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엽 (金一葉ㆍ1896~1971ㆍ75세)"은 "여성 해방 운동의 선각자"로서 앞장서다가, 1933년(37세) 출가, "불가"에 귀의했다. 일본 유학시기(22세)부터, "나혜석 (羅蕙錫ㆍ1896~1948ㆍ52세)ㆍ김명순 (金明淳ㆍ1896~1951ㆍ54세)" 등과 함께, "신 정조론ㆍ자유 연애론ㆍ여성 해방론"을 주장하고, 여성의 의식 계몽을 주장하는 글ㆍ강연ㆍ자유연애 활동을 하였다. ( 칼럼ㆍ논설 기고 : 동아일보ㆍ조선일보ㆍ조선 문단ㆍ매일신보 등)
1. 김일엽 (金一葉ㆍ1896~1971ㆍ향년 75세)
1920년대 대표 여류시인ㆍ페미니스트ㆍ승려ㆍ교사(초등)ㆍ일제강점기 여성운동가ㆍ언론인ㆍ수필가ㆍ"여성 해방 운동의 선각자"로서 앞장서다가, 1933년(37세) 출가, "불가"에 귀의했다. 초기 작품은 "여성 해방ㆍ무지한 여성의 계몽"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었고, 1930년대로 가면서, "불교 사상ㆍ참회ㆍ공사상" 등으로 시적 주제가 전환된다.
• 친 구 : 여성주의 운동을 하면서 만난 사이- 나혜석(화가)ㆍ김명순(1920년대 대표 여류시인ㆍ페미니즘) / 삼숭보통여학교 동창- 윤심덕(가수 겸 배우)ㆍ박인덕(교육인)
• 나혜석 : 정조 취미론 • 허정숙 : 순결 무용론, 연애ㆍ성관계의 무관론 • 김일엽 : 정조의 필요함→ "정조"는 그 사람과의 연애 혹은 결혼할 동안, 다른 이성과의 외도나 "성관계"를 하지 않는 것이 "정조"라고 하였다.
• 동 거 : 1923 (27세), 동경유학 생활 중 : "오오타 세이죠 (도쿄 은행장 아들)"와 임신ㆍ아들 출산 → 친구 "유덕"의 애인인 "방인근 (方仁根ㆍ1899~1975ㆍ소설가ㆍ시인)"과 삼각관계에 빠져 스캔들을 일으켰다 → 1925 (29세): 유부남 "임장화(林長和ㆍ노월(蘆月)ㆍ? ~ ?)"와 동거 → 1928 (32세): 승려 "백성욱 (白性郁ㆍ1897~1981ㆍ불교학자ㆍ동국대 교수ㆍ내무부 장관)"과 동거 → "국기열 (鞠錡烈ㆍ동아일보 정치부 기자)"과 동거에 들어갔으나. 얼마못가 헤어졌다 → 1931 (35세): "이광수 (1892~1950)"와도 사랑에 빠졌으나, 그는 아내를 버릴 수 없다며, 거절
• 출 생 : 평남 룡강군 삼화면 덕동리 • 사 망 : 충남 예산군 수덕사 견성암 별실 (자신이 건립한 비구니 선원)
• 본 명 : 김원주(金元周ㆍ金源珠) • 불 명 : 하엽(荷葉)ㆍ 도호(道號): 백련도엽(白蓮道葉)ㆍ하엽당(荷葉堂) • 학 력 : 이화학당ㆍ닛신(日新)학교 (도쿄)
• 필 명 : 일엽(一葉) 만공 선사로부터 받은 법명이기도 하지만, 본디 일본 유학 중에 만난 친구 이광수가 그의 문학적 재능을 높이 사서, "조선의 한 잎사귀가 되라"는 뜻으로, 여성작가 "히구치 이치요(桶口一葉)"의 이름에서 따와 지어줬다.
