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로 마키아벨리 (Niccolò Machiavelliㆍ1469~1527ㆍ57세)"는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사상가ㆍ"군주론"의 저자로, "마키아벨리즘" 창시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권모술수의 대가"로 알고 있으나, 그는 억울하게 살고 있는 약자들에게 "더 이상 당하지 마라"고 조언했던 인물이다.
1. 니콜로 마키아벨리 (Niccolò Machiavelliㆍ1469~1527ㆍ향년 57세)
"군주론"의 저자 : 나폴레옹ㆍ무솔리니ㆍ루소 (프랑스혁명)ㆍ셰익스피어ㆍ애덤스미스ㆍ데카르트ㆍ스피노자가 독자 /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사상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함께 르네상스인의 전형)ㆍ마키아벨리즘 창시자ㆍ뛰어난 문장가ㆍ정치 철학자ㆍ외교가ㆍ역사가ㆍ권모술수의 대가ㆍ사자의 용기와 여우의 교활함ㆍ사건을 객관적 서술과 역사가의 냉철한 판단에 근거한 과학적 역사를 주장ㆍ"전쟁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이탈리아 인은 이제까지 현명한 군주를 둔 적이 없었기에, 뛰어난 군대를 만드는데 무엇 하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대해 비난 받아야 할 것은 군주입니다."
• 마키아벨리즘 :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 (사람으로 전환시 자기계발서) • 마키아벨리의 묘비명 (산타크로체 성당) : 어떤 찬사도 그의 이름에 걸맞지 않다 • 군주론 명언 : 인간은 은혜를 모르고, 배은망덕하고, 기회주의적이며, 이익에 밝지만, 제멋대로 행동한다 (그런 인간들의 통치기술)ㆍ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가난도 걱정도 병도 아니다. 그것은 생에 대한 권태다ㆍ인간은 대체로 내용보다는 외모를 통해 사람을 평가한다. 누구나 다 눈을 가지고 있지만, 통찰력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
1478년( 9세): 나폴리 침공 → 1493년 (24세): 프랑스의 진격 → 1494년 (25세): "메디치 가" 몰락 → "피렌체 공화국" 공직에 입신 → "10인 위원회"의 서기장ㆍ외교 사절 → 1498~1512년 : "피렌체 공화국" 제2재무성의 장관 (15년 일하고, 공직에서 퇴출ㆍ공화정→군주정 / 피렌체 : 직공ㆍ길드(동업자 조합)의 도시 → 1512년 (43세): "율리우스 2세의 신성 동맹군"에 의해 "피렌체 공화정"이 무너지고, "메디치 가"가 다시 "피렌체"의 지배권 회복(메디치 왕정) → "메디치 가"에 의해, 공직에서 추방 1512~1526년: 14년간 유배생활 ("군주론ㆍ로마사" 논고 저술) → 1526년 (57세): "카를5세(스페인 왕ㆍ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이탈리아 침공 → "교황 클레멘스 7세"는 14년간 유배생활을 하던 그를 "로마"로 불러 "5인 성벽관리 위원회"의 "서기장"으로 임명 →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로마"가 "함락"당함→ 피렌체로 돌아가, 깊은 상심으로 사망
"메디치 가의 군주"에게 바친 "군주론(Il Principe)ㆍ정략론ㆍ로마사 논고"등이 유명하다. 이 주저를 모두 가로지르는 그의 정치사상의 핵심은 바로 "주권자의 자율성"이다. "군주론(메디치 가에 상정)ㆍ로마사 논고(마키아벨리의 최고 저서)"는 "공화주의ㆍ군주주의"의 양 극단이 드러나는 저서로 엇갈린 평가를 받고, 그 실체에 대해서는 학술적으로 논란이 있다. 희곡 "만드라 골라"는 이탈리아 연극 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걸작이다. 1513년에는 "메디치 군주정"에 대한 반란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22일간의 모진 고문 후에 "교황 레오 10세"의 특사로 석방되었고, "산탄드레아"의 고향집에서 14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그 유배기간 동안 쓴 책이 "군주론"이다.
"로마 공화제"를 지향한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강력한 군주가 이끄는 "전제 정치"를 주장하였는데, 당시 현실에 자극받아 "통일을 위한 정치 체제의 출현"을 희망하였다. "군주론"에서 주장한 "마키아벨리즘"은 "군주권의 우위에 입각한 통치자의 지배 원리를 강조"하며, "정치적 목적의 달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의 선택을 광범하게 허용하는 것"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17세기 영국의 철학자인 "홉스"가 "리바이어던"에 채택하였으며,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을 비롯한 근대 초기의 각국 군주들이 이를 실행하였다.
