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양/고대ㆍ불가사의 (7대)ㆍ로마ㆍ신화

고대 로마 ⑥ 판테온 신전 ② 건립ㆍ구경하기 (입구기준으로)

by 당대 제일 2023. 1. 15.
반응형

 

"판테온 (Pantheon)"은 "철근"이 들어 있지 않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콘크리트 돔"이다.  소석회 반죽ㆍ포촐라나(pulvis puteolanum)ㆍ인근 화산에서 가져온 가벼운 부석(浮石)ㆍ주먹 크기의 돌들로 만들어진 "콘크리트"가 이 건물의 주재료로 이다.   "콘크리트"는 현재 쓰이는 "콘크리트"와 매우 흡사하다.

 

1. 판테온 (Pantheon) 건립

① 지금 있는 건물은 AD 125년경, "하드리아누스 황제" 재위 중에 세워진 것이다.

원래 있던 명문 "MㆍAGRIPPAㆍLㆍFㆍCOSㆍTERTIVMㆍFECIT  Marcus AgrippaㆍLucii filiusㆍconsul tertium fecit"를 의미하며, "루시우스의 아들인 마르쿠스 아그리파가 3번째 집정관 임기에 만들었다."는 뜻이다. 이 새로운 건물의 "정면(파사드)"에 덧붙여졌다.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계획한 "로마 전역"에 걸친 재건 계획의 일부로 이 건물은 완전히 재건되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동방으로 널리 여행했으며, "그리스 문화"를 극히 칭송한 국제적인 황제였다. 그는 모든 "신들에게 바쳐질 신전"으로 "판테온"을 건립했으며, 이는 "로마 제국" 내 로마의 신들을 믿지 않거나, 다른 이름으로 "로마의 신"들을 섬기는 백성을 위한, 일종의 "혼합주의적인 행위"였다. 이 건물이 실제로 어떻게 쓰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스 계 로마사람"으로 "원로원 의원ㆍ집정관"을 지낸 "로마사(史)"의 작가 "카시우스 디오"는 "판테온"이 재건된 지,  75년 후에 책을 저술했는데, 실수로 이 건물을 "하드리아누스"가 아닌 "아그리파의 공"으로 돌렸다.  "디오의 책"은 "판테온"에 대한 가장 당대에 근접한 저술로 보이며, 이 건물의 기원ㆍ목적이 AD 200년까지도 명확하지 않았다는 점은 흥미롭다. "아그리파는 판테온이라 불리는 건물을 완공했다. 이 건물이 마르스와 베누스를 포함한 많은 신의 조상들로 장식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나는 하늘을 닮은 건물의 둥근 천장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본다."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

"판테온"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ㆍ카라칼라 황제"에 의해 202년에 보수되었고, 이를 기념하는 작은 비석이 세워졌는데, 비석에는 "pantheum vetustate corruptum cum omni cultu restituerunt (세월에 의해 낡은 판테온을 그들이 모든 정성을 들여 보수하였음)"라는 글이 새겨졌다.

발다키노 (Baldacchino)와 비교해서 보기

"성 베드로 대성당" 한가운데에는 "교황"이 미사를 집전하는 곳인 "중앙 제대"가 있고, 그 위를 "베르니니"의 작품인 "닫집 모양의 발다키노"가 덮고 있는데, 그 높이가 꼭대기의 "황금 십자가 부분"까지 29m나 되며, 무게는 자그마치 37 Ton에 달한다. 이 발다키노는 1625년 "교황 우르바노 8세"의 명령에 따라, 1633.06.29일 "성 베드로의 축일"에 완성했다

2. 판테온 (Pantheon) 구경하기

①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1번째 벽감"에는 작자 미상의 그림인 "거들의 성모와 바리의 성 니콜라오(1686)"가 있다. 오른쪽에서 "제1경당"은 "성모 영보 경당"으로, "멜로초 다 포를리"가 그린 것으로 보이는 "성모 영보 프레스코화"가 있다. 왼편에는 "클레멘트 마이올리"가 그린 "캔버스화 성 라우렌시오"와 "성녀 아녜스(1645~1650)"가 있다. 오른쪽 벽에는 "피에트로 파올로 본치"의 작품인 "의심하는 성 토마스(1633)"가 있다.

