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비스 프레슬리 (Elvis Aaron Presleyㆍ1935~1977ㆍ42세)"는 "로큰롤"의 탄생ㆍ발전ㆍ대중화에 앞장섰고, "팝ㆍ컨트리ㆍ가스펠ㆍ리듬 앤 블루스ㆍ로커빌리" 등 많은 음악 장르에서 성공작을 생산하였고, 음악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1. 엘비스 에런 프레슬리 (Elvis Aaron Presleyㆍ1935~1977ㆍ향년 42세)
"로큰롤"의 제왕ㆍ미국의 가수(빌보드 NO.1싱글- 18개)ㆍ작곡가ㆍ음악가ㆍ배우(31편에 출연)ㆍ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문화적 표상으로 평가된다. 역사상 가장 많은 음판을 판매한 단독 아티스트이다.
• 출 생 : 미국 미시시피주 투펠로(Tupelo) • 사 망 : 미국 테네시 주 멤피스ㆍ자택 "그레이스 랜드" • 사 인 : 심장마비 • 본 명 : 엘비스 아론 프레슬리(Elvis Aaron Presley) • 별 칭 : 킹 오브 로큰롤(King Of Rock And Roll)ㆍ더 킹(The King) • 신 체 : 182cmㆍ74kg → 117kg • 처 : 프리실라 프레슬리 (1945~ ㆍ배우) 1967~1973 이혼 / 딸 : 리사 마리 프레슬리 (1968~2023ㆍ가수) / 사 위 : 1988~1994 : 대니코프(뮤지션) 이혼 20일 후, 2번째 결혼 / 1994~1996 : 마이클 잭슨 (1958~2009ㆍ가수) / 2000~2000 : 니콜라스 케이지(1964~ㆍ배우) 결혼108일 만에 이혼 / 2006~ : 마이클 록우드 (기타리스트)
• 활 동 : 1953~ 1977 • 레이블 : 선 레코드ㆍRCA 빅터 레코드ㆍ HMV • 노 래 : 하트브레이크 호텔(Heartbreak Hotelㆍ1956)ㆍ하운드 독(Hound Dogㆍ1956)ㆍ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ㆍ1956)ㆍ제일하우스 록(Jailhouse Rockㆍ1957)ㆍ버닝 러브(Burning Loveㆍ1972) • 수 상 : "그래미 상"에서 3번 수상ㆍ36세에 그래미상 평생 공로상 수상
1953.07월(18세), "어머니의 생일 선물로 노래를 하고 싶다"는 "엘비스"의 계산된 핑계로 처음 음반을 발표했다. "샘 필립스" 소유의 음반사 "선 레코드"에서 자비로 4달러를 내고, "My Happinessㆍ That's When Your Heartaches Begin"을 녹음했고, 당시 레코딩 매니저였던 "머라이언 키스커"는 그의 모습을 보고, "구걸하러 온 떠돌이인 줄 알았다"고 회상했다. 1954.01월, 다시 "선 레코드"를 찾아가, "I'll Never Stand In Your WayㆍIt Wouldn't Be The Same Without You"를 녹음했다. "엘비스"가 지불한 "4 $"의 레코드는 2015.01월, "엘비스의 80번째 생일"에 경매로 부쳐 30만 $(약 3억 2500만 원)에 팔렸다.
"엘비스"에게는 "흰 팬티 페티시즘"이 있었는데, 아내였던 "프리실라"가 "내셔널 이그재미너 지"에 밝혔다. 이 사실을 밝히게 된 이유는 자신이 "흰 란제리" 등을 입고 찍었던 사진 중 일부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 사진이 나한테 있다면, 다 태워 버렸을 것"이라는 그녀는, 특히 그 사진이 딸인 "리사 마리"에게 들어갈까 봐 전전긍긍인데, 부부간 침실에서의 일이므로 딸에게는 더욱 보여주기 싫은 모양이다. "프리실라"는 "엘비스는 작고, 하얀 팬티를 입은 여성을 좋아했다. 그런 여성과 섹스를 하고 싶다는 구체적 욕망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보면서 즐겼다."고 말했다. "프리실라"는 "엘비스"의 그 같은 취향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침실에서 갖가지 특히 "흰 란제리"를 입고, 사진을 찍어 그를 기쁘게 해주었다.
