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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 역사 • 사건 • 인물

초한지 (楚漢志) ③ 서한 3걸ㆍ한신(韓信)ㆍ소하 (蕭何)ㆍ장량 (張良)

by 당대 제일 2022.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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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삼걸(西漢三杰)한초삼걸 (漢初三傑)전한삼걸 (前漢三杰)건한삼걸 (建漢三傑)"이라하면,  "한신 (韓信ㆍ회음후(淮陰侯)로 강등ㆍ ? ~ BC 196)ㆍ소하 (蕭何ㆍ? ~ BC 193ㆍ전한의 초대 상국)ㆍ장량(張良ㆍ장자방(張子房)ㆍ? ~BC 186)" 을 말한다.

 

1. 한신 (韓信) : 회음후 (淮陰侯)로 강등ㆍ ? ~ BC 196건국 공신ㆍ장군ㆍ제후

동해군 회음현 출신ㆍ"소하""국사무쌍(國士無雙)"이라고 한 명장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해, "유방"의 패권을 결정지었다"소하"가 천거ㆍ평민 출신ㆍ가난하고 품행이 좋지 못해 관리로 천거되지도 못하고, 생업을 꾸려나가며 장사를 하지도 못해, 항상 남의 집에 붙어먹으며 살아 많은 사람들이 싫어했다. 처음에 "항우"를 찾아갔으나 등용되지 못하자, "한"에 귀부하여 공을 세워 "한 왕(漢王)"이 되었으나 후에 "유방"에게 "모반죄"로 살해당한다.

① BC 202년, 마침내 "유방"은 "해하"에서 "항우"를 포위했다.

"한신"은 30만 대군을 이끌고 "항우"를 공격했고, 좌우 앞뒤로 "항우"의 10만 대군을 완전히 포위했다. 곧 항우의 진영에 군량미가 떨어지고 군의 사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신"은 자기 군대에 "초나라 노래(楚歌ㆍ초가)"를 가르쳐 부르게 했다. "초가"를 들은 "항우"의 군사들은 고향 생각에 눈물을 흘리다 속속 진영을 이탈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항우"는 결국 대패하여 "오강(烏江)"까지 후퇴한 후, 그곳에서 자결함으로써 생을 마감했다. "사면초가(四面楚歌)"는 이때의 고사성어로 "사방에서 들려오는 초나라 노래"라는 의미로, 사방이 빈틈없이 적에게 포위된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로써 "유방"은 천하의 주인공이 되었다. "유방"은 "한나라 고조"로 즉위 후, 공신들을 각지의 "제후 왕"으로 책봉했다.

② 그러나 "유방"은 막강한 군사력과 뛰어난 지략을 지닌 "한신"을 경계했다.

"한신"은 "제나라 왕"에서 "초나라 왕"으로 임명되었다. BC 201년, "초나라 왕"으로 책봉되어 임지로 떠난 지 ,9개월 만에 "한신"은 "반란죄"로 체포되었다. "한신이 반란을 꾀한다"는 밀고가 들어오자, "유방"은 대신들을 모아 놓고 의견을 물었다. "진평"은 "한신"의 군사력이 "유방"의 군사력보다 강하고, "한신"이 뛰어난 장수이기 때문에 "그를 토벌할 수 없다"고 진언했다. 그 대신, "유방"에게 "운몽(雲夢)"을 순시한 후, "한신"의 영지 근처인 "진현"에서 제후들을 소집하여 "한신"을 참석하게 한 후 체포할 것을 조언했다.

체포된 "한신"은 "날쌘 토끼를 사로잡으면 사냥개는 잡아먹히고, 높이 나는 새를 잡으면 활은 곳간에 처박히고, 적국을 멸하고 나면 충신은 죽임 당한다더니, 천하가 평정되니 내가 잡혀 죽게 되는구나!"라며, 울분을 토했다. 그러나 "한신의 반란죄"는 입증되지 않아, 그는 목숨을 건지고 "회음후(淮陰侯)"로 강등되었다. 그 후 "한신"은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BC 196년, "소하"가 "한신"을 찾아왔다. "소하"는 "유방"이 "거록(鋸鹿) 태수 진희"의 반란을 평정했으니, 입궁하여 "여태후"에게 축하의 인사를 올리라고 전했다. "소하"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입궁한 "한신"은 곧 매복 중이던 무사들에게 포박되어 살해되었다. 후대 사람들은 "한신"의 죽음을 "토사구팽"에 비유하여 그의 억울한 죽음을 위로했다.

하지만 "한신"에게도 "천하의 주인"이 될 기회가 있었다. "괴통(한신의 참모)"는 앞서 "한신"에게 그의 공적과 지도력은 "항우ㆍ유방"에 못지않으니, 그들과 천하를 삼분하여 다스릴 것을 조언했다. 그러나 "한신"은 "괴통"의 조언을 물리치고 "유방"을 도왔고, 결국 "유방"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한신"은 죽음을 앞둔 상태에서 "괴통"의 조언을 따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한신"의 가솔들은 "삼족을 멸하는 형"을 받았다.

③ 초ㆍ한 전쟁

"항량"이 거병해 "회수"를 넘어 북상하자, 칼을 차고 그의 휘하에 들어갔으며, "항량"이 "장한"과 싸우다 죽자, "항우"의 밑에서 "낭중(郞中)"이 되어 자주 간언했다. 그러나 "항우"는 그 책략을 쓰지 않았다. BC 206년, "진나라"를 멸한 "항우"가 천하를 나누고, "유방"을 "한 왕"으로 봉해 "촉"으로 처넣자 "초나라"를 떠나 "한나라"로 갔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연오(連敖)"가 되었다가, 법에 걸려 참형에 처해졌다.

동료 13명이 모두 처형되고, 자신 차례가 되었을 때, "등공 하후영"을 만나 말했다. "전하께선 천하를 가지고 싶지 않습니까? 어찌 장사를 베리이까?" "하후영"은 그 말을 특이하게 여기고, 그 행색이 건장함을 보고, 풀어주고, 대화한 후, 기꺼이 "유방"에게 천거해 "치속도위(治粟都尉)"가 됐으나, 아직 "유방"에게서 인정받지는 못했다. "한신"은 "한나라" 승상인 "소하"와 자주 대화했고, "소하"에게서 드디어 그 재능을 인정받았다.

