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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고대ㆍ불가사의 (7대)ㆍ로마ㆍ신화

고대 로마 ⑦ 성(性) 문화

by 당대 제일 2024.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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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고대 로마의 "검투사들"은 인기가 매우 많았다는데, 고위 계급의 여성들이 검투사들에게 환장했다고 한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유명 검투사들과 같이 잠을 자고 싶어했고, 종종 엄청난 거금을 지불하고 하룻밤을 사는 경우도 많았다. 저명인의 아내가 검투사와 잤다는 스캔들이 터지는 경우도 흔했다. "소 파우스티나 황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대 황제ㆍ재위 161~180)의 아내)"는 검투사들과의 불륜으로 유명했는데, 하도 아내의 성욕이 심하자, 보다못한 황제가 아내의 불륜 상대 검투사들을 죄다 죽여버리고 그 피로 아내를 목욕시켰다는 일화도 있다. 그러자 더 이상 검투사들과 놀아나지 않았다고 한다.

1. "매춘"의 세계

메르트리세스 (Mertrices)

아름답고 교양있는, 단순한 육체 뿐만 아니라, 기예도 두루 갖춘 고급 매춘부로, 사람 취급을 못 받던 "프로스티불라에"와 달리, "메르트리세스"들은 꽤나 풍족하게 살았다 정부에 공식 등록이 되어있는 사업자였고, 세금도 납부했다 악기 서너 개쯤은 가뿐히 다룰 줄 알았고, 아름다웠으며 재치도 있었다 당연히 후원자들이 돈이나 팁을 그득그득 뿌려줬고, 덕분에 그녀들은 부유하게 살 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의 간통죄"는 유부남과 합법적으로 성관계를 가질 수 있는 "창녀"를 면제했는데, 간통을 도덕성보다 법의 문제로 생각했던 일부 사회 저명 여성들은 간통죄로 기소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스스로 "창녀"로 등록하기도 했다. 스스로 "창녀(메르트리세스)"로 등록하고 활동할 용의가 있는 간통인은 적어도 그녀의 권리와 지위 상실을 부분적으로 완화시킬 수 있었다.

프로스티불라에 (Prostibulae)

단순히 길거리에서 몸을 파는 싸구려 창녀들로, 대부분의 매춘부들은 가난하고 비참한 삶을 살았다. 당시 이들은 최소 14, 심지어는 더 어릴 때부터 매춘을 강요받아 매음굴로 끌려 들어간 사람들이었다. 매춘부들은 자유민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노예 출신이었는데, 로마에서 노예는 인간이 아니라 사유 재산으로 취급받았기에 매춘부가 번 돈은 한 푼도 남김없이 주인에게 돌아갔다.

손님이 매춘부 본인에게 돈을 직접 쥐여주고 싶어한다면 가끔씩 예외를 두었지만, 일반적으로는 거의 없었고, 매춘부들은 돈을 주인에게 빼앗기며 성노예로 학대받는 일이 잦았다 "강간"은 로마 사회에서 범죄였지만 일반 여성과 달리 매춘부들은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가 흔했다.

창녀가 황후의 자리까지 오른 사례 (테오도라 황후ㆍ동로마 제국 시대)

"테오도라 황후(유스티니아누스 대제(161 황제ㆍ재위 527~565) 아내동로마 최고의 성군 중 1)"는 어릴 적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콘스탄티노플"의 술집에서 춤을 추고 몸을 팔기도 했는데, 타고난 아름다움과 압도적으로 명석한 두뇌로, 결국 "유스티니아누스"와 결혼하여 황후라는 최고의 신분까지 올라갔다. 그녀가 어린 시절 가장 즐겨 공연하던 내용이 바로 "레다와 백조" 그녀가 헐벗은 채로 누워있으면, 동료들이 사타구니에 보리 낱알을 뿌렸다. 그러면 백조가 그녀의 사타구니에 흩뿌려진 보리알들을 쪼아먹는 게 공연의 하이라이트였고, 그 외에 공연장 위 관객들이 보는 앞에서 동료 배우들과 관계를 가지기도 했다.