• 가 족 : 부- 김용겸(기독교 목사)의 맏딸ㆍ모- 이마대ㆍ계모- 한은총(안악군에 살던 과부) / 맏딸로 태어나, 기독교적인 분위기에 둘러싸여 자란다. (계모- 한은총) 1900년(4세), 결핵을 앓던 어머니가 남동생 출산 후 바로 사망했고, 남동생도 출산 3일 만에 사망 1907년(11세), 어린 동생이 죽고, 연이어 세 동생이 죽었다. 그 해 순 한글로 된 "동생의 죽음"이라는 "시"를 써서, 발표하였다. 1913년, 아버지 "김용겸"까지 사망하여, 그녀는 외가로 가서,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 파혼ㆍ결혼 : 1916 (20세): 어느 재산가 청년과 파혼 → 1918 (22세)~1921 (4년간): "이노익(李魯益)"과 "정동예배당"에서 결혼ㆍ이혼 → 1929 (33세)~1933 (5년간): 승려 "하윤실"과 "대구"에서 재혼ㆍ이혼
• 경 력 : 1920 - "폐허"지의 동인ㆍ여성 잡지 "신 여자" 창간(편집인 겸 주간) "신 여자"지의 필진 - 나혜석ㆍ박인덕ㆍ김활란ㆍ김명순ㆍ차미리사ㆍ이광수 등 → 1922 - "조선불교여자청년회"에서 세운 "능인여자학원"에 출강ㆍ영어/철학을 지도 → 1921/1931- 매일신보 기자ㆍ동아일보 기자 → 1925~1927(3년)- 아현보통학교(阿峴普通學校) 교사ㆍ조선어/문학 담당 교사
• 소 설 : 계시(啓示ㆍ1920ㆍ여성 잡지 "신 여자")ㆍ어느 소녀의 사(死ㆍ1920ㆍ여성 잡지 "신 여자")ㆍ혜원(1921ㆍ신민공론)ㆍ사랑(1926ㆍ조선문단)ㆍ자각(1926ㆍ동아일보)ㆍ단장(1927ㆍ문예시대)ㆍ희생(1929ㆍ조선일보)ㆍ애욕을 피하여(1932ㆍ삼천리1932)ㆍ오십 전 은화(1933)ㆍ어느 수도인의 회상(1960)ㆍ청춘을 불사르고(1962ㆍ자전적 산문집)ㆍ행복과 불행의 갈피에서(1964) • 시 : 추회(秋懷)ㆍ이별ㆍ동생의 죽음 등 수십 여 편 • 평 론 : 먼저 현상을 타파하라(1921ㆍ폐허)ㆍ조선 신흥 문학에 있는 여류의 업적(1928ㆍ한빛)ㆍ노래가 듣고 싶은 마음(1932ㆍ동광)
"기독교 목사"의 딸로 태어나, 일찍이 고아가 되었으나, 어머니ㆍ외할머니의 배려로 "진남포"의 "삼숭보통여학교"에 입학한 이듬해인 1907년(11세), 한글로 "동생의 죽음"이라는 시를 지어 놀라운 재능을 발휘한다. 이것은 "한국 근대시의 출발점"으로 공인되고 있는 "최남선(당시 18세)"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보다, 1년 먼저 나온 작품이다. 깜짝 놀랄 만한 "자유연애론ㆍ신 정조론"을 외치며, 세간의 주목을 받던 신여성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2번의 결혼과 이혼, 몇 차례의 화려한 남성 편력이 "여성 해방 운동의 선각자"로서 그가 남긴 자취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많은 상처를 받고, 좌절을 겪는다. 어쩌면 삶의 정점에서 "일체의 세욕(世慾)을 단(斷)"하고, 입산해 불문의 선맥(禪脈) 속으로 사라졌다. "덕숭산 비구니 총림(叢林) 건립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차돈의 사(死ㆍ이광수 작)"을 각색해서, 1967.08.25.~ 31일까지, "국립극장 무대"에 올린다.
"러시아의 여성 해방 운동"에 깊은 영향을 받은 그녀는 1913년, "이화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웠고, 1918년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 "도쿄"의 "닛신(日新)학교"에서 공부했다. 1919년, 남편 "이노익"의 원조로, "일본"에 건너가, "일본 동경 영화학교(英和學校)"에 유학하였고 이때 "허영숙ㆍ이광수" 등과 교류하였다. 이때 잡지 "여자계(女子界)"의 주간인 신여성 "나혜석"을 만났는데, "나혜석"은 그보다 6년 먼저 일본 유학을 와서, 1914년 잡지 "학지광"에 "이상적 부인"이라는 글로 유명해졌고. 1917년부터는 일본의 조선인 여자 유학생들의 잡지 "여자계"의 주간으로 있었다. 이때 그녀는 귀국 후, "조선에서도 여성 잡지를 발행하겠다."는 뜻을 품게 된다. "일본 유학" 중, 문인으로 데뷔하여, 시ㆍ소설ㆍ칼럼 등을 발표하였으며, 귀국 후 1920년에는 "폐허"지의 동인으로 참여하고, 1920년에는 여성 잡지 "신 여자"를 창간, 편집인 겸 주간으로 4호까지 펴내며, 여성 운동을 펼친다. "이화학당 시절"부터, 종교에 대한 회의를 해오다가, 1927년 불교잡지 "불교"의 문예란에 기고하면서 "불교"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다.
