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 (근 • 현대사)/공산주의 (남로당 • 빨치산 • 연안파 • 소련파)

공산당 ⑨- 1 : 남부군ㆍ이현상 부대 (1950.12~1953.09)

by 당대 제일 2022. 10. 28.
반응형

 

1950.12~1953.09까지 존재한, "남부군 (南部軍ㆍ이현상 부대ㆍ조선인민유격대 독립 제4지대ㆍ남부군단ㆍ나팔부대)"은 남한 최초의 조직적인 좌익 "빨치산 부대"였고, 특히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인 총수 "이현상"의 직속부대였다.  "빨치산(파르티잔 부대)ㆍ남조선 인민유격대ㆍ조선 인민유격대ㆍ공비ㆍ공산 게릴라"으로도 불린다.

 

1. 남부군 (南部軍이현상 부대조선인민유격대 독립 제4지대남부군단나팔부대)

남한 최초의 조직적인 좌익 "빨치산 부대"였고, 특히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인 총수 "이현상"의 직속부대 (North Korean Partisan in South Korea)

625전쟁 전후, "지리산"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한 "이현상"이 지휘하던 "좌익 빨치산 부대"로, 한국 전쟁을 전후하여, 한국에서 유격전을 수행한 북조선의 "파르티잔 부대"이다.   625전쟁 기간, "이현상"이 이끄는 "남부군단""지리산덕유산" 일대에서 "국군UN"의 후방을 교란하여, 전체 전선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국군과 국민들의 사기를 크게 저하시켰다이들은 결과적으로, 국군이 "빨치산 토벌작전"을 위해, "군단급 규모"의 부대를 전선에서 이동시키게 하여, 국군의 전투력을 분산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빨치산 : "파르티잔 (Partisan러시아어)"에서 나온 말로, 적의 배후에서 비정규전(게릴라전술) 펼치며, 통신교통시설을 파괴하거나, 무기물자를 탈취하고, 인명을 살상하는 "별동대 비정규군" 625전쟁 전후에 각지에서 활동했던 "공산 게릴라"를 말한다"파르티잔 부대( partisan) "는 정식부대원이 아니고, 제복ㆍ계급장 등도 없기에 인식 내지 판별이 어렵다. 침략군ㆍ정복군ㆍ점령군ㆍ식민주의자 등에 대한 방어 전쟁을 수행한다. "파르티잔"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국민의 해방 요구에 응하여 전투 등을 수행한다.

설 립 : 1950.12"이현상(1905~1953.09.1747지리산에서 사살)"

구 성 : "남부군단" 예하의 "지리산 빨치산""남부군"의 직속부대인 제8192사단 + "경남도당" 사단인 제57사단 + "전북도당" 사단들이 주류 + "여순1019사건" 당시 반란군 출신 중 생존자 + 북한군 전투부대의 낙오병들로 구성

교전 횟수 : 10,717 (1949년 이래, "소백산지리산지구 공비토벌 전"에서)

피 해 : 지리산인민유격대- 전사(4,382)포로(1,645) - 빨치산 측(1만 수천 명 이상 추정)  /  한국군 토벌대 - 전사( 103)부상( 238) - 전몰군경 (6,333)  /  노획 무기 - 총기(1,239)실탄( 57,000)박격포(5)

빨치산 토벌 : 백선엽 야전군 사령부(일명, 백야전사)- 전북 남원에 설치, 1952.03.15일 해체

남부군1

2. 빨치산 (조선인민유격대)의 역사

1946.09.07일, "남로당의 박헌영" 등 주요 간부들의 체포령으로 지하 조직화하고, "대구 10ㆍ1 사건" 시기부터 소수의 좌익 세력들로 무장투쟁을 위한 "야산대(野山隊)"가 조직된다. 이어 1948.10월 "여순사건"을 계기로, 남한 내 대다수의 좌익 세력이 입산하여, 본격적인 "빨치산 활동"이 이뤄진다. 

