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 - 역사 • 사건 • 인물

초한지 (楚漢志) ① 항우(楚 초패왕)ㆍ유방(漢 한고조)의 싸움

by 당대 제일 2022. 11. 28.
반응형

 

중국 역사상 최초로 전국을 통일한 "시황제(始皇帝ㆍBC 259~210ㆍ49세ㆍ재위 BC 246~210(36년))"는 난폭하고 잔인하며 성격적인 결점도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중국 역사상 뛰어난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유는 기나긴 "춘추전국"시대(무려 550년 동안이나 지속된 전쟁 기간)를 마감했기 때문이다.  올바른 통치자보다는 지긋지긋한 전쟁을 마무리하는 인물이라면 누구든 환영했을 것이다.

 

1.  "진시황제"가 세운 대제국의 멸망

"시황제"가 세운 대제국은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지만, 그가 죽는 순간부터 기울기 시작했다

천하가 통일된 지 불과 10여 년이 된 시점이었다 간신의 대명사가 된 "법가"의 대가 "이사(李斯)", 환관 "조고(趙高)" 등의 힘을 빌려, 장남인 "태자 부소(扶蘇)"를 제거하고, 대신 차지한 막내아들 "호해(胡亥)"는 통치력이 결여된 인물이었다 혼란이 시작되자, "진승(陳勝)"이라는 호걸을 필두로 패권을 노리는 인물들이 줄줄이 궐기했다 산발적인 봉기가 점차 정리되면서, "유방항우" 천하의 패권을 두고 마지막 승부를 벌이게 되었다.

진승 (? ~ BC 209): "()나라"의 반란 주모자로, 중국 최초의 농민 반란인 "진승오광의 난" 일으켜, ""에 맞서 "장초(張楚)"를 세우고, 왕이 되어 "진나라"를 압박했으나, "장한" 거느린 "진나라 토벌군"에 공격받아 전쟁에 패해서 죽었다 후에, "한나라 유방""진승"에게 "은왕(隱王)"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당시 사회는 고대 "주나라"의 예법 체제가 그대로 통용되었다.

"주나라"는 사람들을 왕족에서 천민까지 모두 10개의 신분으로 구분하던 계급 사회였다 전통적인 관념으로는 "서민이 왕"이 되기란 불가능했지만, 최초로 봉기를 일으켰던 "진승"은 사회 분위기를 획기적으로 바꾸는 계기를 마련했다 "제후장수재상의 씨가 따로 있겠느냐(王侯將相寧有種乎)"

항우

 "항우"가 몰락한 국가와 가문의 원한을 갚고자, "진나라 타도"의 기치를 든 반면, "유방""농민 반란"에 참여하려는 의사를 별로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반란군"을 이끌게 된 발단은 "시황제"가 시작한 "만리장성 공사"였다 이 대규모 토목사업은 "호해(2대 황제)" 시절에도 계속되었는데, 아무리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라고 해도 노동력이 무한정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진나라"는 죄수들을 모두 축성공사에 동원했다.

"호해"가 즉위한 바로 그해, "정장"이었던 "유방"에게 죄수 호송 명령이 떨어졌다 그런데 "유방"이 죄수들을 호송하던 도중, 다수의 탈주자가 발생하고 말았다 가혹한 법률로 유지되던 "진나라"인지라, "유방"은 범죄자로 몰려 중형을 받게 될 입장이 되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술을 거나하게 먹고 나서, 죄수들을 모두 풀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집으로 돌아올 수가 없게 된 "유방"은 떠돌다가, "패현" 주변의 지형이 험한 곳에 머물게 되었다. 이때 죄수들 중에서 오갈 데가 없던 젊은이들이 "유방"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유방"은 그들을 데리고 일종의 "도적단"을 구성했다.

공교롭게 바로 이 시기에 "진승"이 난을 일으켰다. "유방"은 졸지에 "반란군"을 이끌게 되었다. 여기에 고향 친구들과 혈기 넘치는 젊은 사람들이 합세하자, 이럭저럭 300명의 병력이 되었다. "유방""패현의 현령"을 살해하고, 스스로 "패공(沛公)"이라고 칭했다.