2. 죽 음
1977.08.16일, "엘비스 프레슬리"는 "미국 테네시 주의 멤피스"에 위치한 자택 "그레이스 랜드"의 화장실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향년 42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엘비스"는 "마약ㆍ무분별한 술ㆍ담배" 등과는 전혀 거리가 먼 인물이었으나, "지병(변비로 인한 대변 중독)"을 앓아왔기 때문에, 평소 자신의 지병을 숨겨왔다.
1973년, "하와이" 자선공연 "엘비스 : 알로하 프롬 하와이" 이후, "엘비스"는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했다. 1973.10.09일, 아내 "프리실라"와 합의 이혼했다. 그는 이혼에서 오는 상실감을 이겨내고자 "폭식"을 했고, 한때 74kg이던 몸무게는 117kg에 이르렀다. 그는 잠들기 위해 "수면제"를 복용하고, 잠을 깨기 위해 "각성제"를 복용하며, 8개월 동안 9000개의 약을 먹은 것으로 전해진다.
"멤피스의 마피아"라 불리던 호위병 친구들은 "엘비스"의 추락을 부추겼다. 1973년부터 "엘비스"는 "각성제ㆍ진정제ㆍ각종 약물" 남용으로 인해 몇 차례 혼수상태에 빠졌다고 항간에 알려졌는데, 별 이유 없이 쓰러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2010년대 후반, "엘비스"가 사망한 진짜 원인이 밝혀졌는데, 그것은 "엘비스"는 평소에 "변비"를 지병으로 앓고 있었으며, 특히 "항문"에 문제가 많았다.
이 때문에 "엘비스"는 1975년경부터, "대변"을 거의 보지 못해, 심하게 고통 받았으며, 그 때문에 "엘비스"의 몸이 "변 중독"으로 인해, 퉁퉁 부어오르기 시작했으며, "주치의"가 "엘비스"에게 "항문 이식수술"을 권유했으나, "엘비스"는 연예인이라는 신분으로 인한 중압감 때문에 이를 망설이고 있었다. 결국 "엘비스"는 "변비"로 인한 "대변 중독"으로 인해, 그로 인한 여러 가지 "합병증"을 앓아왔고, 결국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실제로 "엘비스"의 시체를 부검해 본 결과, "대변"이 대량으로 검출되었고, "대장"이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진 데다가, "중독"으로 인한 "붓기 증상"이 발견되었다.
3. 영 향
"엘비스가 등장하기 전에는 일렉트릭 기타와 드럼으로 울리는 로큰롤은 보편화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Heartbreak Hotel〉이란 곡으로 로큰롤이 무엇인지를 알게 됐다. 젊은이들은 "로큰롤"에 열광했고, 음악은 선율 중심의 "스탠다드 팝" 음악에서 격렬한 리듬의 "로큰롤"로 바뀌게 됐다. "로큰롤" 이전의 주류 음악은 "스탠다드 팝" 음악이었다. "프랭크 시나트라"로 대표되는 이 음악은 50년대 초반만 해도, 세대 전체에 걸쳐 인기를 누린 음악이었다. 그러나 "엘비스"가 "로큰롤"을 대중화하면서, 젊은이들은 "스탠다드 팝"에서 "로큰롤"로 선회했다. "엘비스"가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이러한 "청춘의 음악적 독립을 이뤘다"는 공로 때문이다.“ 고, "임진모"는 설명한다.
"존 레논"이 "엘비스가 나타나기 전까지, 어린 시절 내게 영향을 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했을 만큼 "엘비스"는 "비틀스 멤버들"을 완전히 매혹시켰다. "폴 매카트니"도,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가 바로 구루(guru)였고, 우리가 기다려오던 구세주였다." "엉덩이 흔들기 춤"은 돈에 눈이 멀었던 매니저 "톰 파커"가 "엘비스"에게 "섹스는 베스트셀러야. 엉덩이를 흔들면 좋겠는데, 그러면 여자애들이 흥분할거야."라고, 말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4. 생 애
13살 때, "엘비스"는 "테네시 주 멤피스"로 가족과 같이 이사했다. 1954년, 이곳에서 음악 경력을 시작, "프로듀서 샘 필립스"와 "선 레코드"에서 녹음을 진행한다. "스코티 무어(기타리스트)ㆍ빌 블랙(베이시스트)"과 작업하여, "로커빌리ㆍ업 템포ㆍ백 비트 추동의 컨트리 음악ㆍ리듬 앤 블루스" 융합을 선도했다. 1955년, 매니저 "톰 파커 대령"의 주선으로 "RCA 빅터"와 계약을 성립한다. 1956.01월, 미국에서 첫 RCA 싱글 "Heartbreak Hotel"이 1위를 달성했다. 일련의 성공적인 전국 방송출연ㆍ차트정상 레코드를 통해 "엘비스"는 신흥 대중음악 "로큰롤"의 중진으로 부상했다. 인종 관계가 변모되던 당시 정력적인 노래 해석ㆍ성적 도발적인 공연 방식이, "인종 장벽"을 가로지르는 몹시 특이한 영향력의 배합과 더불어, 그에게 공전의 유명세를 안겨주었으되, 동시에 그를 논란의 인물로 만들었다. 1956.11월, 자신의 첫 장편영화 "러브 미 텐더"를 제작했다.