※ 메디치 가문 : 15~17C "피렌체"를 주름잡던 부자가문ㆍ유력인 다수 배출ㆍ예술가 후원
4명의교황을 배출하였고, 수많은 예술가와 학자를 후원한 이탈리아의 가문ㆍ이탈리아 르네상스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금융업(최고 145조원)ㆍ교황청과 정경유착(국고은행)ㆍ예술을 사랑한 만석꾼 (레오나르도다빈치/ 미켈란젤로/ 갈릴레오 갈릴레이/ 보티첼리/ 도나텔로 지원)→ 최후 상속자인 "안나 메디치"가 재산ㆍ예술품을 피렌체 시(토스카나 정부)에 기증→ 조건 : 1점이라도 피렌체에서 옮기지 말 것ㆍ모든 민중의 유익을 위해 쓰일 것
"군주론 (Il Principe)"은 "메디치 군주정 (로렌초 2세)"에게 헌정한 책이지만, 로렌초 2세는 읽지도 않고 죽었고, 딸(카트린 드 메디치)가 "프랑스 왕가"와 결혼ㆍ왕비ㆍ군주론을 정독함→"노스트라다무스"가 "그대의 아들 3명이 왕이 될 것이다"고 예언→ 아들 3명이 차례로 왕이 되고, 섭정을 함.
2. "군주론 (Il Principeㆍ1512~1513 저서)"에 숨겨진 코드
"군주론 (Il Principe)"은 1512년 "스페인의 침공"에 의해 "피렌체 공화정"을 무너뜨린 "메디치 가"의 군주에게 바친 것으로, "나를 피렌체로 데려가, 공직에 써 주세요."라는 "메디치 가문"에 보낸 이력서이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의 과장과 권력자의 시점에서 본 책이므로, 조심해서 읽어야 하는 책이다. ① "군주론"은 메디치의 관심을 끌기 위한 "이력서"이다. ② "군주론"은 벼락 집권한 "메디치"의 약점을 저격했다. ③ "군주론"은 주목받기 위해, 당대 "인기 사조"를 반박했다. (당대 인기 사상을 반박하며, 자신을 어필하는 방식을 취함)
"군주론" 제18장 : 군주는 여우와 사자를 모방해야 한다. 함정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여우가 되어야 하고, 늑대를 혼내 주려면, 사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을 하라
이것은 "키케로"의 저서 "의무론 (De officiis) 1권 41절"의 사상을 정면 반박한 것으로, "불의가 행해지는 데는 2가지 방식이 있는데, "폭력과 기만"이다.
"기만"은 마치 "여우의 교활함"처럼 보이고, "폭력"은 마치 "사자의 사나움"처럼 보인다." → 이것을 하지마라.
3. 사 상
① 핵심 : "포르투나 (Fortunaㆍ운명)ㆍ비르투스 (Virtusㆍ자력)"의 힘에 대한 이야기
② "로마사 논고
"베르기니아 사건"에서 말하는 마키아벨리 생각ㆍ베르기니아 사건 (공화정ㆍ호민관ㆍ집정관 등의 귀족과 평민의 대립과 충돌 이야기)
③ 포르투나 (Fortunaㆍ운명)
강력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힘, 권력의 또 다른 면모, 권력은 포르투나에 의해 좌우된다 → 강자에 대한 메시지 : 강자들이여, 포르투나를 기억하라 → 잘난 척 하지 마라 → 자세를 낮춰라
④ 비르투스 (Virtusㆍ자력): 운명을 뛰어넘는 의지
약자에 대한 메시지 : 비르투스를 발휘하라→ 용감하고 과감성 있게 행동하라.
⑤ 약자의 생존법을 가리킨다.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법) → 권력의 속성을 폭로ㆍ우리 모두 군주가 되어야 한다.→ "프랑스 대혁명 (1789년)"으로 실현
• 강자에게 자신의 부당한 처지나, 요구사항을 섣불리 말하지 말라 • 용기를 가지고 저항을 준비하되, 내손에 무기가 쥐어지기 전까지는 침묵과 위장으로 일관하라 • 일단 무기가 내 손에 들어오면, 거리낌 없이 행동하라
4. 마키아벨리즘 :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
이 명제는 "모든 목적이 아닌 정치적으로 좋은 목적을 절대적으로 전제"하는 말이다. 공동체와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만 "권모술수"의 정치도 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좋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좋은 수단만으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좋은 수단만으로는 결코 좋은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냉혹하고 정직한 현실 인식은 현실에 적용해도 틀린 것이 아니다.
