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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인물

화가 : 이중섭 (1916)ㆍ박수근과 쌍벽ㆍ황소ㆍ아이들을 즐겨 그림

by 당대 제일 2022.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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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李仲燮ㆍ1916~1956ㆍ40세)"은 "박수근"과 함께 한국 근대 서양화의 양대 거목으로, 강인하고 굵은 선감의 화풍이 특징이다. 황소와 아이들을 즐겨 그린 화가, 화구를 살 돈조차 없을 만큼 궁핍하여,  담배를 싼 종이 (담배곽의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

 

1. 이중섭 (李仲燮1916~1956향년 40)

일제 강점기한국의 서양화가키가 크고 잘생겼으며, 운동노래미술 등에 다재다능했던 이중섭은 학교 내 여학생들의 선망을 한 몸에 받았는데, 그중에는 "이남덕(야마모토 마사코, 미쓰이 물산 중역의 딸)"도 있었다.

•  출 생 : 평남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     •  사 망 : 서울 서대문적십자병원    •  사 인 : 병사 (간장염조현병거식증영양실조)

•  : 대향(大鄕)      •  학 력 : 오산학교 (五山學校ㆍ평북 정주) → 도쿄 데이코쿠 미술학교 (, 무사시노 미술대학)도쿄 분카 학원 (문화학원)        •  스 승 : 임용련 (오산학교 미술교사ㆍ서양화가)

•  : 이남덕 (李南德ㆍ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이중섭이 "분카 학원" 유학 시절에 만났던 일본인 여자

•  자 녀 : 3- 이태현(조졸)ㆍ이태성(야마모토 야스나리)ㆍ미상     •  수 상 : 1943- 자유미술가협회 특별상 태양상

이중섭

2005.03.16. 이중섭의 차남인 "이태성(야마모토 야스나리)"이 첫 공개해서 경매에 내놓은 그림 8점이 2005.10월에 "가짜"로 밝혀져서, 대한민국의 미술 시장이 냉각되기도 했다현재 "제주도 서귀포시"에서는 1951년 이중섭 가족이 살던 집을 개조해 "이중섭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그 주변으로 이중섭 거리를 조성하였고, 매년 9월에는 이 거리에서 "이중섭 예술제"를 한다.

2. 말년ㆍ죽음

1954, 서울에 올라와 친구 집을 전전하던 이중섭은 하루에 빵 한쪽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그림을 그릴 종이조차 살 수 없을 만큼 궁핍했다생활고, 가족을 떠나보낸 좌절감과 고독감은 점차 그의 정신을 좀먹었다종종 기이한 행동을 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이따금 발작을 일으켰다. 결국 친구의 도움으로 병원에 입원했으나, 거식증과 영양실조, 몇 차례의 탈출 소동 등으로 여러 병원을 옮겨 다녔다보다 못한 친구 "한묵"이 공기 좋은 곳에서 그를 곁에 두고 요양시키기로 결심하고, "정릉 골짜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이런 노력에도 이중섭은 약 반 년 후인 1956년 초여름, 우울증과 폭음, 간장염으로 서울 서대문적십자병원에 입원한 뒤 끝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친구들이 수소문해서 "서대문적십자병원"에 찾아오니 이미 시체와 밀린 병원비 청구서만이 있었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반은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히고, 반은 일본으로 보내졌다. 죽어서야 반쪽이나마 그리워하던 아내와 아이들 곁으로 돌아간 것이다. 친구이자 동료 화가였던 "김병기"는 그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썼다. "사인은 간장염이지만 그는 굶어 죽었대도 좋고 미쳐 죽었다 해도 좋다. 혹은 자살이라 해도 좋다. 이 사회가 예술은 소용없다 해도 그림만은 그린 것이요, 그림으로 세상이 안 먹여 준다면, 안 먹겠다는 처절한 순간이었다."

1955, 친구들의 도움으로 마지막 전시회를 "미도파 백화점"에서 열었다서울에서 열린 전시회에 작품을 40가지도 넘게 전시를 하고, 20점이나 판매하는 높은 성과를 거두지만, 사기로 한 사람들이 전쟁 후 어려운 형편에 돈으로 주기로 한 작품료를 먹을 것으로 대신하거나, 차일피일 미루고 제대로 돈을 지급하지 않자, 결국 손에 쥔 돈은 얼마 안 되는 수고비 정도였다고 한다전시회 때, 도와준 동료와 선후배들에게 술이나 대접할 수 있는 정도의 수입만 갖게 되고, 이로 인해 "가족을 책임지지 못한 가장"이라는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그로 인해 그는 "거식증"에 시달리면서, 동시에 "조현병" 증세를 보이게 된다.