BC 209, "진승오광"이 봉기를 일으키자, "항우""항량"과 함께 "회계 태수 은통(殷通)"을 죽이고 스스로 부장이 되어 군사를 모았다. 이때 모인 군사는 약 8,000여 명에 이르렀다BC 208, "진승""진나라"와의 전투에서 전사했고, "진승 부대"의 구원 요청에 당시 "진승"의 죽음을 알지 못했던 "항량항우"는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격했다진격 도중, "항량항우"의 군대는 그 세가 점점 늘어나, "반진" 세력의 주력 부대가 되었고, "항량" 반진 세력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이때 "유방""항량 군대"에 합류했다.

④ 당시 "유방""여산(驪山)""황제릉(皇帝)" 조영 공사에 부역하는 인부의 호송책임을 맡았다.

도중에 도망자가 속출하여 임무수행이 어려워지자, 나머지 인부를 해산시키고, 자신도 도망하여 중에 은거하였다"항량"은 전략가 "범증"의 의견을 받아들여, 당시 양치기 목동이던 "초나라 회왕"의 손자 "웅심()"을 찾아내, 조부의 이름을 따서, "회왕"으로 추대했다"거록"에서 크게 승리한 "항우"40만 대군을 이끄는 "대장군"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러나 "항우"는 곧 "유방이 진의 수도 함양을 차지했다"는 비보를 들었다"초 회왕""항우유방"에게 "누구든 관중(關中)을 먼저 차지한 자가 관중의 왕이 된다."는 약속을 했는데, "유방"이 먼저 "함양"을 함락했기 때문에, "관중의 왕""유방"이 되어야 했다"함양" 진입에 늦은 "항우"는 크게 노하여, "유방"의 군사를 쳐부수려 했고, "경포(黥布)"를 시켜 "함곡관"을 함락하고, "함양"의 동남방 "홍문(鴻門)"에 진영을 설치했다이때 "항우"의 군사는 40만이었고, "유방"의 군대는 10만이었다.

2. 연보 : 초한지 (항우ㆍ유방)ㆍ서한삼걸

① BC 209 : 농민봉기군 수령인 "진승"의 봉기

남의 집에 고용살이 하던 "진승"도 징집 명령을 받고, 900여 명의 다른 장정과 정해진 장소로 가던 중, "대택향"에서 큰 비를 만나 길이 끊겨, 정해진 기일에 도착할 수 없음을 직감하고, 친구인 "오광"과 함께 나머지 사람들을 설득해, 거대한 제국에 저항하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농민봉기를 일으킴. 농민봉기군 수령인 "진승"이 외친 "신분 해방 선언"이 연쇄반응을 일으켜, "제국의 모순"이 한꺼번에 터지기 시작→ "진승"에 이어, "유방ㆍ항우"가 봉기하고, "6개 왕조"가 부활하여, "왕정복고" 추진

※ 진승 ( ~ BC 209): 농민 봉기군 수령ㆍ반란 주모자→ "진나라" 멸망의 계기 제공

중국 최초의 "농민 반란"인 "진승ㆍ오광(친구)의 난"을 일으켜, "진나라"에 맞서, "장초(張楚)"를 세우고 왕이 되어 "진나라"를 압박했으나, "장한"이 거느린 "진나라" 토벌군의 공격받아 전쟁에 패해서 죽었다. (명언 :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더란 말이냐?ㆍ참새가 큰새의 뜻을 어찌 알리오 → 고려시대 만적 (노비 반란의 대명사)인용→ 신분해방 선언)

② BC 208 : 도망자 신세의 "유방"

"유방"은 부역을 위해, 장정들을 "함양 부근"으로 호송하던 중, 도망자가 속출하여 하는 수 없이 "도망자" 신세가 된다. "유방"은 건달이며, 왈패였고, 개를 잡아 팔던 "번쾌"를 비롯하여 온갖 천한 일을 하던 자들이 "유방"의 친구였다 → 친화력이 남달라, 항상 중심에 서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 한초삼걸 (漢初三傑)ㆍ서한삼걸(西漢三杰)ㆍ전한삼걸 (前漢三杰)ㆍ건한삼걸 (建漢三傑)