매춘부들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보통 속이 훤히 비치는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했으며, 아예 알몸으로 다니기도 했다. 만약 "토가(남성 전용 옷)"를 입고 다닌다면 그건 100% 확률로 고급 매춘부였다. 후원자가 선물한 황금 장신구나 보석들을 주렁주렁 걸치고 다니는 경우도 흔했다 화려한 장식이나 악세사리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인기가 많다는 증거였기에, 매춘부들은 제 인기를 과시할 목적으로 일부러 극도로 호화롭게 차려입고 다녔다 또한 매춘부들은 꼭 여자만 있는 것도 아니라, 남자 매춘부(남창)도 많았다

도시에서 창관들이 밀집한 유흥가는 "루파나리움(Lupanarium)"이라고 불렀다.

보통 분주하고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에 위치했고, 사람이 하도 많이 다니는 통에 더럽고 비좁았다 화대는 굉장히 저렴했는데 대부분의 경우, 매춘부의 화대가 빵 한덩이 가격보다 쌌다 정말 극심한 거지가 아니라면 크게 부담되는 금액은 아니어서 일반적인 로마 시민들은 매춘 업소들을 자주 이용했다 매춘 업소 내부에는 외설적인 벽화들이 가득했으며 손님이 매춘부를 지정하면 그 매춘부가 있는 작은 방 안에 들어가 일을 보는 식이었다. 좁은 방의 문에는 분필로 소녀의 예명과 가격이 쓰여있었고, 안에는 작고 희미한 조명만이 있었다.

3. 콜로세움의 수간 쇼카포포루스(베스티아리)

가장 유명하고 능력이 좋았던 역사상 최고의 "베스티아리(Bestiarii글래디에이터= 사람과 싸우는 직종)""카포포루스(Carpophorus1C 경 인물가난한 하층민 출신)"였다그는 타의추종을 불가하는 동물 조련 능력싸움 능력으로 이름을 알렸지만, 다른 쪽으로도 엄청난 재능이 있었다. 그것은 동물들이 인간을 수간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었다그는 사자멧돼지황소기린얼룩말종마 등 다양한 동물들이 인간을 덮치도록 유도할 수 있었다일부러 암컷의 페로몬이나 냄새를 경기장에 들어갈 여성들에게 묻히는 편법을 썼다.

거대한 동물들과 짝지어진 여성들은 거의 살아남지 못했다. 동물들이 교미 도중 지나치게 흥분해 발톱을 여자의 목에 박아넣는 경우도 있었고, 격렬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아예 여성의 척추가 부서지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이 끔찍한 쇼에 지원하면 돈을 지급했기에, 스스로 자원하는 빈곤층이나 노숙자 여성들이 많아 여성의 공급은 딱히 부족하지 않았다고 한다여자만 수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남자도 수간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남성 죄수들을 수탕나귀에게 수간당하도록 한 뒤 그 앞에 표범을 풀어버리는 등 상당히 끔찍한 처형 방법들을 쓰기도 했다. 반대로 죄수들을 조롱하는 의미로 암염소와 죄수들을 수간시키기도 했다.

4. 율리우스 카이사르 (Gaius Julius Caesar시저BC 100~ BC 44.03.15ㆍ향년 56)

