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각 지역에 조직된 "인민유격대들" 가운데 가장 먼저 교전을 벌인 유격대는 "제주도 인민유격"대였다. "제주도 인민유격대"는 1948.04.03일 민중항쟁을 유혈적으로 진압하는 "경찰대"를 상대로 첫 교전을 벌였다.
1. "인민유격대"는 민중 속에 있다.
① 1948.04 : 제주 4ㆍ3사건 (제주10%ㆍ3만 명 학살)
"제주도 인민유격대"는 전투력과 전투기간에서 다른 지역 인민유격대를 능가할 정도로 "남조선혁명전쟁"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1948.12.08일, "제1회 124차 국회 본회의"에서 "국무총리 이범석"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제주도 인민유격대"는 약 3,000명으로 편성되었다고 한다.
"서울신문(1948.04.30.)"은 "제주도 인민유격대"가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 중 한라산에 구축한 산중진지에 3개월분의 실탄ㆍ식량을 저장해놓고 유격전을 벌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제주도 인민유격대"의 전투력이 다른 지역 "인민유격대"를 능가할 정도 강했던 것은 제주도 민중들이 "제주도 인민유격대"를 전폭적으로 지지ㆍ성원했기 때문이다.
"제주도" 전황을 조사하기 위해, "미 점령군" 산하 "수도경찰청"이 급파한 대규모 형사대가 임무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도중, 1948.05.15일 "전남 목포"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그들이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남조선로동당 제주도당위원회"는 "제주읍"에서만 72개의 당세포를 조직했다고 한다. 이런 사실 하나만 봐도, "제주도 인민유격대"가 제주도민 30만 명 대다수 민중들로부터 지지ㆍ성원을 받으며, "유격전"을 전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제주도 인민유격대"의 완강한 전투력을 보고 놀란 "미 점령군ㆍ이승만 친미 파쇼정권"은 방대한 병력ㆍ무장장비를 토벌작전에 동원했고, 제주도에 파견된 "미 점령군" 장교들이 토벌작전을 지휘했다. "동아일보(1948.05.19)" 보도에 따르면, "남조선 국방경비대ㆍ남조선경찰 정예부대"가 "제주도"에 들어가 본격적인 토벌작전을 벌였다고 한다. 이것이 역사자료에 기록된 최초의 토벌작전이다.
② 1948.10 : 여수ㆍ순천사건 (3,400명 학살)
"제주도 인민유격대ㆍ군경토벌대"가 격전을 벌이던 1948.10.19일 "미 점령군"은 "전남 여수부(府)"에 주둔하는 "남조선 국방경비대 제14연대"에게 "제주도 인민유격대"를 토벌하라는 출동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제14연대" 장병들은 토벌명령을 거부하고,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무장봉기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여수부ㆍ순천부ㆍ구례군ㆍ보성군ㆍ장성군ㆍ광양군ㆍ하동군ㆍ 고흥군"을 삽시에 점령했다.
※ 1948.10.19.~ 10.27일까지 계속된 "무장봉기군ㆍ진압군" 사이의 전투들에서 발생한 인명손실
• 무장봉기군 : 육군(3,700명)ㆍ해군(1,579명)
• 미 점령군 투입인원 : 전투(89회)ㆍ진압군(연인원 7,814명)ㆍ함선(7척)
• 결 과 : 무장봉기군 - 전사(826명)ㆍ포로(2,685명) / 진압군 - 전사(142명)ㆍ포로( 16명)ㆍ부상(195명)ㆍ행방불명(9명)
• 결 과 : 포로에 대한 최고군법회의 군사재판(여수ㆍ순천ㆍ대전에서 진행)ㆍ사형(577명)ㆍ무기형(110명)ㆍ20년 형(48명)ㆍ10년 형(118명)ㆍ5년 형(138명)ㆍ5년 이하(110명) 언도→ 수감자(484명)은 1950년 6ㆍ25전쟁 직전 경찰에 의해 전원 학살
• "제20연대 무장봉기"가 1948.10.27일에 진압되었다고 기록되었는데, 그것은 진압군의 점령지탈환작전이 10.27일까지 완료되었다는 뜻이다. 전투에서 패한 "무장봉기군"은 "백운산ㆍ지리산"으로 들어가 "인민유격대"에 합류했고, "진압군"은 자기들이 탈환한 점령지에서 "양민학살"에 광분했다. "호남신문(1948.11.05.) 보도에 따르면, "사망자(2,533명)ㆍ중상자(1,027명)ㆍ경상자(130명)ㆍ 행방불명자(833명)ㆍ파괴가옥(1,800채)"라고 한다.
