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청년회 (西北靑年會)"는 "서북청년회"는 1946.11.30일부터 가장 규모가 큰 "극열 우익단체"로 활동하였고, 1948.12. 19일에 조직된 "대한청년단"으로 통합되었으며, 남은 일부는 1949.10.18일에 단체등록이 취소되어 소멸되었다. 해방 이후, 이북에서 주도권을 잡은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정치ㆍ사회ㆍ경제적 기득권"을 상실한 "상류층 세력ㆍ이북에 존재했던 조직폭력배들"이 남하하여, 만든 "반공 단체"였다. 해방 정국에서 "우익 청년단체"로 활동했고, "정부 수립" 이후에도 "한국 전쟁" 무렵까지 존속했다.
1. 서북청년회 (서북청년단ㆍ서청) → 대동청년단 → 대한청년단 (한청)
• 결 성 : 1946.11.30일 - 이름처럼 "한반도 서북 지역"에서 월남한 이북 출신ㆍ청년단체 (대한혁신청년회 + 함북청년회 + 황해도회청년부 + 북선 청년회 + 양호단 + 평남 동지회 + 평안 청년회 등)를 통합하여, 서울 YMCA에서 창단
• 목 적 : 보수운동 단체ㆍ극우 반공주의 청년단체 (김구 살해) → 같은 우익조차 외면했다.
• 사 건 : 제주 4ㆍ3 사건(1948.04)ㆍ보도연맹 학살사건(1950.06)ㆍ국민방위군 사건(1951.01)
• 인 물 : 위원장 (선우기성ㆍ1946.02월 월남) / 이성순 (시라소니): 깡패ㆍ서북청년단 감찰부장 /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 교회의 청년들이 결성한 "서북청년회"가 "서북청년단" 시초
• 사무실 : 동아일보 사옥 (한국민주당 본부)
• 활동자금 : 실업가 (한반도 서북부 출신)ㆍ미 군정청 고위관리들ㆍ대한독립촉성국민회 (이승만 계열)에 의존
1945년 해방 이후, 이북에서 주도권을 잡은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정치ㆍ사회ㆍ경제적 기득권"을 상실한 "상류층 세력ㆍ이북에 존재했던 조직폭력배들"이 남하하여, 만든 "반공 단체"였다. 해방 정국에서 "우익 청년단체"로 활동했고, "정부 수립" 이후에도 "한국 전쟁" 무렵까지 존속했다.
1946.03.05일 "월남자 단체"가 11.30일에 통합해 발족하였다. 이 단체는 1948.12.19일 조직한 "대한청년단"으로 통합했으며, 남은 일부는 1949.10.18일에 단체 등록이 취소되어 소멸했다.
1947년부터 "이승만"은 이들을 견제했고, "지청천"을 시켜 "대동청년단"을 창설함으로써, "족청"과 함께 서서히 "대동청년단"에 흡수되었다. "서북청년회원" 가운데 일부는 "국군ㆍ경찰"의 창설에 참여하였고, 일부는 1948년 "남한 단정 반대사건"인 "제주도 4ㆍ3 사건"에 "남로당"이 개입하면서, "남로당 토벌"이라는 명분으로 "4ㆍ3 사건" 진압ㆍ학살에 가담하였다.
"김구"는 "서북청년회"의 전신 중 하나인 "평안청년회"에 참여하였고, 1947.04월 "대동청년단"이 꾸려지기 전까지는 "서북청년회"에 자금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1946.03월, "조만식(조선민주당 당수)"가 "소련 군정ㆍ김일성"에 의해 감금당하자, 지주ㆍ기독교인 등은 남한으로 내려왔다. 이들은 "북한"에 반대하는 단체의 조직을 준비하였다. 이후 "월남한 청년 남성들"이 모여서 조직의 규모가 확장되었다.
1946.03.05일, "문봉제" 등 월남 청년들이 주도한 집회가 성공하고, 이에 힘입어 "평남동지회"가 조직되고, 다시 "평남동지회"는 평남ㆍ평북 조직을 합친 "평안청년회"로 확대되었다. 결성대회에는 "북한 지역 연고자(이윤영ㆍ김병연ㆍ강기덕)"는 물론 "김구"도 참석했다.
