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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인물

화가 : 박수근 (1914)ㆍ이중섭과 쌍벽ㆍ평생 가난과 투쟁

by 당대 제일 2022.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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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 (朴壽根ㆍ1914~1965ㆍ51세)"은 독학으로 미술 공부룰 했으며, 일평생 가난과 싸워야 했던 국민화가였다. 평범한 서민생활을 주제로 절제된 미학으로 그렸으며,  향토성 짙은 작품으로 가장 한국적인 현대 회화를 그린 작가로 평가받는다.

 

1. 박수근 (朴壽根1914~1965향년 51)

회백색을 주로 쓰면서, 단조로우나 한국적인 주제를 소박한 서민적 감각으로 충실하게 다루었고, 한국인 화가 중 가장 독창적이면서도 평범한 한국의 서민상을 주제로 삼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고향 강원도 양구군"에 그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건립되었다. 평생 가난에 시달렸으며, 자신의 화실조차 가지지 못했고, 개인전은 꿈도 꾸지 못했던 화가. 그러나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연달아 회고전이 열리고, 작품들은 고가로 팔리기 시작했다작품들은 오늘날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으며 가장 비싼 작품값을 기록하고 있다.

•  출 생 : 강원도 양구군 양구면 정림리     •  사 망 :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       학 력 : 강원도 양구보통학교 졸업

•  : 미석 (美石     종 교 :개신교(감리회)    수 상 : 1980년 은관문화훈장 (2등급)

 : 김복순 (1922~ 1979)       자 녀 : 딸 박인숙 (1946~ )아들 박성남 (1947~ )

  작 품 : 빨래터 (45억ㆍ2007.05)ㆍ시장의 사람들 (25억ㆍ2007.03)ㆍ노상 (10억ㆍ2006.12)ㆍ농악나무와 여인

"유화로 표현되지만 동양화임"이 분명한, 향토적 리얼리티를 발현한 작가로 평가된다이렇듯 그가 독창적인 시선과 화법을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가난으로 독학한 덕분이기도 했다. 동시대 화가 대부분이 일본을 통해 서양 미술을 배웠으며, 점진적으로 발전된 서구의 다양한 화풍을 일시에 습득하면서 자기만의 화풍을 창출해 내지 못했다

서민의 일상을 소박하게 담아낸 향토성 짙은 작품들로, 가장 한국적인 현대 회화를 그린 화가로 평가된다. 그의 그림들은 치밀한 계산 아래 구성되어 있음에도 인위적이지 않으며, 진실하고 다정다감하여 사람들에게 널리 사랑받고 있다. 오늘날에는 민족 화가로 여겨지지만, 생전에는 큰 평가를 받지 못하다 사후에야 인정받은 불운한 예술가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박수근2

평범한 서민 생활의 모습을 주제로 삼은 작품을 많이 그렸다소재를 극도로 단순화하고, 공간감을 무시하며 대상을 평면화한 화풍을 통해 절제의 미를 화폭에 옮겨 민족 정서를 표현했으며, 질박한 색채와 바탕의 화강암 같은 "마티에르"가 특징이다"이중섭"과 쌍벽을 이룬 작가지만, "이중섭"의 자유분방함에 반해 최대한 절제된 화면효과를 추구했다.

1932년 제11회 조선 미술 전람회에 입선함으로써 화단에 등장하였다해방 후 월남하여, 1952년 제2회 국전에서 특선, 미술협회전람회에서 입상하였다1958년 이후, 미국 월드 하우스 화랑조선일보사 초대전마닐라 국제전 등에 출품하는 등 국내외 미술전에 여러 차례 참가하였다1959, 8회 국전 추천 작가가 되었고, 11회 국전에서는 심사위원이 되었다.

