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사 (白衣社)"를 만든 "맹인 장군 염동진 (1902(9)~ 1950(?)ㆍ47세(40세))"은 "중국"에서 독립 운동에 종사하면서, "중국 국민당" 정권과 "장제스"의 친위 테러조직인 "남의사 (藍衣社)"를 본 떠서, 조직했다. "민족혁명당"의 당원으로도 활동하기도 했으나, 후에 "김구"의 측근이 되었다. 그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을 두는, "파시스트적인 국가 사회주의 건설"을 꿈꾸었다고 한다.
1. 맹인 장군 염동진 (廉東振ㆍ본명 : 염응택(廉應澤)ㆍ1902(9)~ 1950(?)ㆍ47세 (40세))
독립운동가 (김구와는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ㆍ군인ㆍ정치인ㆍ사회운동가ㆍ청년운동가ㆍ"백의사(白衣社)"(해방정국의 비밀테러 결사단체)조직ㆍ총사령관
중국군으로 복무했고, 중국 공산당군 또는 해방 후 북한 공산당에 의해 고문을 당해, 장님이 되었다. "중국"에서 독립 운동에 종사하면서, "중국 국민당" 정권과 "장제스"의 친위 테러조직인 "남의사"를 본 따서, "백의사" 조직했다. "민족혁명당"의 당원으로도 활동하기도 했으나, 후에 "김구"의 측근이 되었다. 그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을 두는, "파시스트적인 국가 사회주의 건설"을 꿈꾸었다고 한다
1932년 중국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를 졸업한 뒤, "남의사"에서 활동하다가, "관동군"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변절하여 "일본군 밀정 노릇"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체포 당시의 고문 후유증으로 시력을 잃어, 훗날 "맹인 장군"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염동진의 모습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진이 1934년 낙양군관학교 시절이다 >
광복 직전, "평양"에서 "백의사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대동단(大同團)"을 결성하였고, 광복 직후인 1945.09월 "조선공산당 평남지구당위원장"인 "현준혁(玄俊赫)"을 암살한 뒤, 월남하여 1945.11월경 "백의사"를 조직하였다.
• 출 생 : 평남 평양
• 사 망 : 1950년 한국전쟁 시, 인민군에게 납북, 생사불명
• 본 명 : 염응택 (廉應澤)ㆍ백의사 단원 중, 동진을 호로 아는 사람도 있다.
• 별 칭 : 맹인 장군 (해방 이후)ㆍ가명- 요춘택 (중국식 이름)
• 학 력 : 선린상업학교ㆍ낙양군관학교 (김구ㆍ이청천의 제자)
• 병 력 : 정신분열증 (1949년 말 부터)
< 경 력 >
1931.03 : 선린상업학교 졸업, 중국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
1934.02 : "낙양군관학교" 한인반 입학
1935.04 : "낙양군관학교" 졸업ㆍ조선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 가입ㆍ김규식(당수), 김원봉(당 실세ㆍ2인자)과 소원
1935.12 : "민족혁명당" 조직에 반대ㆍ남경→ 화북 방면으로 이동 / "요춘택"이란 중국식 이름으로 변경ㆍ"중국군 남경 헌병사령부" 우편물 검사처 근무, "남의사(藍衣社ㆍ중국 국민당 정권과 장제스의 친위 테러조직)"에 가입
1937.02 : 중국군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 근무 / 중공군에 체포ㆍ관동군 수용소 수용→ 고문→ 장님이 됨
1940 : 관동군 수용소 출소→ 비밀리에 평양으로 귀국
1942 : "장제스" 휘하의 반공 결사단체인 "남의사(藍衣社)"를 모방ㆍ"백의사(白衣社)" 결성
1943 : 평양에서 "대동단"이라는 항일 비밀결사 조직
1945.09 : 평양에서 공산주의자인 현준혁 암살→ 소련군 감시증대→ 월남, 서울 낙원동에 정착
1945.11 : 김구 귀국→ 김구 정치적 노선지지→ 임시정부 세력 "백의사"로 흡수→ "백의사"는 "임정의 특무기관"으로 활동
1945.12 : 신탁통치 반대운동 참여→ "송진우" 암살 개입
1946.02 : "박헌영(조선 공산당)" 납치 미수(김두한과 단원)→→박헌영 월북
1947.07 : "여운형" 암살 개입
1948.04 : 김구의 남북 협상 참여→ "한국독립당ㆍ백의사ㆍ염동진" 몰락 (이승만 정부에 대한 쿠테타 계획)
중국 내에서 "낙양군관학교"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에 기여했으나, 미군정기 당시 "반사회적 범죄 조직"을 이끌고 있었으므로, 1963년과 1977년의 독립운동가 서훈 대상에서는 제외되었고, 이후 염동진은 잊혀졌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 월북되고, 유족들 역시 뿔뿔이 흩어지면서, 그에 대한 관심이 소홀한 편이었다.