1946.11월, "우익단체ㆍ영락교회청년회" 등이 통합하여, "서북청년회"가 결성되자, "김구ㆍ이승만ㆍ한민당" 등은 함께 "서북청년단"에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이승만ㆍ김구ㆍ한국민주당" 등에게서 자금을 후원 받았으나, 자금의 대부분은 "서북 출신 재산가"들이 주로 지원하였다.
한편 좌파와의 무력충돌에서 승리하자, "장택상"은 그들에게 특별히 "잔치 상"을 차려주기도 했다. 또한 1973년 "문봉제"는 증언을 통해, "선우기성"이 "장택상"에게 불려가 "쌀 1가마니"에 해당되는 액수의 봉투를 받았다고도 했다. "친일파(최창학ㆍ박흥식)" 등은 협박을 통해 자금을 내기도 했다.
2. 활 동
"서북청년회"는 "좌ㆍ우익 충돌"이 있을 때마다, 언제나 "우익진영의 선봉역할"을 하였다. "좌익 세력"에 대한 테러를 주도하고 경찰의 좌익 색출 업무를 도왔다.
"제주도 4ㆍ3 사건"에서 언급되는 "토벌대"로 불리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정식 군대ㆍ경찰이 아니라 이 "서청"이다. 가장 큰 문제는 "빨치산"을 색출하고 처벌한 것이 아니라 "민간인", 때로는 "군경의 가족"에게조차 적법하지 않은 "사적재재를 가했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격렬한 반공투쟁은 모두가 이북에서 "공산 치하"의 학정에 못 이겨서, 자유를 찾아온 그들의 과거경험이 크게 작용한 데서 나온 행동이었다.
• 제주시민 10%까지 포함한 전국에서 30만 명에 달하는 "국민을 좌경분자 처단"이라는 명목 하에 탄압ㆍ살해했다.
• "공산주의"를 찬양ㆍ고취하던 "민족예술제"를 "광복청년회"와 합동으로 저지시킨 "부산극장사건"
• 1947 : 3ㆍ1절 기념식을 각각 가진 좌우익의 시가행진 중, "남대문"에서 충돌한 "남대문충돌사건", 당시 활동과 관련해 "장택상"은 "서북청년단"에 5만원을 지원하기도 했다.
• "부산좌익청년운동"의 본부격인 "민주애국청년동맹"의 사무실을 습격하여, "서북청년회 부산지부"의 간판을 건 "좌익단체사무실점령사건 및 대북공작"
• 검사 "정수복" 암살사건
이렇게 "서북청년회"가 대공투쟁을 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1947.04월에 환국한 "광복군총사령관 지청천"이 "대동청년단"의 조직에 착수하였다. "지청천"은 "광복군 참모장"을 지낸 "이범석"이 만든 "민족청년단"과의 갈등 속에서도, 전국 청년의 대동단결을 전제로 한 청년조직을 강력히 추진하여, "대동청년단"을 중심으로 기존 청년단체들의 통합공작을 시도하였다. 통합공작에 참가한 단체는 "대한독립촉성 전국청년총연맹ㆍ광복청년회ㆍ대한독립청년단ㆍ청년조선총동맹ㆍ서북청년회" 등이었다.
이 과정에서 "서북청년회"는 "합동파ㆍ합동반대파"로 분열되어 심각한 대립이 계속되다가, "합동파(선우기성 중심)"은 1948.09월 "대동청년단"에 통합되었고, "합동반대파(문봉제 중심의 재건파)"는 "문봉제ㆍ김성주" 등이 중심이 되어 "서북청년단"을 재건하였다. "재건파"는 "이승만의 친위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조직은 1948.12.19일 "대한청년단"으로 흡수 통합됨으로써 자연 해체되었다.
3. 해체 과정
한편 "서북청년단" 해체 요구가 나오자, "장택상(수도경찰청장)"은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조병옥(미군정청 경무국 국장)" 역시도 치안상의 문제를 들어, "서북청년단" 해산을 반대하였다. 일부는 "군"으로 들어갔다.
"조병옥(경찰청 경무부장)ㆍ류동렬(조선경비대 통위부장)ㆍ선우기성(서북청년회 위원장)" 사이에 합의가 있었는데, 당시 "서북청년회" 내부에서도 "대동청년단"으로의 "합류파ㆍ재건파" 사이에 분열ㆍ반목이 있으면서, "제3의 길"을 선택한 사람(서청원)도 있었다고 한다.
