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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공산주의 (남로당 • 빨치산 • 연안파 • 소련파)

공산당 ⑨- 2 : 남부군ㆍ남조선혁명전쟁 (1948.04~1950.03)

by 당대 제일 2022.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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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부터 이미 "야산대 (조선인민유격대의 전신)"이 탄생하여, 한국전쟁 발발 전까지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는 점은 한국전쟁의 내전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1948~ 1953년까지(5년)는 혁명ㆍ전쟁의 시기였다.

 

1. 남부군빨치산 (파르티잔 부대)

남조선 인민유격대ㆍ조선 인민유격대ㆍ공비ㆍ공산 게릴라

"미군정기"에 "대구 폭동(1946.10)"으로 유혈 사태가 일어나면서, "남조선로동당(남로당)의 폭력노선으로, 불법화되는 과정에서 산으로 들어간 좌파 인사들이 "조선인민유격대"의 효시이다. 이들 가운데 일부가 "2·7사건(1948.02)ㆍ제주4·3사건(1947.04~ 54.09)"이후, "전남 곡성군ㆍ구례군" 일대에서 "야산대"로 불리던 "무장 유격대"로 전환했고, "야산대" 일부는 "여수·순천 사건(1948.10)" 이후, 군 정규 부대에서 전환한 "유격대"에 흡수되어, 본격적인 "파르티잔" 활동이 시작되었다.

1946년부터 이미 "야산대(조선인민유격대의 전신)"이 탄생하여, 한국전쟁 발발 전까지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는 점은 한국전쟁의 내전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조선인민유격대"는 "제주4·3사건ㆍ여수·순천사건"을 "한국전쟁"과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으며, "토벌대"와의 전투 과정은 일종의 "작은 전쟁"이 되어, 한국 전쟁의 전초전을 형성했다.

2. 남조선혁명전쟁 : 1948.04월 초 ~ 1950.03월 말

이후, 38도선에서는 "남조선혁명전쟁"보다 더 격렬한 교전이 벌어졌고, 남북 교전은 1950.06.25일 마침내 전쟁으로 이어졌다.  "군경토벌대"의 포위망을 뚫고, 깊은 산으로 들어간 유격대원들은 "6·25전쟁"이 일어나자, "유격대"를 다시 조직하고 싸웠다. 1948~ 1953년까지(5년)는 혁명ㆍ전쟁의 시기였다.

① "남조선혁명전쟁" 종결 : "남조선 인민유격대"는 무엇을 위해 피를 흘렸던가?

"남조선 인민유격대"가 전투를 벌이는 사이, "38도선"에서는 "국군ㆍ조선 인민군" 사이의 교전이 날로 격화되고 있었다. "38도선"에서 격화되는 교전은 전쟁이 불가피하게 되었다는 예감을 불러일으켰다. "6ㆍ25전쟁"을 3개월 앞둔 1950.03.27.일 "김삼룡(남조선로동당 총책임자)ㆍ이주하(남조선인민유격대 총책임자)"가 서울에서 체포되었다.  "이승만 친미 정권"은 1950년 6ㆍ25전쟁이 일어나기 직전ㆍ직후, 모든 형무소들에 분산 수감했던 이른바 "좌익수"들을 대량 학살했다. 대량학살 희생자가 얼마나 많은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1948.04.03일부터 2년 동안 혈전을 거듭해온 "남조선 혁명전쟁"은 그렇게 종결되었다. "조선일보(1949.01.19) 보도에 따르면, "반란(남조선 혁명전쟁)"에서 발생한 "비전투원의 인명손실ㆍ물적 피해"는 1948.12.20일을 기준으로 다음과 같다고 한다.  • 사망자(12,959명)ㆍ전소 가옥(40,221채)ㆍ중상자(9,415명)ㆍ전재민(523,683명) : 전남(8,280명ㆍ9,909채)ㆍ제주도(3,340명ㆍ26,790채)ㆍ경남(708명ㆍ1,993채)ㆍ경북(287명ㆍ899채)ㆍ경기도(187명ㆍ384채)ㆍ충북(66명ㆍ25채)ㆍ강원도(53명ㆍ116채)ㆍ전북(37명ㆍ105채)

② "남조선인민유격대"가 "남조선혁명전쟁"에서 달성하려고 했던 목적

혁명전쟁의 목적은 "민중의 정치적 요구"와 일치된 것이었다.  그러했기에 "유격대"는 "남조선민중" 속에서 혁명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다.  당시 "남조선민중"의 정치적 요구는 1946.02.19일 서울에서 결성된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의 강령(민전의 5대 강령)에 밝혀져 있는데, 이 5대 강령은 "유격대"가 혁명전쟁에서 피 흘려 쟁취하려고 했던 목적이었다.