드디어 "한 왕" 일행은 "관중"을 떠나, "한나라"의 서울 "남정"으로 출발했는데, 도망치는 장수들이 수십 명이었다. "한신"은 "소하"가 자신을 "유방"에게 자주 천거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달아났다. 이를 들은 "소하"는 미처 "유방"에게 알리지도 못한 채, 허겁지겁 "한신"을 쫓아가 데려왔고, "소하"가 달아난 줄 알고 손발을 잃었다고 여긴 "유방"은 돌아온 "소하"를 꾸짖었다. 이에 "소하"는 "유방"에게 "한신"은 "국사무쌍(國士無雙)ㆍ곧 나라에 비견할 자가 없는 선비"며, "한중"에서 계속 왕 노릇할 거 라면야 굳이 "한신"을 쓸 필요는 없지만, 천하를 다투고자 한다면 "한신"이 꼭 필요하다고 천거했다.

"유방"은 처음에 "한신"을 장군으로 쓰겠다고 했지만, "소하"가 "한신"이 그러면 달아날 것이라 하여 "대장군"으로 삼기로 했다. 그리고 "유방"이 즉시 "한신"을 불러 임명하려 하니, "소하"는 "그런 무례한 태도로는 안 된다고 해 좋은 날짜를 잡고 목욕재계하고, 단을 쌓고 예를 갖춰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유방"은 그대로 했고, 모든 장수들은 "자기가 대장군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기뻐했는데, 막상 "한신"이 "대장군"이 되니 모두 경악했다. 예식이 끝난 후, "유방"에게 "계책"을 자문받자, "유방"의 적은 "항우"임을 확인하고 "항우"의 약점을 일장 연설했다.

• 항우는 용맹하지만 현능한 장수에게 임무를 맡기지 못하니 이것은 필부의 용맹(필부지용)일 뿐이다.        • 항우는 남을 공경하며 자애하고 병든 사람을 위해 울며 음식을 나누지만, 정작 공을 세운 사람에게 작위를 줄 때에는 도장이 닳도록 망설이니 이른바 부인의 어짊(부인지인)일 뿐이다.        • 천하를 아우르면서 관중이 아니라 팽성에 도읍을 두었다.        • 의제와 약속을 어기고 친애하는 사람을 왕으로 세우니 제후들이 불평한다.        • 제후들에게 자기 주인 의제를 강남으로 내쫓은 것을 보여줘, 그들이 제 주인을 내쫓고 좋은 땅에서 왕 노릇하게 했다.        • 가는 곳마다 학살하므로 사람들이 원망하고 가까이하지 않으며, 무서워서 그 위세에 눌렸을 뿐이니, 패자라 하나 실은 인심을 잃었다.

그리고 "항우"가 "관중"을 셋으로 나누어, 왕 노릇하게 한 "옛 진나라 장수 옹왕 장한ㆍ새왕 사마흔ㆍ적왕 동예"와 "유방"을 비교해 "유방이 삼진의 왕보다 우위에 있다"고 말했다. 정리하면, 삼진의 왕들은 진나라 장수였기에, 그들 휘하에서 전사한 장졸도 많거니와, 항우가 진나라 장졸들을 다 죽이고 그들만 살렸기에 진나라 백성들의 원망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반면 유방은 관중에서 함부로 사람들을 죽이지 않고 진나라의 가혹한 법을 완화해 진나라 사람들의 인망을 샀다.  또 삼진의 왕들은 의제의 약속을 어기고 항우가 억지로 봉한 것이고, 반면 유방은 의제의 약속에 따라 가장 먼저 관중에 들어왔으므로 관중의 왕이 될 자격이 있으며 진나라 백성들도 따라서 유방을 따를 것이다. "유방"은 "한신"의 제안을 기뻐해, "한신"의 계책에 따라, 즉시 "삼진"을 칠 장군들의 부서를 정했다.

④ 초나라 왕

"항우"가 죽은 후, 회군하던 중, "정도"에서 "유방"의 습격을 받아 군대를 빼앗기고, "제나라" 대신 옛 항우가 "18 제후 왕 분봉" 당시에 받은 "서초 일대"를 받아 "초나라 왕"으로 옮겼고, "동해군 하비 현(현, 피저우 시)"에 서울을 두었다. 강요된 봉토 이전이기는 해도, "초나라"는 "한신"의 고향 땅이며, 규모도 89현으로 73현의 "제나라"보다 더 컸다. 정월에는 다른 "제후 왕들"과 함께 상소해 "유방"에게 "황제"의 존호를 바쳤다.

"초나라"에 와서는 밥을 얻어먹은 빨래하는 여자를 불러 "천금"을 주었고, "하향의 남창정장"에게는 밥을 주다 말았다 며, "돈 100"을 주었다. 그리고 자기를 가랑이 밑으로 기어 모욕을 준 사람도 불러 "중위"로 삼고, 여러 장상들에게 말했다. "이자는 장사다. 나를 욕보였을 당시에 내가 어찌 죽일 수 없었겠는가?  죽여도 이름을 낼 수 없어 지금 성공하기까지 참은 것이다."

⑤ "회음후"로의 폄작ㆍ죽음

"종리말(항우의 장수)"는 집이 "이려"에 있어, 젊어서부터 "한신"과 알고 지낸 사이였다. "항우"가 패망한 후, "한신"에게 망명했다. "한나라"에서는 "종리말을 체포하라"는 조서를 내렸지만, "한신"은 이를 무시하고 "종리말"을 계속 숨겨준다. 그리고 "한신"은 자기 나라에 처음 와서, 현ㆍ읍을 다닐 때 병사들을 거느리고 다녔는데, 이걸 보고 "한신이 모반하려 한다"고 말하는 일이 있었다. 12월, 소식을 들은 "유방"도 "한신"이 "종리말" 같은 "항우"의 잔당들과 같이 반란을 도모할 것을 우려해 좌우에 의견을 물었는데, "조속히 병사를 내어 그 더벅머리 아이를 묻어버려야 합니다!"라며, "서로 한신을 치겠다."고 다투었다.

그러나 "유방"은 "한신ㆍ초나라 정병들"이 "한나라" 장수ㆍ병사들보다 낫다고 "진평"에게 말했고, "진평"의 계책에 따라 "운몽에서 놀려 한다"는 이유로 "초나라" 서쪽 변경의 "진현"에 제후들을 불러 모아 "한신"을 사로잡으려 했는데, "한신"은 이를 몰랐다. "유방"이 "초나라"에 오자, "병사를 내자니 자기는 무죄하고, 황제를 알현하자니 잡힐 것 같아" 두려워했다. 혹자가 "종리말을 베어 가면 될 것"이라고 해, "종리말"과 상의했는데, "종리말"은 자기를 죽여, 황제에게 아첨하려 하는 "한신"을 꾸짖고 자결했다.

