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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고대ㆍ불가사의 (7대)ㆍ로마ㆍ신화

고대 로마 ⑥ 판테온 신전 ③ 아그리파 장군 (BC 63~12ㆍ51세)

by 당대 제일 2023.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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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BC 63~12)"는 고대 로마의 군인ㆍ정치가ㆍ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의 국방장관으로,  단순하지만 뚜렷한 이목구비로 인하여, 미술계에서는 주요 소재로 삼고 있다. 현재 화가 지망생들이 "아그리파의 얼굴"을 그리면서 인물화 그리는 연습을 하는데, 이로 인해 우스갯소리로 "세상에서 가장 초상화가 많은 인물"로 부르기도 한다.

1.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BC 63~ BC 12)

어린 나이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발탁되어, 초대 로마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를 도와, "제정시대"를 여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특히 뛰어난 정치적 감각으로 혼란스러웠던 로마 정국을 수습했던 "아우구스투스"는 반면에 전쟁에는 대단히 둔감하였고, 체력이 약하여, 원정을 나가는 경우에는 병석에 누워 있기 일쑤였다. 일찍이 그의 이러한 문제점을 알았던 "카이사르"는 그의 단점을 보완해주고자, "아그리파"를 그의 후원자로 낙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우구스투스"가 생전에 이뤘던 모든 전쟁의 성과는 "아그리파에 의해 비롯되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며, "악티움 해전" 등 여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생전 2번이나 "통령"의 자리에 올랐는데, 특히 "로마 시"를 아름답게 꾸미는 데 힘을 기울였으며, 로마 제국을 널리 측량하고 지리 서적을 발간하였다.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의 군사적 조언자이면서, "아우구스투스"의 치세 중에는 공공시설물을 건립하는 등에 활동을 보였다.

"아그리파"의 가문은 공화국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지 않았지만, 그는 "옥타비아누스"라는 친구가 있었다. "아그리파" 가문은 "카이사르" 가문과 가까운 사이였지만 아그리파의 형인 "루키우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는 로마 내전에서 "소 카토" 밑에서 싸웠다.

"옥타비아누스"와 그 일행은 "군단"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그리파"는 "옥타비아누스"를 위해 "캄파니아"에서 군대를 소집하였다. "옥타비아누스"가 자신만의 군대를 가지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ㆍ레피두스"와 함께 BC 43년 성립한 "제2차 삼두정치"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옥타비아누스"와 동료였던 "퀸투스 페디우스"는 "카이사르"를 암살한 이들을 기소하기로 한다. "아그리파"는 "카시우스"와의 소송을 맡았다.[2]

BC 42년, "아그리파"는 "필리피 전투"에 참전했다. "로마"로 귀환한 뒤에는 "안토니우스"의 아내인 "풀비아 안토니아"와, 동생인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다. BC 41년에 시작한 전쟁은 BC 40년 "페루자"의 함락으로 끝이 난다. 이후 "시칠리아 섬"을 점거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옥타비아누스"는 "아그리파"에게 "이탈리아 반도"의 방비를 맡긴다.

"아그리파"는 "폼페이우스"의 공격을 잘 막아내었고,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 본토 공격을 포기한다. BC 40.08월, "안토니우스"는 "폼페이우스"와 연합하여 "이탈리아"를 공격하려 하였다. "아그리파"는 "시폰툼(Sipontum)"을 탈환하여 "안토니우스"가 협력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끌고 간다. "아그리파"는 "안토니우스ㆍ옥타비아누스" 사이에 체결된 평화협정에서 중개를 맡았다. 그 후엔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하여 "국방장관" 격으로 활약했고, BC 21년에 "율리아 아우구스투스(아우구스투스 딸)"와 재혼해서, "루키우스 카이사르ㆍ가이우스 카이사르"를 얻었고, BC 12년에 죽은 후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를 얻었다.

2. 판테온 (Pantheon)의 명문 : MㆍAGRIPPAㆍLㆍFㆍCOSㆍTERTIVMㆍFECIT

"판테온(Pantheon)"은 "모든 신들을 위한 공간"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인 "pantheion"이 어원이라 전해진다. 현재 "판테온 신전"은 둥근 돔으로 유명하지만, "아그리파" 시절의 신전은 "T자 모양"이었다고 한다. 로마 대화재 때, 불타 없어지고 "하드리아누스황제"가 재건했다.

원래 있던 명문 "MㆍAGRIPPAㆍLㆍFㆍCOSㆍTERTIVMㆍFECIT → Marcus AgrippaㆍLucii filiusㆍconsul tertium fecit"를 의미하며, "루시우스의 아들인 마르쿠스 아그리파가 3번째 집정관 임기에 만들었다."는 뜻이다.  이 새로운 건물의 "정면 (파사드)"에 덧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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