한신 (韓信ㆍ회음후 (淮陰侯)로 강등ㆍ ? ~ BC 196)→ 군사ㆍ용병술의 대가ㆍ가는 곳마다 승리하는 상승장군(늘 이기는 장수))ㆍ소하 (蕭何ㆍ? ~ BC 193ㆍ전한의 초대 상국))→ 후방 물자 담당ㆍ장량(張良ㆍ장자방(張子房)ㆍ? ~BC 186)→ 전략 전술ㆍ한나라 귀족출신 인텔리) • "소하"가 "한신"을 발탁→ "진평"의 계책으로, "유방"이 "한신"을 처단

"한신" "항우ㆍ유방"과 함께, 한때 천하를 3등분할 정도로 막강한 세력ㆍ능력을 가진 명장ㆍ결정적인 순간에 "유방" 편을 들어, "항우"를 물리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다. 늘 자신을 "유방"과 같은 등급에 놓고 생각할 정도로, 기개ㆍ자부심ㆍ자존심이 상당한 인물ㆍ그러나, "진평의 계책"으로 "유방"이 황제로 지방 순시 중에 "한신"을 붙잡아 압송.

※ 진평 ( ~ BC 178ㆍ"전한 왕조" 건립 후, 24년간 정치일선에서 활약)ㆍ유방ㆍ항우ㆍ범증ㆍ한신

"진평" "위나라" 출신, "유방"과 그의 공신들은 태반이 "초나라" 사람후에 "유방"이 "한나라"를 건국해서 "초한지"가 되지만, "유방항우둘 다, "초나라출신"진승"이 "농민 봉기"를 일으켜각지의 유력자를 ""으로 봉하면서세력을 확대"진평" "진승" 밑에서 벼슬을 시작, 외모풍채를 시기한 사람들이 많아, "초나라"로 귀순

"항우" 밑에서 공을 세워 출세가도를 달리던 중, 자신이 평정했던 지역을 "유방"이 탈환했다 하여 "항우" 죽이려고 하자 칼 한 자루만 차고, "유방"에게 투항"유방"이 측근인 "위무지"의 추천으로 "도위(장수의 참모)"에 임명"범증(항우 오른팔어린 시절부터 아보(아버지 같은 사람))"은 "진평의 이간책"으로 사직하여낙향ㆍ분통이 터지고악성 종양이 나서 죽고 만다.

③ BC 208 : "항우" (24세 때) 봉기

"항우"도 "유방"과 거의 같은 시기에 "항량(숙부ㆍ작은 아버지)"를 따라, 24세 때에 봉기ㆍ할아버지 "항연"은 명장이었고, 아버지는 일찍 죽어, 숙부 "항량"이 정신적 지주였다. BC 208년, "항량(숙부)"이 "장함(진나라 토벌군 대장)"과 싸우다 전사→ 독선적 리더쉽 형성

④ BC 208 : "진 제국"의 모든 시스템을 만들었던 "승상 이사"가 처형됨.

"승상 이사"는 일신의 부귀영화에 잠시 눈이 멀어, "환관 조고"의 꾐에 넘어가 엄청난 짓을 저지른 것을 후회하고, "호해(2대 황제)"에게 뒤늦은 충고를 하지만, 판단력을 상실한 "호해"는 "승상 이사"를 귀찮아하며, 멀리하기 시작ㆍ"환관 조고"는 용도를 다한 "승상 이사"를 폐기하기로 결정하고, "호해"를 조종해 "모반죄"를 씌워, 저잣거리에서 아들과 함께, "요참형(腰斬)"으로 처형(요참형(腰斬): 작두로 허리를 잘라 죽이는 것)

⑤ BC 207 : 거록 전투 (항우의 등장)

"항우"의 등장을 알리는 전투로, 2만 명의 군대로 하루 9번 싸워, 20만의 "진 대군"을 쳐부순 전투ㆍ항우"는 참모 "범증(항우 오른팔ㆍ어린 시절부터 아보(아버지 같은 사람))"에 의해, "회 왕(초나라 마지막 왕)"의 손자로, 민간에서 양을 치고 있던 "웅심"을 찾아내, "초회 왕"으로 받들었다.→ "초나라를 재건하겠다."는 봉기의 명분 확보.