"한신"은 "종리말의 목"을 가지고 "유방"을 뵈었으나, 포박되어서 후거에 갇혀 압송되었고, 도중 "낙양"에서 "유방"에게 용서를 받아 "회음후"로 강등되었다. 그리고 "한신"의 나라였던 "초나라"는 "형나라ㆍ초나라" 둘로 나누어, "유고(유방의 친척 형)ㆍ원왕(유방의 동생)"에게 봉했다. 이후 "유방이 자기 재능을 두려워하고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병을 핑계 삼아 조회에 나가지 않으면서 항상 원망하고 마음속에 불만이 가득히 지냈으며, "주발ㆍ관영" 등과 동렬에 있음을 부끄러워했다.

한번은 "번쾌"의 초대를 만났는데, "번쾌"가 자신을 "신하", "한신"을 "대왕"이라 일컬으며, 정중히 대접했지만, "한신"은 "번쾌"의 집에서 나오며, "내가 번쾌 따위와 동렬이 되었다"며, 자조했다. BC 197년, "진희"가 반란을 일으켜, "유방"이 반란을 토벌하러 간 사이, 가신 중 하나가 "한신이 진희의 난에 가담했다"고 "여태후"에게 밀고함으로써, "장락궁"으로 소환되어 참수형에 처해지고, 삼족이 멸문의 화를 당하게 된다.

⑥ 고사성어

• 일반천금 (一飯千金) : 회음현의 속향 하향(下鄕)의 남창정장(南昌亭長)에게 몇 달 간 기식했는데, 정장 아내가 이걸 싫어해 하루는 일찍 아침밥을 차리고 미리 식사해, 식사 때가 돼 한신이 찾아오니 밥이 없었다.  한신은 그 속셈을 알아채고, 분노해 그곳을 떠났다.  성 아래에서 낚시질을 하는데, 굶고 있는 모습이 그곳에서 빨래하는 여자 중 하나에게 띄어 그가 주는 밥을 받아먹고 "훗날 부인에게 반드시 많이 보답하겠소."라 답했다.  그 부인은 노해 말했다. "사내자식이 스스로 밥도 못 먹고 다니기에, 왕손이 불쌍해서 밥을 좀 줬기로서니, 어찌 보답을 바라겠느냐?"

• 과하지욕 (袴下之辱) : 성 내의 무뢰배 젊은이들이 칼을 차고 다니는 한신을 비웃으며, "죽음을 각오할 수 있으면 그 칼로 나를 찔러라. 못 하겠다면, 내 가랑이 밑으로 나와라!"라고 모욕을 주었다.  한신은 그 사람을 한 번 보고는 허리를 굽혀 그 가랑이 사이를 기어나갔다.  그래서 그 시장 사람들은 모두 그를 비웃으며 겁쟁이로 여겼다.

• 토사구팽​ (兎死狗烹) :  "한신"이 "운몽"에서 "유방"에게 사로잡혀 압송될 때, 이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과연 사람들의 말대로다.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좋은 개는 삶기고, 나는 새가 떨어지면 좋은 활은 넣어두고, 적국이 깨지면 모신은 죽는다더니! 천하가 이미 평정되었으니 나는 마땅히 삶기겠구나!"  "토사구팽"은 "한신" 덕분에 유명해졌으나, "한신"이 태어나기 이전인 "춘추전국시대 범려(월나라 왕 구천의 신하)"가 "오나라"를 멸하고서, "구천"의 심중을 꿰뚫어보고서 관직을 내놓으면서 "문종"에게 함께 물러나자고 권하면서 처음 사용한 표현이다.  "범려"는 초야에 숨어 화를 면하였으나, "문종"은 "구천"에게 충성을 다하다 트집을 잡혀 자결한다.

• 다다익선​ (多多益善):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고제"가 일찍이 장수들의 능력을 평가한 적이 있었는데, "한신"에게 장군으로서 자신의 자질을 평가해 달라 하자, 답했다.  "폐하께서는 십만 명을 넘지 않는 규모를 지휘할 수 있습니다."  고제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공은 어떻소?"  그러자 답했다. "저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고제"가 웃으면서 말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면, 어째서 나에게 사로잡힌 것이오?"  그러자 답했다.  "폐하께선 병사를 거느리지는 못해도 장수들을 잘 거느리시니, 이것이 저 신이 폐하께 사로잡힌 까닭입니다. 또 폐하는 이른바 "하늘이 내리신" 것이니, 이는 사람의 힘이 아닙니다."

2. 소하 (蕭何) : ? ~BC 193ㆍ건국 1등 공신ㆍ전한의 초대 상국

뛰어난 판단력과 행정 수완의 소유자ㆍ유방과 같은 패현(沛縣) 출신ㆍ"유방" 천하를 얻도록 도왔으며, "유방"이 천하를 평정한 후, "유방"이 자신과 성이 다른 "한신진희(陳豨)영포(英布)" 등의 제후들을 암살하는 데 협조하여, "상국"에 임명되었다"유방"과 같은 "패현(沛縣ㆍ장쑤 성(江蘇省)"의 하급관리로 근무하면서, 성실함ㆍ능력을 인정받았다.

BC 209년 "유방"을 도와, "셴양(진의 수도)"를 점령했다. "항우"가 "유방"을 "한 왕"에 봉했을 때도, "한의 승상"으로 있으면서 관중 지방을 중심으로 세력 확대에 주력했고, "한신"을 "유방"에게 천거하여 "대장"으로 삼기도 했다. "초ㆍ한 전쟁" 때, 그는 "승상" 신분으로 "관중 지방"에 머물면서, 그 지역을 "한"의 후방기지로 만들어, 병력ㆍ군비의 보급을 원활하게 했다. "유방"이 천하를 평정한 후, "전한"이 성립된 뒤에도, 오랜 전란으로 황폐해진 국가 안정과 부흥에 헌신하였고, "승상"으로서의 "진의 법률"을 취사하여 "구장률(九章律)"을 편찬하였다.