1933.09월 이후, "충남 예산 수덕사의 견성암"에서 수도하였다. 1933년 출가 시, "망상의 근원"이라며, "불립문자(不立文字)"를 내세우는 스승 "만공 선사"의 뜻(선 수행을 위해 읽고 쓰는 것을 중단하라)에 따라 절필한 이후, 20여 년 동안 일체의 집필 행위를 중단한 채, 수도 생활에만 정진하는 동안, 대중의 관심 밖으로 차츰 밀려난다. 그러다가 1960년 "어느 수도인의 회상"을 펴낸 데 이어, 자전적 산문집인 "청춘을 불사르고"를 내놓자 대중의 이목과 관심이 다시 집중된다.
"개화 여성 김일엽"의 화려한 연애 행각을 기억하고 있던 대중에게 이 책들은 불티나게 팔려나간다. "연애ㆍ사교 생활ㆍ사회 활동"의 정점에서 갑자기 "비구니 세계"의 정적 속으로 자취를 감춰버린 그녀의 사생활과 내면세계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책들은 "비구니의 연애담"을 고백하는 가벼운 "연문(戀文)"을 넘어선 것이었다. 뜻밖에 이 책들을 읽고, 감화되어 입산하는 여성이 속출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2. 남자관계 (결혼ㆍ파혼ㆍ동거)
① 1916 (20세) : 어느 재산가 청년과 파혼
: "이화학당 중등부 2학년" 재학 시절, 어느 재산가 청년과 파혼하면서 큰 상처를 받았다. 이 자산가는 파혼 대신, 집 1채ㆍ토지ㆍ큰돈을 위자료로 주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받은 돈이 많아도, 자신의 상처를 메울 수 없음을 알고는 어떤 돈도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엔 모자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② 1918 (22세)~ 1921 (4년간) : "이노익( 李魯益)"과 "정동예배당"에서 결혼→ 이혼
그는 22세 때, 40세의 이혼남ㆍ다리 하나가 없는 장애인ㆍ연희전문학교 화학교사(1915년부터 재직중)ㆍ미국 유학파(네브래스카 웨슬리언 대학 화학과) 였다. 늙으신 외할머니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혼하여 빨리 가정을 꾸린다. 그러나 훗날 "회고록"에서도 "이노익"에 대한 언급은 거의 하지 않는다. 총각으로 알았던 "이노익 교수"가 총각이 아니라는 것과 의족을 한 남자로, 1번째 결혼 때 남편의 다리를 보고 놀란 신부가 충격을 받고 도망갔던 사실을 그녀는 전혀 몰랐고, 뒤늦게 친구를 통해 이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게 된다.
다리가 없는 장애인인 중년 남편과의 결혼생활은 그녀에게 열등감과 결혼생활에 대한 회의감을 안겨주었고, 이혼을 선언하면서 "의족을 한 남편 이노익의 다리가 밤마다 선뜻선뜻하게 공포감을 일으킨다."고 솔직하게 고백하였으며, "이노익"은 신사적으로 그녀를 보내주었다. 일본 유학을 보내주고, "신여자"지의 창간ㆍ후원을 해주었던 "남편 이노익"과의 이혼은 "성리학자들ㆍ기독교계 인사들"로부터 비판을 받는 원인이 되었다.
③ 1923 (27세), 동경유학 생활 중 : "오오타 세이죠 (도쿄 은행장의 아들)"와 임신ㆍ아들 출산
"오오타 세이죠(太田淸藏)"와 사귀던 중, 임신하였다. 그의 선조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출정한 일본 장수의 후손이었다. 아버지 "김용겸"은 독립운동에 참여한 인물이자, 기독교 목사로써 조선총독부ㆍ일본인의 입장에서 보면, 출신성분이 좋지 않은 인물일 수 있었다. 그러나 "오오타"는 출신성분에 개의치 않고, 그녀에게 친절을 베풀었고, 곧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 뒤 그녀는 임신하였고, "오오타 집안"에서는 그녀를 끝까지 반대하였고, 아들을 낳은 이후에 "일본에서 같이 살자"는 "오오타"의 청을 뿌리치고, "조선"으로 돌아온다.
