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08.19일, 국회에서 "장면의 총리지명 동의안" 표결이 있기 직전, "김두한"이 "장면"의 친일경력을 문제삼기도 했다. "김두한"은 "장면 (張勉ㆍ1899~1966ㆍ66세)"에게 역사적인 귀한 표를 던져서는 안 된다는 내용과 "장면의 창씨 명"을 적은 전단을 뿌리고, "만일 장면을 총리로 뽑는다면, 여의도 의사당을 불살라 버리겠다."고 외쳤다.
1. 논란ㆍ의혹
① 친일 논란
"창씨개명"을 했고, 학교 다닐 때 "신사참배"도 하였지만, "국민총력천주교경성교구연맹 이사직"을 맡았던 경력 때문에,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던 것은 "일제강점기"에 "국민총력천주교경성교구연맹"이 매월 1째 주를 "애국주일"로 정해, "무운장구기원 미사"를 지냈으며, 미사 후에는 시국에 대한 강론을 갖고, 미사 후 단체로 "신궁" 또는 "신사참배"를 갖도록 독려했다는 데에 있었다. 또한 1999년, 정운현의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에서 "친일파"로 지목된 이래, 2004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파 708인에 선정되었다.
1940.07월, "동대문경찰서"에 "동성상업학교 교장"으로서 "국방헌금"을 냈고, 1941.08.07일 종교계의 총동원을 논의하는 "종교계 시국간담회"에 "노기남"과 함께, "천주교 대표"로 참석했다. 1943.06.16일, "동성상업학교" 교우ㆍ생도들로부터 모금한 "항공기 구입비 130여 원"을 "동대문경찰서"에 냈다. 1944.09월, "국민동원 총진회 중앙위원"을 맡았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로마가톨릭" 부문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2009년,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분류하지 않았다.
② 친일 논란에 대한 반론
"조선 총독부에 협력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반론도 있다. 일제 치하, "천주교"가 선교활동의 자유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일제"의 지배를 인정하는 동시에, 신자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반대했던 바, 신앙심이 깊은 "장면"으로선 그 노선을 따랐을 뿐, "장면을 친일파로 보긴 어렵다"는 시각이 있다.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 후보 명단"에 "장 전 총리"를 올렸다. 이때 "김수환 추기경"은 "각 종교단체 대표를 내세웠던 일제 말기 정책에 따라, 대표적 가톨릭 신자였던 장 전 총리는 어쩔 수 없이 대표가 됐는데, 이를 두고 친일로 매도하는 것은 너무 가볍다"며, 강한 유감을 표시했다. 2005.10.21일, "동아일보"와 기자회견에서, "장면ㆍ노기남ㆍ김성수" 등이 친일파로 선정되자, "김 추기경"은 "나도 학도병으로 신사참배는 물론이고, 창씨개명까지 했다"면서, "장면은 단순히 신자 대표자로 활동한 것"이라고 적극 옹호하였다. 당시 "김 추기경"은 "일제는 태평양전쟁 말기, 우리나라를 국민총동원체제로 끌고 가면서, 여러 단체를 만들어, 각 단체의 기존 책임자를 대표로 내세웠다. 그때 장면 박사는 대표적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신자단체의 대표가 됐는데 단순히 이를 두고 친일로 매도하는 것은 너무나 가벼운 일이다."고 반박했다.
"김 추기경"은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져야 하지 않느냐는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성경 말씀대로 "너희들 중 죄 없는 사람이 돌을 던져라"라는 말을 해 주고 싶다"면서, "당신들 아버지가 창씨개명을 안했거나, 학교 다니면서 신사참배 안한 사람 있거든 이분들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덧붙였다.
한편 "김수환"은 장면이 "조선총독부"로부터 학생들을 구하기 위해 오버한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김 추기경"이 졸업반인 5학년 때의 일화가 전해진다. 일제에 대한 울분을 참지 못했던 "학생 김수환"은 "수신(修身)시간"에, "황국신민으로서 소감을 쓰라"는 시험문제를 받았다. 그는 "황국신민이 아니어서, 소감이 없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김 추기경"에 의하면, "장면의 배려로 오히려 무사했다"고 한다. "결국 교장이던 장 전 총리에게 불려가, 뺨을 맞았다. 장 전 총리가 김수환 학생을 호출해 일부러 꾸짖은 것은 "이대로 가다가는 큰 재목 하나를 잃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수신담당 선생에게 선처를 부탁하기 위해서도, 절차가 필요하기도 했다."
"김수환"은 퇴학을 각오했는데, 오히려 "도쿄 가톨릭계 대학"인 "조치(上智)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하게 되는데, "대구교구 장학생으로 일본 유학을 떠난 것도, 장 전 총리의 추천 덕택이었다."고 하는데, "김 추기경"의 개인적인 감정도 엿보인다.
③ 대통령 취임 음모론
"장택상"은 "장면"이 비밀리에 "사람들에게 손을 써서 대통령에 취임하려고 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 했다. 1952년, "UN 총회"에 같이 갔을 때, 비밀리에 사람들과 연락해서 대통령이 되려고 계략을 썼다는 것이다.