"카이사르"는 타고난 바람둥이로 유명했다. 그는 "만인의 남자"라고 불릴 정도로 엄청난 바람꾼이자 유부녀 헌터로, 오죽하면 그가 지나갈 때, 장난조로 사람들이 서로에게 "난봉꾼이 지나가니, 마누라를 숨겨라!"고 외칠 정도였다. 가장 유명한 연인은 "클레오파트라(고대 이집트 여왕)"였지만, 이 외에도 삼두정치의 동료였던 "크라수스폼페이우스"의 아내, "원로원" 의원들의 아내들까지 두루 후리고 다녔다그가 더 대단한 것은 수많은 여인과 관계를 맺으면서도 공과 사를 확실하게 구분했다는 점인데, 그는 칼같이 업무와 여자관계를 구분했고, 자기 관리에 엄청나게 철저했다. 탁월한 관리 능력 덕분이었는지는 몰라도 그와 헤어진 다음에도 그를 싫어하는 여자가 없었다고 한다. 다만 자식 복은 없었는지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 "카이사리온"을 제외하면 제대로 된 자식을 보지 못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애인 소동은 BC 63, "카틸리나의 탄핵 사건" 당시, "카틸리나"와 내통한다는 의심을 받던 그가 스캔들을 이용해 그 의심을 한 번에 떨어버린 이야기이다원로원 회의에 참석 중이던 그에게 서신 1통이 전해졌는데, 그가 서신을 읽자, "소 카토(카이사르 반대파)"가 갑자기 일어나, 그가 읽고 있는 서신이 "카틸리나" 일파와 내통하는 증거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며, 내용을 공개해야 한다고 소리쳤다그가 지극히 사적인 서신일 뿐이라고 응수하자, "카토"는 더 기세등등해졌고, 결국 그는 그럼 "카토" 본인이 직접 낭독하라면서 서신을 건네주었다. 그런데 서신의 내용은 사실 "세르빌리아 카이피오니스("소 카토"의 이복누이)""카이사르"에게 뜨거운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었다당연히 "소 카토"는 한마디도 낭독하지 못하고, 얼굴이 시뻘개진 채로 그에게 편지를 내던지며, "작작 좀 밝혀!"라고 소리쳤고, 원로원 회의장은 웃음바다가 되었다책에 따라서는 "바람둥이 같으니라고!""(당신 편지니) 가져가, 이 바람둥이야!"라고 나오기도 한다.

5. 발레리아 메살리나 (Valeria Messalina)17(20)~ 48향년 30(27)재위 41~ 48)

매춘의 대명사로 알려진 위인이 바로 "클라우디우스(4대 황제ㆍ재위 41~54)"의 아내 "발레리아 메살리나". "메살리나"는 황후라는 고귀한 지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성욕으로 유명했다. 로마의 황후클라우디우스(4대 황제ㆍ재위 41~54)3번째 아내로마황제 "클라우디우스"3번째 아내ㆍ- 옥타비아(Octavia)로마의 명문가 귀족 출신으로, 16세에 50세의 즉위 전의 로마황제 "클라우디우스"결혼하여, "옥타비아 (Octavia, 네로 황제의 아내)""브리타니쿠스(Britainnicus)"를 낳았다

뭔 짓을 하고 돌아다녀도, 황제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걸 알아챈 그녀는 애인들과의 성관계에는 만족하지 못하고, 밤마다 "팔라티노 황궁"을 빠져나가 고급 매춘부로 일했다. 심지어 이도 모자라서 천민들이 이용하는 "최하급 매춘굴"에서 놀았다는 소문이 돌기까지 할 정도였다또한 과감하게 남근의 고리가 달린 "리시스카(Lisisca)"라는 창녀로서 예명까지 적힌 문패까지 어놓고 손님을 받았다고 한다. 물론 사후 기록말살형을 받은 만큼 악의적인 소문일 가능성도 있지만 그녀와 동시대를 살았던 "대 플리니우스(학자)"기록에 따르면, 그녀가 로마에서 가장 악명 높은 매춘부를 선택해 밤샘 섹스 경쟁을 벌였는데, 이 경쟁은 24시간 동안 지속되었고, 그녀는 무려 1시간에 1명씩 총 25명의 남자들을 상대해서 섹스 베틀에서 승리했다고 한다.

