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 (太極旗)"는 1883년(고종20), 조선의 국기로 채택되고, 1948년부터 한국 국기로 사용되고 있다. 1882.08월, "박영효 (朴泳孝)"가 인천에서 "일본 선박 메이지마루 (明治丸)"를 타고 도일할 때, 창안하고 도안한 것이 정설로 알려졌으나, 실제는 "고종"이 일본 수신사로 떠나는 "박영효"에게 태극기의 도안ㆍ재질ㆍ도형의 설명ㆍ그리는 방법까지도 직접 언급하고 지시했다.
1. 태극기 (太極旗)
흰색 바탕에 태극문양과 건ㆍ곤ㆍ감ㆍ리ㆍ(乾坤坎離)의 4괘로 이루어져 있다.
• 흰색 바탕 : 밝음ㆍ순수ㆍ전통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성을 나타내고 있다.
• 태극 문양 : 음ㆍ양의 조화를 상징하며, 우주만물이 상호작용에 의해, 생성ㆍ발전하는 자연의 진리를 형상화한 것이다.
• 4괘 : 음ㆍ양이 서로 변화ㆍ발전하는 모습을 구체화한 것이다.
2. 제작 유래ㆍ역사ㆍ박영효가 일본 선박 안에서 창안?
1883년(고종20), 조선의 국기로 채택되고, 1948년부터 한국 국기로 사용되고 있다. 국기 제정 논의가 처음으로 거론된 것은 1876.01월(고종13)이다. 1875.09월, "운요호 사건 (강화도 사건)"을 계기로 한ㆍ일간에 "강화도 조약 (1876.02)" 체결이 논의되는 동안 일본 측은 "운요호에는 엄연히 일본의 국기가 게양되어 있었는데 왜 포격을 가하였느냐?"고 트집을 잡았다. 그러나 조정 인사들은 "국기"가 무슨 의미와 내용을 지니고 있는 것조차 몰랐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국기 제정의 필요성이 활발하게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태극기 효시에 대하여, 종래에는 1882.08월 특명전권대사 겸 수신사인 "박영효(朴泳孝)" 일행이 인천에서 "일본 선박 메이지마루 (明治丸)"를 타고 도일할 때, "박영효"가 "태극사괘(太極四卦)"를 창안하고 도안한 것이 정설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서 발행된 일간신문 "시사신보"에, "고종"이 직접 도안을 하고, 색깔까지 지정하였다고 보도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따르면, 중국 청나라의 "마건충(馬建忠ㆍ1845~1900ㆍ사상가ㆍ외교관ㆍ언어학자)"이 "청나라 국기"를 본받아 조선의 국기를 만들 것을 강요하자, 이에 분개한 "고종"이 청나라의 국기를 따르지 않고, 청색ㆍ적색으로 이뤄진 "태극원ㆍ사괘"를 그려 국기로 정한다는 명을 내렸고, "박영효"는 "고종"의 명을 받아 "태극기"를 그리는 역할을 하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태극기"는 그 후 널리 보급되었으나, 도형의 통일성이 없어서 "사괘ㆍ태극양의(太極兩儀)"의 위치를 혼동하여 사용해오다가, 1948년 정부수립을 계기로 국기의 도안ㆍ규격이 통일되었다.
3. "박영효"가 아닌 "고종"이 창안?
국내 최고(最古)의 "태극 문양"은 "전남 나주 복암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백제시대 목제품 태극 문양(600년 경)"이다. 그리고 현재 태극기와 비슷한 "태극 모양ㆍ4괘 도형"은 1392년 "고려 말 공양왕" 때, 제작된 "범종(梵鐘)"에 새겨져 있다. 하지만, 그것은 대외적인 국가 상징으로 사용되지는 않았었고, 다만 특유의 문화 양식으로만 사용되는 도형에 불과했었다.