"장택상"에 의하면, "허정"에게서 "장면이 대통령이 되려고 음모를 꾸몄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장면이 파리 UN총회(6차)에서 귀국한 직후, 허정은 침울한 표정으로 "내 방으로 갑시다. 가서 들으면 잘 알 것이오."라고 말하면서, 저 장택상을 자신의 집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장면이 국회의원 김 모와 몇몇 사람을 통하여, 간접 선거에 자기가 대통령으로 입후보할 것을 논의하였고 또 파리 체류 중에도 연락부절(不絶)로 끊임없는 모의를 하였다."는 것이다.
장택상은 "허정"이 전한 말 외에도, "파리 UN총회(6차)" 직후, 장면의 태도가 수상했다고 주장하였다. "4개월 만에 임무를 마치고, 1952.02월 초에 영국과 미국을 거쳐 귀국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뉴욕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그곳에서 비행기로 자녀가 있는 LA로 향해 떠났다. 당시 비행장에는 아이들은 물론 주재 한국 총영사가 나와 있었다. 그런데 내가 미처 자동차에 오르기도 전에 총영사는 나에게 파리에 있는 장면 총리로부터 전보가 왔다고 말하면서, 그 내용은 "자기가 2~ 3일 후에 LA로 직행할 터이니, 장 부의장은 본국으로 먼저 떠나지 말고, 자기를 기다려 달라는 것이었다."고 전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자, 나는 깜짝 놀랐다. 그래서 총영사보고 "아니, 내가 파리에서 런던으로 떠날 때, 장면 총리는 아직 병이 낫지 않았으니 스위스로 가서 더 요양을 해봐야겠다면서, 우리 두 사람이 서로 작별하였던 것인데, 지금 와서 갑자기 LA로 오겠으니, 나보고 먼저 본국으로 가지 말라고 하니 도대체 어찌 된 일이오?" 하고 물었다. 그러자 총영사는 "저는 어차피 그 내막은 백지입니다."하고, 쳐다보는 것이었다."
장택상에 의하면, "파리 UN총회(6차)"에서 임무를 마치고 본국을 향해 떠나올 때, 장면은 그 때까지 병석에 있었고, 장면은 그에게 "나는 이곳에서 스위스 전문의를 만나, 몇 개월 간 치료를 받고, 본국으로 돌아갈 터이니, 장 부의장은 먼저 떠나가라."고 말하여, 헤어졌던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LA로 온다는 말을 들으니, 장택상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불과 수 일이 지난 저녁나절, 장면 총리가 탄 비행기는 LA의 비행장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장택상"에 의하면, 이때 "장면은 본국으로 같이 귀국하자고 했다가, 다시 말을 바꾸었다"고 한다. "장면 총리는 LA에서 나를 만나자, 즉시 하는 말이 "나는 스위스로 가기로 여정을 작정하였으나, 본국으로 돌아가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어서 예정을 바꾸어,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라고,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장면 박사와 나는 LA에서 이틀을 더 지체하고서 하와이로 향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비행기 관계로 하루를 더 지체하게 되었다. 그 익일 아침, 내가 비행장에 나가려고 호텔 현관 밖으로 나왔더니, 마침 장면 총리가 호텔까지 와서 나보고 하는 말이 "나는 장 부의장과 함께 본국으로 가려고 이곳 하와이까지 왔었으나, 아무리 생각하여도 이곳에서 더 치료를 받고 가는 것이 좋게 생각되어, 장 부의장을 만나러 온 것이니, 장 부의장은 먼저 본국으로 떠나라."는 것이었다. "나는 좀 이상한 생각이 들기는 하였으나, 원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깜깜 부지하였기 때문에, 그러라고 대답하고, 나는 먼저 부산으로 떠났다."
"장택상"은 "장면이 대통령 자리에 뜻을 두고 있었다."고 판단했다. "나는 장면 총리와 파리에서 한 호텔에 있으면서도 좀 이상스러운 눈치는 보았었지만, 그가 대통령을 꿈꾸고 있는 줄은 전연 눈치 채지 못하였다. 장면 씨가 총리를 퇴직한 후에는 의당 있을 수도 있는 일이겠지만, 현직으로 있으면서 자기 상사의 앉은 자리를 파헤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고, 더구나 일국의 재상으로서 있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있어서도 안 될 일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④ "제1공화국" 당시 대선출마, 내각제 개헌 의혹
"이승만" 측근들은 그가 "국무총리(2대)" 재직 시부터, "이승만 축출 모의에 적극 개입했다"고 비판했다. "윤치영(이승만 측근)"은 "장면이 이승만 박사를 3번이나 제거하려 했으며, 이승만의 환국을 끝내 막아버렸다"고 했으며, "장면이 내심 대통령이 될 야심을 품고 있었다"고 확신하였다. "이 박사 제거 음모를 꾸민 것은 휴전 반대와 반공 포로 석방 때부터 2차례나 되고, 4ㆍ19를 빙자해서 끝내는 3번째에 이승만 제거를 성공을 시켰다"며, 그를 비판하였다.