4. 제주 4ㆍ3 사건 (1948.04) 개입
"제주도"에서 "단정 반대"인 "4ㆍ3사건"이 발생하고, "김달삼" 등 "남로당원"들이 개입하여 사태를 확산시키자, "남로당 반대"를 명분으로 "4ㆍ3사건"에 개입하였다. 한편 "제주4ㆍ3 평화 기념관"에는 "이승만"은 공식석상에서 대놓고, "가혹하게 탄압하라"고 말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보존하고 있다.
1949.01.21.일, 국무회의에서 "미국 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도, 전남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 색원하여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라며, "지방 토색(討索)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고 말한 "이승만 대통령"의 발언록이 보존돼 있다.
"이승만"은 "모슬포경찰서ㆍ성산포경찰서"를 신설하라는 대통령령도 공포(1949.01.18일)했으며, "서북청년회" 단원을 경찰ㆍ군대에 편입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는 내용도 기념관엔 전시돼 있다.
"서북청년회" 중, "재건파(문봉제 중심)"로 "이승만 친위대" 역할을 하였던 "안두희"는 1949.06.26일 "경교장"에 들어가 "김구"를 살해했다. 또한 1973년 "문봉제"는 증언을 통해, "선우기성"이 "장택상"에게 불려가 "쌀 1가마니"에 해당되는 액수의 봉투를 받았다고도 했다.
한편 좌파와의 무력충돌에서 승리하자, "장택상"은 그들에게 특별히 "잔치 상"을 차려주기도 했다. 한편 "한민당ㆍ이승만"으로부터도 후원을 받았으나, 자금의 대부분은 "서북 출신 재산가"들이 주로 지원하였다. "친일파(최창학ㆍ박흥식)" 등은 협박을 통해 자금을 내기도 했다.
5. 제주 4ㆍ3 사건(1948.04) 진상보고서
"문봉제 (서청 중앙본부 단장)은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이와 관련한 해명성 발언을 한 바 있다. "우리는 어떤 지방에서 좌익이 날뛰니 와 달라고 하면, 서북청년회를 파견했다"면서, "그 과정에서 지방의 정치적 라이벌끼리 저 사람이 공산당원이다 하면, 우리는 전혀 모르니까 그 사람을 처단케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지역이 제주도"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우린들 어떤 객관적인 근거가 있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승만ㆍ미군"의 후원 아래, "제주 사태"의 최 일선에 서게 된 "서청"은 군ㆍ경 모두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중 산간마을"인 "애월면 광령리" 주민이던 "고치돈"은 "하귀리 개수동"으로 소개했다가 그곳에서의 무차별 총살에 놀라, 다시 "제주읍 외도리"로 소개했다. "고치돈"은 "외도리 민보단장"이 처가 쪽 친척이라, 그의 배경으로 양민증도 비교적 빨리 얻었고, "특공대"에 편입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했다. "고치돈"은 "특공대" 시절 목격했던 "서청" 출신 경찰들의 잔혹했던 행동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내가 외도지서 특공대 생활을 할 때 서북청년단 출신 경찰 이윤도(李允道)의 학살극은 도저히 잊을 수 없습니다. 그 날 지서에서는 소위 "도피자 가족"을 지서로 끌고 가 모진 고문을 했습니다. 그들이 총살 터로 끌려갈 적엔 이미 기진맥진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할 지경이 됐지요. 이윤도는 특공대원에게 그들을 찌르라고 강요하다가 스스로 칼을 꺼내더니 한 명씩 등을 찔렀습니다. 그들은 눈이 튀어나오며 꼬꾸라져 죽었습니다. 그때 약 80명이 희생됐는데 여자가 더 많았지요. 여자들 중에는 젖먹이 아기를 안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윤도는 젖먹이가 죽은 엄마 앞에서 바둥거리자, 칼로 아기를 찔러 위로 치켜들며 위세를 보였습니다. 도평리 아기들이 그때 죽었지요. 그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 꼴을 보니 며칠간 밥도 못 먹었습니다."
1948.11.09일, "김두현(53ㆍ제주도 총무국장)"이 "서청" 손에 고문치사 당한 사건도 "서청"의 위세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다. "제주도 행정 2인자"가 보급문제에 불만을 품은 "서청"들에게 희생된 것이었다. 특히 "김재능(서청 제주단장)"은 자기 사무실에서 심한 매질을 한끝에 "김두현 총무국장"이 실신하자, 숨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인데도, 밖으로 내버려 끝내 절명케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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