③ 1948.11 : 대구사건 (무장봉기군- 전사 (76명)ㆍ진압군- 전사 (9명))
1948.11.02일, 이번에는 "대구"에 주둔한 "남조선국방경비대 제6연대"에서 장병 약 200명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전투에서 패한 "제6연대 무장봉기군"도 "지리산 인민유격대"에 합류했다. "무장봉기군"이 합류하는 바람에 "남조선 인민유격대"의 전투력은 더욱 강해졌다.
"남조선인민유격대"가 수행한 혁명전쟁은 "미 점령군ㆍ이승만 친미 파쇼정권"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했다. "제주도"에서는 "남조선 단독선거"가 시행되지 못했다. 그렇게 되자, "미 점령군"은 "인민유격대"를 지지ㆍ성원하는 민중을 남녀노소를 구별하지 않고 무차별 살육하는 토벌작전 방침을 "군경토벌대"에게 하달했다.
기밀 해제된 "미국" 측 문서를 인용한 "연합뉴스(2020.01.12) 보도에 따르면, 1949.01.28.일 "윌리엄 로버츠(미 점령군 군사고문단 단장)"은 "남조선국방경비대 1개 대대"를 추가로 파병하여, "제주도" 전역을 "완전히 초토화 하겠다"는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의 건의를 받고, "최고로 좋은 생각"이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초토화 작전"으로 "제주도" 전역은 학살의 피로 물 들었고, 살육의 불길 속에 휩싸였다. 비전투원을 무차별 학살하는 것은 극악무도한 전쟁범죄다. "연합신문(1949.03.04) 보도기사에는 "군경토벌대"가 제주도(1개 읍ㆍ11개 면ㆍ96개 리)에서 자행한 극악무도한 전쟁범죄에 관한 통계자료가 실렸는데, 피 학살 양민(약 20,000명)ㆍ소각된 리(73개)ㆍ전소 가옥(20,280동)이었다. 2003.12월에 발표한 "제주 4ㆍ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는 제주도 피학살자를 25,000~30,000명으로 추산했다.
"조선일보(1948.06.09)" 보도에 따르면, "미 점령군"은 "충북 영동군"에 "토벌사령부"를 설치하고, "경무부 공안국장"을 "토벌사령관"으로 임명했다고 한다. "미 점령군"이 "토벌사령부"를 "충북 영동"에 설치한 까닭은 그곳이 "충청ㆍ호남ㆍ영남"이 만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정황은 1948년 당시 "남조선혁명전쟁"이 "충청ㆍ호남ㆍ영남"을 포괄하는 광대한 지역에서 전개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2. "미 점령군"이 지휘한 "토벌작전"은 전쟁범죄
"남조선 인민유격대"들 중에서 "지리산 인민유격대"는 "지리산" 일대의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이용하여 유격전을 전개했는데, 그들의 전투상황은 "연합신문(1949.04.03.)"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언론보도를 종합하면, "지리산 인민유격대" 총사령은 "홍순석"이었고, 참모장은 "김지회"였다. 1948.10월, "홍순석ㆍ김지회"는 "남조선국방경비대 제14연대" 무장봉기를 이끌었던 군사지휘관들이다. 그들은 인민유격대 500여 명을 이끌고, "하동ㆍ산청ㆍ함양ㆍ거창ㆍ합천" 등지에 신출귀몰했는데, 20~30명씩 편성된 소부대들은 심야에 "경찰토벌대"의 경비망을 교묘하게 뚫고 들어가, 하루에도 4~ 5차례 "경찰지서ㆍ면사무소들"을 들이치고 빠져나가는 "습격전"을 벌였다. 1949.03.27일, "거창경찰서" 관내 경찰지서를 습격한 후, "금융조함ㆍ우편국"에서 거액의 현금을 빼앗았다.
"경찰토벌대"가 "지리산인민유격대"를 당할 수 없게 되자, "경남 경찰국장"은 1949.03.31일 "진주"에서 "9개 지구 경찰서장 회의"를 긴급히 소집했는데, 그 회의에서 "토벌사령부"를 설치하고 "토벌결사대"를 조직하여 더욱 강화된 소탕전을 개시하기로 결정했다. "경찰토벌대"와 별개로 "국군"도 "지리산지구 토벌사령부"를 설치했다.