1958년, "군"에 징병되었다. 2년 뒤, 가장 성공적인 저작들을 배출하며, 음반 경력을 재발했다. 공연을 가끔 개최했으나, 매니저 "톰 파커 대령"파커의 지도에 따라, 1960년대를 할리우드 영화 및 사운드트랙 음반 제작에 진력했다. 그러나 그 작품 대부분의 평가는 가혹했다. 이후 7년간의 "라이브 공연" 공백을 허물고, 찬평 받은 컴백 스페셜 "엘비스"를 통해 무대로 복귀한다. 이후 "라스베이거스 전속 콘서트ㆍ고소득 순회공연"으로 확장되었다. 1973년, 단독 아티스트로서는 최초로 전 세계 콘서트 방송 "알로하 프롬 하와이"에 출연했다. 1977년, 처방받은 "마약 중독"이 건강을 심하게 악화시켜, 향년 42세에 자택에서 사망했다.
5. 가수 경력
① 선 레코드
1953.07월(18세), "어머니의 생일 선물로 노래를 하고 싶다"는 "엘비스"의 계산된 핑계로 처음 음반을 발표했다. "샘 필립스" 소유의 음반사 "선 레코드"에서 자비로 4달러를 내고, "My Happinessㆍ That's When Your Heartaches Begin"을 녹음했고, 당시 레코딩 매니저였던 "머라이언 키스커"는 그의 모습을 보고, "구걸하러 온 떠돌이인 줄 알았다"고 회상했다. 1954.01월, 다시 "선 레코드"를 찾아가, "I'll Never Stand In Your WayㆍIt Wouldn't Be The Same Without You"를 녹음했다. "엘비스"가 지불한 "4 $"의 레코드는 2015.01월, "엘비스의 80번째 생일"에 경매로 부쳐 30만 $(약 3억 2500만 원)에 팔렸다.
1954.07월, "선 레코드사"의 사장 "샘 필립스"는 "로큰롤 시장을 키우려면, 로큰롤을 흑인처럼 부르는 백인 가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엘비스"의 재능에 좋은 인상을 받았던 "음반사의 여직원"을 통해 그를 소개받는다. "샘 필립스"는 그에게 "스코티 무어(기타 연주자)ㆍ빌 블랙(베이스 연주자)"를 주선하여 팀을 짰고, "엘비스"는 "블루스 가수 아서 "빅 보이" 크러덥"의 1946년 노래 "That's All Right"를 녹음해 데뷔 싱글로 발표했다.
1954.07.10일, 밤 9:30분경, 노래가 "멤피스"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방송되자, 청취자들의 엽서와 전화가 폭주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무대에 올라, "멤피스" 인근에서 이름을 알렸다. "엘비스"는 "필립스"와 함께 "데모 곡"을 만들고, 여러 훈련을 받았다. 1955년, 가을까지, "선 레코드사"의 소속으로 순회공연을 하던 "엘비스"는 그해 11월, 미국의 거대 레코드사인 "RCA 빅터"와 계약을 체결했다.
