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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인물 - 영화 • 유명인 • 정치인 • 대통령

가수 : 프레디 머큐리 (1946) ① 비밀 10가지

by 당대 제일 2023.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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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 머큐리 (Freddie Mercury1946~199145)"는 인도계 동양인ㆍ"잔지바르(Zanzibarㆍ탄자니아 자치령)"에서 태어난 영국의 싱어 송 라이터이다. "Queen"의 "리드 보컬"로 잘 알려져 있으며, "4옥타브"를 넘나드는 화려한 보컬과 폭발적인 무대 매너로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보컬워크 (Vocal Work)"를 남긴 아티스트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1. 프레디 머큐리 (Freddie Mercuryㆍ1946~1991ㆍ향년 45세)

1987년,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진단을 받은 뒤, 투병 생활을 이어가던 중, "런던 켄싱턴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사망 하루 직전인 23일에야 "HIV 양성 반응" 진단을 받은 사실을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당시 미디어는 이를 대서특필했고, 다음날 이 보도는 "머큐리의 사망 소식"으로 바뀌었다. BBC는 "록의 전설이 죽었다"고 보도했다.

작곡 : Bohemian RhapsodyㆍWe Are the ChampionsㆍLove of My Lifeㆍ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ㆍSomebody to LoveㆍDon't Stop Me NowㆍKiller Queen 등

• 본 명 : 파로크 벌사라         • 출 생 : 동아프리카 잔지바르 스톤타운 (영국령)          사 망 : 영국 런던 켄징턴          국 적 : 1946~1964 : 인도 / 1964~1991 : 영국          활 동 : 1969~1991          직 업 : 음악가음악 프로듀서          장 르 : 록ㆍ하드 록ㆍ글램 록          악 기 : 보컬피아노키보드

2. 양성애자 : 이성 연인ㆍ동성 연인

① 이성 연인 : 1970~1976 : 메리 오스틴ㆍ1970년 머큐리(24살)ㆍ오스틴(19살)

유언장을 통해, 재산 절반ㆍ저작권료ㆍ런던의 저택(가든 로지)를 "오스틴"에게 남겼다.  "28개의 방ㆍ대형 정원"을 갖추고 있는 이 저택의 현재 가치는 2,000만 파운드(약 290억 원)에 달한다.  그는 동성 연인 "허튼"이 아닌 "오스틴"에게 재산의 대부분을 상속한 것에 대해 그는 죽기 직전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내 아내였더라면, 이것은 당신의 몫이었을 거예요."  2018년, 67세인 "오스틴"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피해, 이 집에서 조용히 살고 있다.

② 동성 연인 : 1985~1991 (1986년 결혼): 짐 허튼

1983년, 사랑에 빠져, 1985년부터 사귀기 시작했고, 1991년 "머큐리"가 죽을 때까지 함께 했다.  1986년, "머큐리의 40세 생일"에 두 사람은 부부의 연을 맺었다.  1987년, "허튼"은 "머큐리"의 "에이즈 감염" 사실을 알았고, 1990년엔 그 역시 "에이즈"에 감염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 "머큐리"는 "허튼"에게 "50만 달러"를 유산으로 남겼고, "런던"의 집에서 계속 살도록 했다. 하지만 집을 상속받은 "오스틴"은 "허튼"을 집에서 쫓아냈다. "허튼"은 2010년 암으로 사망했다.

3.  비밀 10가지

① 화장된 유해는 "런던"에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2013년, "런던 켄살 그린묘지"에서 "프레디 머큐리" 추정 비석이 발견됐지만, 이후 이 비석은 사라졌다. "머큐리"의 부모는 "인도인"으로선 드물게 독실한 "조로아스터교 신자"였고, "머큐리"도 부모의 영향을 받아, "조로아스터교도"로 남았다. "머큐리" 사후 장례는 "조로아스터교 신부"에 의해 거행됐고, 그의 시신은 화장됐다. 화장된 유해를 어디에 묻었는지는 "메리 오스틴"만 알고 있었다. 

이는 "비밀 장소에 묻어 달라."는 "머큐리"의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팬들과 언론은 "머큐리의 유해"가 어디 묻혀 있는지, 20년 이상 수소문하고 다녔다. 하지만 "오스틴"은 "프레디를 배신할 수 없다"며, 입을 열지 않았다. 2013년, "런던 켄살 그린묘지"에서 "파로크 불사라를 추억하며, 1946~1991"이라고 쓰인 비석이 발견됐다. 하지만 이후 이 비석은 또다시 어딘가로 옮겨졌다.

② 인생의 동반자, "메리 오스틴"은 "브라이언 메이"가 소개해줬다

"머큐리"에게 처음 "메리 오스틴"을 소개해준 사람은 "브라이언 메이"였다. 1970년, "메이와 오스틴"은 몇 번 만나, 데이트를 했다. 그런데 "머큐리"가 "오스틴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메이"는 그녀를 소개해 주었다. 이때 "머큐리"는 24살, "오스틴"은 19살이었다.