1950년, "6ㆍ25전쟁" 후, 북한이 남한을 일시 점령했다가, "9ㆍ28수복"으로 후퇴하면서, 그들이 남겨놓은 지역당ㆍ행정조직ㆍ추종세력이 그대로 "빨치산 화"하면서 남한 전역은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라는 전쟁터가 된다. 무장한 인력만 1~2만 명에 달하며, 남한 곳곳에 경찰도 들어가기 힘든 작은 "해방구"를 형성하여 위세를 부렸지만, 군경의 지속적인 "토벌"과 2차에 걸친 "대토벌작전", 그리고 "남로당"을 정적으로 여겨 숙청한 북한의 외면으로, 물적ㆍ인적 보급이 완전히 차단되었고, "군경"의 지속적인 토벌로 적점 세가 위축되었으며, 1954년 초에는 토벌 완료된다. 이들은 주로 "지리산, 백운산, 덕유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나, "한국군 백야전 전투사령부" 등의 토벌작전((경찰 수색대(차일혁)ㆍ국군부대(김종원))에 의해, 대부분 토벌되었다.

결국 "조선인민유격대"는 이러한 "북한의 무관심" 속에 점점 무너져 내려갔다. "북한"은 자신을 지지해준 "조선인민유격대"를 "정규군"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더러, 데려갈 생각을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정전협정"으로 전쟁이 끝난 뒤에도, "빨치산 세력"에게 산에서 내려가, 지하활동을 계속하라는 무전만 전해주었을 뿐, 그들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이 무전을 전해줄 당시, "국군"이 한창 "토벌작전"을 펼치던 중이고, "경찰"에서는 잔존 "빨치산" 전원의 개인 신원 파악까지 해둔 상태였는데, 산에서 내려가라는 건 하루빨리 죽으라는 소리와 다름이 없었다. 오히려 한국측이 "정전협정" 때, 제발 "유격대원들"을 데려가라고 먼저 제의했는데도, "북한" 측에서는 일절 대답하지 않았다.

"북한"이 이렇게 "빨치산"을 내팽개친 것은 "김일성ㆍ만주 빨치산 계"가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남로당 계"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던 걸로 보인다. "빨치산 간부들"의 상당수가 "남로당 계"와 인연이 있던 인사들이었기 때문이다. 탈북자들 증언에 의하면, "북한"에서도 버림받은 존재이며 인정하지 않아서, 기껏해야 "남조선" 내 "자발적인 혁명전선", 즉 "제2 전선으로 불릴 뿐이지, 우리와는 상관은 없다"는 투라서 잘 모른다고 한다. 덕분에 탈북자들이 "남부군" 같은 영화를 보고, 이랬었구나? 하며, 놀라기도 한다고 한다.

3. 이현상의 활동

※  이현상 (李鉉相ㆍ1905~1953.09.17ㆍ향년 48세) : 남부군 총사령관 (빨치산) :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사회주의자노동운동가혁명가정치가시인군인ㆍ해방 후에는 남조선로동당의 간부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파르티잔 활동을 주도ㆍ일제 강점기, 독립운동노동운동에 참여하였고, 해방 이후에는 "박헌영"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남조선로동당 활동"을 하였다.(1925, "610 만세운동"에 앞장섰다가, 첫 감옥살이)

이현상

"이현상"1949년부터 "지리산 지구"에서 "인민유격대 제2병단"을 편성활동하였으며, "625전쟁" 시에는 광범한 지역에 걸쳐, 협동 작전을 벌였다"UN "의 반격으로 다시 "지리산 지구"로 잠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50.11월에는 "후평리"에서 "반부 인민유격대"로 재편한 다음, 남하하였다1950.11월 중순, "이현상""유격대"를 지휘하여, "강원 후평리"로 후퇴하였고, 여기에서 그는 "승엽(조선인민유격대 총사령관)" 등과 남한지역의 당 사업과 유격투쟁에 관한 문제를 토의했다.