② RCA 빅터 레코드사
1955년, 가수 "행크 스노"의 매니저이자, 공연 프로모터였던 "톰 파커 대령"과 만났다. 그해 11월, "톰 파커 대령"의 권유로 "선 레코드"에서 메이저 레이블 "RCA 빅터"로 이적했다. 1956.01월, "RCA 빅터"에서의 1번째 녹음에서는 "쳇 앳킨스(기타 연주자)ㆍ플로이드 크래머(피아노 연주자)ㆍD.J.폰타나(드럼 연주자)"를 포함한 실력 있는 세션들이 참여해 완성도를 높였다. 같은 달, "RCA 빅터"를 통해 발표한, 데뷔 싱글 "Heartbreak Hotel"은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8주 동안 정상에 머물렀고, 곧바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엉덩이 흔들기 춤"은 돈에 눈이 멀었던 매니저 "톰 파커"가 "엘비스"에게 "섹스는 베스트셀러야. 엉덩이를 흔들면 좋겠는데, 그러면 여자애들이 흥분할거야."라고, 말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1956.03월, "톰 파커"와 정식으로 매니저 계약을 체결했고, 데뷔 음반 "Elvis Presley"를 발표했다. 이 음반은 1956년 "미국 빌보드 앨범 차트" 1위에 올랐고, "빌보드 음반차트" 1위에 오른 1번째 "로큰롤 앨범"이 됐다.
1956.10월, "엘비스"는 싱글 "Love Me Tender"을 발표했고,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기록했다. 1956.11월, 나이 22세에 "로버트 D.웹"이 감독한 영화 "러브 미 텐더"에서 주연을 맡아 데뷔하였다. "타임"은 영화를 찍는 그를 "소시지인가? 분명히 매끈하고 촉촉해 보이는데. 180cm에 77㎏짜리 소시지에 대해 들어본 일이 있는가."라며 독설했다. "엘비스"는 1956~1969년까지 대부분 뮤지컬이거나 노래를 중요한 소재로 삼은 31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그의 인기는 1957년에도 계속되었고, "멤피스의 흑인 빈민가"에서 10대를 보낸 "엘비스"는 10만 달러의 거금을 지불하고, "멤피스"에 "그레이스 랜드"라는 저택을 구입하였다. 1957년, 한 해에만 "Too MuchㆍAll Shook UpㆍJailhouse Rock"으로 연결되는 3곡의 "빌보드 싱글차트" 1위를 히트시켰다. 특히 "Jailhouse Rock"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교도소 로큰롤"이라는 동명의 영화로 제작, 주연배우로 출연해 흥행에도 성공했다.
③ TV 출연
1956.06월, "엘비스"는 "NBC TV"의 "밀튼 벌 쇼"에 출연해, 엉덩이와 다리를 흔들며, 기타를 메고 히트곡 "Hound Dog"을 불렀다. 1956.07.01일, "엘비스"는 "NBC TV"의 "스티브 앨런 쇼"에 나왔다. 흰 나비넥타이에 검정 연미복 차림으로 출연한 "엘비스"는 "Hound Dog"를 불렀지만, 방송에 나간 시간은 1분도 안 됐다. "앨런"은 녹화 뒤, "재능도 없고, 바보 같은 가수"라고 혹평했다. 이튿날 "싱글 레코드"로 녹음된 이 노래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엘비스"가 경쟁 쇼에 먼저 나간 것에 화가 난 "설리번"은 "내 쇼에는 절대로 그 자를 출연시키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나. 2주 만에 말을 바꿔, "엘비스"에게 5만 달러를 주고, 3회 출연 계약을 맺었다. 1956.09.09일, "에드 설리번 쇼"의 첫 출연 때, "엘비스"는 "Hound DogㆍLove Me Tender"를 불렀다. "설리번 쇼"의 명성에 한창 떠오르던 "엘비스"의 이름값이 합쳐져, 무려 5,500~ 6,000만 명의 사람들이 공연을 시청했고, "미 TV" 역사상 가장 높은 82.6%의 시청률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전문가들은 "프레슬리의 쇼 출연이 대공황과 2차 대전을 겪은 구세대와 베이비붐 신세대 간의 갭을 이어주는 징검다리였다"고 설명한다. 방송사가 "엘비스"의 허리 윗부분만을 보여줬기 때문에, 그의 모습은 당시 화면에 절반밖에 나오지 못했다. 연출자 "루이스" 말로는 "그가 춤을 출 때, 여성 팬들의 눈길을 끌려고, 바지 속에 콜라 병을 넣는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957.01월, "설리번"은 마지막으로 출연한 "엘비스"에게 무려 7곡을 부를 시간을 내줬다.