• 1강령 : 남북조선의 통일적 민주주의임시정부를 수립할 것 → 통일된 인민공화국을 건설 목적     • 2강령 : 무상몰수와 무상분여의 원칙에 따라 토지개혁을 실시할 것 → 인민민주주의혁명 수행      3강령 : 친일민족반역자와 친 파쇼반동거두를 완전히 배제할 것 인민민주주의혁명 수행      4강령 : 미군정은 정권을 인민위원회에 즉시 이양할 것 통일된 인민공화국을 건설 목적      5강령 : 미군정이 고문기관 및 입법기관을 창설하는 것을 반대할 것미국의 남조선점령 반대

③ 이름 없는 전쟁 : 남조선혁명전쟁

"이승만 친미정권"의 군사재판에 끌려간 "피고인 유호진"은 이름 없는 시인이며, "지리산인민유격대 문화공작 대원"이었다. 아마도 청춘의 피가 심장에 끓는 청년시인이었을 것이다.  "청년시인 유호진"은 "지리산인민유격대"에 자진 입대하여, 문화공작 임무를 수행하던 중, 토벌대에게 붙잡혀 전쟁포로가 되었다. "서울신문(1949.10.01)"에 따르면, "중앙고등특설군법회의 재판관"은 "지리산인민유격대 문화공작대원 유호진ㆍ전우 8명"에게 "총살형"을 언도했다고 한다. "포로감옥"에서 "다시 만납시다."라는 제목의 마지막 시를 썼던 "유호진"은 1949.10월 중순 어느 날 소슬바람 부는 서울 근교 야산 자락에서 "총살형"으로 최후를 마쳤다.

다음 문답은 1949.09.29일, "중앙고등특설군법회"의 공판에서 "검찰관 김근배ㆍ피고인 유호진"이 주고받은 심문ㆍ진술이다. 이 문답은 "동아일보(1949.09.30)"에 실렸다. 

• 검찰관 : 지리산의 인상은?    • 피고인 : 산이 험했습니다.

• 검찰관 : (지리산에서) 전투를 하는 것을 봤나?     피고인 : 못 봤습니다마는 소문으로 들었습니다.

• 검찰관 : 그러한 곳을 떠날 생각은 없었나?     피고인 : 그러한 생각은 한 일이 없었습니다.

• 검찰관 : 대한민국이 수립된 데 대하여 어떤 감상을 가졌나?     피고인 : 38선이 없는 완전 통일된 정부의 수립을 바랬습니다.       • 검찰관 : 통일된 나라는 어떠한 국가인가?     피고인 : 인민공화국입니다. 

"6·25전쟁"이 1950.06.25.일(일요일), 비가 내리는 새벽에 갑자기 38도선에서 일어난 것으로 믿고 있지만, "6·25전쟁"은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남조선혁명전쟁"과 연동되어 일어났다. 다시 말해서, "남조선혁명전쟁"과 "6·25전쟁"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을 만큼 하나로 연결된 전쟁이다.

3. "남조선혁명전쟁"이 일어난 원인

1948.05.10, 미국이 강행한 "남조선단독선거"를 반대하는 가두시위투쟁에 참가한 군중이 들고 있는 펼침막에는 "국토를 양단하며, 민족을 분열시키는 남조선단독선거를 절대배격하자!조선인민대표의 참가 없이 결정된 조선에 관한 유엔결정을 절대반대하자!"라는 투쟁구호가 적혀 있었다. 미국은 남북조선 전체 민중이 반대하는 "남조선단독선거"를 강행하고, "이승만 친미 정권"을 세워놓았다미국은 "남조선단독선거"를 감행하여, 우리 민족을 좌우로, 남북으로 분열시켰고, 통일된 "인민공화국" 수립하고 "인민민주주의혁명"을 수행하려는 민중의 정치적 요구를 폭력으로 짓눌렀다이것이야말로 미국이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가장 흉악한 "제국주의적 만행"이다.

1948, 미국의 "단선단정책동"을 배격하기 위해 격렬한 "민중항쟁"이 일어났다"경찰대우익테러단체들"을 앞세운 "미 점령군의 유혈탄압"에 대항하여, 민중항쟁은 "무장투쟁"으로 전환되었다. 바로 이것이 "남조선혁명전쟁"이 일어난 근본원인이었다1948.01.04, "미 점령군" 산하 "경무부 부장 조병옥""부산"에 있는 "7관구 경찰청"400여 명을 검거한 사건과 관련된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발표에 따르면, "남조선로동당"1947.02월부터 각 도별로 "군사위원회"를 조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그 중, 1947.03"경남"에서 조직된 "군사위원회"의 사례는 다음과 같다 군사위원회 사령부 아래, 정치부병사부훈련부정보부연락부자금조달부를 두었다     부산동래진주통영남해와 각 군()에 연대를 두었고, 연대에 특공대정찰대전령대정치공작대후보대무기제조반조사반을 두었다      1947.08월 말까지, 모집한 연대병력(830)공작대원(763)참가군중(36,000)이다      시가전산악전공방전을 훈련했다.