"2번째 벽감"에는 15C "토스카나파(派)"가 "성모의 대관식을 묘사한 프레스코화"가 있다. "제2경당"에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1878년 망사)의 무덤"이 있다.  "경당"은 원래 "성령"에게 바쳐진 것이다. 어떤 건축가가 이를 설계하는 영광을 누릴지, 시합이 열렸다. "주세페 사코니"가 참가했지만 낙선했는데, 이후 그는 반대쪽 "경당"의 "움베르토 1세의 무덤"을 설계했다. 시합에서 이긴 사람은 "만프레디오 만프레디"이며, 그는 1885년에 작업을 시작했다. 무덤에는 "로마 독수리"가 위에 얹혀진 거대한 "청동 명판"과 "사보이 가의 문장"이 있다. 무덤 위에 타오르는 "황금 램프"는 1947년 망명 중에 사망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를 기리는 것이다.

"3번째 벽감"에는 "일 로렌초네"의 조각 "성녀 안나"와 "축복받은 성모"가 있다. "제3경당"에는 "움브리아 파(派)"의 15세기 회화인 "성 프란체스코와 성 요한 세례자 사이에 있는 은혜로운 성모"가 있다. 이 그림은 종종 "난간 위의 성모"라고도 불리는데, 이 그림이 원래 "현관 왼쪽의 벽감 안"에 "난간"으로 보호된 채,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성모영보 경당"으로 옮겨졌고, 1837년 이후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오른쪽 벽"에는 작자 미상의 캔버스 화 "교황 보니파시오 4세에게 판테온을 선물하는 포카스 황제" (1750)가 있다. 바닥에는 3개의 "기념 명판"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지스몬다"를 기념하는 문구가 라틴어가 아닌 언어로 쓰여 있다. "오른쪽 마지막 벽감"에는 "베르나르디노 카메티"가 만든 "성 아나스타시오(1725)의 조각상"이 있다.

 입구에서 왼쪽으로

"1번째 벽감"에는 "안드레아 카마세이"가 만든 "성모 승천(1638)"이 있다. "1번째 경당"은 "성지의 성 요셉 경당"으로 "판테온 비르투오지 신자회"의 전용 경당이기도 하다. 이는 16C에 이 "경당"에서 계속 미사를 집전할 수 있게 만든 "교회법(Desiderio da Segni)"에 의해 결성된 "예술가ㆍ음악가들의 모임"을 가리킨다.  이 모임의 초기 구성원들은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ㆍ야코포 메네기노ㆍ조반니 만고네ㆍ타데오 추카리ㆍ도메니코 베카푸미ㆍ플라미노 바카" 등이 있었다. 이 모임에는 "로마"의 저명한 "예술가ㆍ건축가들"이 가입했는데, "베르니니ㆍ코르토나ㆍ알가르디" 외에도 많은 인물이 있었다. 이 모임은 현재 "칸첼레리아 궁전"을 본부 삼아, "교황청 립 미술학원(Academia Ponteficia di Belle Arti)"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경당의 제대"는 "가짜 대리석"으로 덮여 있다. "제대" 위에는 "빈첸초 데 로시"가 그린 "성 요셉과 아기 예수"가 있다. 양옆에는 거장 "프란체스코 코차"가 그린 그림들(1661)이 있는데, 왼쪽에는 "목동들의 경배"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세 동방 박사의 경배"가 있다. 왼쪽의 "회칠"을 한 부조인 "성 요셉의 꿈"은 "파올로 베날리아"의 작품이며, 오른쪽의 "이집트 탈출 중의 휴식"은 "카를로 모날디"의 작품이다. "궁륭" 위에는 17C 작품인 캔버스 화들이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루도비코 지미냐니의 쿠마이의 시빌라ㆍ프란체스코 로사의 모세ㆍ조반니 페루치니의 영원한 아버지ㆍ루이지 가르치의 다윗ㆍ조반니 안드레아 카를로네의 에리트리아의 시빌라"가 있다.