그러나 "초회 왕"은 권력에 욕심이 생겨, 꼭두각시 역할을 거부하고, "항우" 대신 "송의"를 상장군에 임명하고, "항우"는 아래 차장에 임명→ "장함(진나라 토벌군 대장)"은 동쪽으로 진격하고, "농민 봉기군"은 "함양(진나라 수도)"로 진격 중에, "거록(하북성 평향현)"에서 충돌ㆍ"송의(상장군)"은 싸우기를 거부하고, 싸우자는 "항우"를 묵살→ 새벽에 "항우"는 "송의"를 단칼에 베고, "진나라 군대"를 공격→ "파부침주" 전술을 구사

※ 파부침주 : 군대를 이끌고, "황하"를 건넌 다음, 배는 침몰시키고, 취사용 솥은 깨버리고, 막사는 불태우고, 단 3일만의 군량만 휴대한 채, 전쟁하는 전술

※ "거록 전투" 승리 이후 :  "거록 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농민 봉기군" 수장이나 "제후국" 대부분이 "항우" 밑으로 들어감. 그런데, "초희 왕"이 "누구든 관중(함곡관 안의 진나라 땅)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을 왕에 봉한다."고 선언을 하면서, 대세 향배에 문제가 발생한다.

⑥ BC 206 : 열세의 "유방"이 뜻밖에 "함양" 함락ㆍ"관중"에 먼저 입성ㆍ"함양" 철수

"유방"은 "장함"의 "진나라 토벌대"가 북쪽을 담당하는 사이, 남쪽 길을 우회해, "진나라"의 허를 찌르고 "관중"에 먼저 입성, 민심 이반상태를 파악한 "유방"은 "약법삼장"이라는 대권 공약으로 "민심 수습책" 발표.

※ 약법삼장 :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 남을 다치게 하거나 재산을 빼앗은 자는 그에 상응하는 법으로 처벌, 그 외의 모든 "진나라 법"은 폐지한다.

"유방"이 "함양"에 진입할 무렵, "호해(2세 황제)"는 "환관 조고"의 압박으로 자결하고, "진왕(호해의 사촌형인 자영)"이 "환관 조고"의 꼭두각시 노릇 중이었다 → "환관 조고"가 "진왕"을 찾아 갔을 때, 미리 숨겨둔 무사로 "환관 조고"를 잡아, "거열형"으로 죽인 뒤, 직접 "유방"을 찾아가, "황제 옥새"를 주고 항복 → "유방ㆍ부하들"은 "함양성(진나라 황궁)"에서 큰 잔치를 벌이려 하지만, "장량ㆍ소하"의 간언을 받아들여, 약탈ㆍ살인을 금하고, 조용히 "함양성"을 나옴 → "소하"는 "함양성"에서 황실의 중요 문서ㆍ호적을 가져 나와, 훗날 행정 처리ㆍ세금 부과 시 자료로 활용

⑦ 홍문지연 (홍문의 파티)

"항우"가 40만의 대군을 이끌고, "함양" 근처까지 오자, 전력 면에서 절대 열세인 "유방"은 빌미를 주지 않으려고, "패상"으로 철수 → "유방"이 "항우"에게 사신을 보내, 먼저 "함양에 입성한 것은 항우를 위함"이라고 해명하자, "유방"에게 "정식으로 자신을 찾아와 해명하라"면서, "홍문"에 술자리를 마련해 놓고, "유방"을 초청.

"유방"은 100명 남짓의 기병을 끌고, "홍문"으로 간다. "범증(항우의 책사)"는 "항장(항우 사촌동생)"을 시켜, 칼춤을 추다가 "유방"을 암살하려 하나, "항백(항우의 숙부ㆍ작은 아버지)"이 과거 자신을 도와준 "장량"에게 알려주고, "장량"은 "항백"에게 도움을 청한다 → "항장"이 칼춤을 추니, "항백"도 나와 칼춤을 추면서, "항장"의 칼을 맞받았다. "장량"의 전갈을 받은 "유방"은 화장실을 간다며, 빠져나와 도망쳤다.

