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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 서양

3대 명품 브랜드 : 에르메스 (1837)ㆍ루이 비통 (1854)ㆍ샤넬 (1909)

by 당대 제일 2022.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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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名品)"이란, 뛰어나거나 이름이  물건이나 작품을 말하는 것으로, 현대에는 세계적으로 이름난 고가의 상품을 말하는데, "에르메스 (1837)ㆍ루이 비통 (1854)ㆍ샤넬 (1909)"이 여기에 해당한다.

 

1. 에르메스 (Hermès)

 로 고 : 마차 모양 로고를 사용하는 이유는 원래 "마구 용품안장"을 판매하는 회사였다.

국 가 : 프랑스 파리

창 립 : 1837

창립자 : 티에리 에르메스 (Thierry Hermes1801~187877)

품 목 : 가죽제품(지갑) / "그레이스 켈리제인 버킨"의 이름을 딴 "켈리 가방버킨 가방"이 유명하다.

에르메스

원래 ""에 필요한 용품을 취급하는 "마구상(마구 용품안장)"으로 시작한 "에르메스"는 오늘날 최상의 품질을 인정받는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자동차 산업이 발전하면서, 가방지갑과 같은 가죽제품으로 사업을 전환하여 성공하였다.

"에르메스""프랑스"에서 가방에 최초로 "지퍼"를 사용하여, 만들어 보급하기도 했다.

이는 "티에리 에르메스"의 손자가 "세계대전" "미국"을 방문했을 때, "미국"에서 지퍼를 보고 들여와서, 당시 "프랑스" "지퍼사용 가방 특허"를 내고 독점권을 행사하였다

"에르메스" 주식의 71%"에르메스 가문"이 소유하고 있다.

1801, 그는 "독일 크레펠드(Krefeld)"에서 태어났으며, 1828년 가족들과 함께 "프랑스 파리"로 망명하였고, 1837, "바스 듀 랑파르 거리(Rue Basse-du-Rempart)""마구상"을 열었다.

그는 이곳에서 "마차"를 끄는 ""에 필요한 용품과 각종 장식품을 판매했다.

그의 마구 제품은 정교한 품질로, 1837"세계 박람회"에서 1등 메달을 받았고, 전 세계 왕실과 귀족들에게 마구 용품을 납품할 정도로 품질을 인정받았다.

1880, "파리 포부르 생토노레 24번가"로 이사했고, 이곳은 오늘날 "에르메스"의 본사가 되었다.

 

2. 루이 비통 (LVLouis Vuitton)

 로 고 : 1896, "조르주 비통" "루이비통"의 이니셜인 "LV"를 결합하고, "별무늬" 복한 디자인의 "모노그램(Monogram) 캔버스"를 만들었다.

국 가 : 프랑스 파리

창 립 : 1854

창립자 : 루이비통 (Louis Vuitton1821~1892ㆍ71세)

품 목 :  트렁크가죽제품기성복신발시계보석액세서리선글라스

루이 비통

1854, 파리에 있는 "노브 데 카푸친느(Rue Neuve des Capucines)거리"에서 "루이 비통"에 의해 설립되었다.

1858, "루이 비통""트리아농 캔버스"로 된 가볍고 밀폐된 바닥이 평평한 트렁크를 제작했다.

이러한 "트렁크"가 나오기 전에는 상단이 "둥근 트렁크"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시장에 "루이 비통"은 여행 할 때, 마차에 쌓기 편하게 하기 위해 트렁크를 바닥과 상단 모두 평평하게 했다. 이런 디자인으로 인해 성공적으로 판매를 하고, "루이 비통" 상표의 이름을 드높이자, 타 여행용 가방 제작사들이 "루이비통의 디자인"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1821, "루이 비통""프랑스" 동부의 "프랑슈콩테(Franche-Comté)"에서 태어났다.

목공소를 운영하는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자연스레 나무 다루는 법을 익힐 수 있었다.