• 1935년, "여승"이 된 후, "수덕사"에서 "아들(13살)"과 해후
1935년, "정조 취미론"을 주장하고, "자신의 아내ㆍ어머니는 깨끗하기를 바라면서, 남의 여자에게 성욕을 품는 남자들의 이중적인 성 관점"을 비판하던 "나혜석"이 여론의 질타를 받고, "수덕사"를 찾아왔을 때, "승려"로 출가하는 것을 상담해 주기도 했다. "나혜석"이 이혼의 아픔을 안고, "충남 수덕사" 자락을 찾아, "일주문" 바로 옆에 있는 "수덕여관"에 여장을 풀었고, "수덕여관"에 머무르며,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처음에는 "나혜석"에게 승려가 되라고 권고했지만, "이혼 고백서" 발표 직후, 전시회 등이 실패하고 "중을 시켜 달라"고 시위하던 중, "엄마가 보고 싶어, 현해탄을 건너 왔다"는 13살 앳된 소년이 찾아왔다. 그 아이는 "김일엽"이 "일본" 유학시절, 명문가 출신 "오오다 세이죠"와의 사이에 낳은 사생아인 아들 "김태신"이었다. 모정에 목말라 있는 아들에게,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불러라"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김일엽"을 보고, "어쩜 저렇게도 천륜을 거역할 수 있을까"라고 느낀 "나혜석"은 모정에 굶주린 그 소년이 잠자리에 들 때, 팔베개를 해주고, 젖을 만지게 해주었다.
④ 1925 (29세) : 유부남 "임장화 (林長和ㆍ노월(蘆月)ㆍ? ~ ?)"와 동거
일본 유학생이었던 시인 노월 "임장화"와 한때 동거하였다. 그는 소설가ㆍ언론인ㆍ문학평론가ㆍ평남 진남포 지주 아들ㆍ일찍 결혼을 하여 본처가 있었다.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현대미술사 전공, 일본 토요대학(東洋大學)에서 철학 전공) "임장화"의 개인주의 지향형 예술관인 "신 개인주의적 예술지상주의"가 자신을 구제하리라고 확신했으나, "임장화"의 본처ㆍ자녀가 그들이 살던 집에 찾아 와서, 문제를 야기하였고, "임장화"는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고, 결국 헤어졌다.
⑤ 친구 "유덕"의 애인인 "방인근 (方仁根ㆍ1899~1975ㆍ소설가ㆍ시인)"과 삼각관계에 빠져 스캔들을 일으켰다.
⑥ 1928 (32세) : 승려 "백성욱 (白性郁ㆍ1897~1981ㆍ불교학자ㆍ동국대 교수ㆍ내무부 장관)"과 동거
그는 독일 유학파ㆍ부르크스부르크 대학 철학박사ㆍ불교학자였다. "백성욱"이 "불교신문사 사장"으로 취임할 무렵에 만나 친하게 되었고, 연인으로 발전했다. 그로부터 7~8개월에 걸쳐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백성욱"은 불교에의 귀의를 결심, 영적인 지도를 결심하여, 결국 그녀의 구애를 받아들일 수가 없어, "두 사람 사이의 인연이 다하였다"는 편지 1통만을 남기고 떠났다. 1930년, "백성욱"은 "금강산"에 입산, "승려"가 되었다. 깊이 사랑했던 "백성욱"이 갑자기 떠나버리자, 그녀는 극심한 심적 충격을 받았다. 1928년에 쓴 소설 "희생"은 실화 소설로, "백성욱"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⑦ "국기열 (鞠錡烈ㆍ동아일보 정치부 기자)"과 동거에 들어갔으나, 얼마 못가서 헤어졌다.