⑧ BC 206 : "항우"의 "함양" 입성

"항우"는 "유방"이 떠난 "함양"에 들어가 "진왕"을 죽인다 → 불을 지르고, 죄 없는 백성을 살육했고, "진나라" 병사 20만 명을 생매장해 죽였다 → "궁"을 약탈하고, "궁궐"이 무려 3달을 타 올랐다고 한다 → "병마용갱"을 도굴하여, "무기"만 가져갔다고 한다 → BC 206년, "항우"는 "초회 왕(회 왕(초나라 마지막 왕)"의 손자)를 "의제"로 삼고, 자신은 "서초패왕"으로 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초회 왕"까지 죽였다. "유방"은 명분과 실리를 앞세워, "제후국 왕"들에게 "공동으로 항우를 치자"고 제안ㆍ이무렵 최고 명장 "한신"을 얻었다.

⑨ 해하 전투 : "유방"이 "항우"와 벌인 마지막 대전

"항우"와의 싸움에서 연전연패하던, "유방"이 "항우"와 벌인 마지막 대전ㆍ"한신"에 의해, "배수진"을 구사 + "장량"의 "사면초"가 전술ㆍ"항우"가 "유방" 아버지를 잡아, "삶아 죽이겠다."며, 항복하라 하자, "우리는 초회왕 앞에서 같이 영지를 받은 사이다. 내 아버지를 삶아 죽이는 것은 네 아버지를 삶아 죽이는 것이다. 행여, 삶거든 나에게도 국 한 그릇 보내다오" 라고 말하자, "항우"는 결국 "유방"의 아버지를 죽이지 못했다.

도망 다니느라, 정신이 없던 "유방"은 부득이 권한을 대폭 부하들에게 위임하고, "항우"는 모든 권한을 자기 한사람에게로 집중시킴 → "유방" 군대는 유연하게 독자적 작전수행이 가능했으나, "항우" 군대는 보고하고, 명령이 떨어져야만 행동할 수 있었다. "항우"는 결국 "해하 전투"에서 패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패왕별희ㆍ사면초가 : "서초패왕 항우ㆍ우희(우미인)" 이야기 : "항우"는 전쟁터에 사랑하는 연인 "우희(우미인)"을 늘 데리고 다녔는데, 함께 자살을 선택했다.

⑩ BC 202 : "유방"은 마침내 "천하대권"을 차지했다.

"유방"은 황제로 즉위한지, 7년이 지난 BC 195년 사망했다. "공신"을 비롯한 "지방 세력의 반란"을 진압하다가, 부상한 몸을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3. 주요 전투

 홍문 (鴻門)의 연회

"항우"는 참모 "범증"의 건의에 따라, "유방"을 제거하기로 하고, 다음 날 새벽 "유방"을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유방"의 전략가 "장량"에게 매수된 "항백(항우의 당숙)"이 "항우"에게 "유방은 관중의 왕이 될 의사가 전혀 없다"고 변호했다.  거기에다 "유방"이 군사 100여 기 만을 거느리고, "항우"를 찾아와 "관중"을 먼저 차지하게 된 것을 사죄했다. "항우"는 "유방"을 제거하기로 한 계획을 철회한 것은 물론 "유방"을 자기 처소에 머물게 하고 잔치까지 베풀었다.

장래 "항우"에게 큰 장애가 될 것이 분명한 "유방"을 제거하고자 했던 "범증"은 "항우"에게 신호를 보내 "유방"을 죽일 것을 건의했으나, "항우"는 "범증"의 신호를 끝내 무시했다. "항우"가 "유방"을 제거할 의사가 없음을 간파한 "범증"은 "심복 항장(項莊)"을 조용히 불러 검무를 추다가 "유방"을 죽이라고 시켰다. 그러나 "유방"의 경호를 맡고 있던 "번쾌(樊噲)"가 달려와 "항장"을 상대했고, 그 사이 "유방"은 말을 달려 자기 진영으로 도망쳤다.  "홍문의 연회"로 인해 "항우ㆍ유방"의 운명은 극명하게 달라졌다.