① "한신" 제거에 협조ㆍ상국 (소하ㆍ조참)에 임명

BC 196년, "한신"이 모반을 꾸미고 있음을 알고, 책모를 써서 이를 제거하였다. 당대 "국사무쌍(國士無雙)"이라고까지 불리던 명장으로, 신중한 성격이었던 "한신"이었지만 자신을 천거한 "소하"를 믿고 방심하다가, 결국 "소하"에 의해 제거당한 것이다.  "한신"을 제거한 공으로 "소하"는 신하로서는 최고위인 "상국"에 임명되었다.   • 검리상전 (劍履上殿): 칼을 차고 신발을 신은 채, 전상에 오르는 것        • 입조불추 (入朝不趨): 입조할 때, 총총걸음으로 걷지 않는 것        • 알찬불명 (謁讚不名): 알현할 때, 이름을 대지 않는 것 등의 특권이 주어졌다.

"한 왕조"에서 최고위였던 "상국"은 일부 예외를 빼면, "소하ㆍ조참" 외에는 주어지지 않은 것이었고, "그만한 공적을 세우지는 못했다"하여 임명되지도 않았다. 또한 "소하"의 가계는 몇 번이나 단절되었지만, 곧 황제의 명으로 찾아낸 자손들에 의해, 그의 후(侯) 봉호는 이어졌다. 후세에까지 "소하"는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유방"이 죽고 2년 뒤, "소하"도 뒤를 따르듯 숨을 거두었다.

"소하"는 죽기 직전, 자신의 후임으로 "조참"을 지명했다. "조참"은 정무를 소홀히 한다는 비난을 받을 때조차, "고조와 소하가 정한 법령은 명료하고 명백하게 세상을 다스리고 있으며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 세세한 것까지 바꿀 필요 없이 그냥 지키기만 하면 됩니다."라고 황제에게 진언했고, 황제도 그 말을 납득했다. 여기서 "소하"의 행정 수완과 뛰어난 판단력을 볼 수 있다.

"유방"이 "함양(진 수도)"에 입성하자, 다른 사람들은 모두 "진 황궁"에 쌓인 많은 보물에 눈이 팔려 있는 와중에, 유일하게 "진 역사ㆍ법률ㆍ각국의 호적 대장" 등이 보관된 "승상부(丞相府)의 기록 보관소"로 달려가, 그것이 "항우"에 의해 파괴되기 전에 모두 가져오는데 성공했다. 이것은 훗날 "한 왕조"의 기초를 다지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BC 202년, 마침내 "유방" 진영의 승리로 "초한 전쟁"은 끝났고, 전공을 논하는 자리에서 전장에서 활약한 여러 장수들을 제치고, "소하"가 "제일 공신"으로 천거된다. "소하"의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군수물자 보급, 근거지인 관중 땅의 안정" 없이는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을 것이라는 "유방"의 이해ㆍ판단에서 나온 결단이었다. 이때 "소하"는 "차후(酇侯)"로 봉해지고 식읍 7,000호를 하사받았으며, 일족 수십 명도 각각 식읍을 받았다.

② "유방"의 의심

"유방"은 "소하"에게도 의혹의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서는 "초한 전쟁" 때부터 그러한 경향이 있었고, "소하"도 그것을 헤아려 전쟁에 참가할 수 있는 친척은 모두 전장으로 돌림으로서, "모반의 마음"이 전혀 없음을 보였다. 그러나 "유방"이 황제가 되면서부터, 그러한 시기와 의심이 더욱 강해졌고, "한신"을 비롯한 원훈들이 잇따라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보며, "소하"에 대해서도 같은 결론에 이른다. (오랜 세월에 걸쳐 관중을 지키며 민중의 신망이 두터운, 마음만 먹으면 쉽게 관중을 장악할 수 있다는 것도 소하를 위험시한 요인이었다).

"소하"는 여러 차례 부하의 조언을 받아들여 일부러 논밭을 사 모으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거나 하는 등으로 자신에 대한 평판을 떨어뜨리거나, 자신의 재산을 아예 국고에 기부해버림으로써, (한때 투옥된 것을 빼면) 간신히 숙청을 피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사실에서 "소하"를 "보신주의자"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신생국가인 "전한 왕조"를 지키기 위해 풍파를 일으키지 않으려고 이러한 일련의 행동을 보이게 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③ 초ㆍ한 전쟁

"진" 말기 동란기, "소하"는 "조참" 등과 함께 "패현의 성"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진" 정부가 파견한 현령을 죽이고, "유방"을 현령으로 앉혔다. 이후 "유방" 진영에서 내부의 사무 일체를 지휘하였고, "유방"이 "항량ㆍ항우"를 중심으로 하는 "반진(反秦)" 진영에 가담해 각지를 전전하게 되었을 때, 군량 수송을 전담해 이를 끊어지지 않도록 하면서 병사들이 백성을 약탈하는 등의 일이 없게 하였다.

BC 206년, "진"이 멸망하고 "유방"이 "항우"에 의해 "한 왕(漢王)"에 봉해지자, "소하"는 "승상"으로서 내정 일체를 맡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후영"이 "한신"을 천거해 오자, "소하"는 그를 "유방"에게 천거하지만, 자신이 받은 한미한 직책에 불만을 품고 도망치려는 "한신"을 잡아두기 위해, "이번에도 제대로 중용되지 못한다면 나도 한을 떠나겠다."며, "유방"을 설득해, 끝내 "한신"이 "유방 진영의 대장군" 지위에 오르게 한다. "한신"이 이렇다 할 출신 배경이나 전장에서 세운 특별한 공적이 없었을뿐더러, "초나라" 일개 잡병(雜兵)에 불과했고, "한"에서도 하급 무사에 지나지 않았으나, "유방"이 그를 크게 중용한데에는 "유방"이 평소 "소하"를 얼마나 신뢰하고 의지하였는지 잘 보여준다.

"유방"이 군세를 거느리고, "관중(關中)"에 입성할 때, "소하"도 함께 했다. "초한전쟁"이 격화되면서 "유방"이 전쟁터로 나가 "관중"을 비운 동안, "소하"는 "태자 유영"을 보좌해 그곳을 지켰다. "관중"에서도 "소하"의 행정 수완은 유감없이 발휘되었으며, "관중"에서 "유방"이 있는 전장으로 식량ㆍ병사가 끊어지는 일이 없도록 후방에서 지원했으며, "관중"의 백성을 괴롭히는 일도 없어 "명 승상"으로까지 칭송받았다.