"2번째 벽감"에는 "빈첸초 펠리치"의 "성녀 아녜스 조상"이 있다. 왼쪽에 있는 "흉상"은 "발다사레 페루치"를 묘사한 것으로, "조반니 두프레"의 석고상에서 따온 것이다. "움베르토 1세ㆍ아내 마르게리타 디 사보이"의 무덤은 바로 옆의 "경당"에 있다.  "경당"은 원래 "대천사 미카엘"에게 봉헌되었다가, 나중에 "사도 토마스"에게 봉헌되었던 것이다. 지금 형태는 "주세페 사코니"가 설계한 것으로, 그의 사후 제자인 "귀도 치릴리"가 완성한 것이다. "무덤"은 "도금된 청동"으로 장식된 "설화 석고판"으로 되어 있다. "소벽(小壁)"에는 비유적인 묘사가 담겨 있는데, "에우제니오 마카냐니"는 관대함을, "아르날도 초치"는 후함을 표현했다. "왕족의 무덤"들은 1878년에 설립된 "왕릉의 명예로운 호위대 국립협회"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그들은 또한 "무덤" 주변에 경계병들을 배치했다. "왕릉의 제대"에 있는 문장은 "치릴리"의 작품이다.

"3번째 벽감"에는 위대한 예술가인 "라파엘로"의 유해가 매장되어 있는데, 대리석 석관에 있는 비문에 따르면, "뼈와 재" 들이 남아있다. 그의 약혼녀인 "마리아 비비에나"는 "라파엘로"의 대리석 석관의 오른쪽에 묻혔는데, 그녀는 그와 결혼하기 전에 죽었다. "석관"은 "교황 그레고리오 14세"가 기증한 것으로, "피에트로 벰보"가 새긴 비문에는 "ILLE HIC EST RAPHAEL TIMUIT QUO SOSPITE VINCI / RERUM MAGNA PARENS ET MORIENTE MORI (살아 있을 때, 자신을 능가할까 봐 두려워했던 모든 것들의 어머니(자연)에 의해, 여기 라파엘로가 묻혀 있다. 라파엘로가 죽을지라도 그녀(자연)는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새겨져 있다.

현재의 배치는 1811년 이후의 것으로, "안토니오 무노스"가 설계한 것이다. "라파엘로의 흉상(1833)"은 "주세페 파브리스"의 작품이다. "2개의 명판"은 "마리아 비비에나ㆍ안니발 카라치"를 기념하는 것이다. "무덤" 뒤에는 "바위의 성모"라고 알려진 조각상이 있는데, "성모가 바위 위에 한쪽 발을 쉬게 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 조각상은 "로렌체토"가 "라파엘로"가 의뢰를 받아들여, 1524년에 만든 것이다.

"그리스도의 수난 경당"에는 "벽감" 안에 "로마 시대의 벽돌"로 된 벽이 보인다. "제대" 위에 있는 "나무로 된 수난상"은 15C에 만들어진 것이다. "왼쪽 벽"에는 "피에트로 라브루치"의 작품인 "성령 강림(1790)"이 있다. "오른쪽 벽"에 있는 얕은 부조인 "교황 비오 7세에게 잃어버린 다섯 지방을 헌정한 콘살비 추기경(1824)"은 "베르텔 토르발센(덴마크의 조각가)"의 작품이다. 여기에는 "아고스티노 리바롤라 추기경의 흉상"이 있다. 이쪽의 "마지막 벽감" 안에는 "프란체스코 모데라티"의 작품인 "조각상 성 에라시오(1727)"가 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