"박용만(이승만 비서)"은 "장면이 이승만 밑에서 국무총리 직에 있을 때부터, 야당 의원들과 서로 충분히 통하고 있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고 주장했다. "개헌공작이 구체화되고, 실현단계에 있던 1952.04.20일 장면이 이 박사에게 국무총리 사표를 제출하였다. 장면이 국무총리 직을 사임한 그때는 이미 개헌공작은 다 되어 있었으며, 법적인 절차만 거치면 개헌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도록 충분한수를 확보하고 있었다."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서 임기가 끝나는 해인 이때, "내각책임제 개헌"이 되어, 자신이 거세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며, "자신을 거세하고, 실질적인 실권자가 될 국무총리 자리에 자기가 이제까지 제일 신임하고 사랑했던 장 박사가 된다고 하는 사실 앞에서 더욱더 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이 박사는 가장 신임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가장 심하게 배신을 당했다는 생각을 가졌었다"고 주장했다.
박용만은 "만약 전쟁 중이었던 그 때에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통과되고, 장박사가 국무총리가 되어 국정을 맡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라고 의혹을 제기하였다. "스트롱 맨 이 박사같이 평화선을 선포하고, 세계 여론과 압력을 일축해서 반공포로를 석방하고, 북진통일을 끝까지 고집하며 휴전협정을 반대하고, 미국을 위협(?)해서 전후복구와 경제재건에 많은 원조를 받아 왔었을까? 이런 실없는 생각을 해보면서, 나는 4ㆍ19 전후 장면 정권 때를 상기해 보기도 했다. 장면 정권 때는 또 그만 두고라도, 5ㆍ16 군사쿠데타 직후, 미국 정부 측과 UN군 총사령관이 며칠을 두고 국무총리 장 박사를 찾았건만, 겁에 질린 장총리가 여 수도원에 숨어 있다가 며칠 후에 겨우 얼굴을 내밀고 정권을 넘기겠다고 선언하던 그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면 입맛이 쓰다."는 것이다.
⑤ 흥사단 관련설
"서북 출신"으로 구성된 "흥사단 계열"의 인물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흥사단"의 핵심 인물들과 같은 고향이었으나, "흥사단"에서 가입 요청이 들어오기도 했지만 그는 가입을 거절했다. "국무총리"와 "원내 자유당"시절부터 "원내 자유당" 외에 "흥사단"의 지지를 받기도 했다. 이후 "흥사단 계열"로 분류되었고, "민주당 신파"에서 조차 "흥사단 계"로 보았으나, 본인은 이를 부인하였다.
"세간에서는 나를 신파에서도 흥사단(興士團) 계열이라고 보는 이가 있었다. 이는 전혀 낭설이다. 나는 흥사단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다. 흥사단에 가입한 일도 없고, 흥사단과 연관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흥사단 계열에서 나를 지지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내가 흥사단 계열이라는 지목을 받을 이유는 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⑥ "부산정치 파동" 당시, 대통령 추대 시도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곽상훈" 등 야당 의원들은 "장면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오위영"은 "곽상훈ㆍ권중돈ㆍ서범석"과 함께, 수차에 걸쳐 은밀히 선거 전략을 추진하였으나, 불행하게도 "부산 정치 파동"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곽상훈"에 의하면 "그 무렵에 오위영 댁에 모여, 차기 대통령 선거에는 고집불통이요, 심술쟁이인 이 박사를 몰아내고, 운석을 대통령으로 앉힐 계획을 진행시켰다. 그 당시의 헌법에 정ㆍ부통령 선거는 직선제가 아니라, 국회에서 얼마든지 이 박사를 몰아낼 수 있었다. 우리는 압도적인 사전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나는 당시의 국무총리인 장 모씨에게 우리의 취지를 밝히고 도장을 찍도록 권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도장을 찍어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곽상훈"에 의하면 "내각책임제"로 바꾸고, 장면을 그 내각책임제 하의 "국무총리"로 추대할 계획이었다 한다. "그날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 박사에게 너무나 가혹하게 하는 것 같았다. 당시에 그는 비록 실정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과거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한때는 사형 직전에 구사일생으로 탈옥한 일도 있지 않는가? 그리고 지금 전시인데, 갑자기 내각 책임제로 개헌하고, 또 이 박사까지 몰아내는 2가지 일을 한꺼번에 해치우기란 용이한 일이 아닐 것 같았다."
"이 박사를 실권 없는 상징적인 대통령 자리에 그냥 둔 채, 내각 책임제로 개헌해서 운석을 중심으로 한 인물 본위로 잘 다스리면, 국가 장래를 위해 좋을 것이란 나대로의 결론을 내려, 그 이야기를 했다가 젊은 과격파들에게 묵살당하고 말았다. 걱정은 됐지만 대의에 따라야 하겠기에, 다시 장모씨를 만나러 그의 국무총리실로 갔더니, 신임 이모 장관이 이미 와서, 무엇인가 비밀히 숙의 중이었다. 나는 이 박사의 참모들에게 "손 맞게 일들 잘하시오. 성사하는 날, 내가 국회에서 잘 알아서 할 테니."하고, 혼란한 정국을 바로잡고 참신하게 일하자는 뜻에서 한마디 넌지시 했다."고 하였다.