3. 장량 (張良)ㆍ장자방 (張子房) : ? ~ BC 186ㆍ건국 1등 공신

"명 참모"를 의미하는 "장자방"의 주인공ㆍ"장가계(張家界)"에서 칩거ㆍ"천리 밖의 승패도 한눈에 들여다본다."는 지략가로 알려져 있다전략적인 지혜를 잘 써서, "유방"이 ""을 세우고 천하를 통일하도록 하는 데 기여하였다"장량"이 "유방"을 도와, "한(漢)나라"를 건국하는 데 일생을 바친 것은 오직 조국 "한(韓)나라"를 멸망시킨 "진시황제에 대한 복수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항우"에게 세력이 밀리던 "유방"을 도와 그가 "함양"을 돌파하게 하고, "홍문의 연"에서 "유방"의 목숨을 구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유방"으로부터 "군막에서 계책을 세워, 천리 밖에서 벌어진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이 장자방이다"는 극찬을 받았다.

영천군 성보현 출신ㆍ"한(韓)"나라 명문가 출신ㆍ한나라의 5명의 왕을 모신 재상 집안에서 출생조부 "장개지(張開地)""소후(昭侯)선혜왕(宣惠王)양왕(襄王)" 시절에 재상을 지냈고, 부친 "장평(張平)""희왕(釐王)혜왕" 시절에 재상을 역임

① 말 년

BC 201년, "장량"의 건의로 "유방"이 "낙양"에서 "관중 지역"으로 천도한 후부터, 항상 신병을 이유로 조정에 출석하지 않고 두문불출하여, 권력의 중심에서 비켜서 있었다. 실제로 BC 196년 "한신"은 "여태후(여치ㆍ유방의 왕후)"의 농간에 죽임을 당했고, 후에 "소하"는 수감되었으며, 함께 "해하 전투"를 치렀던 "팽월(양나라 왕)"도 살해되었다. 이들 모두 "개국공신"으로 "한나라"가 개국된 후, 권력ㆍ부의 중심에 있던 인물들이었다. "장량"은 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장량"은 건국 후 단 1번 정치에 개입한 적이 있었다. 바로 "유방"의 후계자 문제로 "여태후"가 "장량"을 닦달했을 때다. "유방"은 말년에 애첩인 "척희(戚姬ㆍ척부인)"을 사랑해서, 그녀가 낳은 아들 "여의(如義)"로 황태자 "유영(劉盈)"을 대신하려고 했다. 다급해진 "여태후"는 "장량"을 다그쳤고, "장량"은 "유방"이 존경하는 "상산사호(常山四皓)"에게 황태자의 보좌를 맡기면, "유방"이 황태자를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과연 "유방"은 후계자를 바꾸지 않았고, 이로써 "장량"은 황태자와 "여태후"를 살린 은인이 되어 자신의 목숨을 보전했다.

BC 196년, "장량"은 다시 관직에서 물러나, "신선술을 배우겠다"는 이유로 다시 두문불출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한신ㆍ팽월"의 살해와 이에 공포를 느껴 일어난 "경포의 반란" 등 살벌한 세상에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처세술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여태후"가 "장차 장량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모함하자, "유방"은 "장량"이 머물고 있던 "장가계(張家界)"를 공격해 왔다. 하지만 "유방"은 천연의 요새인 이 지역을 끝내 정벌하지 못했다. "장량"은 "유방"이 세상을 뜨고 8년 후 세상을 떠났고, 이곳에 묻혔다.

BC 201년(고조6), 공신들에게 포상할 때, 책략으로써 세운 공을 인정받아 "제나라"에서 3만 호를 마음대로 택하라는 말을 받았지만, 스스로 사양하고 "고조"를 처음 만난 "유(留) 땅"을 받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유 후"에 봉해졌다. 공신 서열 62위에 불과했지만, 봉읍은 1만 호로 유택(12,000호), 조참(10,600호) 다음으로 가장 많았다.

② 초ㆍ한 전쟁

"유방"을 보좌해,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한나라"를 건국한 뒤, "한나라"의 기틀을 마련했다. BC 206년 "진나라"가 완전히 멸망하고, BC 202년 "유방"이 "한 고조"로 즉위했다. "장량"이 "유방"을 도와, "한(漢)나라"를 건국하는 데 일생을 바친 것은 오직 조국 "한(韓)나라"를 멸망시킨 "진시황제에 대한 복수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유방"을 돕게 된 데는 조국 "한나라"에 대한 충성심과 "진나라"에 대한 보복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장량"의 복수는 단순히 "진나라"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에서 끝나지 않았다. "장량"은 타인을 존중할 줄도, 의로운 일에 목숨을 걸거나 죽음을 태연하게 받아들일 줄도 모른데다 참을성까지 없었던 "유방"을 "한나라"의 건국자로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장량"의 뛰어난 계책과 가르침은 "한 고조 유방"을 완전한 대륙의 패자로 만들었다. "장량"이 "유방"을 돕지 않았다면, 중국의 역사상 가장 강대했던 시기 중 하나인 "한나라"의 시대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부 "장개지(張開地)"는 "소후(昭侯)ㆍ선혜왕(宣惠王)ㆍ양왕(襄王)" 시절에 재상을 지냈고, 부친 "장평(張平)"은 "희왕(釐王)ㆍ환혜왕" 시절에 재상을 역임했다. 아버지가 죽고 20년 뒤인 BC 230년에 "한"이 "진"에 멸망하여 집안은 몰락했고, 그때 아직 관직을 얻지는 못한 채였다. 조국을 멸망시킨 복수를 위해, 전 재산을 모두 팔아 자금을 마련하고, 동생이 죽었을 때조차 장례 비용을 대주지 않았다고 한다. 동지를 찾아 동쪽으로 떠나 "창해공(滄海君)"이라는 자를 얻어 대화를 나눠보고, "창해공"으로 하여금 BC 218년경, "박랑사(현, 허난 성 양장)"을 지나는 "시황제"의 행차를 노리고, 무게가 120근(약 30kg)이나 되는 철퇴를 던져, "시황제"가 탄 수레를 부수어, "시황제"를 암살하려 했다.