그러나 해방 후에는 백의사를 조직, 김구의 노선을 지지하기도 했다. 중국에서 활동했고, 귀국 후 소련 군정에 반발하여 월남하였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김구와 함께 이승만 정권을 전복할 쿠데타를 기도하였으나, 한국 전쟁으로 실패하였다. 해방 정국에서 그의 휘하 조직인 "백의사"는 "여운형 암살"(1947.07.19), "장덕수 암살"(1947.12. 08)을 지휘했다. 따라서 그는 테러리스트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1950년 6ㆍ25 한국전쟁 당시, 조선인민군에 피랍, 월북되었다. 월북 이후, 행방불명이다.
2. 의혹ㆍ논란 : 김구 암살배후 논란
1949.06.26일 김구의 암살이후, 한때 염동진은 김구의 암살을 지시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실리보고서에는 "안두희가 "백의사"단원이며, 염동진을 백범 김구의 암살배후로 지목"하고 있으나, "백의사" 단원들은 "어떠한 연관성도 없다"고 강력하게 부인하였다. 백의사 단원이자, 백관옥의 동생 백찬옥은 "염동진은 백범 김구의 암살 소식을 듣자,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백범 김구의 비서로 지냈던 선우진 또한 "연관이 없다"고 말했다.
미군정이 작성한 보고서에 의하면, ㆍ민간인(염동진)은 스스로 김구의 개인적 친구라고 말한다. ㆍ염동진의 추종자(백의사) 대부분은 김구 씨의 추종자 ㆍ염씨는 김구 씨와 비밀 연락과 접촉관계를 갖고 있으며, 염씨는 한국군 내부의 우익 반대파(Rightist dissidents)의 통신을 김구 씨에게 전달해주는 매개자 노릇을 해왔다 ㆍ그 민간인(염동진)은 여러 차례에 걸쳐, 이승만이 수반인 정부보다는 더 강력하고 군사적인 유형의 정부를 선호한다고 밝혔다 ㆍ그 민간인은 김구가 한국의 지도자가 되면, 일본과 미국이 훈련시킨 200만의 한국군을 갖게 될 것이며, 필요한 경우, 이 한국군은 그를 따라 38선을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당시 그 스스로 김구를 수반으로 하는 군사정부를 원하고 있는 일종의 동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백범 김구 연구"를 한 도진순 교수는 "염동진은 백범에 대해 적대적이라기보다는 상호의존적이었으며 , 염동진이 "안두희에게 김구 암살을 지시했다"는 언급은 문서 어디에도 없으며, 명백한 오보"라며 반론하였다.
3. 평가
① 긍정적 평가
미국에 보내는 기밀문서를 작성한 조지 실리 미국 육군 소령은 "분명 가장 악질적인(the most malignant) 인물"이란 평을 내렸고, "혹은 일반적으로 "맹인장군(Blind General)"으로 알려진 용감한 한국인"이라는 인물평도 덧붙였다. 실리 소령은 보고서에서, "영어ㆍ독일어ㆍ프랑스어ㆍ일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나, 미국인과 인터뷰할 때는 통역을 활용해 신분을 위장할 만큼, 비상한 지략의 소유자"라고 회고했다.