⑦ "부산정치 파동" 당시, "병원선" 피신 의혹
"병원선 피신 주장"에 대해, "미국 육군병원"에 입원하여 4개월간 치료를 받았던 장면은 "병원선"엔 가 본 일이 없다고 항변하였다. 장면에 의하면 "부산 정치 파동 당시 신병으로 미군 병원에 입원한 것이며 병원선에 피신한 일은 없다"는 것이다. "후일, 서독 병원으로 사용한 부산에 있는 미국 육군병원에서 4개월간 치료를 받았다. 외부와는 일체 연락이 없었고, 외부인의 출입도 금했다. 이것을 병원선에 피신하여, 음모라도 꾸미고 있던 것처럼 억측을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병원선에 숨어, 사람들을 시켜, 그때 대통령에 또 나서는 이 박사의 낙선 운동을 계획했다니, 언어도단이다." 라고 억울함을 주장하였다.
⑧ 부통령 사임 관련
1960.04월, 잔여임기를 4개월 남겨놓고, "부통령 직"을 사퇴했다. "민주당 신파" 내부에서도, "이승만이 퇴진하면, 그가 대통령직을 승계할 것"이라며, 사퇴를 만류했지만, 그는 사퇴를 고집했는데, "장면"은 "부통령 직" 사임이유로 • 정권을 내놓더라도 장면이 대통령직을 계승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하여, 이승만의 하야를 유도하려는 것 • 부통령으로서의 도의적인 책임 • 이승만의 불행을 이용해서 권력을 잡는다는 인식을 심는 것이 싫어서였다고 하였다.
이영석은 "이승만이 퇴임하고 3ㆍ15 선거가 무효로 처리되면, 잔여 임기가 4개월도 안되지만, 대통령직이 장면에게 넘어오게 되어 있는데, 이것을 거부한 것은 무책임한 주장"이라고 비판하였다. "민주당 구파"는 장면의 "부통령직 사퇴"에 대해, "정략적 사임설"을 주장, 그가 "새 정부의 실권을 잡는데 보다 유리하리라는 정치적 타산에서 부통령직을 사퇴했다"고 비판했다. "독재 방지를 위해, 내각책임제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장면이 대통령이 되면, 내각제 개헌을 실현해야 되는데, 현직 대통령에 있으면서, 차기 정부 국무총리 직 경쟁에 나서는 것은 여론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할 것이고, 그것을 내다본 것"이라는 것이었다.
"김도연(민주당 구파 인사)"은 1968년에 펴낸 자신의 회고록에서 "장면의 부통령직 사퇴가 이승만 하야를 촉진했을 가능성은 인정하였으나, 당시 장면이 부통령직을 사퇴하지 않고, 대통령직을 유지한다면,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다"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⑨ 미국이 "차기 지도자"로 장면 지목
"차기 지도자" 자리를 놓고, "미국"은 장면을 지목하였다. 1960.07.29일로 예정된 "제5대 총선거"에 관심을 보인 미국은 친미성향이 강한 "장면"을 선택했다. 07.11일, "아이젠하워 미대통령"은 서울에 "주한 미국대사"에게 장문의 훈령을 보냈다. 훈령에서 "장면을 지도자로 선발하는 것이 이상적인 선택임을 주지시키고, 이점을 허정에게 말한 뒤 장면에게 지도자 자리를 수락하도록 은밀히 요청하라"고 주문하였다.
"마셜 그린(주한 미국대사 대리)"는 07.20일 "대사관저"에 있을 "아이젠하워" 주최 조찬모임 때, 민주당 지도자인 장면을 "대통령 오른편"에 앉도록 좌석을 배치하고, 그에게 미 대통령과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라는 문건을 작성했다.
07.29일, 총선 당일에는 "총선"이 한참 진행 중일 때, 아이젠하워의 방문을 받고, 조찬회동을 함께 하였다. 07.29일, 장면은 "금천역"에서 "무허가 강연"을 하면서 열차를 지연시켰다가, "곽상훈"이 "옹진군 유세" 때, 군용기를 동원하고, "전투기"의 호위를 받은 일과 함께 "관권선거"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⑩ 4ㆍ19 관련자에 대한 미온적인 처벌
"3ㆍ15부정선거, 4ㆍ19의거" 당시, 학생시위 진압자에 대한 미온적인 처벌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가 "자유당 관련자" 처벌에 미온적이었던 배경에는 "미국"의 요청도 존재하였다. 장면은 "정치보복이 행해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하며, "자유당 계" 인사들에 대한 처벌에는 반대하였다. 다만 "부정선거 관련자"들 선에서 처리하려 하였다.
미국은 "허정 과도정부시절"부터 "총리 허정"과 "민주당 최고대표위원 장면"에게 보낸 서한에서, "한국의 4월 민주혁명은 계급혁명이 아니며, 계급혁명이 되어서도 안 된다. 이는 비민주적인 이승만 독재정권을 타도하는 데 있었다.(중략) 미국의 원조가 사실상 한국 경제의 동맥 역할을 하고 있으니, 설사 부정축재자들이 이 정권하에서 원조자금ㆍ세금포탈ㆍ부정 금융대부ㆍ여타 수단과 집권당에 아부로 인한 이권 취득으로 치부를 이루었다 하더라도 이의 국고환원ㆍ범칙금에 의한 부정재산 회수가 쿠바의 카스트로 정권이 사유 개인재산을 몰수한 것과 같은 행위로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⑪ 언론과 갈등
"민족일보"는 1961.02.08일에 체결된 "한미경제원조협정"이 02.28일 "국회"에 통과되기까지 7회에 걸쳐 사설을 통해 집중타를 가하였다. 비판이 격렬하자, 장면은 "민족일보가 정권을 무너뜨린다"고 생각했다. "송원영(장면의 공보비서)"는 회고록에서 "민족일보는 창간 직후부터 계속 도각(倒閣)공세를 폈다"고 회고했다.