그러나 철퇴는 "시황제"의 수레가 아닌 다른 빈 수레에 맞아, 암살은 실패하고 "장량" 등은 도망쳤다. 이름까지 바꾸고, 하비에 숨은 그는 "황석공"이라는 인물로부터 병법을 배웠다고 한다. 훗날 "장량"은 예언대로 자신이 산에서 발견한 "노란 돌(황석)"을 가지고 돌아와, 이를 가보로 전했으며, 사후 "장량" 무덤에도 함께 부장되었다고 한다. 또한 "하비"에서 도피생활을 하면서 "항우의 숙부 항백(項伯)"이 사람을 죽이고 도망쳐온 것을 숨겨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 후 "유방"이 군사를 일으키자, 100여 명의 종을 데리고 따랐다. "초나라 의제"를 옹립한 "항량(항우의 숙부)"에게 "횡양군(진나라에 망한 한나라의 여러 공자 중 1명)"을 왕의 재목으로 추천해서, "한왕 성(韓王 成)"에 옹립하도록 했으며, "한의 사도"에 임명되었다. 한때 "장량"이 섬긴 "패공 유방"이 "남양군"을 공략할 때, "장량"도 "패공"에 속해 한나라의 10여 성을 함락했다. "패공"은 "한왕 성"에게 "양책"을 지키게 했다. 

"항우"가 BC 206년에 "진나라"를 멸하고, 각지에 제후들을 봉건하면서, "한성"도 "한 왕"이 되었고, 서울은 "양책"에 두었다. 그러나 "장량"을 "한 왕 유방"에게 종군시켰기 때문에, 군공이 없다하여 "항우"가 본국으로 보내지 않고, "서초"의 서울 "팽성"에 머무르게 해, 감시를 받았다. 결국 "한왕 성"은 왕위를 뺏겨 "열후"로 강등되었고, 살해되었다. "장량"은 "항우"에게로 달아나, "유방" 밑에 있던 한나라 왕실 자손 "한신"을 "새 한 왕"으로 세우고 "항우"에게 저항하게 했다.

③ 사기 : "창해공(滄海君)"과의 만남ㆍ"시황제" 암살시도

장량은 33살 때, 재상 벼슬을 지내다가, "진시황"에게 "한나라"를 빼앗기게 되자, 그 길로 초야에 숨어 살며, 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불세출의 재사(才士)"였다. 어느 날, 장량이 낮잠을 자고 밖으로 나오니, 동자가 급히 달려와 놀라운 소식을 전해준다. "선생님! 초나라의 "진승"이라는 사람이 "진시황"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나, 초나라 재건운동을 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누구에게 그런 소리를 들었느냐?" "조금 전에 만리장성 노역부로 끌려갔다가 도망쳐 온 사람에게 들었습니다."  "알았다 물러가 있거라." 장량은 대단한 일이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속으로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오솔길을 혼자 거닐며,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오동나무 잎 하나가 떨어짐으로서 천하에 가을이 온 것을 알 수가 있다더니(오엽일락진지추: 梧葉一落盡知秋) 천하의 폭군 진시황에게도 이제야 패망의 조짐이 온 것이로다. 그렇다면 나도 낮잠만 잘 것이 아니라, 서서히 움직여 봐야 하겠는걸."

장량이 산속을 한 바퀴 돌고 산 아래로 내려오니 마침 노인들이 술집 마당에 모여앉아 술추렴을 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머리가 유난히 희어 보이는 노인이 술을 마셔가며 개탄한다. "5백 년 전만 하더라도 천하가 태평하여 백성들이 즐겁게 살아갔던 모양인데, 전국시대 이후로는 세상이 하루도 편할 날이 없으니, 이런 비극이 어디 있단 말인가?" "태평 시대란 도대체 어떤 시대를 말하는 것인가?" 다른 노인이 그렇게 물어보자, 그 노인은, "해 뜨면 농사짓고 해지면 잠자고, 우물 파서 물 마시고 밭 갈아 배불리 먹으면서 격양가(擊壤歌)를 즐겁게 부를 수 있다면, 그런 시대가 바로 태평성대가 아니겠나. 옛날에 태평성대에는 도둑도 없었고, 백성들이 싸움터에 끌려가는 일도 없었다니, 얼마나 좋았던 시절이었냐 말일세."

"그러면 오늘날 진시황 시대와 비교하면 어떤 점이 다르다고나 할까?"  "생각해 보게! 진시황이라는 자는 백성들을 법으로만 다스려 나가려고 하는데, 그 법이란 것이 제 마음대로 만든데다가 가혹하기 이를 데 없어서, 자나 깨나 백성들을 들볶는 데만 쓰여지고 있으니, 이게 무슨 빌어먹을 정치란 말인가." 노인은 거기까지 말하다가, 장량이 옆에서 듣고 있음을 알게 되자 별안간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장량을 염탐꾼으로 알고 겁에 질린 모양이었다.

장량은 노인들의 어색해진 분위기를 달래듯 노인들 곁으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노인장은 진시황의 학정을 성토하다 말고 왜 중도에 입을 다물어 버리십니까?  나를 염탐꾼으로 아시고 겁이 나신 모양이구려."  "아, 아닙니다. 늙은 것이 취중에 쓸데없는 말을 잠깐 씨불여 보았을 뿐이라오." "하하하, 겁을 몹시 내시는 것을 보니, 나를 아직도 못 믿을 사람을 보시는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노인장 대신에 내가 진시황의 학정을 기탄없이 말해보기로 할까요?" "엣? 선생이 진시황의 학정을?" "노인장 대신에 내가 여러분에게 진시황의 죄상(罪狀)을 말할 테니까 노인장께서는 맞는지 들어보아 주십시오." 

그리고 장량은 좌중에 연설조로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진시황은 잔학무도하기가 이를 데 없어서, 남자들은 농사를 짓지 못하게 만들어 놓았고, 여자들은 길쌈을 못하게 만들어 놓았고, 부자강리(父子强離), 부부강별(夫婦强別)로 젊은이들을 모조리 끌어내어 만리장성을 쌓지 않으면 아방궁 노역부로 혹사를 시키더니, 이제는 그것만으로도 부족하여 분서갱유(焚書坑儒)까지 자행하고 있으니, 이와 같은 역천지죄(逆天之罪)를 어찌 보고만 있을 수 있으리오?  그러니, 우리들은 마땅히 들고 일어나 천하의 폭군을 우리의 손으로 거꾸러뜨려야 할 것입니다."