스스로를 인민해방군으로 부르면서, 다음과 같은 군훈(軍訓)을 정했다.      유격전을 전개한다      본부명령에 절대복종한다      비밀을 엄수한다      풍찬로숙에 단련한다      문약과 사치는 아편과 같다      전투력의 원천은 공적과 겸손이다      영웅주의와 자유주의는 적이다.

4. 1948.02.07 : 27 구국투쟁 - 사망(28)체포(8,479)

1948.02.07, "미국의 단선단정음모를 파탄시키고, 정권을 인민위원회에 넘기라"고 요구하는 민중항쟁이 폭발했다. "27 구국투쟁"으로 역사에 기록된 대규모 민중항쟁이다"27 구국투쟁" "남조선로동당"이 각 도별로 조직한 "군사위원회""인민유격대"로 개편된 결정적인 계기로 되었다"27 구국투쟁"이 일어난 날,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산하 노동자들은 총파업투쟁에 돌입했고, 각계각층 민중이 가두시위투쟁에 나섰다.

"미 점령군" 당국으로부터, "유혈진압명령"을 받은 "경찰대"는 시위 군중에게 발포하여 28명을 살해했고, 8,479명을 체포했다. "유혈진압"으로 격화된 민중항쟁은 폭동테러방화를 불러왔다항쟁참가자들은 "지방경찰서 지서"들을 습격하여, "총기(26)실탄(481)"을 빼앗았다"경찰대"에게서 빼앗은 총기실탄은 민중항쟁을 "무장투쟁"으로 전환시킨 촉진제가로 되었다.

"남조선로동당 서울시당위원회" 세포조직 성원 50여 명은 서울에 있는 "경무부 무기고"를 습격하여 총기를 빼앗으려는 대담한 "습격전"을 준비하다가 체포되었다"미 점령군" 산하 "경무부 부장 조병옥"이 발표한 담화를 인용한 "동아일보(1948.02.26)" 보도에 따르면, "27 구국투쟁"의 결말은 다음과 같다.

항쟁참가자 : 사망(28)부상(35)    /    경찰관 : 사망( 5)부상(23)     /    관공서 : 사망( 1)부상(12)     /    우익 인사 : 사망( 5)부상(63)    /    파업 : 12건    /    방: 204건    /    동맹휴학 : 22

5. 1948.05.09~10 : 민중 항쟁 - 사망(27)

"선행대(先行隊)"가 "남조선인민유격대"로 개편

"27 구국투쟁"으로 폭발한 민중항쟁은 194831절을 계기로 다시 폭발하여, 3~ 4월 내내 계속되었다"미 점령군" 당국이 "남조선단독선거"를 강행한 05.10일을 전후하여, 대규모 민중항쟁이 또다시 폭발했다"서울신문(1948.05.18) 보도에 따르면, "남조선단독선거"가 강행된 05.09~ 10일에 일어난 민중항쟁의 결말은 다음과 같다.

항쟁참가자 : 사망( 27)ㆍ부상( 68)   /   경찰관 : 사망( 51)ㆍ부상(128)    /   경찰관 가족: 사망( 7)ㆍ부상( 16)     /   관공서 : 사망( 11)ㆍ부상( 47)   /   선거후보 : 사망( 2)ㆍ부상( 4)    /   선거공무원 : 사망( 15)ㆍ부상( 61)    /   우익 인사 : 사망(107)ㆍ부상(387)    /   테러 : 612

이처럼 대규모 민중항쟁이 계속 폭발하면서. 격화되던 1948년 상반기 "남조선"에는 "혁명적 상황"조성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남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는 각 도별로 분산된 "군사위원회"를 통합시킬 필요를 느꼈다"미 점령군" 산하 "수도경찰청 청장 장택상"1948.05.27일에 발표한 내용을 인용한 "경향신문(1948.05.27)" 보도에 따르면, "남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는 각 지방당 조직들에게 1948.04.01일부터 "선행대(先行隊)"를 조직하라고 지시하고, 다음과 같은 방침을 시달했다고 한다.