"국군 지리산지구 토벌사령부"는 "유격전에는 유격전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하면서, "토벌유격대"를 조직했다. 그렇게 되자, "인민유격대"는 "토벌유격대"와 전투를 벌여야 했다. "국방부 보도관"의 발표문을 인용한 "자유신문(1949.05.01)" 보도에 따르면, 1949.04.08일 오후 5시경 "지리산 달궁" 부근에서 벌어진 "지리산 인민유격대"와 "국군토벌유격대" 사이의 교전에서 "홍순석(총사령)ㆍ김지회(참모장)"이 전사했다고 한다. "총사령ㆍ참모장"이 전사했어도 "지리산 인민유격대"의 전투는 계속되었다.
"관보 제112호(1949.06.16)"에 따르면, "내무부"는 "지리산 인민유격대"를 소탕하기 위해 "전남 구례, ㆍ경남 하동ㆍ전북 남원"에 각각 "지리산지구 특별경비대"를 설치하기로 했다고 한다. "동아일보(1949.06.23)" 보도에 따르면, "경북 봉화군 봉성면" 산악지대에서 벌어진 "지리산 인민유격대ㆍ경찰토벌대" 사이의 교전에서, "봉화군 경찰서장"을 비롯한 경찰관 4명이 전사했고, 그밖에 여러 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서울신문(1949.08.08)" 보도에 따르면, "내무부"는 "지리산 인민유격대"를 고립시키기 위해, "지리산" 산간마을들을 모조리 불사르고, 산간마을주민을 하산시켜 집단마을을 조성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서울신문" 보도의 표현을 빌리면, "일찍이 만주에서 실시하여 많은 성과를 얻은 집단마을조성 전술은 50~100호를 묶어 1개 집단마을을 만들고, 집단마을 주위에 높은 방벽을 쌓아 밤낮으로 경비하는 전술"이었다. 집단마을조성에 협조하지 않는 주민들은 "공비내통자"로 몰려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학살당했다. 이것은 명백한 전쟁범죄다.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시기, "만주"에서 "일제 관동군ㆍ만주군"이 "조선인민혁명군ㆍ조선혁명군ㆍ 한국독립군ㆍ중국인항일부대들"을 고립시키기 위해, "만주" 각지에서 산간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학살하고, 집단마을에 가두었던 전쟁범죄가 "지리산"에서 다시 자행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ㆍ만주군"에 자진 입대하여, "일왕 히로히또"에게 충성했던 친일민족반역자들이 8ㆍ15 이후, "미국"에게 충성하기 위해, "남조선 국방경비대"로 대거 입대해 군부를 장악했으므로, 그들은 일제에게서 배운 전쟁범죄를 거리낌 없이 저질렀던 것이다.
"관동군ㆍ만주군"의 하명을 받고, 항일투쟁세력을 토벌했던 그들은 8ㆍ15 이후 "미 점령군"의 하명을 받고 "남조선 인민유격대"를 토벌했다. 그런 점에서, "남조선 인민유격대"는 미국의 비호를 받는 "친일민족반역세력과 싸웠다"고 말할 수 있다. "남조선 인민유격대" 토벌작전에 동원되어 전쟁범죄를 저지른 고위급 지휘관들은 다음과 같다.
• 채병덕 : 일본군 중좌 (중령) 출신ㆍ육군 참모총장 • 신태영 : 일본군 중좌 (중령) 출신ㆍ육군 참모총장 • 원용덕 : 만주군 중교 (중령) 출신ㆍ호남 토벌사령관 • 정일권 : 만주군 상위 (대위) 출신ㆍ지리산지구 토벌사령관 • 김백일 : 만주군 상위 (대위) 출신ㆍ광주지구 토벌사령관 • 백선엽 : 만주군 중위 (중위) 출신ㆍ순천여수지구 토벌사령부 참모장 • 박정희 : 만주군 소위 (소위) 출신ㆍ호남토벌사령부 작전참모
"미 점령군"은 "토벌사령부"를 설치하고, "남조선 인민유격대"를 집중적으로 공격했건만, 승산이 보이지 않았다. "남조선 인민유격대"를 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1948.08.15일 "이승만 친미 파쇼정권"이 수립되었고, 그에 따라 "미국"은 "남조선 점령군"을 철수해야 하는 상황에 밀려들어갔다. "미국"은 1948.09.15일 "남조선점령군"을 철수하기 시작했고, 1949.06.30일 철수를 완료했다. 그러나 "미국"은 "점령군"을 철수한 이후에도 "군사고문단 495명"을 남한에 남겨두고, 국군을 지휘ㆍ통제했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1949.11.25~26일 "충남 대전 대흥동"에 있는 "한국군 헌병사령부"에서 "국방부ㆍ육군본부ㆍ법무부ㆍ내무부" 고위당국자들이 참석한 "4부 합동회의"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 회의에서 토벌작전을 강화하기 위해, 총사령부를 "대전"에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지리산지구ㆍ태백산지구ㆍ호남지구ㆍ영남지구ㆍ안동지구"에서 각각 토벌작전을 지휘하는 각 "지구 전투사령관(5명)"은 "4부 합동회의"를 마친 뒤, "토벌작전회의"를 진행했다. "4부 합동회의"에 참석한 "육군총참모장 신태영"은 취재기자들에게 "군경토벌대"가 "남조선 인민유격대"와 벌인 전투들에서 거둔 전과를 밝혔다.