④ 군 복무
1957년 말, "미국 국방부"로부터 "징집영장"을 받았다. "미 국방부"에서는 그의 인기를 활용하기 위해, "연예 사병"으로 복무하기를 권했지만, "엘비스"는 외부의 시선을 의식해, 그냥 "일반 전투병"으로 복무하기로 결정했다. 1958.03.24일, 머리를 깎고, 군복을 입는다. 가을, "엘비스"는 기초 훈련을 마치고, "독일연방공화국" 내에 소재하는 "제1기갑사단 소속 미군기지"에 "소총병"으로 18개월 복무하였다. 수만 명의 여성 팬이 "엘비스"의 근무지 "독일"까지 따라갔을 정도로 인기는 지속되었다. 군에 있는 동안, 어머니가 사망하자, "엘비스"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실의에 빠졌지만, 1959.09월 연회에서 훗날 아내가 되는 소녀 "프리실라"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⑤ 가수 복귀
1960.03.02일, "엘비스"는 "독일"에서 군 생활을 마치고, "미국 뉴저지의 미 육군 포트 딕스 기지"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귀국했다. 1960.03.05일, 제대한 지 불과, 보름 만에 "내슈빌의 RCA 스튜디오 B"에서 뽑아낸 싱글 "Stuck on You"는 발매와 동시에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가장 상위권을 점령했다. 곧이어 "It's Now or NeverㆍAre You Lonesome Tonight?" 같은 발라드곡이 포함된 "Elvis is Back!"도 "빌보드 음반 차트" 2위에 등극하면서, 성공을 거뒀다. "It's Now or NeverㆍAre You Lonesome Tonight?"은 차례로 "빌보드 싱글 차트"의 1위를 차지했다. "엘비스는 섹시하게 노래하지 않았다. 외설적으로 노래했다"라는 평과 함께했다. 데뷔 시절의 인기 요인이었던 빠른 템포의 곡에서 벗어나, "스탠더드 팝" 계열의 곡으로 변신을 꾀했다.
1960.03.12일, "프랭크 시나트라 쇼"가 마련한 "Welcome Home Elvis" 프로그램에서 "엘비스"는 "록 가수"답지 않게 턱시도ㆍ정장 차림으로 출연해, 자신이 "국민가수"로 지향점을 조정하고 있음을 알렸다. 1960년대 초ㆍ중반, "엘비스"는 "가수"로서의 활동보다는 "영화배우"로서 활동했고, 그의 복귀 후 1 번째 영화는 미국 군인으로서의 공익적 이미지를 옮겨온 "지아이 블루"였다.
1961년에는 영화 "블루 하와이"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61.06월, 발표한 또 하나의 히트 음반 "Something for Everybody"로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한 데 이어, 그해 10월에 발표한 동명 영화의 사운드트랙 "Blue Hawaii"는 "빌보드 차트"에서 20주간 1위, TOP 10 차트에서 39주간 머무는 성공을 자랑했다. 음반에 수록된 발라드 넘버 "Can’t Help Falling in Love"도 큰 인기를 누렸다.
"할리우드 배우"로서의 활동에 집중한 1960~ 1967년에, "엘비스"는 음악적으로 심각한 "슬럼프시기"를 겪었고, 1965년 "비틀즈"가 "엘비스의 캘리포니아 자택"을 방문해, "잼 세션을 나눴다"는 것이 호사거리가 됐을 뿐, 영화 출연 외에는 은둔ㆍ칩거 생활이 계속되었다.
1967.05.01일, "엘비스"는 "독일 군복무" 중에 만난 22세 소녀 "프리실라"와 결혼했다. 이듬해, 외동딸 "리사 마리"가 태어났지만, 결혼 생활은 5년 만에 파경을 맞는다. 1968.12.03일, "NBC TV"는 "엘비스"의 복귀 프로그램을 특집 방송으로 편성했다. 가수로서 복귀를 선언한 "엘비스"는 컴백 공연을 통해, 재기에 성공했다. 1969.07월, "라스베이거스"에서 4주간 총 57회의 공연을 선보였고, 13만 명의 관객이 동원됐다. 8월에 발매한 싱글 "Suspicious Minds"는 "엘비스"의 18번째 "NO.1 싱글"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이 곡은 "엘비스"가 기록한 마지막 "빌보드 NO.1 싱글곡"이다.
1969년에 연속 출연한 "차로ㆍ습관의 변화"를 끝으로, 더 이상 영화 출연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1970년, "6회에 걸친 투어" 중 총 2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고, "존 레논ㆍ밥 딜런ㆍ조지 해리슨ㆍ데이비드 보위ㆍ아트 가펑클" 등이 함께 출연한, 1972년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의 4회 공연도 완전 매진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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