3. 가족과의 이별ㆍ첫 개인전 (통영 성림다방)

그림 재료를 살 돈이 없어서, "담배곽의 은박지"에 그림을 그릴 정도로 극심한 어려움에 시달렸는데, 이 때문에 1952년, 부인이 두 아들과 함께 일본으로 넘어갔다.  1950.06.25, "한국 전쟁"이 일어났다이중섭은 아내와 두 아들, 조카를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다"부산"의 피난민 수용소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던 그는 종교 단체의 주선으로 "제주도"로 건너가 "귀포"의 한 농가에 자리 잡았다"미쓰이 물산 중역"의 딸로 고생을 모르고 자란 "마사코"는 물론, 생업에 종사한 일 없이 순수하게 화가로서만 살아온 이중섭에게는 생활력이 없었다그림을 팔아 생활한다는 것 자체를 상상하기 어려웠던 시기였기에, 피난민에게 나오는 배급을 받고, 마사코가 이삭을 줍고, 이중섭은 바닷가에 나가 게를 잡아 근근이 먹고 살 수밖에 없었다.

이중섭은 아이들물고기를 그리는데, 열중하며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 나갔다1년이 채 지나지 않아, "부산"으로 돌아온 이중섭은 부두에 나가 막일을 하는 한편, 다방을 중심으로 화가들과 교류하며 단체전을 준비했다가족과 그림만이 생의 희망이었다1952.07, 이중섭은 아내 "마사코"와 아이들을 일본으로 보냈다기약 없는 피난민 생활로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린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이중섭은 가족을 떠나보낸 허전함으로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다아내와 아이들을 만나고 싶어 하는 그의 간절함을 보다 못한 친구 "구상"이 이듬해 "선원증"을 구해 일본행을 주선했으나, 1주일짜리 "임시 체류증"이었던지라 곧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게다가 패전 이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마사코"의 집안 역시 어려웠기에 이중섭까지 받아 줄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들의 만남은 1953년 이중섭이 "부두 노동"으로 번 돈으로 마련한 "선원증"을 통해, 일본의 처갓집을 방문하여 한 차례 더 있었을 뿐이다그러나 "선원증"을 갖고 있던 이중섭은 일본에 오래 체류할 수 없었기 때문에, 1주일 만에 한국으로 귀환했고, "부산대구통영진주서울" 등을 떠돌며 가난 속에서도 창작에 매달렸다다시 "부산"으로 돌아온 그는 "화가 전혁림작가 유치환김상옥김춘수" 등의 배려로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1952.12월에 "한묵박고석손응성이봉상"과 함께 "기조전"을 열었으며, 1953년에는 40여 점의 작품을 가지고, "통영" "성림다방"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4. 민족교육의 영향으로, 작품 주제로 "황소"를 소묘

어린 시절 아버지가 작고하여, 출생지인 "평원"을 떠나 외가였던 "평양"으로 가족 모두 거처를 옮겨 평안남도 평양에서 성장하였다외조부는 평양 내에서 손꼽히는 부자로, 사업이 아주 번창했다고 하며, 그의 형도 사업가로 크게 성공했기에, 어릴 때부터 어려움은 전혀 모르고, 편안한 유년 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8세 때까지 마을의 "한문 사숙"에서 "동몽선습맹자논어"등을 배우다가 "평양" 외가로 가서 "평양 종로 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갔다.

3남매 중 막내로, 누나와는 10여 살 이상 차이가 나서 어울리기 쉽지 않았을 뿐더러 내성적인 성격이라 어렸을 때부터 혼자 그림을 그리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일찍부터 그림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던 그는 학교에 들어간 이후에도 공부보다 그림에 열중했고, 방학 때 집으로 돌아가서도 그림만 그렸다. 그런 그를 형이 나무라면 광에 숨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보통학교에서 이중섭은 당시 유화 화가였던 "김찬영"의 아들로, 훗날 서양화가가 되는 "김병기"와 같은 반이 되면서 서구 미술의 세계에 눈을 떴다"김병기"의 집에 들락거리면서 유화 도구와 물감, 각종 서구 화집들을 접한 것이다덕분에 학업 성적은 좋지 않아, 보통학교 졸업 후 "평양 고등보통학교" 입시에 실패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진학 시,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에 입학했다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오산학교에 들어간 이중섭은 이곳에서 화가 "임용련"에게 그림을 배우며 본격적으로 서양화를 그리기 시작했다"임용련"은 후기 "인상파 경향"의 화가로, "예일대"에서 공부하고 "파리"에서 활동한 인물이었다당시 화가나 미술교사들이 대부분 일본에서 공부했던 것과는 매우 다른 이력이다색채와 조형의 기초, 구상 등을 중시하는 "임용련" 아래에서 그는 소묘와 에스키스(esquisse, 작품 구상이 담긴 초벌 그림) 등을 그리면서 기본기를 익혔으며, 후기 인상파 화풍도 접했다.

무엇보다 오산학교는 민족의식이 강한 학교였는데,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임용련"은 일본의 조선어 말살 정책에 대비해, 수업 시간에 한글 자모를 이용한 구상화를 그리게 했다민족정기에 대한 교육을 받은 이중섭은 일본에서 개최되는 미술전에 작품을 제출하게 되는데, "오산학교" 시절 민족교육의 영향을 크게 받아, 작품의 주제를 "황소"로 잡고, "황소"를 소묘하는 작품으로 참가하게 된다당시 "황소"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한국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황소"라고 할 정도로 민족정서를 대표하는 동물이라, 일본인들이 일부러 ""에 관련된 표현 자체를 못하게 하는 분위기였는데, 이런 분위기를 보란 듯이 비웃으며 작품을 그려낸다.