1961.02월 말, "국무원 사무처"에서 장면 정권에 대한 비난을 계속하던 "민족일보"에 대한 인쇄중단을 지시했다. 이는 연일 장면 정부를 비난하는 논설을 내보내자, "공보비서 송원영"을 보내 기사를 빼달라고 사정하기도 했으나 호응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민족일보"는 곧 "제2공화국의 언론 탄압"이라며 다시 공세를 퍼부었다.
한편 측근이자 사돈인 "경향신문의 한창우" 등은 그에게 인사 청탁을 했으나, 그는 인사 청탁을 거절하였다. "박종률(비서관)"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한창우 사장은 장면 총리에 대해 심기가 불편했지요. 주일공사 등에 대한 인선 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불평도 많이 하고 그랬지요. 당시 경향신문이 장면 정권에 대해서도 혹독하게 비판했어요. 사돈 간 치고는 너무 심하다 할 정도로 말입니다."라고 회고했다.
⑫ 5ㆍ16 군사 정변 관련
장면은 총리 재임기간 동안, 10여 차례나 "쿠데타 정보"를 보고받거나, 입수했다. 근거 없는 설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정보였는데, 그는 그때마다 "미국 타령"을 했다. 그는 매번 "미군이 있는데, 어떻게 쿠데타를 하겠소."라는 말로 대응했다. "쿠데타"를 일으킬 세력으로는 "이범석 계열ㆍ박정희 계열ㆍ그 외에 군부 지도자"들이 지목되고 있었다.
1961년 봄, 장면은 "족청계 거사설"을 가지고,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을 불러, 사실 확인을 했다. 그러나 "장도영"은 확실한 증거가 없지만, 계속 조사하겠다고만 대답했다. 군부는 미온적으로 대응하였고, 그 역시 "쿠테타 모의설"을 접하였으나,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1960.12월, "김도연"으로부터 "정변 음모"를 전달받은 "윤보선"은 장면에게 "정변 준비"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장면은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에게 알아보니, 별일이 아니랍니다. 걱정할 것 없다"고 대응하였다. 장면 내각은 "4ㆍ19 폭동설"에 대비해, 군에 "폭동진압 훈련"을 지시했다. "박정희 소장" 등을 주동으로 하는 군부세력은 "만일에 폭동이 발생하면, 그것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군을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킬 계획"이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4ㆍ19 당일" 폭동이나 데모가 없자, 정변계획은 지하로 잠적할 수밖에 없었다.
"5ㆍ16 군사정변" 소식을 듣고, "장면 총리"는 일가족을 이끌고, "주한 미국대사관"으로 피신하였으나, "주미 대사관"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장면은 가족들을 피신시킨 뒤, 자신은 "카르멜 수녀원"으로 피신하였다. 장면 사후, "아내 김옥윤"은 "미국 대사관"이 "장면의 신분을 알고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고 증언하였다. "카르멜 수녀원"에 은신한 이후, 3일간 연락이 두절되었다가, 05.18일 "윤보선 대통령"이 "군사정변"을 추인했음을 확인하자, 장면은 "수녀원"을 나와, "내각총사퇴 의사"를 발표한다.
당시 "박정희"의 배후를 "최경록 육군참모총장ㆍ정일형 외무장관"으로 의심하기도 했던 그는 총리의 행방을 묻는 "정일형 외무장관"의 전화를 받고도 행방을 알려주지 않았다.
2. 사상과 신념
① "공산주의ㆍ사회주의"에 대한 생각
"공산주의ㆍ사회주의"를 구분해서, 판단했다. "사회주의 사상"은 부분적으로는 수용해야 된다고 생각했지만, "공산주의"에는 부정적이었다. 1961.04.06일, "신문 주간연설"에서 그는 "합법적인 사회주의는 보장해야 된다."고 했다.
"사회주의가 공산주의와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공산주의는 폭력을 정권 탈취의 수단으로 삼는 데 반해, 사회주의는 비폭력 의회주의를 통해, 정권을 잡는 것을 기도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런 한에 있어서, 사회주의는 자유 민주주의와 똑같이 우리나라에서 법률의 보호를 받으며, 정당 활동을 할 권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의 이익에도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1961.03월, "공개 담화"에서는 "공산주의 진영에게 기왕의 파괴적 태도를 청산하고, UN결의의 모든 조건을 성실하게 이행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본질적으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평등"이라는 이름하에 인간의 자유와 개성을 억압하는 사상이라고 봤고, 특히 인간의 존재를 "유물론ㆍ변증법ㆍ무신론"으로 해석하는 것을 상당히 부정적으로 봤으며, 이는 "기독교 신앙"을 통해 극복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② 언론의 자유 보장
"기자 회견"을 "주 1회"로 정례화 했다. 가끔 "대통령 유시"나 발표하고, "기자회견"은 1년에 1~2차례 하는데 그쳤던 "이승만"과는 달리 기자회견을 매주 1차례로 정례화 했다. 그럴 때면 전 각료를 동원하다시피하며 갖가지 질문에 답했다.