"태극기"가 대외적인 국가 상징으로 사용된 것은 1882년의 일이다. 그럼에도 무슨 영문인지 1882년에 그렸다는 최초의 태극기 실물이나 그림이 보존되지 않아 태극기 역사가 단절되어왔다. 일제 침략 36년 동안, 처절한 압박과 함께, 천태만상의 변형된 태극기를 사용되었다. 그 후, 1949.10월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현재 모습의 태극기를 제정하게 되었다.
그 동안 역사학계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최초의 태극기를 찾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였고, 마침내 1997.08월, "동경 도립중앙도서관"에서 최초의 태극기 그림과 관련 기사가 게재된 1882.10.02일자 "시사신보 (時事新報)"를 발견하여, 1997년 광복절에 공개함으로써 115년 만에 그 실체를 역사 사실로 확인하게 되었다.
기사의 내용을 보면, "고종"이 일본 수신사로 떠나는 "박영효"에게 태극기의 도안ㆍ재질ㆍ도형의 설명ㆍ그리는 방법까지도 직접 언급하고 지시했던 내용들이 자세히 나온다. 이러한 사실은 "박영효의 일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4각형태의 흰색 바탕에 폭 부분 5분지 2를 중심삼아. 태극을 그려 청색과 홍색을 칠하고. 네 귀퉁이에 4괘가 바라보도록 만든 새 국기를 임시 숙소(고베의 니시무라야) 옥상에 휘날림으로써. 국왕의 명령을 다 받들었노라!" 라는 내용이 곧 최초의 태극기를 사용하였음을 잘 증명하고 있다.
1882년, 사용한 태극기는 1392년 "고려 말 공양왕" 때, 제작된 "범종(梵鐘)"에 새겨져 있는 "태극 모양ㆍ4괘 도형"이 대부분 일치한다. "범종"의 태극기는 높이 35cm, 직경 30cm로 "고종"이 그려낸 태극기와 같은 형식이다. "고종"은 태극기를 새로 그려낸 것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태극 모양을 그대로 "대한제국 국기"로 사용하도록 한 것이다.
1883.01.27일, "고종"은 태극기를 "국기(國旗)"로 사용한다고 왕명으로 공포하였다. 당시의 태극기는 4괘의 위치가 지금과 동일하지만, "태극의 음양" 모양은 지금과 같지 않았다. "태극의 음양" 배치가 위ㆍ아래로 되어 있지 않고, 좌(빨강)ㆍ우(파랑)으로 되어 있었다.
"상하이 임시정부" 내부에 걸려 있는 태극기도 음양 배치가 좌ㆍ우로 되어 있으며, 1948.08.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행사" 당시, "중앙청"에 걸린 태극기도 음양 배치가 좌ㆍ우로 되어있었다.
1949년, "국기제정위원회"가 구성되어, 1949.03.25일 "음양(陰陽) 배치"를 확정한 후에야 지금과 같은 태극기의 태극 모양이 확정된 것이다.
"국기봉"도 국화인 "무궁화 봉오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하고, 색깔은 국기 깃 면의 색깔과 조화를 이루도록 "금색"으로 하였으며, 1949.10월 "문교부 고시 제2호"로 공포함으로써, 태극기는 완전한 통일 규격으로 자랑스럽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중국"은 "오성홍기(五星紅旗)"를 사용하는데, 1949년 "공산당 인민정치협상회의"에서 결정됐다. 붉은 바탕(혁명)에 황색(황인종)으로 된 큰 별 하나(공산당)와 작은 별 4개(노동자ㆍ농민ㆍ민족자산ㆍ도시소자산 계급)가 왼쪽 윗부분에 배치된 도안이다.
최초 중국은 우리 "태극기"를 가지려고 했다. 이유는 태극기가 우주 만물의 음양(陰陽) 법칙을 상징하고 있고, 음양(陰陽) 법칙이 곧 이 세상 모든 생명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은 태극기를 가지려고 했지만, 국제적으로 태극기가 한국 국기로 공식 인정되고 있었기에 무척 아쉬워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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