첫 작품이라 전시 때, 비교적 그림 크기를 크게 그려 내는 기조를 알면서도 손바닥만한 작은 크기에 강렬한 눈빛을 가진 ""를 그린 그림을 본 일본의 한 기자는 "이중섭"의 천재성을 바로 알아보고 감탄했다는 말이 이어진다특히 "" 그림의 낙관에 "중섭"이 아닌 "둥섭"이라고 씌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당시 친일파로 변절한 조선인 문학가가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게재한 "머리를 중처럼 밀고 전쟁에 참가하는 아름다운 청년이 되자"라는 논조의 사설을 보고, "중섭"의 본인 이름에 발음이 ""자도 부르기 싫고 부끄러운 일이라며 분노하여, 낙관의 이름까지 바꿔서 써낸 일화가 있다.

5. 일본 유학

1936, 이중섭은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임용련"의 권유로 "도쿄 제국미술학교"로 유학을 갔다그러나 스케이트를 타다 다치는 바람에 입학 1년 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다이때 그림을 반대하는 형 때문에 집에 붙잡혀 있었다고도 한다1년 후 "분카가쿠엔(文化學院)"에 입학한 이중섭은 이곳에서 친구인 "김병기"를 다시 만났고, 훗날 한국 모더니즘과 추상화의 선구자로 일컬어질 "유영국", 북한의 천재 화가로 이름을 날릴 "문학수" 등과 교유했으며, 절친한 친구인 시인 "구상"도 이때 만났다.

1936, 일본 "도쿄 데이코쿠 미술학교(, 무사시노 미술대학)"에 입학했지만, 1937년 자유롭고 혁신적인 분위기의 학풍을 중시하는 "도쿄 분카 학원(문화학원)"으로 옮겨 졸업하였다1941, 일본 "도쿄"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조선인 화가인 "이쾌대진환최재덕"등과 함께 "조선신미술가협회(朝鮮新美術家協會)"를 결성했고, 1943년에는 "자유미술가협회 특별상 태양상"을 수상했다.

"문화학원"의 자유롭고 진취적인 분위기 속에서 당시를 풍미하던 "전위 미술"에 강하게 끌렸다강인하고 굵은 선이 특징인 이중섭의 화풍은 이 시기부터 형성되었으며, 그는 학내에서 곧 "동방의 조르주 루오"라고 불리며 주목을 받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츠다 세이슈"의 관심을 받았는데, 그는 일본 최초로 추상미술을 표방하는 "자유 미술가 협회"를 결성한 인물이었다"츠다"는 이중섭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며, 동양이라는 지역적 특성과 한국인으로서 "한국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이중섭 뿐"이라고 격려했다이중섭은 그의 아래에서 "문학수유영국안기풍" 등과 함께 "자유전"에 그림을 출품하고,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시대는 이중섭에게 화가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순탄치 않은 인생을 선사했다"태평양 전쟁"으로 "군국주의" 물결이 일본을 휩쓸면서, 사상과 예술 활동이 억압받기 시작한 것이다전쟁 때문에 "프랑스 유학길"도 막혔으며, 일본 내에서 조선인에 대한 탄압도 심해져, 이중섭은 결국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1945, 고향인 "평안남도 평원"에 돌아왔다"마사코"와 헤어지고, 화가로서의 길도 막힌 이중섭은 좌절하여 매일 들판에 나가 ""를 그렸다그러나 이듬해 "마사코"가 전쟁의 포화를 뚫고, 고향 "원산(평원군)"으로 찾아왔다두 사람은 다음 달 혼례를 치렀고, 이중섭은 "마사코"에게 "이남덕"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향에서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하면서 그림을 그리던 이 시기가 이중섭 인생에 있어 가장 행복한 때였다안정적인 생활은 잠시, 곧 북한 사회가 급속도로 "사회주의 체제"로 이행하면서 다시 고난이 시작되었다.

1946, "원산사범학교"의 미술교사로 근무했지만 1주일 만에 사직했다1946, 사업가였던 형이 "지주 계급"으로 지목받아 처형되었고, 그에게는 "사회주의 체제를 위한 정치 선전용 그림"을 그리라는 압력이 들어왔다예술을 혁명적 도구로 인식하는 공산주의 사회 체제에서 예술가 개인의 표현의 자유는 인정되지 않았다그는 곧 퇴폐적이고, 부르주아적인 그림을 그린다는 이유로 ""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1946, 친구인 "구상" 등이 펴낸 시집 "응향(凝香)"의 표지 제작을 맡았지만, "응향(凝香)"이 퇴폐적, 반인민적, 반동주의적인 작품으로 규정된 "필화 사건""응향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친구인 "구상"을 비롯해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런 상황을 이기지 못하고 남한으로 내려갔다이 무렵 이중섭은 첫아들인 "태현"을 병으로 잃는 개인적 슬픔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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