BC 206년 "항우"는 40만 대군을 이끌고, "함양"을 함락하고, "진나라 황제 자영(子嬰)"을 살해했다. "항우"의 군대는 금은보화ㆍ비단ㆍ궁녀들을 탈취하고, "아방궁"에 불을 질러 완전히 폐허로 만들었다. 패권을 장악한 "항우"는 "서초패왕(西楚覇王)"에 올라 9개의 군(郡)을 영지로 삼고 "팽성"에 도읍을 정했다. 그리고 "초 회왕"을 "의제(義帝)"로 삼고, 반란군 장수들을 "제후 왕"에 책봉했다.

그러나 "항우"는 "제후 왕"을 책봉하는 과정에서, 공로의 경중과 상관없이 무분별하게 "제후"를 봉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특히 "항우"는 "유방"을 견제하고자, "사천성" 방면으로 추방하듯 밀어냈다가, "항백"의 설득으로 "한중의 제후 왕" 자리를 주었는데, 이것이 "제후 왕"들의 불만을 샀다. "제나라 승상 전영(田榮)ㆍ조나라 승상 진여(陳余)" 등이 영지에 부임하자마자 "초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항우"는 이들 반란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항복하는 자들까지 생매장시키고, 살육을 일삼아 민심을 잃고 말았다. BC 206년, "한 왕 유방"은 "초 회왕이 항우에게 시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항우"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던 다른 "제후 왕"들을 규합하여 "항우"를 토벌할 것을 요청했다.

 팽성 (초의 수도) 전투

BC 203년, "초나라 팽성"에서 벌어진 전투로, "항우"가 "유방"의 60만 명의 군사를 거의 전멸시키는 괴력을 발휘했다. "초왕 항우"는 자신의 눈에 거슬리던 "제나라"를 공격하고, 그 잔당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유방"은 그 사이에 60만 대군을 이끌고, "팽성(초의 수도)"를 기습 공격한다.

당시 부하 "한신"의 지휘로, "관중 지방의 3왕"을 쓰러뜨린 "한왕 유방"은 각지의 "9 제후왕"들을 불러 모아, 60만에 이르는 군사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치기위한 "종장"이 된다. "팽성"을 지키던 장수 "팽월"은 항복했고, 다른 "초나라" 장수들은 성에서 진귀한 재보ㆍ항씨 족중ㆍ미녀 등을 모두 이끌고 "제나라"로 도망쳤고, 그로 인해 "패왕의 팽성"은 쉽게 "유방"에게 함락된다. "제나라"를 공격하던 "항우"는 도망쳐 오던 자신의 부하들에게 격분하고, "정공ㆍ정도"에서 "용저ㆍ항타"를 불러, "유방"을 치기로 마음먹었다.

"항우"가 "제나라"를 치기위해 "팽성"을 비운 틈을 타서, "유방"은 56만의 병사를 거느리고 "팽성"을 어려움 없이 점령해 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항우"는 분노하여, 정예병 3만을 거느리고 "팽성"으로 돌진하였다. "유방"의 군대는 "항우"가 동쪽에서 공격해 올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항우"는 허를 찔러 새벽에 서쪽 "소현"을 무찌르고, "유방"을 급습하였다. "유방"은 크게 패하였고, "항우"의 포위 공격에 "유방"은 꼼짝없이 죽어야 하는 급박한 순간에 직면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서북쪽에서 폭풍이 불어, "모래바람"이 하늘을 덮었다. 대낮인데도 어두컴컴한 것이 마치 밤과 같았다. "항우"가 거느린 "초군"은 갑작스런 날씨변화에 어지럽게 흩어졌다. 이 틈을 타서 "유방"은 포위망을 뚫고 도망칠 수 있었다.

"유방"이 "팽성"에서 패하자, 그를 따르던 제후들은 하나 둘씩 "유방"을 배반하고, "항우" 쪽으로 갔다. 초조해진 "유방"은 "장량"과 앞으로의 대책을 논의했다. "유방"은 급할 때도 늘 침착하게 신하들과 상의하였고,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였다. "장량"은 "유방"에게 장군 "한신"을 추천하였고, 명을 받은 "한신"은 다시 군대를 수습해 "형양"에 집결하였다. 그리고 여기저기 흩어졌던 다른 장수들도 "형양"에 다시 모이면서, 서서히 "한군"의 세력은 회복되기 시작했다. "항우"는 "유방"의 "형양성"을 공격하였으나, "한신"은 "초군"을 크게 무찔렀다. 그러나 포위되어 있는 "형양성"에는 식량이 부족하였다.