⑧ 1929 (33세)~1933 (5년간): 승려 "하윤실"과 "대구"에서 재혼→ 이혼
승려(대처승(재가승))ㆍ숭실전문학교 영문학 교사ㆍ보성전문학교 영문학 교사ㆍ와세다 대학 출강ㆍ타 대학에도 불교/동양철학 담당 강사였다. "대처승(재가승)"이라는 점에 끌려 결혼, 1933년까지 "성북동 양옥집"에서 생활하였다. 그러나 "하윤실"은 승려였지만, 그녀의 기대와 달리 세속적인 사람이었고, 실망한 그녀는 "금강산"에 입산한다. 바로 "금강산 서봉암"의 "비구니 승려 이성혜"를 찾아갔으나, 속세를 못 잊어 결국 다시 "하윤실"에게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1933년 이혼하고, "승려"가 된다.
⑨ 1931(35세): "이광수(1892~1950)"와도 사랑에 빠졌으나, 이광수는 아내를 버릴 수 없다며, 거절
"이광수"는 "나혜석ㆍ김일엽"과는 연인 관계이었고, "김명순"의 후견인이기도 했다. (아내 - 허영숙 (이혼ㆍ1921~1946ㆍ도쿄여의전 졸업ㆍ서양식 산부인과 의사)) "이광수"를 만나 잠시 사랑했지만, 그는 "아내 허영숙을 버릴 수 없다"며, 그녀의 애정을 거절했다. 1917~1918년 무렵, "나혜석"의 연인이었고, 1930년에는 "김일엽"과 잠시 사귀기도 했다. 1915년, "도쿄 와세다 대학" 유학 중, 그는 "의학전문학교"에 다니던 "허영숙"과 연애하였다. 그런데 "허영숙"과 연애하는 도중, 미술학교에 유학 중이던 "나혜석"과도 연애하게 된다. 두 여성과 연애하던 중, "나혜석"과의 결혼을 희망하였으나, 자신의 친구이자 나혜석의 오빠인 "나경석"의 강한 반대로 무산되고 만다.
3. 1933년 (37세) 출가, "불가"에 귀의
1930년, "수덕사(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덕숭산"에서 "불자"로 생활하다, 1933년 가을 "승려"가 된다. 1931년, "경성"에서 "나혜석"을 만났을 때, "속세를 접고 여승이 되겠다."고 속내를 털어놓는 그녀에게 "나혜석"은 "현실 도피의 방법으로 종교를 선택해서는 안 된다"고 면박을 주기도 하였다. 1931년 이혼 이후, 괴로워하는 "나혜석"에게, "함께 불교에 귀의해 승려가 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혜석"은 거절했고, 후일 1935년 "나혜석"이 다시 승려가 되려 하자, 이때는 그녀가 거절하였다.
"승려"가 된 뒤에도, "나혜석" 등과 꾸준히 연락하였다. "나혜석"은 그녀가 "현실도피성 목적으로 승려가 되었다"고 하면서도 그와 가깝게 지냈다. "허정숙"은 그녀가 현실을 도피할 목적으로 승려가 되었다며, 비판하였다. 다른 여성운동가들은 그녀가 보다 강하게 저항하지 않음을 탓하였다. "하윤실(승려ㆍ전 남편)ㆍ이관수(동아일보기자)ㆍ나혜석(최초 서양화가ㆍ유화)ㆍ허정숙(여성운동가)" 등이 여러 번 그녀를 설득하며 만류하였으나, 삭발을 하였다. "나혜석"은 "현실의 고통을 의연하게 감내하지 못하고, 법당으로 도피한다."며, 여러 번 만류하였고, 친구이자 한때 연인인 "이광수"도 반대하여, 여러 번 설득하였으나, 결국 설득하지 못했다.