마의 시인 "데키무스 유니우스 유베날리스(55~140)"는 시에서 매음굴에 다니던 시절, 그녀의 행각을 묘사했는데, 황제가 잠든 것을 알았을 때, 하녀와 함께 동행하여 매음굴로 떠나곤 했으며, 그때마다 창녀의 두건을 쓰고, 황궁의 침대보다 매음굴의 매트를 더 선호했다고 한다거기서 그녀는 금발 가발로 머리카락을 감추고, 오래된 더러운 시트 냄새가 나는 창가에 들어가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고, 젖꼭지에 금박을 입힌 것 외엔 벌거벗은 채, 자신을 "암컷 늑대"라고 칭하며 손님들에게 아부하고 그들의 돈을 챙겼고, 그런 다음 모든 남자들의 쓰다듬을 즐기면서 누워있었다고 . 나중에 포주가 창녀들 해산시킬 때가 오면, 그녀는 마지못해 그녀의 방에서 끝날 때를 기다리며 가능한 마지막 시간까지, 지칠 때까지 섹스를 하며, 욕정을 불태우고ㅡ 황궁으로 다시 떠났다고 한다. 그는 "메살리나""창녀 황후(meretrix augusta)"라고 칭했는데, 이 부분은 로마의 정계에 간섭한 악명으로 이름 높았던 "클레오파트라"와 그녀를 비교하려는 목적이 있었다고 한다.

6. 고대 로마의 황제

흔히 "로마식 연회"하면 "난교"와 온갖 음란한 짓거리가 벌어지는 퇴폐적인 장소를 떠올리기 쉬운데, 실제로는 이런 일이 거의 없었다. 이런 난잡한 연회를 주최한 황제는 "네로(5대 황제ㆍ재위 54~68), 콤모두스(17대 황제ㆍ재위 180~192), 엘라가발루스(23대 황제ㆍ재위 218~222) 정도이다.

"티베리우스(2대 황제ㆍ재위 14~37)""카프리 섬"에서 연회를 즐기는 과정에서 직접 여장을 했다는 기록이 있고, "소아성애"에 빠졌다는 소문도 있었다"칼리굴라(3대 황제ㆍ재위 37~41아우구스투스의 증손자티베리우스의 종손)"는 가끔씩 자신의 우월성과 "카이사르 가문"의 상징성을 위해, 율리우스 가문과 연관된 "비너스(미의 여신)"분장을 하고 연회에 등장했다. 그는 "동성애"는 아니지만, "근친 의혹"이 있었던 황제다재위에 오른 뒤, 유난히 3명의 여동생들(특히 여동생 율리아 드루실라)을 총애한 것으로 유명했다.

"네로(5대 황제ㆍ재위 54~68)" 임신한 아내 "포파이아 사비나"를 발로 차서 죽여버렸는데, 죽이고 나서 후회하여 아내를 많이 그리워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사비나 황후"와 닮은 사람을 발견했는데, 필이면 남자 노예였던 "포피루스"였다. 죽은 아내와 똑 닮은 "포피루스"에 홀딱 빠진 "네로"는 그를 거세시킨 뒤 자유인으로 해방한 후, 반쯤 아내로 삼다시피 했다. "네로"는 또 다른 자유 노예들과 함께 침실에서 "포피루스"와 서로 즐기는 걸 좋아했다고 한다.

"엘라가발루스(23대 황제ㆍ재위 218~222)" 어린 나이(14)에 황제에 올라, 로마인조차 경멸할 만큼, 정말 기발할 정도의 성욕과 기행으로 유명했으며, "트랜스젠더"의 시초 격 인물로 불린다따라서 재위 4년 만에 "율리아 마이사(할머니)"등에게 암살됐다"카시우스 디오(로마 역사가)"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양성애자 성향이었던 그는 평소 여성의 성기를 가지고 싶어했고, 자신에게 여성기를 만들어 줄 수 있는 자에게 제국의 절반을 주겠다는 말을 남겼다남자와의 관계에 더 관심이 많았고, 눈에 짙은 화장을 칠하고 뺨에 분을 발랐으며 여성의 옷을 차려입고 다녔다. 궁전 안, 모든 사람들이 제 알몸을 볼 수 있도록 벌거벗은 채로 궁전을 돌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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