"유방"에게 "장량"이 있었다면, "항우"에게는 "범증"이라는 신하가 있었다. "범증"은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더욱 "유방"을 압박하도록 지시하였다. "유방"의 신하 중에 "진평"이 있었다. 그는 "항우"와 "범증"의 사이를 이간시키자는 계략을 내놓았다. "항우"로 하여금 "범증"을 의심하게 만들자는 것이었다.

어느 날, "항우"의 사자가 "형량성"에 왔을 때, "진평"은 초호화판으로 차린 음식상을 가지고 나왔다. 그는 "초나라"의 사신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범증께서 보내신 사신인 줄 알았더니, 항우 장군이 보낸 사자군요. 이거 실례해야 하겠습니다." 라고 하며, 음식상을 도로 물리고, 조촐하게 차린 음식상으로 "항우"의 사자를 대접했다. 사자의 보고를 받은 "항우"는 더럭 의심이 생겼다. 그렇지 않아도 "범증"의 존재가 거북스러웠는데, 혹시 그가 "유방"과 내통하고 있다면, 그를 그대로 둘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생각한 "항우"는 차츰 "범증"의 권한을 박탈했다. "범증"도 차차 "항우"에 대한 불만이 쌓였다. "범증"은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항우"를 찾아 말을 했다. 그러자 항우는 범증을 말리지도 붙잡지도 않았다. "범증"은 터질 듯한 분노로 길을 떠났고,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방"의 군대는 식량부족으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이 때 장수 "기신"은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유방"을 구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사태가 매우 급박합니다. 신이 대왕을 탈출시킬 계책이 있습니다.  신이 거짓 항복하는 척해 초나라 군대를 속일테니, 대왕께서는 이틈을 타서 형양성을 빠져나가십시오." 밤이 되자, "기신"은 군사를 시켜 큰 소리로 말하게 했다. "성안에 식량이 다 떨어져, 한 왕이 항복하러 나온다." "유방"이 항복하러 나온다는 말을 들은 "초군" 진영은 환영하며, 만세를 불렀다. 성을 포위하고 잇던 병사들은 "유방"이 항복하러 나온다는 "동문"으로 모여들었고, "유방"은 그 틈을 타서 "서문"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유방"이 항복하러 나온다는 말을 듣고, "항우"는 급히 "동문"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끌려 나온 유방의 얼굴을 살피던 "항우"는 크게 놀랐다. 끌려 나온 사람은 유방이 아닌 장수 "기신"이었다. "유방은 어디 있느냐?" "한 왕께서는 이미 성을 빠져나갔소." "기신"은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간사한 이놈을 불태워 죽여라." "항우"는 이를 갈며 그 자리를 떠났다. 만약 "범증"이었다면, 이런 계략에 속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기신"을 불태워 죽인 것은 오히려 한나라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는 구실을 하였다.

수개월이 지나도 승부가 나지 않자, "항우"는 점점 초조해졌다. 너무 먼 거리를 추격해온 "항우" 진영은 식량이 떨어져가고 있었다. 어느 날 "항우"는 높은 누각에 올라가 인질로 잡고 있던 유방의 아버지를 삶아 죽이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자 유방은 큰 소리로 대꾸하였다. "나는 그대와 예전에 황제 앞에서 형제가 되기로 약속한 적이 있다.  그러니 내 아버지는 바로 너의 아버지일 것이다.  그대가 그대의 아버지를 삶아 죽이겠다면, 내게도 그 삶은 국 한 그릇을 나눠주기 바란다." "항우"가 참지 못하고 유방의 아버지를 죽이려 하자, 숙부인 "항백"이 막았다.