1975년 발표한 "Love of My Life"는 "오스틴"을 위해 만든 곡이다. 두 사람은 동거하며 지냈지만, "머큐리"가 1976년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 사실을 그녀에게 털어놓으면서, 각자의 길을 가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오스틴"과 우정을 유지했다. "머큐리"의 다른 연인들이 "오스틴"을 질투해도, 그는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 머큐리는 1985년에 이렇게 말했다. "나의 다른 연인들이 나에게 메리를 대체하게 해달라고 졸랐지만, 그건 불가능해요."

※ 브라이언 메이 (Brian Mayㆍ1947~ ): "Queen"의 기타리스트ㆍ천체 물리학자2008~2013년까지, "제4대 리버풀 존 무어스 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③ 죽을 때까지 함께 했던, 동성 연인 "짐 허튼"과 비공식 결혼했다.

1983년, "짐 허튼"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은 1985년부터 사귀기 시작해, 1991년 "머큐리"가 죽을 때까지 함께 했다. 머큐리는 사람들에게 "허튼"을 "정원사나 이발사"로 소개했다. 하지만 "허튼"은 "투어" 때마다 "머큐리"와 동행했고, 생일 파티에도 꼬박 참석했다. 1986년, "머큐리의 40세 생일"에 두 사람은 부부의 연을 맺었다. 물론 이 결혼은 당시에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영국에서 동성결혼이 허용된 것은 2013년부터고, 미국에선 2015년부터다). 하지만 이후 두 사람은 오른손 약지에 "결혼반지"를 끼고 다녔다.

1987년, "허튼"은 "머큐리"의 "에이즈 감염" 사실을 알았고, 1990년엔 그 역시 "에이즈"에 감염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 "머큐리"는 "허튼"에게 "50만 달러"를 유산으로 남겼고, "런던"의 집에서 계속 살도록 했다. 하지만 집을 상속받은 "오스틴"은 "허튼"을 집에서 쫓아냈다. "허튼"은 2010년 암으로 사망했다.

④ 본명인 "파로크 불사라"를 감추고 싶어했다.

1946.09.05일, "머큐리"는 "잔지바르(현, 탄자니아)의 스톤타운"에서 태어났다. "인도" 출신의 그의 아버지는 "영국 식민지 사무관"으로 일하면서, "잔지바르"로 발령받아 간 도중에 그를 낳았다. "머큐리"는 "잔지바르"에서 "인도"를 거쳐, 10대 때 "영국"으로 이사했다. 그는 "뭄바이" 인근 "성 피터스 기숙학교"에 다닐 때, 이름을 "프레디"로 바꿨다. 법적으로 성을 "머큐리"로 바꾼 것은 20대 중반인 1970년 "Queen"이 막 결성됐을 때다.

"머큐리"는 "잔지바르ㆍ인도" 시절을 이야기하기를 꺼려했다. 한 번은 공연이 끝난 후 동창들이 찾아왔는데 "죄송하지만 저는 당신이 누군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Queen"의 홍보를 맡았던 한 직원은 "머큐리"가 죽고 나서야, 그의 본명이 "파로크 불사라"였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⑤ 음역대는 "4 옥타브"를 넘나들었다.

"머큐리"는 어릴 때, "성악"을 배웠다. 하지만 누구에게 사사 받을 정도로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다. 타고난 "미성"으로 고음을 소화할 수 있던 그는 자신의 음역대가 "바리톤"이라고 했지만, 대부분의 음을 "테너 음역대"에서 소화했다. 2016년, 유럽의 과학자들이 "머큐리의 음성"을 분석한 결과, "머큐리"는 "떨림음(비브라토)"에 강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일반적으로 "오페라 가수들"의 "비브라토"가 5.4Hz~6.9Hz 사이를 오갔다면, "머큐리"는 7.04Hz에서 움직였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그는 "패션ㆍ헤어스타일"을 바꿈과 동시에, "창법"도 바꿨다. "줄담배"로 인해, "미성"이 예전 같이 나오지 않으면서, 아예 "탁성"을 내는 쪽으로 선회한 것이다. "탁성"은 목에 힘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공연을 오랫동안 하기 힘들다. 1980년대 이후, 공연에서는 그가 "고음"이 많은 곡을 부를 때, 키를 낮춰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다.

⑥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았다.

무대 위에서 터프한 모습과 전혀 달리, "머큐리"는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나중에 "돌출 입"을 가리기 위해, "콧수염"을 길렀다. "로저 테일러"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머큐리의 실제 삶은 아무도 몰랐어요. 그는 샤이하고 젠틀하고, 친절한 사람이었어요.  무대에서 보여준 모습과 전혀 달랐죠." "Queen"의 사진작가는 그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프레디는 무척이나 상처받기 쉬운 사람처럼 보였고 그것은 뜻밖이었습니다.  식탁에 앉아 손뼉을 치면서 어떤 요리가 나올지 궁금해 하는 모습을 보면, 천진난만한 어린애 같기도 하고요. 또 아주 과묵하고 내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샤이한 성격"이어도 타고난 끼는 감출 수 없는 법이어서, "머큐리"는 2가지 극단적인 모습을 오갔다. 대학 시절 그는 밴드 "스마일"의 보컬 "팀 스타펠"과 친하게 지냈는데, 강의실에서 종종 책상을 두들기면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낯선 사람이나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친한 사람들 앞에서는 크게 떠들면서 장난치는 경우도 많았다.