또, KBS 라디오를 통해 "주례 국정보고"도 방송했다. 매주 토요일 오후 7:30분에 시작한 이 방송에서 "장면"은 "민주당 정부 방침"을 국민들에게 설득조로 이야기했다. 장면은 오히려 대화와 설득을 통하여, 국정을 운영하려 하였고, 한편으로는 언론을 통한 홍보를 적극 이용하려 하였다.
"송원영(국무총리실 공보비서관)"에 따르면, "장면의 주례 기자회견은 20여 평 되는 작은 방에서 열렸기 때문에 기자들이 내뿜는 담배연기가 장면의 얼굴에 사정없이 밀려오기도 했다. 이를 보다 못한 비서관들이 기자들에게 "아버지도 없느냐"고, 따로 불러서 주의를 주기도 했다." 그런데 장면은 "흡연은 개인의 취향인데, 그것을 왜 그대가 혼내느냐"며 오히려 비서관들을 책망하였다.
1961.02.04일, "장면"은 "반도호텔"에서 열린 "관훈클럽 창립4주년 기념모임"에 초청받아, "언론의 자유와 그 책임"을 주제로 강연한다. 장면은 "약간 과장해서 말하면"이라고 전제한 뒤, "북조선 괴뢰의 앞잡이들이 "조선인민보"나 "해방일보"를 발행하겠다고 등록신청을 해도 막을 도리가 없을 만큼, 완전한 언론출판의 자유가 허용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무책임하고ㆍ사실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며ㆍ독선적인 언론"이 횡행하는 현실을 우려했다.
장면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모든 압제에 반대해야 하는 것과 같이 자유가 자유 그 자체를 파괴하도록 방임해서도 안 된다"는 말로 연설을 끝맺었다. 무절제한 언론에 대한 이 경고를 "관훈 클럽"은 훗날 발간한 "40년사"에서, "언론에 경종을 울리는 진지하고도, 의미심장한 내용이었다."고 평가했다.
③ 교육ㆍ신앙 구국론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악한 존재"라고 규정하였고, 따라서 인간을 올바른 길로 계도하고 이끌거나, 인간의 본성을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은 "교육"과 "신앙의 힘"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는 "신앙ㆍ교육"이 낙후된 조선을 개화시킬 수 있는 길이라 확신하였다.
미국유학 중, 그는 "국내에서 우리가 민족에 이바지하는 길은 민간교육사업이 더욱 효과적이며, 첩경이라는 신념을 가지게 되고, 민족 도덕을 앙양시키기 위해서는, 종교적 신앙에 깊이 뿌리를 박아야겠다고 깨닫게 되었다." 나라가 낙후된 것은 "배우지 못한 탓"이라 보고, 교육을 통해 깨달음을 주어야 하는 것이며, "신앙"을 통해 미신을 버리고, "경건함"과 "도덕의 길"로 사람들을 인도해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④ "전체주의"에 대한 거부
"공산주의ㆍ사회주의ㆍ나치즘ㆍ파시즘ㆍ페미니즘" 등을 극도로 혐오하였다. 이들 사상이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침해하고, 파괴하는 악질적인 사상으로 규정하였다. "공산주의ㆍ사회주의"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병립할 수 없다"는 점과 "나치즘ㆍ히틀러ㆍ파시즘ㆍ페미니즘"에 대해서도 심한 혐오감을 드러냈다. 또한 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자유주의이며, 어떠한 형태의 "전체주의"도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강연ㆍ계몽 연설"을 통해, 그는 "민주주의 국가라면, 표현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는 절대적으로 보장해야 되는 바, 전체주의적인 사상을 용납할 수는 있을지라도, 공산주의ㆍ사회주의ㆍ나치즘ㆍ파시즘ㆍ페미니즘과 같은 사상이 사회 주류사상이 되는 것만큼은 어떻게든 막아야 함"을 역설하였다.
그는 이러한 사상들이 "그리스도 교"를 극도로 혐오하거나, 부정하는 것도 당연한 것으로 봤다. "개신교"에 대해서는 같은 형제이므로, 포용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전체주의적 사상"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반감ㆍ거부감을 드러냈다.
⑤ 소급입법 적용 반대
과거의 죄악에 대한 "소급입법 적용"을 반대하였다. "4ㆍ19혁명" 당시, 사망한 사망자 유가족들은 관련자 처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과거의 죄악에 대한 "소급입법 적용"을 반대하였다. "소급입법안 적용"은 "민주주의"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며, 자칫 정치보복의 논리와 "연좌제"로 흘러 갈수 있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의 "소급입법 반대 주장"은 끝내 묵살 당했지만, 후일 "김대중 대통령"은 그의 "소급입법안 적용에 반대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1960.10.07일부터 시작된 "3ㆍ15부정선거" 관련자 재판과 10.08일 석방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었다. 장면은 10.08일 재판 결과에 대해 "그것이 법조문에 의한 공정한 판결이었는지는 모르나, 국민감정에 미치는 영향도 참작했어야 했다"면서, 형량이 너무 가볍다고 크게 화를 냈다. 그러나 그는 소급입법에는 반대했다. 장면은 "끝내 보복을 위한 소급입법을 고집한다면, 스스로 당을 떠날지도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소급 입법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민의원 의장"과 "수습 위원"들이 "데모대 대표들"에게 언질을 준 바도 있고, 국민적 여론이 고조되어, 다시 입법에 착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전화나 혹은 직접 "자유당"의 숙청 혹은 정치적 보복을 강요했다. 그러나 장면은 서명을 거부했고, "소급입법안"은 결국 "민의원ㆍ참의원"에서 결정하게 되었다.