1933년, "금강산 서봉암(瑞鳳庵)"에 가서, "비구니 이성혜(李性惠)"의 상좌로 삭발ㆍ출가하여 "여승"이 되었고, 이때 자신의 필명인 "일엽"을 "법명"으로 쓰게 된다. "승려"가 되기 직전, 남동생 "김진범"과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계모"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함을 듣고는 통곡하며, 주저했다고 한다. 1933.09월, "수덕사"에 속한 유명한 비구니 암자 "견성암"으로 입산한 후, "글 또한 망상의 근원"이라고 가르친 스승 "만공(滿空)선사"의 뜻에 따라, 절필한지 30여년이 지난 뒤에야, 수상록 "어느 수도인의 회상(1960)ㆍ청춘을 불사르고(1962)"등 베스트셀러를 펴내,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4. "나혜석(친구ㆍ여성운동 동지)"의 출가 상담
1935년, "정조 취미론"을 주장하고, "자신의 아내ㆍ어머니는 깨끗하기를 바라면서, 남의 여자에게 성욕을 품는 남자들의 이중적인 성 관점"을 비판하던 "나혜석"이 여론의 질타를 받고, "수덕사"를 찾아왔을 때, "승려"로 출가하는 것을 상담해 주기도 했다. "나혜석"이 이혼의 아픔을 안고, "충남 수덕사" 자락을 찾은 이유는, 거기에는 동갑이고, 잡지 "폐허ㆍ삼천리"에서 동인으로 활동하던 "김일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나혜석"은 "수덕사"로 직행하지 않고, "일주문" 바로 옆에 있는 "수덕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나혜석이 수덕여관에 와 있다"는 전갈을 받은 김일엽은 암자에서 내려와, 두 사람은 반갑게 회포를 풀었지만, 1명은 여성을 옥죄는 사회제도가 한없이 원망스러운 "이혼녀"이고, 다른 1명은 그것을 초월한 "여승"이었으므로, 두 사람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너처럼 중이 되겠다."는 "나혜석"의 부탁에 "너는 안 돼"라고 만류했지만, "만공(滿空)선사를 뵙도록 도와 달라"는 "나혜석"의 간청에 못 이겨, "만공스님" 면담을 주선했지만, 대답은 똑같았다.
"만공(滿空)선사"로부터 "임자는 중노릇을 할 사람이 아니야"라는 일언지하의 거절을 당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수덕여관"에 머무르며,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처음에는 "나혜석"에게 승려가 되라고 권고했지만, "이혼 고백서" 발표 직후, 전시회 등이 실패하고 찾아왔을 때는 안 된다고 하였다. 특히 "나혜석"이 자녀들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본 "김일엽"은 "나혜석이 스님이 될 수 없다"고 봤다.
5. 자기 고백ㆍ결단 - "나를 완성하자"
"여성의 본능을 약탈ㆍ추격ㆍ매장하는 남성 지배 구조의 사회"로부터 자기 보존을 위해, "사회"에서 퇴각해 "나"에게로, "여성 해방 운동ㆍ남성"으로부터 "선가(禪家)"로 돌아간 그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남겼다. 그녀의 "나를 완성하자"는 이 자기 고백과 결단의 토로에 대해, "임중빈(문학 평론가)는 "속세의 편력에 대한 장송곡"이라고 말한 바 있다. 어쨌든 그녀는 이후, 세속에서 보인 화려한 편력을 단호하게 끝내고, "선경(禪境)"에 들어 "꽃답게 흘러가는 때를 관조하는 삶"으로 일관한다.
"나를 완성하자. 그리고 내 자아 가운데서 엄숙한 인생을 창조하자. 나를 자위할 만한 예쁜 이상을 찾고, 내 인격을 존중히 해줄 지식을 닦아라. 그리고 내 감정을 보드랍게 해줄 꽃다운 정서를 기르자. 지금 내게 대하여는 인생의 외형은 아무 가치가 없다. 사람의 안목을 어둡게 하는 금전이며, 명예며, 지위는, 일문의 가치가 없다. 모든 "때"는 내게 대하여 다 신성하다. 나는 일시라도 꽃답게 흘러가는 "때"를 더럽히지 말자. 신성한 "때"는 새로운 나를 위하여 충실한 생활을 엮어줄 것이다."
6. 여성 해방 운동
① 여성 자유 선언
"여자도 사람"이라고 주장하였다. 조선 역사가 봉건 제도 이래로, "여자들에게만 지나치게 억압을 가해왔다"고 주장했다. "유교적 가부장제하"에서 열악한 삶을 살았던 여성의 근대적 해방의식은 1920년 자유주의적 남녀평등사상에 기초하는 "신여성론"으로 확장되며, 많은 논쟁을 불러왔는데, 언제나 그 중심에 그녀가 있었다.