남조선로동당 각급 당 조직들에서 엄선한 당원들로 "선행대"를 조직한다    행대 최고기관은 남조선로동당 최고기관의 지령을 받는다     선행대는 전국적 통일체로서 유격대의 기초조직이다     선행대는 명령계통이 엄격한 군사조직체다     선행대는 각 지역에 "백골대촉루대인민청년군" 등 특수조직체를 둔다.

"남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는 각 지역별로 분산된 "군사위원회"를 통합하여 "선행대"를 조직했고, "선행대"를 개편하여 "남조선인민유격대"를 조직했다"호남신문(1949.11.13.)" 보도기사에는 "한국군 제5사단 정보처"가 수집한 정보가 실렸는데, 그 정보에 따르면, "남조선인민유격대"는 다음과 같이 편제되었다고 한다.

"남조선인민유격대" 사령부인 "총사(總社)" 예하에 중대급 부대인 "철사(鐵社)금사(金社) 암사(岩社)"를 두었고, "영사(營社)"라는 별동대도 두었다. 1개 사는 유격대원 20~ 60명으로 편성되었다     "철사" 예하 소대급 부대인 12사를 두었고, "금사" 예하 소대급 부대인 34사를 두었고, "암사" 예하 소대급 부대인 56사를 두었다     "광부대북부대남부대"는 유격대원 12~ 14명으로 편성되었다.

"남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가 각지에 분산된 "군사위원회"들을 통합, 개편하여 "남조선인민유격대"조직하고 있었던 1948.04월 남조선민중은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미 점령군" 당국은 "경찰대우익테러단체들"을 앞세워 단독선거반대투쟁을 잔인하게 탄압했다단독선거반대투쟁에 참가한 민중은 "경찰대우익테러단체들"의 폭압만행에 맞서 자위적 무장을 택했다그런 급진적인 상황에서 "남조선로동당 제주도당위원회"1948.04.03일 단독선거를 파탄시키기 위한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현대사에 "제주43항쟁"이라고 기록된 무장투쟁이다.

"제주도"에서 무장투쟁이 일어나자, "남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선행대""남조선인민유격대" 확대개편하고, 혁명전쟁을 개시하기 위한 비상대기태세에 돌입했다이런 급박한 사정은 1948.07.03"미국 합동통신(United Press) 서울특파원 제임스 로우퍼""미 점령군" 당국자로부터 입수한 기밀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그 기밀문서는 당시 "미 점령군" 당국 "경무부 산하 경찰대""전북 완주"에서 압수하여 "미 점령군 당국"에 보고한 "남조선로동당 완주군당위원회 기밀문서". 기밀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소련군이 북조선에서 철퇴하는 1948.07월 초에 전투가 개시될 것인데, 조선인민군이 남조선에 내려와 남조선로동당을 지원할 것     통일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전투를 계속할 것이며, 남조선단독정부를 파괴할 것     1948.06.27일 또는 28일까지 전투지령을 수리할 것     전투비행대 조직은 계획하는 중이며, 이에 관해 1948.06.25일까지 소속본부에 보고할 것     20~25세 청년동맹 맹원 15명을 1948.06.30일까지 남조선국방경비대에 잠입시킬 것     후원자들로부터 3~5만원의 기부금을 모금할 것     반동분자를 조사하고, 그들의 성명과 주소를 적은 일람표를 작성할 것

"남조선로동당 완주군당위원회"가 기밀문서에 1948.06.27일 또는 28일까지 전투지령을 수리할 것"이라고 명기한 것은, 1948.02.07"27구국투쟁"을 계기로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민중항쟁의 폭풍 속에서 "남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각 지역별로 "남조선인민유격대"가 조직되어 "남조선혁명전쟁"에 돌입할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1948년에 연속적으로, 격렬하게 전개된 민중항쟁의 폭풍 속에서 "남조선인민유격대가 조직되었다"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기가 없으면, 혁명전쟁을 할 수 없다그래서 "남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남조선인민유격대"를 무장시키기 위한 "무기제조 사업"을 추진했다이런 사정은 "경무부 부장 조병옥"1948.07.13일 취재기자들에게 전한 발표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발표내용은 "동아일보(1948.07.14.)" 기사에 실렸다. 보도기사에 따르면, "경찰대""전남 강진군 월출산 구정봉"에 있는 "인민유격대 무기 공장"을 습격하여 다음과 같은 전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인민유격대원 : 전사(4)포로(25) 99식 장총탄피 및 엽총탄피 압수 : 1가마     총기 압수 : 1338식 장총 제조기구 : 10여 점     수류탄 압수 : 2박격포 제조기계 : 1     폭약 압수 : 10일본도 압수 : 5자루     화약 압수 : 1피복류 압수 : 35지령문서/ 취사용구 압수 : 다량     실탄 압수 : 200뇌관 압수 : 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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