장면은 직접 "민의원 회의ㆍ참의원 회의"에 나가서, "소급입법은 안되며, 과거의 헌법 부정과 정치보복의 악순환을 불러올 뿐이라며, 감정적인 정치보복의 선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호소하였다. 장면의 단호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세는 "개헌에 의한 특별법 제정"이었다. "장면 정부"는 수동적인 입장에서, 장면 개인은 피동적 입장에서 "견딜 수 없는 고역"을 겪는 사이 "소급입법"은 통과 되었다. 장면의 결사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급입법안"은 "민의원" 233명 중, "찬성(191)ㆍ반대(1)ㆍ 기권(2)ㆍ무효(9)", "참의원"에서는 찬성(44)ㆍ반대(3)ㆍ무효(3)ㆍ불참(6)으로 "국회"를 통과하고 만다.
⑥ 자유민주주의관
항상 "자유"를 강조하였다. 그는 늘 "범죄행위ㆍ반역행위" 이외에는 어떠한 형태의 자유든, 존중되어야 한다는 의사를 피력하고 다녔다. 이는 "국가ㆍ정부"가 침해할 수도 없고, 침해해서도 안 되는 것이 "국민의 자유"라는 것이다.
그는 국민 스스로가 직접 "자유"의 소중함을 느끼고, 지켜나가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론과 학설로 배운 자유는 혼란을 일으키지만, 경험으로 체득한 자유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단단한 초석이 되는 것이다. 자유가 베푼 혼란과 부작용에 스스로 혐오를 느낄 때 진실한 자유를 얻는 것이다."고 하였다.
1960.03월, "대구 유세문"에서도, 정치결사의 자유와 범죄행위ㆍ반역 이외에는 어떠한 형태의 자유를 누려야 된다는 등의 자유를 "연설문"에서 유독 강조했는데, 그의 이러한 평소 소신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유"와 "방종"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조광(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는 "장면 박사는 이 땅에 단군 이래 최초로 민주주의라는 신화를 역사적 현실로 바꿔놓은 인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자유당 독재체제 아래, 위축됐던 각 이익 집단과 사회단체들이 분출해내는 욕구를 권위주의적인 방법으로 억누르지 않았습니다. 대화라든지 협력을 통해 자율적으로 해결하려는 방법을 취했습니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⑦ 공개채용제도 도입
1960.08월, "국무총리(2대)" 취임 직후, "공개채용 제도"를 도입하였다. 그리하여 각종 인사 채용 때, "공개경쟁 채용"의 원칙이 도입되었다. "김영구(5대 민의원)"에 의하면 "공개채용에는 사심이 하나도 없었다. 입학시험 보듯 한 거니까. 그때 뽑힌 사람들이 나중에 거의 전부 장ㆍ차관을 했습니다. 유능한 사람을 시험 쳐서 뽑았으니까, 그대로 키우니, 인재가 된 것이다."고 진술하였다.
이를 두고 "조광(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은 "그 청렴성은 정권에서 담보됐다. 공채제도 하나만 예를 들어도 그렇다. 이는 공정성과 효율성을 전제해야 시행할 수 있는 것이다."고 평했다.
⑧ 검찰ㆍ경찰 중앙수사부 신설론
"제2공화국" 당시, 정보력 부재에 견디다 못한 측근들이 정권안정을 위해 "3개 기관(군ㆍ검ㆍ경)"의 합동의 특별 기구를 만들자고 건의하였지만, 장면은 "자유당 때의 김창룡 특무대장이나, 김종원을(1956년 부정 대통령선거의 공을 인정받아 내무부 치안국장에 임명,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에 연루) 만들 수 없다."며, 한사코 반대했다.
그러나 "장면 총리"는 일찍부터 경찰이나 검찰에 "특별수사 기관"을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960.09.23일의 시정 연설에서 그는 "경찰 기구의 개편과 함께 대검찰청 안에 중앙 수사국을 발족시켜 각종 정보기관을 연결 조정하는 한편, 과학적인 수사 방법으로 공산 괴뢰 무장 간첩의 남침 방지와 색출은 물론 범죄 수사의 완벽을 기하려 한다."며, "특별수사 기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1961.03월 그는 "자유주의"에서 한발 후퇴, "깡패ㆍ혁신세력" 소탕을 추진한다. 3월 초부터, 그는 강력한 정치를 하기위해, 경찰을 통해, "혁신분자와 깡패리스트"를 작성, 05.19일 국가비상사태 비슷한 것을 선포, "깡패ㆍ혁신세력"을 일제 검거한다는 계획 아래 그 리스트를 작성해 놓고 D-day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5ㆍ16 군사정변"으로 무산되고 만다.