장량의 말이 끝나자, 노인들은 일언반구(一言反口)도 없이, 모두들 전신을 와들와들 떨며 부리나케 일어나, 제각기 뿔뿔이 달아나버리는 것이었다. 장량은 그 광경을 보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을 하였다. "아아, 진시황의 법이 얼마나 가혹하면 늙은이들조차 저렇듯이 겁을 내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아까부터 장량을 유심히 살펴보며 술을 마시던 키가 9척이나 되어 보이는 젊은 사람 하나가 장량 앞으로 다가오더니, 장량의 손을 덥석 움켜잡으며 말한다. "지금 당신의 말을 들어보니, 진황제는 살려두어서는 안 될 폭군 같구려. 그렇다면 왜 그런 자를 없애 버릴 생각은 아니 하고 살려두오? 당신에게 만약 그런 뜻이 있다면, 나도 당신을 도와주겠소." 장량은 그 말을 듣자 크게 기뻤다. 오래 전부터 구해 오던 장사(壯士)를 이제야 만났기 때문이었다. 장량은 그를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인사를 청했다. "우리 인사나 나누고 지냅시다. 귀공의 성함은 어떻게 되시오?" 

장사가 대답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바닷가에 살아 왔는데, 남들과 달리 기골이 장대(氣骨壯大)한 탓으로 사람들이 창해공(蒼海公ㆍ?∼?)이라고 불러오지요.  보아하니, 선생도 예사 어른 같지는 않은데, 함자는 어떻게 되시오?" 나의 이름은 장량이고, 자는 자방이라고 하오. 한나라가 망하기 전에는 재상 벼슬을 지낸 일도 있었소. 진작부터 진황제를 죽이고 나라를 되찾을 생각에서 자객을 구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오늘 귀공을 만나게 되어 한량없이 기쁘구려."

"좋소이다. 선생이 원한다면 내가 진황제를 죽여주겠소." "고맙소이다. 귀공이 진황제를 죽여주기만 한다면 그것은 여섯 나라의 원수를 한꺼번에 갚는 것이기에, 귀공의 이름은 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오." "나는 이름을 알리려고 사람을 죽이려는 것은 아니오.  다만 진황제라는 자가 백성들을 몹시 괴롭힌다기에 죽여 없애려는 것뿐이오." 이렇게 창해공은 진실로 순박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언약이 성립되자, 장량은 비밀리에 진시황의 동태를 염탐해 보았다.

때마침 진시황은 지방을 순찰하는 중이었는데, 다행하게도 수일 후에는 한나라 땅인 양무현(陽武縣)을 지나게 된다는 소식이었다. 며칠이 지난 후, 장량이 창해공과 함께 양무현으로 달려가 산위에서 살펴보니, 진시황의 행렬이 큰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황색 비단으로 호화롭게 장식한 온량거를 중심으로 여러 채의 비슷비슷한 수레가 앞뒤에 따르고 있었고, 전후좌우에는 수천 명의 기마 무사가 호위하고 있었다. 창해공이 시황제의 행렬을 바라보며 묻는다. "진황제라는 자는, 황색 비단으로 호화롭게 장식한 저 수레 속에 타고 있을 테지요?" "아마 그럴 것이오. 전후좌우에 호위병의 경계가 삼엄한데, 귀공은 저렇듯 삼엄한 경계를 뚫고 들어가 진황제를 능히 살해하실 수 있겠소?" "염려마오. 철퇴(鐵槌)를 휘두르며 번개같이 달려 들어가 일격에 작살을 내버리면, 호위병들이 손쓸 사이가 어디 있겠소?" 창해공은 자신만만하게 장담하였다. "그러면 꼭 성공하시고 돌아오시길 바라오." "잠깐 다녀올 테니, 선생은 이곳에 몸을 숨기고 구경이나 하고 계시오."

"창해공"은 그 한 마디를 남기고 열 자가 넘는 철퇴를 바람개비처럼 휘두르며 산을 내려가는데,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눈에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고, 이것을 숨어서 지켜보는 장량은 두 손을 합장하고 하늘을 우러러 성공을 빌 뿐이었다. 곧이어, "창해공"은 철퇴를 바람개비처럼 휘두르며, "진시황" 순행 대열 속으로 질풍(疾風)같이 뚫고 들어가 호위병들을 비롯하여 온량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때려 죽였다. 목적은 "진시황"을 없애는데 있었지만,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온량거에 타고 있던 사람 모두를 때려죽인 것이었다. 온량거에 날벼락이 떨어지는 바람에 엄숙하던 행렬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

"자객이다! 자객을 잡아라!" 앞뒤를 따르던 호위병들이 순식간에 구름떼 같이 몰려들어, "창해공"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그러자 "창해공"은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좋다. 나를 얼마든지 잡아가거라. 천하의 폭군을 내 손으로 잡아 죽였으니, 나는 여한이 없다." "창해공"은 "진시황"을 죽여 버린 줄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커다란 오산이었다.

"진시황"은 워낙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 지방 순행을 다닐 때에는 자객들의 기습이 두려워, 온량거에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태우고 자기 자신은 몇 발짝 떨어진 수레를 타고 다녔던 것이다. 그 덕택에 "진시황"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진시황"은 밧줄에 묶인 "창해공"을 꿇어앉혀 놓고, 불호령을 내렸다. "여봐라! 이놈이 누구의 사주를 받고 짐을 죽이려고 했는지, 가차 없이 고문하여 배후를 당장 밝혀내어라!" "진시황제" 앞에서 "창해공"의 살이 문드러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무참한 고문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창해공"은 의연한 자세로 시황제를 당당하게 꾸짖는다. "이 어리석은 놈아! 나는 무도(無道)한 너를 하늘의 뜻으로 벌(罰)하려 했을 뿐이다.  천하의 의장부(義丈夫)인 내가, 어찌 남의 사촉(私囑)을 받아서 너를 죽이려 했겠느냐?"

"창해공"은 고문에 못 이겨,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장량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진시황제"는 "창해공"을 죽인 뒤에도 배후의 인물을 기어이 색출하려고 "대사 조고"를 불러, "<정부의 시책을 비방하는 자들의 이름을 알려주는 사람에게는 상금으로 만 냥을 하사한다>고 전국에 방을 써 붙이라!" 하고 명령하였다. 이리하여 "진나라" 전국에는 "돈에 눈이 먼" 고자질꾼들로 인하여, 백성들이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의 한바탕 바람이 불었다. 또 그로 인해 억울한 사연으로 죽어간 사람의 수가 부지기수에 이르렀다. 이렇게 밀고된 불평객들의 명단에는 "장량"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 언젠가 술집 마당에서 노인들을 상대로 "진시황"의 학정을 비난한 것이 티가 난 것이었다. "장량"은 화를 면하기 위해 부득불 도망을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장량은 막역한 친구인, "초나라" 명장이었던 "향연"의 조카 "항백(項伯ㆍ? ~ BC 192)이 있는 옛 "초나라"로 피신하였다. "항백"을 만난 장량이 쫓겨 온 사정을 사실대로 말하자, "항백"은, "걱정 말고 내 집에 얼마든지 있게. 자네를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누가 도와주겠는가?" 하였다.