1920년대, "신 여자선언"을 통해, 기존의 사회규범에 대한 정면도전을 시도했다. "신 여자선언"은 개화기 여성의 "헌장"으로도 평가된다. 또한 그는 "한복"에 대해서도 비판했는데, 허리띠로 가슴을 겹겹이 동여매는 것이 여성의 사회적 활동을 제약한다는 비판을 가하였다. 남자와 가정으로부터의 해방을 요구하는 일부의 주장에는 반대하고, 다만 여자도 남자와 동등한 권리ㆍ자유를 가져야 된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사특하고, 헛된 주장으로 분란을 조장한다."는 "유교 사상가들"의 비판과 어려서 부모를 일찍 잃은 것에 대한 인신공격 등을 당했지만, 그녀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자신의 견해를 고수하였다.
② 순결론 비판ㆍ자유연애론
"순결과 정조는 정답이 아니며, 사회적으로 강요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재래의 모든 제도와 전통의 관념에서 멀리 떠나, 생명에 대한 청신한 의미를 환기코저하는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들의 인격과 개성을 무시하는 재래의 성도덕에 대하여 열렬히 반항하지 않을 수 없다"며, "정조는 결코 도덕이 아니"라, "유동하는 관념으로 항상 새롭다"는 봉건적 여성 정절 이데올로기에 대한 신랄한 공격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는 "생물학적 순결론"에 반대하고, "정조"는 그 사람과의 연애 혹은 결혼할 동안, 다른 이성과의 외도나 성관계를 하지 않는 것이 "정조"라고 하였다.
"정조 취미론"을 주장한 "나혜석"이나 "순결 무용론, 연애ㆍ성관계의 무관론"을 외친 "허정숙"과는 달리 "정조의 필요함"을 일단 인정하였으나, "사설로서 사회를 타락시킨다."는 유학자들의 비판에 직면하였다. 또한 "그녀가 고아 출신이라는 것"은 꼬리표로 따라다니며, 시중의 인신공격과 비방의 소재가 되었다. 자신의 체험에 근거한 "자유연애론의 옹호자"이기도 했다. 당시 대부분의 여성들이 기존의 결혼 관습을 따라, 정해진 사람과 결혼을 하는 것에 반해,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사람과 "자유연애"를 공표하며,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자세로 스스로를 실험하였다. 보수적 유교사상가들과 남자 지식인들은 이러한 "자유연애" 역시 문란한 것으로 몰고 갔다.
③ "신 정조론" 주장
1920년 초부터, "육체적인 정조보다 정신적인 정조가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여자에게만 정조와 순결을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저항하였다. 1924년, "정조는 육체가 아닌 정신에 있다"는 "신(新) 정조론"을 주장하였다. "정조"에 대해, "사랑을 떠나서는, 타 일방에서 구할 수 없는 본능적 감정"이라며, 결혼 여부가 아니라 근대적 사랑에서 "정조의 존재"를 찾았다. 한국 여성들을 한 남자의 성노리개로 팔리거나, 성노리개로 즐겨도 된다고 보는 모욕적인 착오에서 남자ㆍ여자 모두 깨어나야 한다는 점과, 자신의 어머니와 아내는 순결하기 바라면서 남의 여자에게는 성욕을 품고 성관계를 즐기며,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한국 남자들의 이중적인 태도를 비판하였다.
또한 여자들 역시 각성하여, 남자들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말 것을 주장했다. 여자 역시 노동을 하고, 여자 역시 남자들과 같이 힘든 일도 해서 경제적으로 독립하자고 했다. 여자들도 남자들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말고, 당당하게 독립하여 무능한 인형에서 탈피하고, 남녀가 동등한 경제권을 가지는 동시에, 인격자로서의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유교적 가치관" 대로, 여자를 집안에만 가두는 "사회의 인습" 역시 비판하였다.
④ 자유연애ㆍ자유결혼 운동
1926~ 1928년까지, 조선 전국 각지를 다니며, "자유연애ㆍ자유결혼" 운동을 설파하였다. 결혼과 연애는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부모나 집안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지 말고, 몸과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남녀 간 자유롭게 연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과 부모와 주변이 결정하지 말고, 스스로 배우자를 고르자고 역설하였다.
또한 결혼은 자유롭게 선택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결혼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며, 부모와 집안에서 함부로 간섭, 개입할 권리는 없다고 하였다.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것이며, 타인이 이 문제에 개입할 이유가 없음을 역설하였다. 그녀의 "자유연애론ㆍ자유결혼론"에 청년 남녀는 열광하였고, "성리학자들"은 "금수의 가르침ㆍ금수화의 길"이라고 비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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