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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 일반 • 명리학

애국가 (愛國歌) : 안익태 작곡ㆍ윤치호 작사 ?

by 당대 제일 2022.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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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 (愛國歌)"는 대한민국의 국가로, 1919년 "안창호"에 의해 "임시정부"에서 "작별 (스코틀랜드 민요)"에 삽입해서 부르기 시작하다가, 1935년 작곡가 "안익태"가 지은 "한국환상곡"에 가사를 삽입해서 현재까지 부르고 있다. 작사자는 "윤치호 설ㆍ안창호 설ㆍ윤치호-최병헌 합작설" 등이 있었다가, 2022.08.23.일, "뉴욕"에서 "애국가 원본 악보"가 발견됐는데, 작사에 "김준성 목사" 라고 써져 있었다.

 

1. 애국가 가사 : 작사자 - 미상작곡가 - 익태

16소절의 간결하고, 정중한 곡이다.  (후렴은 1~ 4절이 모두 같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애국가

2. 애국가의 유래

10여 종의 "애국가" 중에서, 1896.11.21"독립문 정초식"에서 불린 애국가의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죠션 사람 죠션으로 길이 보죤 답세"가 지금도 맥을 잇고 있다.

작곡가 "익태" 1936, "(오스트리아 수도)"에서 유학 중 작곡한 것을 1948.08.15"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국가로 제정하였다. 현재의 "애국가"가 처음 불려 진 것은 "익태""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한 "한국 선수단" 찾아가 함께 부른 것이다.

 

3. 작사가 : 윤치호 ?

"윤치호는 자기가 소속한 "남 감리회"를 배경으로, 1906년에 "개성"에 설립한 "한영서원(현 송도고등학교)"에서 기가 편찬한 "찬미가"의 애국 찬송을 가르치며, 애국 운동을 벌여, 전국적인 호응을 받았다.

1908년 :  감리교 장로 윤치호는 "찬미가" 라는 작은 책을 내었다"찬미가"에 수록된 가사는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의 번역본과 유사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4. 작곡가 : 안익태 - "애국가"의 표절 논란 : "한국 환상곡"의 일부가 "애국가"이다.

1960년대 "애국가" 표절 논란이 처음 불거졌다. (표절 노래는 "오 도브루자의 땅이여" (불가리아 노래)).

1964, "서울 국제음악제"에 참가하기 위해, 방한한 "피터 니콜로프(불가리아계 미국인 지휘자)" "애국가는 불가리아 노래를 표절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파문을 일으켰다하지만 "애국가"가 만들어진 것이 "안익태의 유럽 방문 전"이었고, "유럽지역"의 노래를 일일이 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표절설은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게 유력하다.

2000년대, "안익태"의 친일 행적이 잇따라 발굴되면서, "애국가"는 다시 도마 위에 오르게 되었다"친일파의 곡을 대한민국의 상징으로 쓸 수 있는가?"라는 것이었다뿐만 아니라, "애국가 저작권" 문제도 제기되었다.

일단 "저작권 문제"는 당시까지 생존해 있던 부인 "롤리타 안"이 저작권을 포기하면서 일단락되었다2005.03.16, "로리타 안(안익태 부인)""애국가의 저작권""한국 정부"에 기증하였다.

 

5. 윤치호 (尹致昊이토 지코1865(고종2)~ 194580)

조선-대한제국 개혁의 문신독립운동가외교관(조선인 최초의 영어 통역관)언론인교육자정치가사상가종교가철학가기독교 운동가민권운동가시민사회운동가독립신문 사장대한자강회 회흥업구락부 회장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일제 시기, "시국강연" 등을 통해 전시 동원에 적극 협력

배화학교명(캐롤라이나 학당의 새로운 교명)작성자변절자라는 견해와 나약한 지식인이라는 비판과 근, 냉철한 합리주의자라는 상반된 시각과 평가가 존재하고 있다.

친일인명사전에서 "윤치호 편"을 쓴 "김승태"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윤치호는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경력도 확인되지만, 이후 일왕이 직접 임명한 "일본 귀족원의 칙선 의원"이 되는 등 적극적인 친일로 기울었다"고 말했다.

조선 선조 때, "영의정 윤두수"의 둘째 아들 "윤흔"8대손으로, "병조판서"를 지낸 초기 개화파 정치인 "윤웅렬"의 아들이고, 해방 후 대한민국의 군의관 "윤치왕", 사업가 겸 외교관 "윤치창"의 이복형이며, 한민국 제4대 대통령이자, 정치인인 "윤보선(尹潽善)"5촌 당숙이었다큰아들 "윤영선"1950년대에 "농림장관", 손자는 "교통부" 고위 관리를 지냈다증손녀는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과 결혼했다.

 

6.  안익태 (安益泰에키타이 안(스페인어)1906~196559)

한국 출신의 스페인 지휘자작곡가연주가(첼로트럼펫바이올린)친일인명사전 등재

1948.08,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그가 작곡한 "애국가"가 정식국가로 채택되었다.현재, "작곡가"로 알려져 있지만, 주요 활동은 어디까지나 "지휘"였고, 1930년대 후반~ 1940년대 초반에 걸쳐, "유럽" 각지의 "오케스트라"에서 지휘를 맡아, 활동하였다1955.02.19, 떠난 지, 25년 만에 "이승만 대통령의 80회 생일 축제"를 위한 특별초청을 받아 귀국했다.

<  친일 행각 - 일본 축전곡(슈트라우스 곡) 연주ㆍ만주 환상곡/ 만주 축전곡 작곡 >

1938, "아일랜드"에서 "더블린 방송 교향악단"의 객원 지휘를 맡은 것을 시작으로, 유럽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 때 거장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64~1949)"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에 대하여는 사실과 다르다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안익태 스스로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930년대 후반에 만났다고 밝혔으나, 실제로는 "베를린" 머물렀던 1942년에 만난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두 사람이 인연을 맺은 건, 빨라도 1941년 이후이고, 그나마 "안익태의 친일 행적"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1941~1943년까지, 주 베를린 만주대사관 공무원인 "에하라 고이치(江原綱一)"의 집에서 살았다1941, "독일"에서 거장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64~1949)"의 손녀를 구출해준 것이 계기가 되어 "슈트라우스"의 총애를 받는 제자가 되었고, 유럽 각국의 "오케스트라"로부터 초청지휘를 받으면서 지휘자로서 명성을 떨쳤으나, "독일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이 무렵, "독일나치 제국"에 협력했던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일본 축전곡"을 연주하는 한편, 1942,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축하하는 "만주 환상곡만주 축전곡"을 작곡하는 등 "일본독일 제국주의"를 알리는 음악 활동에 두루 참여했다.

그가 작곡한 "만주국 축전곡"의 가사에는 추축국인 "일본독일이탈리아"의 결속을 다짐하는 내용이 있는데, 가사의 일부는 "에하라 고이치"가 썼다고 한다"에하라 고이치"는 물밑에서 독일 내의 일본 첩보활동을 총괄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독일에서 활동하는 예술인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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