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식 (朴殷植ㆍ1859~1925ㆍ66세)"은 임시정부 2대 대통령(1925ㆍ전임 이승만)으로, "근대사 연구"에 치중했으며, "신채호 (申采浩ㆍ1880~1936ㆍ56세)"는"고대사 연구"에 치중했다. 1915년 "한국통사"를 지었으며, 이것은 일제가 "조선사 편수회"를 설치하는 원인이 되었다.
1. 박은식 (朴殷植ㆍ1859~1925ㆍ향년 66세)
임시정부 2대 대통령 (1925ㆍ전임 이승만)ㆍ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ㆍ애국계몽운동가ㆍ정치가ㆍ학자ㆍ교육자ㆍ언론인(황성신문ㆍ대한매일신보 주필→ 통감부에 매매)ㆍ대동교 (大同敎)를 창건하고, 신한혁명당 (新韓革命黨)을 조직하여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 출 생 : 조선 황해도 황주군 • 사 망 : 중화민국 장쑤 성 상하이 (임시정부 최초의 "국장") • 묘 지 : 상하이 정안사로(靜安寺路) 공동묘지 → 서울 동작구 국립묘지 • 사 인 : 인후염(목구멍 뒷쪽에 위치한 인두의 염증)
• 호 : 백암(白岩ㆍ白巖ㆍ白菴)ㆍ겸곡(謙谷)ㆍ태백광노(太白狂奴)ㆍ무치생(無恥生ㆍ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자신을 가리킴) • 학 력 : 한학 (향시에 참가해서 "특선"으로 합격) • 종 교 : 대종교 → 대동교(大同敎)를 창건
• 처 : 연안 차씨 • 자 녀 : 2남 3녀 (막내인 박영애(1894~1986)만 성장) • 양자 - 박시창 (1903~1986) 육군 2성 장군ㆍ독립운동가 • 저 서 : 한국통사(1915) - 일제가 "조선사 편수회"를 설치하는 원인이 되었다.
1911년 (만주에서 1년간 6권의 책 저술)- 대동고대사론(大東古代史論)ㆍ동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ㆍ명림답부전(明臨答夫傳)ㆍ천개소문전(泉蓋蘇文傳)ㆍ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ㆍ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ㆍ안중근(1914)ㆍ각국근사(各國近史,1915)ㆍ이준전ㆍ한국독립운동지혈사(1920)ㆍ이순신전(1923)ㆍ한말비록(韓末秘錄)ㆍ대동민족사ㆍ단조ㆍ안중근의사 전ㆍ번역서- 발해사ㆍ금사
주자학자로서 출발해, 개화자강론자ㆍ애국계몽사상가ㆍ학자ㆍ언론인ㆍ독립투사로, 민족이 처한 조건의 변동에 따라 자신의 사상과 행동을 발전시키면서, 전 생애를 민족의 해방과 독립에 바쳤다.
1904.02월,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황성신문"을 통해 일제의 침략정책을 비판하고, 국민들에게 자주독립정신과 애국사상을 고취했다.
그가 이처럼 열정적으로 언론 활동을 한 것은 "독립신문"의 영향이었다. "독립협회"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은 국민을 관리와 군주보다 우위에 둠으로써 민주주의를 전파하였다. 이를 본 박은식은 언론이 계몽활동에 매우 쓸모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죽을 때까지 언론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이후 원로로서 뒤에서 독립운동을 지도하고 지원했다.
한민족의 독립투쟁사를 3ㆍ1운동을 중심으로 저술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의 집필을 시작해 1920. 12월 간행했으며, 1924년 "임시정부 의정원"의 추대로 "이승만"에 이어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925년 사망하자, 11.04일 임시정부 최초의 "국장"이 치러졌다.
그는 1가지 꿈이 있었다. 바로 "조선의 독립"을 보고, "광복사"를 쓰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건강이 악화되었고, 결국 지병을 이유로 사임하였고, 박은식은 "인후염"으로 사망했다.
만약 그가 20년만 더 버텼더라면, "광복사"를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죽음을 앞둔 그는
① 독립을 하려면, 전족(全族)적으로 통일이 되어야 하며,
② 독립운동을 위하여는 모든 수단방략이라도 쓰고,
③ 동지간의 애증친소(愛憎親疎)의 구별이 없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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