그는 언제든 사회를 위협할만한 세력이 등장한다면, 엄히 다뤄야 된다는 의사를 드러내기도 했다. "사회 질서가 지나치게 문란해져서, 국가 안녕을 유지할 수 없는 단계에까지 이른다면, 그때 가서는 단호한 조처를 취할 준비와 계획을 별도로 세워야 된다."는 것이었다. 이를 두고, "혁신세력ㆍ보수세력"은 절대적인 자유를 보장한다면서, 권력기관을 통해 통제하려 든다며 비아냥을 가하기도 했다.
⑨ 경제 정책
1960.10월부터 경제개발ㆍ국토건설을 위한 "경제개발 정책"을 수립하여, 식량 증산ㆍ장기불황으로 발생한 "실직자ㆍ고등학교 졸업ㆍ대학 졸업 후 미 취직자"들의 구제를 위한 국토건설 개발을 추진하려고 하였다.
"국토 건설단"을 수립하고, "초대 단장"으로 취임하여, "장준하" 등 사상계 동인들을 발탁, "이론 교육ㆍ정신교육"을 담당하게 하였고, 그들에게 경영하게 하였으나, "5ㆍ16 군사정변" 이후 "군정"은 "국토 건설단"을 "불량배ㆍ범죄자ㆍ예비역 군인들"로 대체하였다. 1960.04월, "김영선 재무부장관"을 미국으로 파견하여, "경제안정 지원기금"의 일부인 2,000여 만 달러를 수령 받아왔고, "장면"도 1961.07월 "도미"를 계획하고 있었다.
⑩ 민족성에 대한 견해
그는 "한민족의 민족성을 고쳐야 된다"고 보았는데, 그는 "우리의 민족성은 신앙으로 고쳐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으로만 이 혼란을 극복할 수 있어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부패하고, 요령 피우기를 좋아하는 근성은 반드시 버려야 된다고 생각했고, 그는 민족성의 개조의 방법으로 "합리주의ㆍ가톨릭 신앙ㆍ교육 계몽"을 제시하였다.
⑪ 외교적 성과
1948.08월, "대한민국 단독정부" 수립 시, 국제사회에 한국 정부에 대한 승인을 설득하여, 성사시켰다. "공산권 국가"의 반발과 "제3세계 국가"들의 냉담한 반응 속에, "미국ㆍ프랑스ㆍ영국"을 비롯한 각국의 "UN총회 대표자"들을 찾아다니며,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여, 승인을 얻어냈다.
유창한 영어 실력 외에, 그의 참여로 "교황청ㆍ각국의 천주교 인사들"의 협력ㆍ승인 부탁이 작용하기도 했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서울"이 3일 만에 점령당한 전황을 전화로 접한 그는, "미국 상원ㆍ하원ㆍ미국 국무부"를 설득, "UNㆍ국제사회"에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줄 것을 호소하여, "국제사회"의 한국문제 개입 및 한국전쟁 파병을 성사시켰다.
⑫ 대 북한관계
"북한"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대한민국 중심의 통일의지"를 표명하였다. 1950년대, 그의 통일관은" 이승만의 멸공통일ㆍ승공통일론"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나, 1960년 초의 통일방안에 있어서는 "무력을 배제한 평화적 통일론"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1961.03월 북한 "김일성"이 제시한 "연방제 통일안"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김일성"이 "연방제 통일안"을 내놓자, 이를 부정하였고, "정일형 외무장관"을 통해 이를 반박하게 했다.
⑬ 대 미국관계
대체적으로 "미국"과는 우호적인 관계 유지를 천명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해리 트루먼 대통령ㆍ미 국무성ㆍ국제사회"를 대상으로 설득하여, 한국전쟁 시 "미군ㆍUN 다국적군"의 참전을 적극 이끌어냈고, 한국전쟁 이후에도 "미국"과의 적극적인 관계를 유지함과 동시에 "미국 원조"의 경제개발 정책을 추진ㆍ유지해 나갔다.
한때 "미국"에서는 "이승만"을 강제퇴진 시킨 뒤, 그를 "한국의 통치자"로 세울 것을 계획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친미 정책"이 "미국 의존정책"이라는 비판적인 시각도 병존한다. "강준만"은 "지독한 숭미 주의자"라며, 혹평을 내리기도 했다.
⑭ 대 일본 관계
"제1공화국" 기간 중, "이승만 정권"의 "강경 반일 외교"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이었고, 미국으로부터 경제원조의 대가로 "일본"과의 재수교 압력을 받으면서, "제2공화국" 초반부터 일본과의 회담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일본과의 무리한 협상노력은 "극우ㆍ극좌" 양측으로부터, "친일파ㆍ친일 정권"이라는 오해를 받았다.
그러나 "한일외교 재개의 대가"로 "장면 내각"에서 보상금을 "28억 5천만 달러"를 요구하자, "일본"이 거절함으로써, "장면 내각"의 "한일 협정"은 무산되고 말았다. "김영구(5대 민의원)"에 의하면, "처음 한ㆍ일 관계정상화 교섭 때, 장면은 처음 일본에 배상금을 100억 달러를 요구하였다. 이때 일본의 정부가 깜짝 놀라 "그 절반 정도면, 안 되겠느냐"고 했다. 교섭 당사자의 말을 들으니, 50억 달러는 무난했고, 아마 70~ 80억 달러는 받으리라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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