• 전투 기간 : 1949.11.01.~ 24일까지 • 결 과 : 남조선인민유격대원 전사(888명)ㆍ포로(347명)ㆍ투항(429명)
다급해진 "이승만 친미 정권"은 "토벌작전"을 하루빨리 끝내려고 온갖 방법과 수단을 동원했다. "경향신문(1950.01.22.) 보도에 따르면, "국방장관ㆍ육군총참모장ㆍ전투지구사령관(3명)ㆍ헌병사령관ㆍ정보국장ㆍ연대장(2명)ㆍ부대장(여러 명)ㆍ국회 국방위원장ㆍ치안국장대리ㆍ경남 지사/군수/경찰국장ㆍ경북 지사/군수/경찰국장ㆍ행정조사관"을 비롯한 100여 명이 1950.01.19일 "경북 안동"에 있는 "중앙국민학교 강당"에 모여, "토벌작전회의"를 진행했다고 한다.
그들은 1950.03월 말까지, 토벌작전을 완전히 끝내자고 결의하면서, "해안선 방비를 강화하고, 토벌지구에 있는 모든 마을을 "철저히 파괴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서울신문(1950.01.30)" 보도에 따르면, "지리산 인민유격대"를 토벌하고 원대 복귀한 "국군 제211부대"의 귀환신고식이 1950.01.28일 "서울 서빙고동 군부대훈련장"에서 진행되었는데, "지리산 토벌작전"의 결말을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 지리산인민유격대 : 전사(4,382명)ㆍ포로(1,645명) • 한국군 토벌대 : 전사( 103명)ㆍ부상( 238명) • 노획 무기 : 총기(1,239정)ㆍ실탄( 57,000발)ㆍ박격포(5문)
그러나 "군경토벌대"가 토벌작전을 완전히 끝내자고 결의했던 1950.03월 말이 다가왔는데도 "남조선인민유격대"는 완강히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당황한 "군경토벌대"에게 비상조치가 요구되었다. "동방신문(1950.02.22)" 보도에 따르면, "안동에 있는 중앙국민학교 강당에서 지난 01.22일 회의에 참석했던 100여 명이 다시 모여 제2차 회의를 진행했다"고 한다. "자유신문(1950.02.23)" 보도에 따르면, "주한미군사고문 단장 윌리엄 로버츠(william L. Roberts)가 토벌지구를 직접 시찰하였다"고 한다. 당시 "주한미군사 고문단은 점령군이 철수하기 이전과 마찬가지로 토벌작전현장에 미국군 장교들을 파견하여 토벌작전과 대량학살을 여전히 지휘ㆍ통제"하고 있었다.
'한국 (근 • 현대사) > 공산주의 (남로당 • 빨치산 • 연안파 • 소련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타하리 3인 : 현 엘리스(53)ㆍ김수임(39)ㆍ김소산(36) (0) | 2022.10.29 |
---|---|
혁명 트로이카 : 주세죽 (52)ㆍ고명자 (46)ㆍ허정숙(89) (0) | 2022.10.29 |
공산당 ⑨- 2 : 남부군ㆍ남조선혁명전쟁 (1948.04~1950.03) (0) | 2022.10.28 |
공산당 ⑨- 1 : 남부군ㆍ이현상 부대 (1950.12~1953.09) (1) | 2022.10.28 |
공산당 ⑧ 남로당ㆍ남조선노동당 (2) | 2022.10.2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