② 부정적 평가
해방 정국에서 그의 휘하 조직인 "백의사"는 "여운형 암살"(1947.07.19), "장덕수 암살"(1947.12. 08)을 지휘했다. 따라서 그는 테러리스트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4. 김구와의 관계-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
염동진과 김구와의 관계는 애증이 교차하는 특별한 존재이기도 하며, 복잡한 관계였다. 김구에게 악감정과 원한을 가졌으면서도, 그를 사적으로는 친구이자,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특수한 관계였던 그는 김구와의 충돌 때문에, 한때 "김구의 암살배후"로 몰리기도 했다.
① 1934~1935년 낙양군관학교 재학 시
낙양군관학교 재학 중, "한인반" 학생들이 "이청천 파"와 "김구 파"로 나뉠 때, 그는 이청천을 지지하여 낙양군관학교 재학 중에는 김구와 갈등하였다. 미국 정보기관의 조사에 의하면, "낙양군관학교 재학 중 그는 김구와 적대적인 관계였다"고 한다. 이 학교에 입교한 "한국 학생들은 김구 계열과 이청천 계열로 나눠져 있었는데, 염동진은 이청천 계열로 분류된다. 이로 인해 김구와 평소 사이가 나빴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김구가 암살되자, 한때 "김구 암살의 유력 배후"로 지목되기도 했다.
이후 이청천 파벌이 남목청 회의 이후, "한국독립당"에 입당하면서 그 역시 임시정부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김구의 밀고"로 중국 공산당에 넘겨져, 고문을 당하기도 한다.
미국 정보부의 3급 기밀 문건에 의하면, "그는 중국공산당 정보부의 고문을 받는 와중에 눈이 멀었는데, 같은 나라 사람이자 당시 강력한 적이었던 사람에 의해 그들의 손으로 넘겨졌다. 염동진을 중국 공산당에 밀고한 그 배신자는 바로 오늘날 가장 막강한 한국 정치인 중의 하나이며, 가장 사랑받는 한국 애국자의 한 사람인 "김구"였다."
미군의 보고서는 "염동진을 배신한 배신자가 김구라며, 김구를 배신자"로 지목하기도 했다. 미국은 그가 김구에 대해 "격렬한 비난을 가하며, 동시에 군사적 견지에서 김구의 장점과 가능성을 격찬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 민간인(염동진)은 김구가 한국의 지도자가 되면, 일본과 미국이 훈련시킨 200만의 한국군을 갖게 될 것이며, 필요한 경우 이 한국 군인들은 그를 따라 38선을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② 김구와의 비밀 연락체계
염동진은 김구와 비밀 연락과 접촉관계를 갖고 있다. 염씨는 한국군 내부에 존재하는 "우익 반대파(Rightist dissidents)의 통신"을 김구에게 전달해주는 "매개자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어느 날 염동진이 김구에게 국군 내 비밀자료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빼돌려져, 미군 CIC 방첩대에 보고 되기도 했다. 염동진이 김구에게 알선해 준, 이 대한민국 국군 내 파벌은 고급 장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국 내 CIC 사령부에 제출되는 보고서들은 비밀로 분류되었다. 한번은 제출되는 정보들을 보호하기위한 보안장치들을 확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인 요원들을 매개로 해서 내 자신이 점검을 해본 일이 있었다. 1건의 비밀보고서가 실질적으로 한국경비대(국군) 정보참모부(G-2)에 뿌려졌고, 이 문건이 김구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미군에게) 발견되었다. 그 후에 문서화된 보고서들이 전달되지는 않았으나, 구두보고들이 한국주재 CIC 사령부 정탐과 책임 장교와 전라남도 광주지구 CIC 사무소 책임 장교에게 이루어졌다."
5. 사상ㆍ신념
①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을 두는, "파시스트적인 국가 사회주의 건설"을 꿈꾸었다고 한다.