"이승엽"6개 도당(충남충북전남전북경남경북)에 대한 지도권한을 "여운철"에게 위임했고, "이현상"에게는 유격대의 통일적 지도를 맡겼다"이현상""후평리"에 집결된 "유격대""남반부 인민유격대"를 조직하여, 다시 "지리산"을 향했다이때 편성된 "인민유격대""유리사단(400)혁명지대(60)인민여단(150)"과 사령부 및 기타 직속부대(150) 등 약 800명의 병력이었다1950.12, "제천 지구"에서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단"으로 부대를 개편한 후, "덕유산" 일대에서 활동하였으며, "이현상""남부군단 총사령관"의 직함으로 1951.07월 중순부터 "남한" 일대의 "유격부"들을 총지휘하였다.

4. 개 요

1946, "대구 101사건"으로 공산당 활동이 비 합법화된 이후, "남로당 계열""야산대(野山隊)"라는 이름으로 초보적인 "게릴라전"을 벌였고, 1948.10"여순사건"과 그에 호응한 각 반란사건의 잔당들이 "지리산"으로 도피했을 때, 일제강점기 시기 무장투쟁 경력이 있던 "이현상"이 이들을 규합하여 격적인 무장 세력화한다. 이 이외에도 전국 각지의 지명 수배된 "사회주의자"들이 산발적인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었으나, 대부분은 "도피성"에 가까웠다.

남부군2

"김일성""월북자"를 비롯한 다양한 인원들로 편성된 부대를 만들었다1950, "한국전쟁" 발발 이후, 북한의 점령이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남한 각지에 이 부대를 대규모로 남파시켰고, 이는 거의 "정규군"1개 부대와 비슷한 규모였다이전까지는 각 지역에서 모집한 "의용병들""유격대"와의 차이에 대해 논쟁이 끊이질 않았는데, 2006년 공개된 영상에 따르면, 남한에서 모은 "의용대"와는 다른, 북한에서 내려온 사복 차림의 "빨치산들"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그러나 1950.09.15, "인천 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의 허리가 잘리자, 퇴로를 잃어버린 "북한군" 잔당북한의 남한 각 행정부처협력세력들은 퇴로를 잃은 채, "무장 세력"으로 정착된다이들은 북한이나 서로간의 연계가 거의 되지 않고, 각자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각 세력은 "행정구역 도 단위"로 활동하였는데, "경남도당경북도당전남도당전북도당" 등 상당수의 세력이 "태백산맥"에서 뻗어 나온 각 ""들에 터를 잡고 활동하였기 때문에, "태백산맥", 그 중에서도 "지리산""빨치산"의 대명사격이 되었다.

한편 "북한""남로당" 출신의 "이승엽"을 주축으로 이들을 지원규합하여, 후방 교란세력을 만들기 위해 지속적으로 100~1,000명 단위의 "무장공비 집단"을 만들어 남파하나, 대부분 "주 전선"에서 걸려 괴멸되었고, 과거 "빨치산" 경력이 있던 "이현상"의 세력만이 성공적으로 남하하여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이승엽"의 명으로 "조선인민군 유격대 남부군"으로 개칭하며, "이현상"을 필두로 하여, 각지에서 활동하는 "빨치산" 세력을 규합하여, 한때 낮에는 한국, 밤에는 인민공화국 소리를 들으며, 그 위세가 대단하였다.

또한 "북한"에서 "김일성""남로당"의 권력다툼 끝에, "남로당"을 이끄는 "박헌영이승엽"이 숙청되자 남한의 "빨치산"을 지휘하는 "남로당" 세력들은 그야말로 허탈에 빠지게 된다이에 빠르게, "지도부""김일성 절대지지파"로 교체 되는데, 이에 따라 "박헌영"의 오른팔인 "이현상" 마저 모든 직위를 박탈당하고, 초라하게 "빨치산"의 뒤를 쫒아 다니다가, "토벌대"에 의해 사살된다"빨치산" 자체는 "국군경찰"로 구성된 "1차 대공세"로 인해 그 위세를 잃었으며, "2차 대공세" 때 완전히 작살나 버려서 이후에는 더 이상 조직적인 부대가 남아 있지 않게 된다이후 "망실공비"란 이름으로, "경찰서 형사들"의 추적을 받게 된다.