14살이 되던 해, "파리"에 대한 동경으로 무작정 "파리"에 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는 약 400km가 되는 거리를 무일푼으로 걸어가기 시작했고, 2년 후 "파리"에 도착했다.

1837, 그는 "파리"에서 한 가방 제조사의 견습생이 되었다.

그해, "파리"에는 "생제르맹(Saint-Germain) 철도선"이 개통되면서, 역마차에서 고속철도로 여행하는 시대로 변화했다.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귀부인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치마를 크게 부풀리는 속치마가 유행했기 때문에 짐을 싸는 것이 어려웠다이때 그는 하루에 13시간씩 귀족들의 여행 짐을 꾸리는 일을 했다많은 양의 짐을 싸는 데 탁월했던 그는 "나폴레옹 3" 부인인 "외제니(Eugenie) 왕비"와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1854, 그는 "외제니 왕비"의 후원으로, "뇌브 데 카푸신(Neuve des Capucines) 4번가"에 자신의 이름을 건 포장 전문 회사 "루이비통"을 열었다당시 트렁크는 뚜껑이 볼록해서 차곡차곡 쌓기가 어려웠는데, 그의 트렁크는 뚜껑이 평평하여 마차 위에 쌓기가 용이했다.

 

3. 샤넬 (Chanel)

 로 고 :  이름에 걸맞은 로고도 "가브리엘 샤넬"이 직접 디자인했다하나는 자신의 이름인 영문  "CHANEL"을 단순한 "산세리프 체"로 디자인한 "워드 마크". 또 하나는 2개의 "C"가 서로 대칭적으로 놓인 로고다. (가브리엘 샤넬은 어려서부터 "Coco"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2개의 로고는 "샤넬"이 세계 패션계에 던진 화두와 이념을 잘 드러내 보인다 먼저, 검정색과 흰색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단순하고 순수한 색의 대비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2개의 "C"가 이루고 있는 완벽한 대칭성이다. "샤넬"의 로고는 "향수ㆍ화장품ㆍ욕실용품"에만 사용되었다.  이는 여성을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옷으로부터 해방시키려고 했던 "샤넬"의 정신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국 가 : 프랑스 파리

창 립 : 1909

창립자 : 가브리엘 샤넬 (Gabrielle Chanel1883~1971ㆍ88세)애칭 : 코코 샤넬 (Coco Chanel)

그녀의 유해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독일"에 협력한 혐의와 조국 "프랑스"를 배신한 행위에 의해, "프랑스 고급묘지"에 묻히는 것을 거부당하여, 어쩔 수 없이 망명생활을 했던 "스위스 로잔"에 매장되었다.

제 품 : 향수보석기성복장신구

샤넬

26살의 재능 많은 "가브리엘 샤넬"이 자신의 첫 가게를 파리에 연 것은 1909년이다이후 그녀는 순조롭게 "패션 디자이너"로서 성공의 길을 걷는다그리고 1921년에 세계 패션계의 역사적인 사업을 시작한다. 바로 "샤넬 향수".

"샤넬"은 여성복에서 혁신을 이룬 것처럼, "향수" 이름을 짓는 데에서도 기존의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그녀는 단지 개발된 순서에 따라, "번호" 만으로 "향수" 이름을 붙였다당시 대부분의 "향수" 이름은 "봄의 욕망녁의 도취"와 같은 시적인 이름이 붙었다여기에 이미 "파리"에서 자신의 의상실이 유명하다는 사실에 자신감을 얻고, "샤넬"을 덧붙여 "향수" 이름을 짓게 된다.

1883, "소뮈르(프랑스 남서부의 오벨뉴 지방)"에서 태어난 그녀는 12세에 모친이 사망하는 바람에 아버지에게 버려져, 보육원수도원을 전전하면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시골마을인 "물랑"에서 바느질하는 노동자로, 고아원을 나온 그녀는 당시 그녀를 후원한 한 장교에 의해 예능계에 재능을 각성하게 되었다.

