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릴린 먼로 (Marilyn Monroeㆍ1926~ 1962ㆍ36세)"는"금발의 백치미인" 컨셉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실제로는 똑똑했다고 한다. "육체파 스타"의 이미지가 강하게 베여있지만, 사실 "먼로"는 의외의 수준 높은 지성을 가진 스타였다. 어쩌면 "아서 밀러"와의 결혼도 그와 대화할 수 있는 지성을 가졌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1. 남편 (3명)
① 1942~1946 (4년ㆍ16~20세): 짐 도허티 (이혼ㆍ1926ㆍ동갑?): 항공사 정비공 ② 1954~1955 (1년ㆍ28~29세): 조 디마지오(이혼ㆍ1914ㆍ12살 차) : 메이저 리그 뉴욕 양키즈 야구선수 ③ 1956~1961 (5년ㆍ30~35세): 아서 밀러 (이혼ㆍ1915ㆍ11살 차): 미국의 양심을 대표하는 극작가ㆍ세일즈맨의 죽음 ④ "아인슈타인"과 염문설 : "아인슈타인"은 "먼로"보다 47살이나 많다.
⑤ 아이를 낳을 수 없었던 이유 : 3번의 결혼 생활에도 "먼로"가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이유는 10대 때부터 거듭된 "낙태 수술"로 자궁이 엉망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조 디마지오ㆍ아서 밀러"와 부부 관계를 유지하면서, 몇 차례의 임신이 있었지만, 이러한 문제 때문에, 번번이 "유산"으로 끝나고 말았다.
2. 결혼 (3번)ㆍ이혼
① 1942~1946 (4년ㆍ16~20세): 짐 도허티 (이혼ㆍ1926ㆍ동갑?): 항공사 정비공
첫 결혼은 1942년, 16세 때 "항공사 정비공"으로 일하던 "짐 도허티"와 치렀다. 이 결혼은 당시 "먼로"의 위탁 부모가 타주로 이사를 가야 하는데, "먼로"를 데려가지 못하는 상황이어서 일어난 일이었다. 한마디로 차마 아직 미성년인 여자아이를 내버려 두고 가기가 미안해서, 이웃의 청년과 급하게 짝을 맺어 준 것이었다. "짐"의 부모, 특히 어머니가 "먼로"가 성실하고 정숙한 처자라고 환영을 하며, 결혼을 빨리 치르도록 종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4년 만에 "먼로"가 모델 일을 하는 문제로 헤어졌다. 훗날, "짐 도허티"는 "여전히 먼로를 사랑합니다만, 먼로에게 빠진 것은 아니에요"라는 말을 남겼다.
② 1954~1955 (1년ㆍ28~29세): 조 디마지오 (이혼ㆍ1914ㆍ12살 차): 메이저 리그 뉴욕 양키즈 야구선수ㆍ1941- 56경기 연속 안타ㆍ1955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
이후, 전설적인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와 2번째 결혼을 했으나, 결혼 274일 만에 이혼했다. "디마지오"는 이미 전성기가 끝난 상태였고, "먼로"는 한창 절정의 인기를 누릴 때였는데, 이것이 한 때 야구선수로서 큰 영광을 누리던 "디마지오"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유명한 일화로 "먼로"가 많은 청중에 둘러싸여 환호를 받으면서, "이 기분을 당신은 모를 거예요"라고 하자, "디마지오"가 "잘 알아"라고 대답한 일이 있었다.
이처럼 둘 다 자존심이 세서 자주 다투다가, "디마지오"가 야구 배트까지 동원해서, "먼로"를 상습적으로 폭행하기에 이르렀다. 어찌나 맞았는지 이 시절의 "먼로"는 얼굴의 멍을 감추기 위해, 늘 짙은 화장을 해야 했다고 한다. 부상으로 쉬어야 했던 "디마지오"가 신혼여행 겸 팬 사인회로, "먼로"와 함께 일본에 갔는데, 계획에 없이 "한국"의 최전선 장병위문공연 제의가 들어왔고, "먼로"가 거기에 응해서 위문공연을 갔다.
둘 사이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상황인 1954.02월 실시한, "한국 위문공연"부터 본격적으로 틀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위문공연을 본 후부터, "디마지오"는 "먼로"를 계속해서 닦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1954.02.12일, 대구 동촌비행장으로 들어와서, 10여 곳에서 미군병사들을 위한 위문공연을 했다) 영화 "7년만의 외출" 촬영 현장에 따라간 "디마지오"는 "먼로"가 환풍기 씬을 찍는 것을 보고, "먼로"에게 화를 내서, 둘이 큰 소리로 다투는 모습이 알려지기도 했다.