대부분의 생포된 "유격대원들""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일정심사를 거쳐, "민간인 학살" 등에만 연루되지 않았다면, 대개 재판을 받고, 얼마 안 가서 방면되었으나, "고립된 빨치산들"은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물론 "진압군" 측에선 무의미한 피해를 줄여 보기 위해, 이런 사실들을 빨치산들에게 선전해서 투항을 권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립되었던 "유격대원들"은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당시 증언에 의하면, 10대에 불과한 "빨치산들"이 포로로 잡히고도 곧 "인민공화국"이 너희 괴뢰들을 쓸어버릴 것이라고 발악하는 경우도 많았고, 국군에 의해 점거된 "빨치산" 근거지에서 "빨치산"들이 "허약한 국방군 따위가 감히 자기네 근거지에 도달했으리라곤 상상도 못하고, 인민군이 여기까지 왔다"고 환영하는 황당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신념 하나는 철두철미했던 것이었다"생포된 유격대원"을 이렇게 취급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당시 "한국 정부"는 이들의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고, "적의 비정규군"이 아니라, "납치되거나 오도되어 가담한 선량한 양민" 또는 "일반 범죄자"로 간주했기 때문이다이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우선 "유격대"의 경우, "정규군"과는 달리 "교전권"을 인정하기에는 굉장히 미묘한 형태이다게다가 후방 치안을 확보하기 위해, 추가적인 "유격대원"의 증가를 막아야 했는데, 만약 "빨치산들" "교전권 당사자"로 인정하면, 오히려 "빨치산"이 더욱 증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물론 "진압군" 측에서 화가 나서, 또는 운반하기 힘든 중상자를 그 자리에서 바로 사살해버리는 것이야 막지는 못했겠지만, 일단 산 아래로만 내려오면 목숨은 보장받았다"김영옥 대령"의 회고록에서도, 잡은 포로 중, 크게 다친 한 사람을 계속 끌고 다닐 수 없어서 죽여 버린 적이 있다고 하며, 그 자신도 조금 후회하기도 했다고 한다만약 이들을 "한국 정부""교전권"이 있는 존재로 인정해버렸다면, 오히려 "북한"과의 "포로 교환" "북한"으로 송환 당했을 수도 있다물론 이들은 상당수가 그러기를 바랐지만. 다만 "남한" 출신으로 입산한 이들 뿐 아니라, 낙오해서 산으로 들어간 "정규 인민군 출신자들"도 모조리 포로가 아닌 범죄자로 간주해 버린 데,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결국 "한국 토벌대"에 의해, "지리산 본부"를 제외한 나머지 "유격대 지구"는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그렇다고 "지리산 본부"도 안정된 곳은 아니었다"해방구"들이 모두 사라지면서, 고립 상태가 되어, 상황이 최악이긴 마찬가지였다당시 "토벌대"와는 서로 잔인하게 죽고 죽이는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했다"토벌대장""차일혁 경무관"의 수기를 보면, 상부에서 "빨치산의 목을 잘라, 전과 보고를 하라" 명령을 내리기도 했고, "빨치산"이 경찰서를 공격하여, "경찰서장" 목을 잘라, 효수하는 참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5. 과 정

"남반부 인민유격대""중공군 참전"으로 1950.12"태백산맥"을 타고, 침투했다1950.12월말에는 "충북 단양"을 거쳐, "문경경찰서"를 습격한 후, 그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했다"이현상""제천지구"로 이동하여,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단"으로 부대를 다시 개편했다"남부군단"1951.02월초에 "속리산"을 거쳐, "덕유산"으로 들어갔다"덕유산"에 들어간 "이현상(남부군단 총사령관)""여운철"과 함께 1951.07월 중순, 6개 도당(충남충북전남전북경남경북) 회의를 열기도 했다. 이후 "남한 일대"의 유격투쟁은 "이현상"이 총지휘하게 되었다.