⑦ "Queen" 엠블럼을 디자인했다.

"머큐리"가 밴드 이름을 "스마일"에서 "Queen"으로 바꾸자고 제안했을 때, 다른 멤버들은 이 이름에 반대했다. "Queen"에는 "게이"라는 뜻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머큐리"가 이 이름을 고집해, 결국 다른 멤버들도 따랐다. 1973년, "머큐리"는 "Queen"의 1번째 앨범을 내기 직전에 "로고"도 만들었다. 그의 전공은 "그래픽 디자인"으로 "영국의 일링 예술대학"에서 "예술과 그래픽 디자인"으로 학사 학위를 받았다. 아마도 음악을 하지 않았다면, "그래픽 디자이너"로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 지도 모른다.

그가 만든 "엠블럼"에는 "Queen 4명 멤버들"의 별자리가 담겨 있다. 2마리의 "사자"는 사자자리인 "존 디컨ㆍ로저 테일러", "게"는 게자리인 "브라이언 메이", 두 요정은 처녀자리인 "머큐리"를 상징한다. "사자들"이 "Q"라는 글자를 붙잡고 있고, "게"가 "Q" 위에 놓여 있고, "요정들"이 사자 아래에서 쉬고 있는 그림이다. "Q"안에는 왕관이 있고, 전체 그림을 거대한 "불사조"가 위에서 지켜보며 보호하고 있다.

⑧ "패션 테러리스트"이자, "패션 아이콘"이었다.

"머큐리"는 항상 눈에 띄는 과감한 옷을 골라, "옷 못 입는 연예인" 순위에서 늘 상위권을 차지했다. "머큐리"는 집착적으로 "외모ㆍ옷"에 신경 썼다. 친구들과 함께 놀러가기로 할 때도 "어떤 벨트를 매는 게 좋은지"를 놓고, 1시간 넘게 고민할 정도 였다. 그는 공연 준비를 할 땐, "예산의 절반"을 "의상ㆍ조명"에 쏟아 부었다. 멤버들은 그의 독특한 의상 취향에 보조를 맞추느라, 진땀을 흘렸다.

그의 패션 취향은 남달랐다. 그는 남들이 소화하기 힘들어 선택하지 않을 옷을 골랐고, 고집적으로 입고 다녔다. 그래서인지 1970년대 "머큐리"는 영국에서 "옷 못 입는 아티스트"를 선정할 때마다 늘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Queen" 초기에 그는 "글램 록"을 지향해, "긴 머리ㆍ검정색 매니큐어ㆍ검은 눈 화장ㆍ몸에 딱 붙는 발레복"을 주로 입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는 "가죽옷"을 선호했고, 이후엔 "타이트한 트레이닝복ㆍ흰 러닝셔츠ㆍ화려한 재킷ㆍ백 바지" 등으로 변화해갔다. "Queen"의 콘서트는 "패션쇼"를 방불케 했다. 공연 막바지에 그는 "왕관ㆍ빨간 망토"를 걸쳤고, 그 나라 "국기"를 두르고 나오기도 했다. 독특한 옷을 계속 입은 결과, "머큐리"는 "레이디 가가" 이전 세대의 "와일드 패션 아이콘"으로 남았다.

⑨ "런던 히스로 공항"의 수화물 운반원이었다.

"머큐리"는 음악을 하기 전, "런던 히스로 공항"에서 수화물을 운반하는 일을 했다. 비행기에 실은 손님들의 짐을 공항으로 나르는 일이었다. 2018.09.05일, "브리티쉬 에어웨이의 히스로 공항" 수화물 운반원들은 살아 있다면 72회 생일을 맞았을 그들의 선배를 기리며, "I Want to Break Free"의 노래에 맞춰, 춤추는 영상을 공개했다.

⑩ 고양이를 10마리나 키운 "고양이 집사 (애묘인)"이였다.

고양이를 사랑해서 한 번에 10마리를 키운 적도 있다. 첫 솔로 앨범에 수록된 "Mr. Bad Guy"는 그의 "고양이들"에게 헌정한 노래이고, "Delilah"는 그가 가장 아끼던 "고양이"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1980년대 중반, 연인이었던 "바바라 발렌타인(오스트리아 배우)"는 이런 에피소드를 전했다. "하루는 메리가 런던에서 독일에 있던 제게 전화를 걸었는데, 프레디의 고양이 중 한마리가 죽었으니 적당한 때를 봐서 알려주라고 하더군요.  그는 걷잡을 수 없이 슬퍼하더니 당장 런던으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저 고양이가 죽었을 뿐이라고 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고, 끝내 런던으로 갔습니다."

1987년, "머큐리"에게 해고된 매니저 "폴 프렌터"가 거액을 받고, 영국 일간지 "더 선"에 "머큐리의 사생활ㆍ죽은 동성 연인"에 대해 폭로하자, 그는 극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이때부터 그는 새로운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면서, "고양이"에게 더 의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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