민중의 뜻을 배반하고, 헌법에 새겨진 주권재민의 원칙을 위반하면서까지, 힘센 당이 악법들을 일방적으로 그것도 악한 방법으로 통과시키려 할 때, 민중들은 좋은 방법으로 "민의"라는 좋은 목적을 지킬 수없다. 때론 폭력으로라도 악법 통과를 저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평화적이고 좋은 방법으로 좋은 세상(목적)을 만들 수 있었다면, 수많은 전쟁과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말은 "정치에 있어서만큼은 결과가 무척 중요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철학에서 "책임윤리"라는 말이 있듯이 정치는 책임을 지는 것이고, 책임은 결과로 판가름 난다. 100가지를 잘해도 1가지를 잘못하면 잘못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으로 생을 일관했으나 말년에 변절한 사람이 많았는데, 여지없이 친일분자로 분류된다. 정치는 나라의 존망이 걸린 것이기에 냉엄한 것이고, 목적이 중시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 격언이 문제가 있다면 좋은 목적, 즉 공공의 이익을 누가, 어떻게 결정할 수 있냐는 것이다. 오늘날 좋다, 나쁘다 부터 철학적으로도 쉽게 판단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더군다나 최고선이 무엇인지는 오리무중이다.
절대윤리와 상대윤리가 혼재하고, 수단과 목적도 명쾌하게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수단은 목적이 되고, 목적은 그대로 수단이 될 때가 있는 것이다. 공(共)적 이익이 무엇인가를 놓고도 논쟁은 끊이지 않는다. 사회주의자와 자본주의자의 싸움이 아직도 계속 중인 이유다. 하지만 당대에는 비교적 단순한 사회여서 선ㆍ악을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었으므로, 마키아벨리는 선각자가 아니라할 수 없겠다. 한편, "앤터리 패럴"은 "만일 마키아벨리즘에 비판과 의문이 제기된다면, 인간ㆍ근대성 자체에 대한 의심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 한가지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를 공격한다 해도 근대성의 문제로부터 이 세계를 구할 수 없다."고 함으로써, 마키아벨리를 옹호했다.
5. 정치 철학
"마키아벨리"는 지도자가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반드시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지도자가 기회를 인식하고 포착할 수 있으며, 상대보다 생각이 앞서게 되고, 그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운(運)은 모든 전략적 판단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 닥쳤을 때에는 운 때문에 최대한 세밀하게 세운 계획이 완전히 뒤집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역량 있는 지도자는 가능성이 기회로 변하는 때를 인식하고, 경쟁자나 상대방보다 더 빨리 반응하여 행운의 이점을 활용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외교와 군사 방면에서 크게 활약하였으나, 1512년 "율리우스 2세의 신성 동맹군"에 의해 "피렌체 공화정"이 무너지고 "메디치 가"가 "피렌체"의 지배권을 회복하면서, 공직에서 추방되어 독서와 글을 쓰며 지냈다.
이때 그는 "메디치 가의 군주"에게 바치는 "군주론"을 저술한 것으로 여겨진다.
1513년 발표한 "군주론"에서 위대한 군주와 강한 군대, 풍부한 재정이 국가를 번영하게 하는 것이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군주는 어떠한 수단을 취하더라도 허용되어야 하며, 국가의 행동에는 종교 및 도덕의 요소를 첨가할 것이 아니라는 "마키아벨리즘"을 발표하였다.