④ 사기 : "황석공 (黄石公)"과의 만남

그리하여 장량은 "항백"의 신세를 지게 되었는데, 어느 날 "이교(圯橋)"라는 다리를 건너가는데, 80살 노인 한사람이 다리 위에 앉아 있다가, 장랑을 보고, "여보게 젊은이! 내가 개천에 신발 한 짝을 떨어뜨렸는데, 자네가 저것을 좀 주워주겠는가?" 하고, 개천에 떨어진 신발을 가리키며 말하는 것이었다. 옷은 남루하고 피골이 상접하여 기운은 하나도 없어 보였지만, 두 눈에서는 이상한 광채가 빛나는 노인이었다. 장랑은 개천으로 내려가, 노인의 신발을 공손히 집어다 주었다.

그러자 노인은 신발을 신다가 다시 개천에 떨어뜨리고, 장랑더러 또다시 주워달라는 것이 아닌가? 장랑은 2번째도 신발을 공손히 집어다주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도 또 다시 신발을 떨어뜨리고 다시 신발을 주워 달라고 한다. 장랑이 또 다시 신발을 공손히 주워 바쳤더니, 노인은 크게 기뻐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대는 가히 가르칠 만한 인재로다. 내가 그대에게 귀중한 책을 한 권 주고 싶으니, 그대는 지금부터 닷새 후, 이른 새벽에 저기 보이는 저 숲속 바위 앞에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게나. 그런데 나보다 늦게 와서는 안 되네."

그로부터 닷새 째 이른 아침에 장랑이 숲속 바위 앞으로 달려와 보니, 그 노인은 먼저 와 있다가 장랑을 보고 꾸짖는다. "젊은 사람이 늙은이를 기다리게 해서 무엇에 쓰겠나. 닷새 후에 여기서 다시 만나세." 장랑이 2번째는 꼭두새벽 같이 달려갔지만, 그때에도 노인이 먼저 와 있다가 다시 닷새 후를 기약하고 그냥 돌아가 버렸다. 장랑은 3번째는 아예, 전날 초저녁부터 가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그 노인은 동이 틀 무렵에 어디로부터인가 가죽 관(冠)에 황금 도포를 입고 바람처럼 나타나는데, 그야말로 신선과 다름없이 거룩한 모습이었다.

신비스러운 생각이든, 장랑이 땅에 엎드려 큰 절을 하면서 말했다. "선생께서는 소생에게 부디 가르침을 내려 주시옵소서." 그러자 노인은 웃으며 대답한다. "나는 황석공(黃石公ㆍ? ~ ?)이라는 늙은이일세. 그대에게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네.  그대는 학문을 닦아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 잡아볼 뜻이 있는가?" 장랑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은 하늘의 뜻인 줄로 알고 있사옵니다. 소생이 비록 불민하오나 어찌 천의(天意)를 받을 생각이 없으오리까? 선생께서는 부디 가르침을 내려주시옵소서." "황석공"은 호쾌하게 웃으면서 대답한다. "그대가 이처럼 올바른 뜻을 품고 있다니, 내 어찌 그대의 부탁을 거절하랴."

장랑이 또다시 절을 하며 부탁한다. "지금 진황제는 극악무도하여 백성이 살아가기 어렵고 천하가 어지러우니 어떡하든지 세상을 바로 잡아놓아야 할 텐데, 소생은 의욕은 있으나 계략(計略)과 지모(智謀)가 너무도 부족하옵니다." "황석공"은 그 말을 듣고 더욱 기뻐하며 말한다. "내가 관상을 보니, 자네는 열심히 공부하면 먼 장래에는 제왕(帝王)의 스승이 될 상(相)일세.  그러한 자네를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 나로서는 다시없는 기쁨일세." 그러면서 "죽간서(竹簡書) 3권"을 내주면서 말했다. "이 책은 "태공망(太公望ㆍ강태공)"의 "삼략(三略)"이라는 귀서(貴書)일세.  이 책 속에는 천하를 경륜하는 온갖 방법이 모두 들어 있으니, 오늘부터 이 책을 열심히 공부하여 대성토록 하게. 세상 사람들은 "손자병법(孫子兵法)ㆍ오자병법(吳子兵法)≫"을 소중히 여기지만, 이 책은 그런 것과는 또 다른 천하를 경륜하는 훌륭한 신서(神書)라네.  자네가 이 책으로 10년 동안만 공부를 열심히 한다면, 그때에는 참다운 군주(君主)를 만나 명성을 만고에 떨치게 될 걸세."

"선생님 고맙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명심하고, 전력을 기울여 공부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머리를 조아려 물었다. "제가 만약 성공하여, 후일에 선생님을 찾아 뵈오려면 어디로 가야 하겠습니까?" "황석공"은 그 말을 듣고, 소리를 내어 웃으며 대답한다. "하하하, 자네가 세상만 바로 잡아주면 그만이지, 나 같은 늙은이를 무엇 때문에 다시 만나려고 하는가?" "스승님을 찾아뵙는 것이 제자의 도리가 아니옵니까?  선생께서는 부디 거처하시는 곳을 알려 주시옵소서." "나는 일정한 거처가 없이 행운유수(行雲流水ㆍ떠도는 구름처럼 흐르는 물처럼) 거주무심(去住無心ㆍ어느 한곳에만 정붙이고 살지 않고 여기저기 떠다님)하니, 나에게 무슨 일정한 거처가 있겠는가." "그러시다면 10년 후에 선생님을 다시 만나 뵐 수 있는 장소라도 말씀을 해 주시옵소서."

그것도 부질없는 일이야. 자네가 후일 나를 굳이 만나보고 싶다면, 이 말 한 마디만 말해 둠세. 지금부터 13년 후에 천곡성(天谷城)이라는 곳에 찾아가면, 성문 동쪽에 누런 바위가 하나 있을 걸세. 그 바위가 바로 나라는 것을 알아주게." "황석공" 노인은 그 말 한 마디만 들려주고, 아무 미련도 없이 바람처럼 표표히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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