"천하를 위해 일하는 자는 자질구레한 집안 일 따위는 돌보지 않는 법이니, 비록 그 아버지를 죽인다 해도 아무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항우는 "항백"의 말을 듣고, 유방의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다. 성미 급한 "항우"는 "유방"에게 제안했다. "천하가 어지러워 백성의 고통이 말이 아니다.  이것은 모두 우리 두 사람의 싸움 때문이니, 나와 일대일로 싸워 결판을 짓자." 그러자 유방이 웃으며 대꾸했다. "싸우려면 차라리 지혜로 싸울지언정, 힘으로 싸우지 않겠다." "유방"은 급할 것이 없었다. "항우 군"은 너무 멀리 진격하여 지쳐있었고, 식량도 부족한 형편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방"은 이런 유리한 상황을 이용해서, 가족을 구출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휴전하는 조건으로 가족을 돌려달라는 제안을 하였다. 불리한 위치에 있던 "항우"는 이 조건을 받아들이고 군대를 돌렸다. "유방"도 군대를 돌리려 하자, "장량"은 "유방"에게 말했다. "이런 기회에 초나라를 치지 않으면 호랑이를 기르는 셈이 됩니다.  지금 항우를 돌려보내면, 그는 나중에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큰 힘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유방"은 이 말을 받아들여 "한신"에게 "항우"를 추격하게 하였다. "한신"이 추격하자, "항우"는 "해하"에서 그들과 대치했다. "한신"은 여러 겹으로 "항우"를 포위하였다.

 해하 전투

BC 202.02월, "해하(垓下)"에서 "항우"와 대치했다. 여러 제후국들과 연합한 "유방"의 10만 군사에게 포위되고, "한신"의 30만 대군의 공격을 받는다. "항우 군"은 식량이 바닥이 나서 먹을 것이 없고, 고향을 떠나온 지 오래되어서 모두 지쳐있었다. 그래서 "한신"에게로 도망쳐오는 병사들이 늘어났다. "한신"은 밤마다 "초나라" 출신 군사들에게 "초나라" 노래를 부르게 했다.(사면초가)

밤마다 들려오는 "초나라" 노래 소리를 들은 "항우"는 자기를 도와야할 군사들이 모두 "유방"의 군대에 가담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전쟁에 시달린 병사들은 고향의 노래 소리를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렇게 용맹하던 "항우"도 고향의 노래에 점점 마음이 약해져 가고 있었다.

마침내 "항우"는 장막 가운데서 "최후의 연회"를 벌였다. 이때 "항우" 옆에서 그를 떠나지 않고, 술을 같이 한 사람은 "우희"라는 애첩과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그의 명마 "추(오추마)"뿐이었다. 술기운이 몸에 돌자, "항우"는 눈물을 흘리며 노래했다. "힘은 능히 산을 뽑을 수 있고, 기백은 능히 천하를 덮었노라.  때가 이롭지 못하니, 추야, 너마저 달리지 못하는 구나.  우희야, 우희야 이를 어찌한단 말이냐."

"항우"가 이 노래를 부르며 읊조리자, 주위의 얼마 남지 않은 군사들도 울었다. 노래를 마친 "항우"는 "우희"의 목을 치고, 큰 소리로 말에 오르며 말했다. "자, 포위망을 뚫고 남으로 가자." 날이 샐 무렵, "항우"가 탈출한 것을 안 "유방"은 휘하 장수 "관영(灌嬰)"에게 5,000기의 기병을 주어 남쪽을 도망가는 "항우"를 추격시켰다. "남"으로 달아나던 "항우"가 "양자강" 기슭의 "화현(和縣)의 오강포(烏江浦)"라는 물가에 이르렀을 때, 같이 출발했던 800명의 군사는 28명으로 줄어있었다.

"항우"는 병사들에게 모두 말에서 내리게 하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결전을 벌이자." "항우"는 스스로 칼을 잡고, 달려드는 "유방"의 군사를 혼자서 수백 명을 죽였다. 그러나 마침내 "항우"는 "중과부적"임을 느끼고, 스스로 목을 찔러 숨을 거두었다. 농민 출신이었던 "유방"은 "항우"보다 싸움의 능력이 뛰어난 장수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힘을 과신하지 않고, 인재를 잘 활용하며 감정에 휘말리지 않고 칼을 쓸 때와 지혜를 이용할 때를 잘 알아 마침내 "항우"를 꺾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