탈고(1513년)후 헌정(1517년)까지 걸린 시간이 4년 → "메디치 가문"은 정적인 "마키아벨리"를 쳐다보지 않음 → 재능을 알아본 "메디치 가문"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만남 신청 → "메디치"는 읽지도 않고, 그를 외면 (필사본(해적판) 형태로 돌아다니기 시작- 1532년 교황청의 허가를 받아, 필사본 중 1부를 출간) → 굴욕을 당하고 뛰쳐나가, 1518년 "루첼라이 정원(루첼라이 가문의 정원)"에서 "피렌체"의 청년 귀족에게 고전강독 교육 → 이곳에서 약자의 전쟁 시작 →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고, 피렌체 젊은이와 함께 "군주타도" 시작 → 약자의 대변인으로 변함
그의 헌정사에서 볼 수 있듯이 결국 "군주론"은 "피렌체"를 통치하는 "메디치 가문"의 일원이자 대인 "로렌초(Lorenzo the Magnificent)"의 손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i Piero de' Medici)"에게 헌정되었다. 그것은 "마키아벨리"의 개인적인 서신을 통해 알 수 있다. "메디치 가문"이 재집권하고, 몇 달 후에는 마키아벨리의 체포ㆍ고문ㆍ추방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그 서신은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에 재집권한 이듬해에 씌어졌다.
"군주론"의 헌정은 "프란체스코 베토리"(Francesco Vettori, 군주론이 인정되기를 바랐으며, 메디치 가문에 추천을 했던 마키아벨리의 친구)와 오랫동안 논의되었다. 원래 그 책은 어린 "로렌초"의 삼촌이었던 "줄리아노 데 메디치(Giuliano di Lorenzo de' Medici)"에게 헌정될 예정이었으나, 그는 1516년 사망하고 만다. 출간되기 전까지 "군주론"이 "메디치 가문"의 어느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았는지는 확실치 않다. "마키아벨리"는 그 내용을 글을 통해서 배운 것만이 아니라, 독특하게도 "실제 경험을 통한 군주의 본질과 위인들의 처신에 관한 그의 지식의 꾸밈없는 요약"이라고 서술하였다.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가 논한 바람직한 정치적 행위의 종류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이었는데 그러한 부도덕함은 여전히 만만찮은 논의의 주제이다. 비록 그것이 "군주에게 압제하는 방법을 조언"하지만, "마키아벨리"는 일반적으로 "자유로운 공화정을 원했다"고 생각된다.
몇몇 논평가들은 그가 "지도자의 부도덕하고 죄악이 되는 행위를 수용하는 것을 그가 이탈리아의 끊임없는 정치적 분쟁과 불안정한 정국의 시대에 살았다"는 것, "개인의 욕구와 인민의 빈곤을 묵살할 뿐만 아니라 혁신ㆍ진취성ㆍ(과학적)의문을 인과관계로 질식시키는(지금은 우리가 본성을 통제하는 것을 용인하는)", 중세 가톨릭의 "고전적 목적론"의 통제를 그가 완화시키는 것으로서 다수의 "행복ㆍ평등ㆍ자유"를 증대시켰음을 주장하며, 옹호한다.
다른 한편으로 Strauss(1958,11쪽)는 "만일 우리가 마키아벨리는 근본적으로 애국자 혹은 과학자라 인정해야만 할지라도, 우리는 그가 악의 교사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고 지적하였다. 뿐만 아니라 마키아벨리는 "그가 무엇을 하는지 알 만큼 사려 깊고, 그의 사리에 맞는 친구에게 그것을 시인할 만큼 너그럽다."고 했다.
그는 이상주의가 아닌 현실주의의 필요를 강조했다.
""군주론"에서 그는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운명을 통제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가 생각하는 최고의 윤리적, 정치적 목적을 설명하지 않는다. "마키아벨리"는 지도자가 되려는 자는 저절로 "영예와 명예를 목표로 삼는다"는 점을 당연시 했다. 그는 이러한 목표를 지도자의 "역량(virtue)과 사려분별(prudence)의 필요성"과 연관지었으며, 그러한 역량을 바람직한 정치와 진정한 공익에 필수적이라 보았다. 위인들이 그들의 역량과 사려분별을 발전시키고, 이용해야 한다는 것은 가톨릭 군주에게 하는 충고의 전통적인 주제였다. 그리고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더라도 Fischer(2000, 75쪽)가 말한 대로, "더 큰 역량이 운명에 덜 의존한다는 것"은 고전적으로 마키아벨리 당대의 "인문주의자의 상투적인 표현"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그의 의견에 의하면, 그들의 기독교 신앙 때문에 운명에 맡겨 버린, 그러므로 부적절한 지도자에게 맡겨버리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다른 저자들을 넘어선 그 이상의 것이었다. 그는 그러한 단어의 기존의 기독교적 의미와는 대조적으로, "역량과 사리분별"이란 단어를 "영예를 추구하는 것"과 "품성의 기상이 넘치는 뛰어남"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하였지만, 기존의 기독교적 의미의 유래가 되는 "그리스ㆍ로마의 개념을 따라가는 것"을 더욱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는 "야망과 위험의 감수"를 권장하였다. 그런 식으로 또 다른 인습과의 단절로서 그는 가능한 한 정치공동체의 군주의 목표로서 안정성뿐만이 아니라 근본적인 혁신 또한 논의하였다. 중대한 개혁을 해내는 것은 군주의 역량을 돋보이게 하고, 그에게 영예를 가져다 줄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분명히 "그의 당대에 이탈리아에는 중대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시대의 이러한 견해는 널리 공유되었다."