실제로 "디마지오"의 친아들마저도, 훗날 이에 대해 증언하며, 아버지를 비난했을 정도였다. "조 디마지오"는 "먼로" 사후, 매주 3번씩 "먼로 무덤"에 꽃을 바치며, 그리워했다. 유언 중에, "이제 먼로를 다시 만날 수 있겠군."이라는 말도 유명하다. 또한, "케네디 가문의 형제(존 F.케네디ㆍ로버트 케네디)"와 "먼로"의 스캔들을 사실이라고 믿어서 평생 "케네디 가문"을 증오했고, "케네디 대통령"과 악수도 거절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지켜줬어야 하는 건데 그러지 못했다고 평생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③ 1956~1961 (5년ㆍ30~35세): 아서 밀러 (이혼ㆍ1915ㆍ11살 차): 미국의 양심을 대표하는 극작가ㆍ국제펜클럽 회장ㆍ세일즈맨의 죽음ㆍ시련ㆍ다리에서 바라본 풍경
이후 1956.07월, "먼로"는 극작가 "아서 밀러"와 3번째 결혼을 한다. "아서 밀러"는 "세일즈맨의 죽음"을 쓴 희곡 작가였으니, 말 그대로 "당대 최고의 지성과 당대 최고의 육체의 만남"으로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이 결혼도 곧 실패로 끝난다. "금발의 백치미인" 컨셉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실제로는 똑똑했다고 한다. "육체파 스타"의 이미지가 강하게 베여있지만, 사실 "먼로"는 의외의 수준 높은 지성을 가진 스타였다. 어쩌면 "아서 밀러"와의 결혼도 그와 대화할 수 있는 지성을 가졌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어울리지 않아 보인 두 사람은 여러 공식 모임에서 만난 인연을 통해,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아서 밀러"는 "먼로"에게 팬의 한사람으로서, 진심으로 "먼로"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그녀를 위로했고, "먼로"는 그의 자상함에 저절로 반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자신을 "섹스 심벌"이 아닌 "인격체"로 대해준 "아서 밀러"와 사랑에 빠진 "먼로"는 결혼을 결심하게 되고, 결혼 이후에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 위해, "아서 밀러"의 종교인 "유대교"로 개종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행복했던 순간은 잠시, "아서 밀러"는 "먼로"가 스타 시절부터 겪어온 "스트레스와 신경쇠약"을 받아주는데,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관계 완화를 위해, 두 사람은 아이를 가지려 했지만, 임신한 지 3달 만에 "유산"하게 되면서, 둘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고, 3년 반 넘게, "먼로의 정신병"을 옆에서 지키기 힘겨워했던 "아서 밀러"는 결국 그녀와 이혼을 선택하게 된다.
"밀러"가 "매카시즘(1950~1954년까지 미국을 휩쓴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에 휘말려서, 고생한 것이 이혼 사유 중 하나이다. "밀러"가 "매카시즘"에 휘말렸을 때, 의원 1명에게 "당신의 아내인 먼로와 사진을 찍게 해주면 당신을 사면해주겠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밀러"는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그녀가 죽은 뒤, "밀러"는 "전락 이후(After the Fall)"라는 작품을 발표하고, 여기서 그녀를 끝까지 도와주지 못했던 것에 대한 죄책감을 드러내었다.
④ 1961~1962.08.05 : "아서 밀러"와 이혼 이후
"밀러"와 이혼 후, 촬영 중에 대본을 못 읽을 정도로, "각성제ㆍ음주"를 하여, 정신이 망가진 "먼로"는 이런 저런 추문에 휩싸였다. 결국, 영화 촬영을 고의로 펑크 내고, "존 F.케네디 대통령 생일잔치"에 참가해서, 노래를 부르는 추문을 일으켜서, 바로 영화 촬영장에서 해고되었고, 이후 은둔생활을 하였다. 80년대 후반, 발견된 미공개 사진이나 "디마지오 아들"의 회고에 의하면, 은둔생활 동안 약물을 끊고 재기의 노력을 했다고 한다.
