "송봉우"에게 결별을 선언, 관계를 끊어버렸다.
이후 "신일룡"을 만나 사귀었으며, 그와의 사이에서 3째 아들 "신영한"을 두었다. "정조"를 문제 삼는 견해에 대해, 정조는 무엇이며, 누가 만들었느냐, 남자들은 여러 여자를 첩으로 두고, 술집 여자와도 놀아나면서 왜 여자에게만 정조를 강요하느냐며, 반박하였다. 그녀는 강연ㆍ칼럼을 통해, "정조 무용론(정조는 의미가 없다)"을 주장했다. 자신이 오래전부터 주장하던 "자유 연애론ㆍ연애 유희론"을 직접 실천하였다.
② 활동
"일본ㆍ중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다가 귀국, "여성주의ㆍ사회주의"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24년 "조선여성동우회ㆍ조선여성해방동맹" 등 여성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조선공산당" 조직에도 참여하여 1925.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의 관련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가 풀려났고, "신간회ㆍ근우회" 등의 조직에도 참여하였다. 또한 "동아일보 기자ㆍ논설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29년, "광주학생 항일 운동" 때 여학생들 선동을 이유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1936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 "민족혁명당ㆍ조선독립동맹" 등에서 활동하였다.
광복 후, "서울"로 귀국했다가 "미 군정"의 탄압을 피해 38도선 이북으로 월북, 남북을 오가며 활동하던 중, 1948.04월 "남북협상"에 북측의 여성계 대표로 참여한 뒤, "북조선"에 정착했다. 그해 9월 "최고인민회의 1기 대의원"이 되고, 38선 이북의 "북조선 단독 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내각 문화선전상ㆍ보건성 부상", 1949년 "보건상", 1959년 "사법상ㆍ최고재판소 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연안파 숙청" 때, 전 남편인 "최창익 (부수상ㆍ연안파)"을 비판하여 숙청을 면하였다. "연안파 사건" 이전부터 "최창익ㆍ윤공흠" 등과 선을 긋고 있었지만, "연안파"로 분류되었다. 남편 "최창익"은 "연안파 숙청" 때 몰락했으나, 그녀는 "최창익"과의 관계를 끊고 "김일성"을 지지하면서 계속 권력의 중심에 머물렀다.
"연안파ㆍ종파 사건" 등으로 일시적으로 "반당 종파분자"로 몰려, 정계에서 물러나 협동농장에서 갔다가 다시 복귀, 1965.09월 "조선민주여성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 되고,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서기국장"이 되었다. 9월 "최고재판소 소장"에 복직하였다. 1972년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이 되고 그해 "최고인민회의 제5기 대의원"에 선출된 뒤, 제6~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연임ㆍ재선되었다.
'한국 (근 • 현대사) > 공산주의 (남로당 • 빨치산 • 연안파 • 소련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수임 (39세) : 이강국 애인 (남로당)ㆍ이대 출신 (모윤숙ㆍ노천명) (0) | 2022.10.29 |
---|---|
마타하리 3인 : 현 엘리스(53)ㆍ김수임(39)ㆍ김소산(36) (0) | 2022.10.29 |
공산당 ⑨- 3 : 남부군ㆍ제주 43사건ㆍ여수/순천사건ㆍ대구사건 (0) | 2022.10.28 |
공산당 ⑨- 2 : 남부군ㆍ남조선혁명전쟁 (1948.04~1950.03) (0) | 2022.10.28 |
공산당 ⑨- 1 : 남부군ㆍ이현상 부대 (1950.12~1953.09) (1) | 2022.10.2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