가수를 지망하면서, 카바레에서 노래하던 그녀는 "Ko Ko Ri KoQui qu'a vu Coco dans le Trocadero"라는 노래의 가사에서, 자신의 예명인 "코코"를 이름 앞에 붙여 사용했다그 후 예능계의 길을 잠시 접고, 당시 교제 중이던 장교인 "에튀엥느 발장"에 의해, "파리" 근교로 이주하여, 사교계로 이용되던 발장의 목장에서 머물렀다.

여기서 따분한 시간을 보내던 그녀는 모자의 디자인에 영감을 받아, "발장"의 후원으로 1909년에 "마르젤브 거리 160번지""모자 가게"를 개업했다1910, "파리의 캉봉거리 21번지""샤넬 모드"라는 "모자 전문점"을 개업한 그녀는 이때 "발장" 헤어져, 평생 연인으로 지낸 "아서 카펠(영국의 청년사업가)" 교제를 시작했다.

"샤넬 모드"의 개업자금은 "아서 카펠"의 후원이었다1918,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아서 카펠"과 얼마동안 동거 했던 그녀는 1919, "카펠"이 사고로 사망하자, 다시 혼자가 되었다.

1921, 본점을 "캉봉 31번지"로 확장한 그녀는 "조향사 에른스트 보"와 함께 "샤넬"의 첫 향수인 "No.5No.22"를 발표했다이 때 "피카소(화가)장 콕토(극작가)스트라빈스키(작곡가)" 등이 주최한 살롱에 출연한 그녀는 "사교계의 거물"이 되었다. 당시 화가였던 "마리 로랑생"이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현재 초상화는 "파리의 올랑쥴리 미술관"에서 전시 중이다1924년 이후, 6년간 교제하던 "영국 웨스트민스터 공작"과 만난 그녀는 "공작"의 보석애호 취미로부터 영향을 받아 모조 보석을 사용한 "쥬얼리"를 발표했다.

이때 "샤넬 슈트"도 발표해, 1934년부터 양산되기 시작했다이후 그녀는 "공작"과 헤어져, 여러 디자이너유력자들과 사귀었는데, 그녀와 사귄 남자들은 모두 급사하거나 파산했다. 이에 "샤넬""불행한 사자자리의 숙명을 가진 여자"라 불리기도 했다.

1939, 4,000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대기업으로 성장했으나, "노동인권"이 존중되지 않는 노동조건에 항의한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을 벌였다. 그녀는 이 충격으로 일부 점포를 제외하고는 사업을 접기로 해, 일시 은퇴했다. 이후 15년간 "샤넬""프랑스 패션계"를 떠났다.

1939,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1940년에 "프랑스""독일군"에게 점령당하자, 패전국 "프랑스"에선 친독계열의 "비시 괴뢰정부"가 들어섰다당시 프랑스인들 중에는 "독일군"에 대항해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며 고문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는 자가 부지기수였는데, 그녀는 "독일군 장교"와 애인관계로 지내면서, 그의 비호아래 타락적인 생활을 보냈다.

1944, "드골"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군연합군""프랑스"를 해방하자, 그녀는 "나치독"에 협력했다는 비난에 직면해, 고국을 탈출해, 애인과 함께 전후 수년간 "스위스 로잔"에서 망명생활을 보냈다이러한 경위로 현재도 "샤넬""나치스에 혼을 팔아넘긴 매국노"라는 혐오감이 "프랑스"에선 강하다.

1954, "스위스" 망명생활을 접고, "파리"로 돌아온 그녀는 "방도므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릿츠 호텔"에 거주하면서, 패션계로의 복귀를 꾀했다그녀의 "2차 대전" 당시 언동에 강한 혐오감이 팽배해 있던 당시 유럽에선 "매국노"라는 경멸과 "치독일"에 대한 혐오감이, 전쟁이 끝난 후 10여 년 간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이와 반대로 미국에서는 여성들의 사회진출과 맞물려 그녀의 참신한 패션은 열광적인 선풍을 끌었다1971, 거주하던 "파리 릿츠 호텔"에서 콜렉션을 준비하던 그녀는 88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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