1962.05.19일, "먼로"는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케네디 대통령"의 45번째 생일 파티에 특별 출연해, "Happy Birthday Mr President"라는 자작곡을 부르게 된다. 이날 그녀는 속옷도 입지 않은 채, 꽉 끼는 "금색의 실크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 "케네디 대통령"을 비롯한 좌중을 놀라게 했다. 매혹적인 몸짓과 아름다운 그녀의 목소리는 "매디슨 스퀘어 가든"의 모든 이를 홀리기에, 충분했다. 그녀의 공연이 끝난 후, "케네디 대통령"과 동생 "로버트 케네디"는 "먼로"와 만남을 갖게 되었다. 이 만남은 이후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락 내리는 "케네디가 형제와 먼로"의 염문설로 발전하게 된다.
"존 F.케네디"는 많은 기자들이 있는 와중에, "먼로"와 마지막 만남을 가졌다. 그때 기자 하나가 달려들어 사진을 찍어 댔는데, 미국 정부에 의해 압수되었고, 그중 일부만 공개를 허락받았다. 당시 무대 뒤에 서 있던 "케네디 대통령의 경호원"은 "케네디 암살 50주년"을 기념해서 한 인터뷰에서 "내 기억에 남은 것은 그 여자의 엉덩이와 고혹적인 목소리뿐이었어. 그리고 그 때의 내 나이에는 그 정도로 충분했지."라는 말을 남겼다. 한편 "재클린 케네디(영부인)"은 "존 F.케네디"와 "먼로"의 사이를 눈치 채고 있었고, 남편의 생일파티에 "먼로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격노하여, "당신 혼자 가세요."라고 쏘아붙이고는 말을 타러 갔다. 그리고 얼마 후, "먼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했고, 남편과의 사이도 다시 상당히 진전되었다고 한다. (이때 입었던 "드레스"는 1999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대략 14억에 팔렸으며, 2016.11월 "줄리어스 옥션 경매"에 다시 부쳐져, 대략 20~30억 선에서 낙찰될 예정이다.)
3. 생 애
1926년, "LA 카운티 병원"에서 아버지 "마틴 에드워드 모턴슨(노르웨이 인)"과 정부였던 어머니 "글레디스(스코틀랜드 인)"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어머니 "글레디스"가 "먼로"를 양육했고, 생부는 양육의 의무를 방기하였다. 어머니는 "할리우드 스튜디오"에서 "화학 약품"을 다루는 일을 하였다. 7살 때, 어머니가 "우울증"으로, "정신병원"에 수용되면서, 어린 시절 총 7군데의 가정에서 양육되었다. "고아원ㆍ양부모" 집에서, 양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등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힘든 환경에서 도피하고자, 같은 학교 연극반이었던 "짐 도허티"와 16세 때 결혼했지만, 이런 결혼이 늘 그렇듯이 4년 만에 헤어졌다.
"먼로"를 맡아 기르던 위탁 가정의 부모가 멀리 이사를 가는데, 법적인 문제로 "먼로"를 데려갈 수 없고, 그렇다고 아직 어린 소녀를 그냥 내버릴 수도 없어, 급히 결혼을 시킨 것이라고 한다. 남편 "짐 도허티"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집을 떠난 후, "군수공장"에 취직하여 생산직 노동자로 일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방위 산업체"에서 페인트 분무기를 뿌리는 일을 하다가, "부대 사진작가"의 눈에 띄어, 모델이 되었다. 달력의 "누드모델"로 일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47년 "쇼킹 미스 필그림"이라는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여, 스크린에 데뷔한다. 그 후로도 단역을 전전하다가, 1950년 "아스팔트 정글(The Asphalt Jungle)ㆍ이브의 모든 것(All About Eve)"에 출연하여, 배우로서의 자질을 인정받는다. 1952년 "돈 보더 투 낙"에 출연했다.
1953년, "나이아가라"의 주연을 맡아, 폭발적 인기를 얻게 되는데, "20세기 폭스 사"는 엉덩이를 흔들며, 걸어가는 "먼로 워크"를 중심으로 화려한 선전을 전개, 그녀를 세계적인 "섹스 심벌"로 만들었다. 이후,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1953)ㆍ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1953)ㆍ돌아오지 않는 강(1954)ㆍ7년만의 외출(1955)ㆍ버스정류장(1956)ㆍ왕자와 무희(1957)ㆍ뜨거운 것이 좋아(1959)" 등의 영화에 출연했다. "먼로"가 마지막으로 남긴 영화는, "클라크 게이블"과 공동 주연으로 출연한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 (1961)"로, 당시 남편이던 "아서 밀러"가 각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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