"마키아벨리"의 서술은 지도자들이 그들의 운명을 영예롭게 통제하도록 시도하는 것을 권장하였는데, 심각한 정도의 몇몇 상황에는 그러한 계획의 위험ㆍ필요악과 무법성에도 불구하고, 공동체를 정의하는 "형식과 명령"의 "새로운 정립(혹은 재정립)"을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 부당함과 부도덕함을 이용하여, 전적으로 새로운 국가를 혹은 심지어 새로운 종교를 세우는 것이 "군주론의 주된 주제"라고 말해지기도 하였다.
6. 로마사 논고 (Discourses on Livy)
"마키아벨리"가 정치역사에 대해 집필한 저서로, 원제는 "티투스 리비우스의 처음 10권에 대한 논고 (論考)"인데 이를 줄여서 "로마사 논고"라고 부르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1513년부터 이 책을 집필하기 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군주론"을 발표하면서, 1517년에 모두 완성시켰다. 이 저작은 고대 로마역사가 "티투스 리비우스"가 지은 "로마 건국사(총 140권)" 가운데, 15세기에 발견된 1권~ 10권까지 수록된 "공화정 시대 로마"의 사례를 참조하면서, 3권에 걸쳐. "공화정"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체 구분법"에 따라, 정치체제를 크게 "군주정ㆍ귀족정ㆍ민중정ㆍ참주정ㆍ과두정(寡頭政)ㆍ중우정(衆愚政)"의 6가지로 나누고, 각각의 정치체제가 타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들 각 정치체제의 특징을 겸비한 체제가 가장 최적이라고 주장했다. 고대 로마의 "공화정"을 그 모범사례로서 삼아, 역사의 흐름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정치체제가 바람직한 것인지를 고찰하고, 공화정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며, 현실주의 정치사상을 전개하고 있다. "군주론"에 가려 주목받지 못한 저작이지만, "근대 공화국 형성"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저서로 인정받고 있으며,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과 흡사하다.
7. 생 애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피렌체"에서 아버지인 "베르나르도 디 니콜로 마케아벨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1494년에 "메디치 가"가 몰락할 무렵, 공직에 입신하여 피렌체의 공화국 10인 위원회의 서기장이 되었으며, 외교 사절로서 "신성 로마제국" 등 여러 외국 군주들에게 사절로 파견되면서 독자적인 정치적 견해를 구축하였다.
1498~ 1512년까지는 공화국 "제2재무성의 장관"도 역임하였다. 외교와 군사 방면에서 크게 활약하였으나, 1512년 "율리우스 2세의 신성 동맹군"에 의해 "피렌체 공화정"이 무너지고 "메디치 가"가 "피렌체"의 지배권을 회복하면서, 공직에서 추방되어 독서와 글을 쓰며 지냈다.
이때 그는 "메디치 가의 군주"에게 바치는 "군주론"을 저술한 것으로 여겨진다. 1513년 발표한 "군주론"에서 위대한 군주와 강한 군대, 풍부한 재정이 국가를 번영하게 하는 것이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군주는 어떠한 수단을 취하더라도 허용되어야 하며, 국가의 행동에는 종교 및 도덕의 요소를 첨가할 것이 아니라는 "마키아벨리즘"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그의 정치사상은 일찍부터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때부터 그는 "코시모 루첼라이"라는 "공화주의파"의 주도하에 이뤄진 "오리첼라리 정원의 모임"으로 알려진 "피렌체 공화주의자"의 모임에 참여하게 되고, 그의 "로마사 논고"는 바로 "코시모 루첼라이"에게 헌정되었는데, 이 저작은 "피렌체 공화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저작이며, "로마 공화정"을 비롯한 공화국들의 긍정적 역량을 최대한 조명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1527년 사망하였다. 당시 민간에서는 "부활하고, 1일을 살다 죽었다"는 믿지 못할 전설이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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