2. 향토색 짙은 한국적 회화

1914, "강원도 양구"에서 "박형지"와 어머니 "윤복주"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5세 때 마을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웠고, 7세 때 "양구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공부에는 흥미가 없었고 미술 성적만 좋았는데, 일찍부터 "밀레의 만종"에 감동 받아, 그같은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했다고 한다"자연에 대한 애정소박함일상의 평범성""밀레"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되었다고 여겨진다"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리려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사는 다채롭지 않다 나는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린아이의 이미지를 즐겨 그린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여 미술학교에 진학하고자 했으나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집안이 곤궁해져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보통학교의 일본인 교장과 담임 선생이 그의 재능을 아껴 계속 그림을 그리게 독려했고, 그 결과 1932"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봄이 오다"로 입선했다이른 봄 고향의 농가를 수채화로 그린 작품이다당시의 화가 대다수가 일본 유학을 다녀오면서 서양화풍을 익혀 온 데 반해, 시골집에서 독학으로 그림을 그린 그는 일본풍이나 서양화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다이로써 오히려 향토색 짙은 한국적 회화를 확립할 수 있었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화가로 입문했으나, 평생을 싸우게 될 가난으로 꿈을 제대로 펴지 못했다어머니가 병환 끝에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가 돈을 벌고자 금강산으로 떠나자, 어린 동생들이 그의 몫으로 남겨졌다그는 "춘천포천" 등지를 떠돌며, 날품팔이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그림을 그렸다이런 상황에서 그는 1943년까지 매년 "선전"에 작품을 출품했다"일하는 여인(1936)(1937)여일(麗日1938))" 등이 입선하는 성과를 거두었고, 이즈음부터 본격적으로 유화를 익히기 시작했다.

1940, 그는 윗집에 살던 "김복순"이라는 여성과 결혼하고, "평양시청"에서 "서기"로 일했다직장이 안정되고, 상사병으로 앓아누울 정도로 좋아했던 여인과 맺어진 그는 인생의 가장 행복한 한때를 보냈다1942년 아내와 아들을 그린 "모자(母子)실을 뽑는 여인" 등 아내를 모델로 많은 그림을 그렸다1945.08.15, 독립하자 그는 "평양"을 떠나, "강원도 금성여자중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그러나 "금성"은 북한 체제 아래 있던 지역으로, 화가이자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그는 북한 당국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결국 "625 전쟁"이 터지자, 피난길에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고, 그는 홀로 서울에 도착했다가족과는 1952년에야 극적으로 상봉했다.

그는 서울에서 "8PX"에서 미군의 초상화를 그리며, 생활을 꾸렸다1953,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이 특선을, 1954"풍경절구"가 입선하면서 초상화가 생활을 접고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초상화가로 일하면서 간신히 펴진 생활은 다시 곤궁해졌고, 가족의 생계는 아내의 생활력에 의존해야만 했다그는 연필을 살 돈이 없어 큰딸이 쓰던 "몽당연필"로 데생을 했다고 한다.

이 시기 그는 전업작가로서 생활을 꾸려나가기 위해, 외국인이 드나드는 "반도 호텔의 반도 화랑" 그림을 내다 걸었다한국의 토속적 정감이 물씬 배어나는 그의 그림은 외국인에게 조금씩 팔려 나갔다미국의 "마가렛 밀러(잡지기자)마리아 핸더슨(미 대사관 문정관 부인)실리아 지머맨(미국 미술상)" 등이 특히 그의 그림을 좋아해, 주 고객이 되었다또한 그녀들은 친구들에게 "박수근"의 그림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며, 구매를 주선했다.

자신이 사들인 "박수근 컬렉션"으로 미국에서 작은 전시회를 개최하고, 미국 미술잡지에 그의 그림을 소개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국전"에서 잇따라 낙선했으며, 국내에서는 거의 팔리지 않을 만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아이러니하게도 외국인들이 그의 작품을 알아보고 후원해 주지 않았더라면, 가장 한국적이라는 평을 듣는 그의 작품들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1960년이 되어서야 "국전"에 추천작가 자격으로 "노상의 소녀들"을 출품하는 등 세속적인 인정을 받았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화가로서 치명적인 "백내장"에 걸렸고, 수술비를 마련하지 못해 끝내 "왼쪽 "을 실명했다그럼에도 그는 한쪽 눈만으로 매일 그림을 그렸고, 1964"국전""할아버지와 손자"를 출품했다.

1965.04, 외출했다가 복통을 일으켰다"신장염간염" 진단을 받은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혼수상태에 빠질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간경화"가 많이 진행되었음에도 매일 술을 마신 것이 원인이었다"청량리 위생병원"에 입원한 그는 05.06일 병원에서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와, 생을 마감했다마지막으로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긴 멀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이후 유작인 "유동""국전"에 출품되었고, 유작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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