"남부군단" 예하에는 "1전구(전북의 북부지구와 충남)""2전구(전북의 남부지구)"가 있었다"1전구"에는 "충남 빨치산" 570명을 "68사단"으로, "전북 북부지방 빨치산" 700명을 45사단으로 각각 개편했다"2전구""전북 남부"에 있는 각 유격대를 "46사단53사단"으로 개편했다직속부대로는 "81사단92사단602사단"이 있었다이들은 "지리산"에도 "병기수리소"를 설치하여, 하루에 1,000발의 탄환을 만들었으며, 병원시설도 있을 만큼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1951.07월부터 "노동당""남한지역"에서 "2전선"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각 지대 "유격대 체제"부터 당 사업을 주로 하는 "지구당 체제"로 개편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남부군단" 예하의 "지리산 빨치산""남부군 직속부대""8192사단""경남도당" 사단인 "57사단", 그리고 "전북도당 사단"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이들은 "여순 1019사건" 당시 반란군 출신 중, 생존해 있던 인원과 "북한군 전투부대 낙오병"들로 주로 구성되어 있었다이들은 비교적 전투경험이 많은 병력들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국군으로서는 큰 부담이었다이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백운산덕유산" 등 험준한 산악지대에 거점을 두고, 국군과 UN군의 "보급로 차단식량 약탈지서 습격차량 기습통신망 절단살인방화" 등을 자행하였으며, 들의 행동은 전후방 국군 전투력에까지 영향을 주었고, 민심을 크게 동요시켰다.

6. 토 벌

국군은 "남부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2개 사단" 규모의 토벌부대를 편성하여, "1군단장 백선엽 소장" "사령관"으로 하는 군단급 "백야전 전투사령부" 창설을 명령하였다"토벌작전"이 개시되자, "기동타격부대""지리산"을 남북으로 양분하여, 북쪽은 "8사단", 남쪽은 "수도 사단"이 담당하여, 공비 주력을 타격하였고, 저지 부대는 "빨치산"의 퇴로를 차단하였다"백야사" 예하 부대들은 "지리산백운산덕유산" 일대 전투부대를 동시에 투입하여, 대부분 토벌하였고, 핵심지도자 대부분을 사살포획하였다"백야사"의 전과는 작전기간 동안, 사살포로투항 등을 포함하여 16,000여 명에 달했고, 노획무기도 3,000여 정을 상회하였다.

백야사

7. 추가 내용

"낙동강"까지 진격했던 "북한군""맥아더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패주하면서, 일부는 38선을 넘어 도주했으나, 나머지는 시간상 북으로 후퇴할 수 없는 처지였다"김일성"은 후일을 기약하고, "남한 땅에 잔존하라"고 명령한다"남한 땅"에 잔존하기 위해서는 산악으로 피해야 하였기에 이들은 "지리산태백산"으로 들어가 항전한다. 다시 "북한군"이 내려올 때까지 항전을 지속하는 것이었다. 

항전

이에, 국군은 "2개 사단"을 동원하여, 진압작전에 돌입하게 되면서, 이들은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밤에는 산 아래로 내려와 민가에 숨어들어 양식을 얻어가거나 빼앗아 가면서, 북한군이 내려오기를 기다리게 된다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이 되었어도, , "14후퇴"를 하여도 "미국 리지웨이 장군"이 준비해두었던 방어선에 의해 이들은 "평택"에서 "지리산"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3년의 전쟁 후, 종전되면서 그들은 갈 곳이 없어졌다국군의 매복 작전에 걸려들어 잡히게 되거나, 자수하는 인민군이 발생하게 되고, 북한에서는 "쟁책임론"이 활발하게 진행된다"김일성""전쟁책임론"을 뜻밖에도 남한 출신인 "박헌영"에게 뒤집어씌우면서, "사형"을 집행한다이리하여, 남한에서 항전하던 "남부군"은 와해되어, 일망타진된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