웨더마이어 중장에 보낸 서신에 의하면 "한국인들은 극단적인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모두 거부합니다. 새로운 한국의 국가형태는 국가 사회주의이어야 합니다." 실리 보고서에도 이와 비슷한 문장이 있다. "염동진은 여러 차례에 걸쳐 이승만이 수반인 정부보다는, 더 강력하고 군사적인 유형의 정부를 선호한다고 하였다. 염동진은 김구가 한국의 지도자가 되면, 일본과 미국이 훈련시킨 200만의 한국군을 갖게 될 것이며,(중략)"라고 기록되어 있다.
② 공산주의와 좌파 노동운동에 대해 매우 경계했다고 한다.
1947년 말, 웨더마이어 중장에게 보낸 서신에 의하면, 공산주의에 대한 염동진의 생각이 분명하게 들어있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은 여러 나라의 사례에 비추어 입증된 바 있습니다. 그런데도 미군정은 너무나도 작은 그릇인 남한에서 이런 우스꽝스런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적혀있다.
서울(G-2) 본부와 목단 지역에 사령부를 두며, 1만 5천명의 사단 병력으로 구성되는 "백의군 창설" 계획을 세웠으며, "백의군"을 창설하고, 중국 공산당을 공격하는 것이 목표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당시 만주에는 이미 중국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던 상태라서 실현은 하지 못했다.
③ 김구와 만주 폭격 계획
김구와 염동진은 만주계획을 세우고 합의하였다. 만주계획은 1947년 말~ 1948년 초에 여러 차례 김구가 강조한 "만주에서의 군사계획"이었다. 이때 김구, 이청천, 이범석 등은 북한을 폭격할 계획을 세운다. 김구 등은 "중국 국민당 지역에서 활동했던 우익 민족주의자들은 북을 무력 공격할 뿐만 아니라, 중국내전에서 장제스의 중국 군대와 동맹해 한ㆍ중의 공산주의 세력을 소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구상은 종국적으로 동북아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격멸한다."는 것이었다.
즉 남ㆍ북ㆍ만주가 포함된 이 계획은, 한국ㆍ중국ㆍ미국의 "동아시아 삼각 반공군사 동맹체제"의 수립계획이었다. 그러나 김구가 "남북협상"에 참여하면서, 조직원들이 떨어져나가면서 큰 타격을 받았고, 이후 김구의 암살로 "만주폭격 계획"은 백지화된다.
6. 1948년 단정 수립ㆍ백의사의 몰락
1948.04월, 김구가 남북 협상에 참여하게 되면서, 김구와 그를 따르던 "한국독립당"은 몰락했고, 염동진과 그가 이끌던 "백의사" 역시 서서히 몰락한다. 또한 "정치 테러"는 좌파 외에도 우파 내에서도 공감을 얻지 못하였고, 국민들은 이들을 위험한 단체로 보게 되면서, 그에 대한 분노와 혐오가 확산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의 정부수립과 함께, "백의사"는 급격하게 쇠퇴의 길로 들어서면서 몇 명만 제외하고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7. 이승만 정부 전복할 쿠테타 계획ㆍ1949년 김구 암살배후 논란
이 무렵 그는 "이승만 정부에 대한 쿠테타"를 계획한다. 미국 첩보기관의 정보에 의하면, 그는 김구와 함께 "이승만 정부를 전복할 쿠테타"에 가담했다. 1949.06.26일 김구의 암살이후, 한때 염동진은 김구의 암살을 지시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실리보고서에는 "안두희가 "백의사"단원이며, 염동진을 백범 김구의 암살배후로 지목"하고 있으나, "백의사" 단원들은 "어떠한 연관성도 없다"고 강력하게 부인하였다. 백의사 단원이자, 백관옥의 동생 백찬옥은 "염동진은 백범 김구의 암살 소식을 듣자,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백범 김구의 비서로 지냈던 선우진 또한 "연관이 없다"고 말했다.
8. 1950년 6ㆍ25 한국전쟁 당시, 조선인민군에 피랍, 월북, 행방 불명
염동진은 1949년 말부터 "정신분열증"을 앓았다고 한다. 1950년 6ㆍ25일 한국전쟁이 나자, 염동진은 피난가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서울 체류 중, 조선인민군에게 피랍되어, 납북되었으며, 이후 생사는 불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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